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길벗 ‘좋은벗님네’와 함께
글 · 남상학
"은퇴는 인생에서 완전한 자유를 갖게 되는 특혜 받는 순간이다. 강요에서 벗어나 비로소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인생에서 가장 풍요로운 시기다.” (프랑스: 베르나르 올리비에)
▲거제 지심도 전망대에서
1만 2천km에 이르는 실크로드를, 4년간 혼자서 도보여행한 후 <나는 걷는다>를 출간한, 프랑스의 베르나르 올리비에는 《떠나든, 머물든》이라는 에세이집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는 시종 은퇴를 예찬한다. 우선 “예순을 앞두고 아내와 어머니의 죽음, 직장에서의 해고, 자녀의 독립 등을 겪으며 서서히 침몰하는 중이었다. 죽음까지 생각할 정도였다”고 고백한 그는 삶의 절박한 처지에서 새로운 삶의 안식처로서의 수단으로 도보여행을 택했다. 여행과 마음의 비움을 통해 새로운 삶을 발견했고 편안한 마음으로 은퇴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은퇴는 매여 있는 삶에서의 ‘놓임’을 의미한다. 좋든 싫든 지금까지 자기를 얽어매고 있던 일에서 벗어나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이 은퇴의 매력이다. 그러나 은퇴가 일에서 해방됨으로써 누리는 것이라 할지라도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이 된다면, 그 자유는 아무 가치 없는 것이 되고 만다. 그래서 은퇴를 한 사람들은 나름대로 자신의 특기나 취미에 따라 그림을 그리거나, 붓글씨를 쓰거나, 사진을 찍거나, 낚시를 가거나, 등산을 가거나, 여행을 하거나 평소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일에 몰두한다. 컴퓨터를 배우고, 남을 위한 봉사활동을 하기도 한다.
나는 은퇴를 하기 전에 일찌감치 여행을 하며 남은 생애를 보내리라 마음을 정했다. 성서는 본질적인 면에서 인간을 가리켜 나그네이며 행인(行人)이라고 규정한다.(히 11:13) 삶은 한 여정에 불과하며, 세상을 사는 인간은 본향을 향해 가는 나그네일 뿐이다. 떠나온 고국이 있으면 돌아가야 할 고국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삶 자체가 긴긴 여행길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그래서 집을 떠나 낯선 곳을 찾아가는 여행자들은 새로운 곳에 대한 기대감과 호기심으로 여행지를 찾아간다.
그러나 여행은 누구나 선망하는 로망이 아니다. 여행을 뜻하는 ‘travel(트래블)'이라는 단어가 'travail(트리베일․고생하다, 수고하다)'에서 왔다는 것이다. 좀더 어원을 따져 올라가면 'travaill'은 로마 시대 고문기구의 하나인 ’tripalium(트리팔리움)'이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여행=고생’이라는 등식이 성립하는데, ‘집 떠나면 고생’이라는 말이 동서고금의을 막론하고 만고의 진리인 셈이다. 그런 고생보따리의 여행이건만 여행에 대한 로망은 식지 않는다.
<바람의 딸, 걸어서 지구 세 바퀴 반> 등 여행기록을 쓴 제자 한비야는 홍익대학교와 미국 유타대학교 언론대학원에서 국제홍보학 석사학위를 받고 돌아와 국제홍보회사인 버슨-마스텔라 한국지사에서 근무하는 여자였다. 세계여행의 꿈을 지녔던 그녀는 그 꿈을 이루기 위하여 좋은 일자리를 버리고 배낭을 메고 7년간 세계의 오지를 찾아 발길로 걷는 여행을 시작했다. 그는 대학에 입학하기 전 5년간 우리나라 구석구석을 발이 닳도록 돌아다녔다.
그런가 하면 잭 니컬슨과 모건 프리먼이 주연한 영화 <버킷리스트>는 시한부 생명 선고를 받은 두 환자가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일’ 목록(버킷리스트)을 만들고는 그걸 찾아 떠난 여행길을 그렸다. 버킷리스트, 그건 평생 꼭 해보고 싶은 일이었고, 그는 죽음을 목전에 두고 이집트 피리미드를 찾아 거기 앉아보기, 루브르박물관에서 한 주 보내기, 로마의 유적을 찾아가기 등을 여행에 즐거워한다. 그 여행의 끝, 그것은 그들에게 행복이었다. 그렇다면 여행이란 고생보따리 속에 고이 감춰진 행복덩어리다.
여행의 멋을 알고 있었던 나는 직장 생활을 할 때에도 방학이나 공휴일이 되면 한 순간의 일탈(逸脫)을 꿈꾸며 여행을 떠났다. 낯선 곳에서 자연의 아름다움에 도취되기도 하고, 전국을 다니며 그들이 사는 모습을 배우기도 하고, 직장 생활에서 오는 권태와 피로를 풀기도 했다. 가족들과의 여행에서는 이것 외에도 가족간의 유대를 굳게 하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그래서 학생들이 수학여행을 가거나 다른 지역으로 수련회를 가게 되면 나는 열심히 따라다니며 장래의 여행을 염두에 두고 필요한 정보를 꼼꼼히 챙겼다. 여행은 새로운 것과의 만남이고, 그 만남 속에서 행복을 느끼는 것이라는 신념으로.
그래서 은퇴하면서 나는 주저하지 않고 발길 닿는 대로 마음껏 여행을 하고 싶었다. 여행이라는 것이 준비할 때 설레고, 여행지에서는 낯선 풍광에 놀라고, 나와 다르게 사는 사람들과 대화하면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좋았던 일, 그리운 사람, 소중한 인연들을 생각해 보고, 여행을 통해서 삶을 새롭게 가꾸며 사물을 보는 관점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키는 계기가 된다면 노년의 삶이 그보다 더 좋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또 여행은 그 동안 열심히 살아왔던 삶에 대한 보상이요, 기쁘고 즐거운 마음을 안고 가족들 품으로 돌아오는 기분이야말로 은퇴자가 누리는 행복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은퇴와 함께 인생 후반기에 누리는 일종의 호사(好事)로 여행을 택했던 것이다.
여행은 어디로 떠나느냐도 중요하지만 누구와 함께 하느냐도 중요하다. 아내, 친지, 동료 등 가까이 있다고 생각되어도 막상 같이 떠나기란 그리 쉽지가 않다. 다행히 나는 여행에 취미를 가진 친구들을 만나게 되었다. 공자는 논어 학이편에서 “有朋이 自遠方來면 不亦樂乎아”라고 했다. “벗이 있어 먼 곳에서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라는 뜻이다. 친구와 함께 하는 즐거움, 친구의 소중함을 깨닫게 하는 말인데, 생각과 취미가 같은 친구를 만난다는 것은 얼마나 큰 행복한가.
우리는 여러 면에서 비슷한 점이 많았다. 유유상종이라 했던가. 모두 교직에 있었고,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니 서로 대화가 통하고 같은 생각으로 끈끈하게 묶일 수 있었다. 김종기, 문영식, 이한수 님 등 세 분은 내가 퇴직하기도 전에 이미 여러 차례 여행을 했던 분들이었고, 내가 은퇴하면서 이영배, 장호찬 님이 자연스럽게 합류하였다. 그 뒤로 김삼봉 님이 참여했다. 그래서 우리는 여행의 길벗으로 “좋은벗님네”라는 이름을 붙였고, 수년간 우리는 전국의 가보고 싶은 지역을 마음껏 누볐다.
우리 동호인들은 여행을 시작하면서 늘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다. 여행을 누릴 수 있는 여건이 어느 정도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었다. 은퇴자들이 여행을 즐기기 위해서는 적어도 세 가지를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첫째는 여행을 할 수 있는 건강이 있어야 하고, 둘째는 크게 제약을 받지 않는 시간과 마지막으로는 여행 경비를 마련할 수 있는 어느 정도의 경제력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다행히 이 조건을 어느 정도 갖추고 있었으니 얼마나 다행한가.
▲부부가 함께한 아우라지에 갔을 레일바이크를 즐기는 모습
* 출처 : 졸저 <아름다운 동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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