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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에세이/아름다운 동행

10,000원의 행복

by 혜강(惠江) 2011. 7. 19.

 

10,000원의 행복

 

- 은퇴 후에 달라진 새로운 삶 - 

 

 

글 · 남상학

 

 

 

  지금은 ‘하바드 생’이지만 나도 언젠가는 동네 경로당이나 기웃거리는 ‘동경대생’이 될 것이고,  거동이 불편하면 방에 콕 틀어박혀 지내는 ‘방콕대생’이 될 것이다. '하바드생'으로   남아 있는 동안만이라도‘10,000원의 행복’에 감사하며 살아갈 것이다.        

 

 

 

 

▲어느 봄날, 남산꽃길에서   

  

 

  내가 블로그 <시솔길을 함께 걸어보실까요>(http://blog.daum.net/nam-sh0302) 를 개설하고 나 자신을<시솔길을 가꾸며 사는 화~백(화려한 백수)입니다.>”라고 소개했더니, 어느 분이  “그림을 그리는 분이시군요. 저도 한때 그림을 그린 적이 있습니다.”라며 장황한 댓글을 달아주었다. ‘시솔길’은 내 홈피 <남상학의 시솔길>(http://www.poemlane.com) 에서 따온 것으로  ‘시가 있는 오솔길’을 줄여서 한 말이고, ‘화백’이란 ‘화려하게 살아가는 백수’라는 뜻으로 쓴 말이었다. 다시 말하면 현직에서 은퇴하여 한가하게 홈페이지를 가꾸며 소일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분은 나를 그림을 그리는 사람으로 착각한 모양이었다. 나는 웃음이 절로 나왔다. 

  ‘화백’이란 일반적으로 고희를 넘어선 원로화가를 다른 사람이 존경하는 마음으로 부르는 말이다. 그런데  ‘화려한 백수’라는 말을 괄호 안에 밝혔는데도, 이 분은 내 글의 뜻을 잘 살피지도 않고 ‘그림을 그리는 화가’로 단정한 것이었다. 본래 ‘백수’는 ‘아무 것도 없는 건달’이라는 뜻으로 ‘백수건달(白手乾達)이란 말을 줄여서 사용되었다. “떵떵거리며 살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백수건달이 되었다.”라는 말에서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다가 요즘에는 단순히 ‘직장에 안 다니고 놀고 있는 사람’으로 그 사용 범위가 넓어진 것이다. 그런데 내가 ’화려한‘이란 수식어를 붙이게 된 것은 공직에서 할 일을 다 마치고 정년 은퇴하여 연금을 받으며 살고 있기 때문에 호사로 붙인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는 화백은 그림을 그리는 ‘화백(畵伯)’이 아니라, 그리 궁색하지 않게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는 ‘화려한 백수’의 ‘화백(華白)’인 셈이다.   

  요즘 은퇴한 사람들의 유형을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이 있다. 하바드 대학생, 동경 대학생, 방콕 대학생이란 말이 그것이다. 모두 국가나 도시, 대학 등 고유명사로 표현한 말이어서 무슨 그럴 듯 한 말로 들린다. 그러나 실상은 은퇴한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희화하여 부르는 용어인 것이다. 하바드 대학생이란 별 할 일도 없어 보이는데도 하루 종일 바쁘게 돌아다니는 사람이요, 동경 대학생이란 동네 경로당에서 화투놀이나 하며 소일하는 사람을 말한다. 그리고 방콕 대학생이란 건강이나 호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아 나들이도 못하고 방안에 콕 박혀 사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직장에서 은퇴했다고 해서 늘 한가하게 사는 것은 아니다. 그 사람의 성격, 건강, 경제적 능력, 일의 유무에 따라서 이들이 생활하는 모습은 천차만별이다. 그러나 이런 해학적인 은어들이 오갈 때마다 웃고 넘기면서도 이런 말들이 모두 인생의 끝자락을 살아가는 나이 먹은 노인들의 자화상인 것 같아 씁쓸한 느낌이 든다. 

  나는 네 유형 중에서 첫 번째에 가깝다. 특별한 일도 아닌데 하루 종일 바쁘게 사는 사람  속에 속한다. 그래서 내 아내도 나를 가리켜 ‘하바드생’이라고 부른다. 이런 바쁜 생활은 비교적 건강하고 d일을 만들어 하는 성격 탓이다. 나는 은퇴 후 운동모자를 쓰는 일이 많은데, "HARVARD"라는 영문글자가 박힌 자주색 모자를 즐겨 썼다. "HARVARD"글자의 아래에 조그맣게 "DAD"라는 글씨를 박아 놓았지만, 그 글씨는 작아서 잘 보이지 않았다. 얼핏 보면 하바드 학생인 것처럼 보였다. 이 운동모자는 내 조카 유정이가 하바드에서 공부할 때 귀국 하면서 큰아버지의 선물로 가져온 것이다. 내 조카는 그 때 내가 은퇴 후 하바드 생이 될 것이라고 예측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겪는 은퇴 후의 후유증에 시달려본 적이 없다. 친구들은 갑자기 바뀐 생활에 대한 부적응으로 정신적 공허감, 또는 상실감, 무기력증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도 있지만 나는 그런 증상을 전혀 모르고 지냈다. 나는 일찍부터 은퇴와 함께 일에 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여행을 하며 사는 날을 기대해 왔기 때문에 고대하며 기다렸던 일에 허전함을 느낄 이유가 없었다. 가사와 교회봉사, 친구와 친척을 만나고, 제자들을 관리(?)하는 등 잡다한 일을 제외하고는 많은 시간을 여행에 할애했다. 여행은 퇴임 후 내 삶의 원동력이었고 삶에 활력을 주었다. 

  방방곡곡 국내의 구석구석을 찾아다녔다. 가고 싶은 섬이 있으면 주저 없이 여객선을 탔다. 내 발길이 닿은 섬은 이루 셀 수가 없을 정도다. 유년 시절 10여 년간 섬에서 살았던 섬 아이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은퇴 후에는 비교적 시간의 자유가 있었으므로 해외에 나가는 일도 많았다. 첫 번째 여행은 미국 남가주숭의동문회의 초청으로 LA, 산디에고, 멕시코를, 시카고숭의동문회의 초청으로 시카고 일원을 돌아볼 수 있었다.  

  동생의 초청으로 형제들과 함께 일본의 도쿄․오사카․교토․나라를 비롯한 제팬 알프스를, 처가 쪽 형제들과는 중국 장가계와 상하이 일원을, 내가 근무했던 학교의 선생님들과는 동남아는 태국, 캄보디아, 베트남을, 그리고 또 다른 선생님들과는 러시아(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동유럽(폴란드, 체코, 헝가리, 오스트리아)을 잇는 긴 여행에도 참가했다. 또 미국에서 MBA과정을 이수하고 있던 둘째아들 경우 덕분에 미국의 서부와 동부지역을 여행했다. 그리고 교회에 다니는 분들과는 이스라엘, 이집트, 요르단을 잇는 성지순례 코스를 다녀왔다. 내년에는 캐나다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   

  여행에서 돌아오면 나는 열심히 글을 정리하고 찍은 사진을 편집하여 여행의 기록을 모두 내 홈페이지에 올렸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여행에 도움이 될까하여 이들 자료를 내 블로그에 올려 공개했다.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작업이었지만 나는 이 작업을 하면서 행복감을 느꼈다. 친구들은 이런 나를 보고 흔히 쓰는 말로 ‘백수가 과로사(過勞死)한다’며 무리하지 말라는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분주하게 살아가는 생활 속에서도 특별히 할 일 없는 날이 생기면 나는 또 일을 꾸몄다, 즉석미팅 형식으로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만남을 주선하는 것이다. 서울과 근교를 찾아 바람을 쐬기도 하고, 미술전시회를 감상하거나 영화를 감상했다. 서울은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으므로 각 지역에 많은 유적들을 흩어져 있다.

  삼국시대의 유적으로 풍납토성, 아차산성, 몽촌토성이 있는가 하면, 한양이 수도로 정해지면서 경복궁, 경희궁, 덕수궁, 창경궁, 창덕궁 등 많은 고궁들이 생겨났다. 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정릉, 태릉, 강릉, 선정릉, 종묘이 있다. 이들 유적이나 문화유산들은 단순한 볼거리 차원으 넘어서서 역사공부에도 좋았다. 또 전통문화를 체험을 원한다면 북촌마을이나 남산골 한옥마을, 서울 놀이마당 등이 있다.

  건강을 다지기 위해 오를 수 있는 산은 북악산, 인왕산, 용마산, 청계산, 관악산, 도봉산, 수락산, 불암산 등이 있다. 또 산책을 겸한 나들이를 원한다면 남산공원, 하늘공원, 삼청공원, 서울숲공원, 한강공원, 올림픽공원, 월드컵공원, 양재시민의 숲, 우면산 생태공원 등 크고 작은 공원이나 청계천을 찾아가면 된다. 그밖에 문화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려면 박물관, 미술관, 영화관, 공연장도 찾아간다. 


  지하철이 닿는 곳은 나이 먹은 경로우대 대상자에게는 교통비가 들 리 없고, 산과 공원은 물론 대부분의 고궁도 무료입장이 가능하므로 하루 온종일 점심 값만 있으면 된다. 다만 미술관, 영화관은 입장료를 지불해야 하지만 그것도 할인이 되므로 식사비용을 포함하여 10,000원이면 족하다. 여럿이 움직일 때는 회비를 모아 공동으로 사용하므로 누가 경비를 부담할 것인가 전혀 신경 쓸 이유가 없다. 그리고 돈을 쓰고 남아 각자에게 나누어 주게 되면 금액의 다소에 관계없이 공돈을 받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이런 일이 거듭되면서 우리는 10,000원을 투자하여 하루의 즐거움을 누리는 것을 일컬어 ‘만원의 행복’이라고 명명했다.

  맛집을 순례하는 재미 또한 빼놓을 수 없다. TV나 신문, 잡지에 소개되는 정보들을 참고로 하여 떠난다. 서울 시내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서울이 답답하다고 느껴지면 인천, 강화, 안양, 수원, 안산, 양평 등 수도권 지역으로 나갔다. 그런데 어디를 가든 우리가 선호하는 음식은 값이 비싼 것들이 아니다. 은퇴자에게는 10,000원이면 족하다. 그 정도의 음식으로도 나의 입을 행복하게 하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   

  한번은 오전 11시 지하철 신도림역에 네 사람이 모였다. 아침을 먹고 별 할 일이 없어 갑자기 연락하여 만난 것이다. 인천의 신포시장을 가기 위해서였다. 신도림역은 수도권 전철 1호선과 서울 지하철 2호선이 교차하는 곳으로 인천, 수원 등지로 갈 때 집결하기 좋은 장소였다.  이 날 맛집 탐방 대상으로 선정된 것은 어느 신문에서  ‘신포시장의 명물’이라고 소개한 닭강정집이었다. 우리는 전철을 타고 동인천역에서 내려 지하중앙시장 길을 따라 10분 정도 걸어 신포시장으로 향했다.
  
  12시가 채 안 된 시간이었지만, 시장 입구에 들어서니 고소한 닭튀김 냄새가 진동했다. 20년 전통을 내세우는 식당으로 들어선 우리는 ‘대(大)자’ 하나에 콜라 2병을 주문했다. 대(大)자 하나로 장정 넷이 먹을 수 있다고 했다. 큰 접시에 담긴 닭강정을 보는 순간 나는 우선 그 양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다음으로는 달고 매콤한 맛과 바삭거리는 식감. 양념소스에 버무렸음에도 입 안에서 바삭거리는 것이 이곳 닭강정의 인기 비결이란다. 나는 잘 왔다고 생각했다. 생전 처음으로 닭강정 맛을 음미하며 바깥으로 나왔다. 놀라운 것은 식당을 향하여 두 개의 줄이 길게 이어져 있는 것이었다. 왼쪽의 줄은 포장해 가기 위한 것이고, 오른쪽 또 하나의 줄은 홀에서 먹고 가기 위해 대기하는 줄이라고 했다.

  신포시장에서 나와 일행은 월미도로 향했다. 월미도 문화의 거리에는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바닷바람을 쐬며 갈매기의 묘기를 감상하고 있었다. 잽싸게 채가는 갈매기의 묘기에 모두들 탄성을 질러댔다. 우리는 아이들처럼 구경꾼이 아닌, 참여자로 길매기와 한참동안 놀았다.  그 뒤로 대형 코스모스 해양관광유람선과 내가 가끔 즐겨타는 월미도와 영종도를 오가는 카페리도 보였다.

  여름 바다의 낭만을 즐기고 서울로 향하는 차 안에서 나는 6,000원을 돌려받았다. 네 사람이 10,000원씩 낸 돈 40,000원 중에서 닭강정 14,000원, 콜라 2,000원 합계 16,000원을 지출하고 24,000원이 남은 것을 돌려받은 것이다. 그러니 오늘은 ‘10,000원의 행복’이 아니라 ‘4,000원의 행복’이라고 해야 하리라. 나는 이 ‘10,000원의 행복’을 누리고 산 지 오래되었다. 할 일 없이 탑골공원이나 종묘 앞 광장에 모여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나는 ‘10,000원의 행복’에 늘 감사한다.  

  나는 차 안에서 점차 가속화되는 노령 사회의 문제를 생각해 보았다. 우리나라 노인 인구는 전체 인구의 9.5%인 460만 명이고, 평균수명은 75.5세(남자 72.1세, 여자 79.1세)라고 한다. 그중 노후대책이 가능한 노인은 불과 30% 정도. 건강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고, 의학이 발달하는 추세에 비추어 보면, 평균 수명은 더 길어질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노인문제는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풀어야 할 과제가 아닐 수 없다. 나도 지금은 ‘하바드 생’이지만 언젠가는 동네 경로당이나 기웃거리는 ‘동경대생’이 될 것이고, 거동이 불편하면 방에 콕 틀어박혀 지내는 ‘방콕대생’이 될 것이다. 하바드생으로 남아 있는 동안만이라도 ‘10,000원의 행복’에 감사하며 살아갈 것이다.  



 

▲국화도의 한 펜션에서 삶은 고동을 빼먹는 장면  

 

▲제주도 우도에서

 

▲이작도 해변

 

* 출처 : 졸저 <아름다운 동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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