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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충청남도

대전 대청호반길, 물굽이 된 산자락 따라 가을의 끝자락을 걷다

by 혜강(惠江) 2010. 11. 11.

 

대전 대청호반길

 

물굽이 된 산자락 따라 가을의 끝자락을 걷다

 

 

박 경 일  기 자

 

 

 

▲ 대청호반길 3코스와 연결되는 자전거길 2코스(냉천길)의 마산동 부근 샛길에서 만난 풍경. 대청호반길에서는 굳이 정해진 코스대로 움직이지 않아도 좋다. 호수 쪽으로 이어지는 샛길에 들어서면 오히려 더 호젓하면서 빼어난 가을의 정취가 기다리고 있는 까닭이다

 

 

   대전(大田). 어쩐지 ‘여행’보다는 ‘출장’이 더 어울리는 도시입니다. 도시 전체에서 풍기는 ‘효율로 재단된 듯한 느낌’ 탓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압축성장의 시기에 폭발적으로 확장된 도시라는 생각에 늘 스쳐 지나기만 했던 곳. 그러나 대전에도 손대지 않은 풍광과 그윽한 정취가 살아남아 있었습니다. 낡았으되 누추하지 않고, 손대지 않았으되 그것 그대로 아름다운 풍경. 그렇게 새로 대전을 보게 했던 것은 바로 ‘길’ 때문이었습니다.

  ‘대청호반길’. 바로 대청호의 대전 쪽 기슭을 따라 걷는 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탄력있는 흙길은 백제시대의 허물어진 산성터를 타고 넘기도 하고, 호젓한 강변의 억새를 지나치기도 하고, 호수에 반쯤 잠긴 버드나무 군락지를 지나기도 합니다. 다도해처럼 호수 위에 점점이 떠있는 섬들을 굽어보기도 하고, 강변을 따라 유연하게 굽어지는 수면 높이의 흙길을 따라 걷기도 합니다. 그 길에서는 고요한 침잠의 느낌과 함께 ‘길이 주는 위안’을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마침 대청호에는 그득히 물이 차올라 있었습니다. 그 호반길을 따라 걸으며 마주쳤던 가을 풍경이 어찌나 찬란하던지요.

  대청호는 말 그대로 ‘육지 속의 바다’라고 할 만큼 거대합니다. 1980년 대청댐에 담수가 시작되면서 금강의 아름답던 강마을과 여울은 물 속에 잠기고 말았지만, 대신 내륙 깊은 곳의 산자락들이 더러는 물돌아가는 굽이가 되고, 더러는 섬이 돼서 가을볕에 빼어난 풍광을 빚어내고 있습니다. 일찌감치 상수원 보호구역으로 지정되면서 개발의 삽날을 피한 강변마을들이 정겨운 오래 전의 허름한 풍경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것이지요.

  전국 곳곳에 정말 많은 길들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대청호반길’도 대전시가 대청호를 끼고 있는 옛길과 강변 길을 이어붙여 만들어낸 것입니다. 6개 코스의 호반길을 하나 하나 짚어가며 걸어봤습니다. 마을에서 거저 내주는 자전거를 타고 호수와 딱 붙어서 이어진 호젓한 단풍 길을 달려보기도 했습니다. 강변에서 인기척에 놀란 물새가 푸드덕 날아오르기도 했고, 내륙의 호수에서 물고기를 잡는 자그마한 동력선들이 노을의 물빛에서 반짝거리는 풍경과도 마주쳤습니다. 너무 서둘러 길을 낸 흔적에 아쉽다 싶은 곳이 없진 않았지만, 그래도 하루하루 깊어가는 가을의 정취를 느끼는 데는 이정도면 족하지 싶었습니다.

  가을이 하루하루 더 깊어지고 있습니다. 단풍으로 빛나던 나무들이 제 잎들을 하나둘 낙엽으로 내려놓고 있는 시간입니다. 이렇게 가을은 곧 떠나고 말겠지요. 그 가을날의 하루쯤을 내서 호젓한 호반길을 걸어보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대전이야 수도권에서 2시간이면 넉넉히 닿을 곳이니 당일치기 여정이라도 괜찮을 터입니다. 이른 아침 서두른다면 물안개 자욱한 아침의 고요를, 한낮에는 첩첩이 이어진 능선이 수면에 제 모습의 반영을 찍어내는 모습을, 해질 무렵이라면 석양에 금박지처럼 반짝이는 호수를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늘·능선·호수가 만나는 길… 단풍물감따라 낭만이 찰랑이네

 
 

▲ 대청호반길 6코스에서 마주친 가을 풍경. 이즈음 대청호에는 물이 가득 차있어 능선 끝이 섬이 되거나, 호반의 나무들이 물에 잠겨 있다. 호수에 밑동을 담근 나무들이 고운 단풍으로 물들어가고 있다.

 

▲ 짙은 숲의 대청호반길을 따라 강변의 오지마을을 잇는 버스들이 간간이 들고 난다.

 

 

 

# 가을의 기운으로 가득한 대청호반길에 서다

 


대청호반은 이즈음 가을로 그득하다. 가을이 깊어질수록 찰랑찰랑 차오른 호수의 물빛도 푸른색이 더해지고, 수변의 나무들은 온통 단풍이 물들어가고 있다. 댐이 가둔 물의 수위가 차오르면서 길게 이어진 산자락 능선의 끝이 섬이 돼서 동실 떠올랐다. 이런 풍경이라면 굳이 따로 조성된 ‘걷는 길’을 찾지 않아도 좋겠다. 그저 목적지없이 호반을 따라 타박타박 걷는 것만으로도 가을의 정취를 몸과 마음 가득히 담을 수 있겠다.

대전시가 끼고 있는 대청호반에 새로 걷는 길이 놓였다. 이른바 ‘대청호반길’이다. 호반길은 1코스부터 6코스까지 모두 6개. 2시간 안쪽의 평탄하면서 짧은 코스부터, 호반의 능선을 타넘으며 제법 허벅지가 팍팍해지는 4~5시간짜리 코스까지 다양하다. 호반에 바짝 붙어 호젓하게 걷는 코스가 있는가 하면, 백제의 옛 성터에 올라 다도해를 방불케 하는 장쾌한 호수 전망을 굽어보는 코스도 있다.

대청호반길의 최고의 코스라면 단연 ‘3코스’를 꼽아야 하리라. 그 길을 손수 만들어 낸 공무원도 그랬고, 그 길을 몇번이고 걸어봤다는 이들도 그랬다. 호반을 따라 난 6개 코스를 하나하나 디뎌본 뒤에야 비로소 그 의견에 흔쾌하게 동의할 수 있었다. 탄력있는 흙길을 따라 산성에 올라 대청호를 굽어보고 호수로 내려서서는 고즈넉한 포장도로를 따라 물을 바짝 끼고 걷는 맛이 빼어났다. 풍광도 풍광이지만, 너무 무겁지도, 너무 가볍지도 않게 몸의 근육들을 적당히 쓰면서 걷는 그 길에서는 눈뿐만 아니라 몸도 즐거워졌다.

 


# 최고의 대청호반길 3코스… 노고산성을 넘다



대청호반길 3코스는 대전 동구 서쪽 최북단의 직동의 ‘찬샘마을’에서 시작한다. 마을 뒷산의 노고산성에서 백제 왕자 창(훗날 위덕왕)이 신라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여 병사들이 흘린 피가 내를 이뤘다 해서 ‘핏골’이라 불렸던 마을이다. 호반길은 마을 뒤편을 따라 농가와 텃밭을 지나 쇠점고개를 거쳐 노고산성을 향해 오르는 것으로 시작된다. 산길이라고 해야 정상이 해발 250m에 불과하니 길은 그리 가파르지 않다. 쇠점고개는 고갯마루에 대장간이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그러나 지금은 선홍색 연시감이 주렁주렁 열린 감나무만이 옛 집터를 짐작케 한다. 고갯마루를 지나 고도를 올려다보면 곧 무너진 노고산성의 흔적을 만나게 된다. 노고산성은 옛 백제 왕자 창이 신라군과 맞서 치열한 싸움을 벌였던 곳이다. 관산성에서 아버지 성왕을 신라군에 잃은 그는 이 산성에서 결사의 항전을 벌였다지만, 지금은 이끼덮인 성벽의 자취만 무상하다.

산성을 지나면 곧 노고바위다. 멀리서 보면 할미모습으로 보인다고 해서 ‘늙을 로(老)’ 자에 ‘시어미 고(姑)’ 자를 쓴다고 전한다. 여기서 몇걸음을 더 가면 시야가 탁 트이면서 비로소 호수가 내려다 보인다. 대청호반길 중에서 최고로 꼽히는 조망처다.

동쪽으로 내려다 보이는 호수는 어찌나 장쾌한지 바다라고 해도 믿을 정도다. 호수 쪽으로 내려온 산자락의 능선이 물에 잠기면서 마치 리아스식 해안과도 같은 풍경을 만들어낸다. 호수에 물이 가득 차오르면서 곳곳에 섬들까지 떠있어 그대로 전라남도 어디쯤의 해안으로 착각할 정도다.

 

# 운치있는 호반 풍경에 바짝 붙어 걷는 길



노고산성을 넘는 길은 찬샘정이란 정자를 만나 호숫가로 붙는다. 여기서 다시 찬샘마을 쪽으로 돌아나오다가 성황당고개를 넘어서 다시 성치산성을 넘는 게 정해진 코스다. 그러나 찬샘정 앞에 서보면 어느 쪽 길을 택해야 할지 망설이게 된다. 정해진 코스대로 좌회전하는 대신 우회전해서 냉천길을 따라 마산동으로 이어지는 호반길이 한눈에도 반할 만큼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이쪽 길은 대청호반길 중에서 자전거길 2코스로 명명된 포장도로이기는 하지만, 호수에 딱 붙어서 걷는 맛이 그만이다.

이 길에서는 물오리 떼들이 푸드덕 날아오르기도 하고, 강변마을에서 조각배를 띄워 놓고 고기잡이를 하는 모습도 만난다. 차로 달리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자전거로 휙 지나치기에조차 아까운 길이다. 능선 자락이 물에 잠기면서 비탈진 숲에 물든 오색단풍이 강물에 풀려서 색색의 물감으로 녹아 흐를 것 같다. 이렇게 가을의 정취를 만끽하며 호반을 끼고 걷는 길이 5㎞ 남짓 이어진다.

그 길 위에서는 호수 쪽으로 이어지는 샛길마다 들어가 봐도 좋겠다. 호수 쪽으로 난 길을 택하기만 한다면 걷기 코스에 대한 강박도, 시간에도 구애받지 않은 채 그저 발길 닿는 대로 걷는다 해도 길을 잘못들 염려는 없다. 길을 잃는다 해도 어차피 길끝은 호수로 닫혀있으니 최악의 경우란 막다른 길을 만나 되돌아오는 정도일 뿐이다. 갔던 길을 되짚어 돌아 나오는 수고쯤은 능히 감수할 수 있는 것이, 호수 쪽으로 방향을 잡아 굽이굽이 돌 때마다 풍경에 대한 기대와 탄성이 교차하기 때문이다.

 


# 역사의 흔적과 이야기를 따라 걷는 길

 


대전이라면 대개 도시의 이미지만 떠올리지만, 실상 대전은 역사의 무게만으로도 녹록잖은 곳이다. 대전은 옛 마한의 부족국가인 신흔국의 땅이기도 했고, 신라에 맞선 백제가 무려 50여개가 넘는 성을 축성하기도 했다. 조선시대로 넘어가면 송시열, 송준길, 박팽년과 같은 인물들의 이름이 나온다. 제월당, 쌍청당, 남간정사 같은 문화재들도 즐비하다.

냉천길을 따라 마산동을 지나면 길은 미륵원터와 관동묘려로 이어진다. 미륵원터는 고려말의 여관 격인 ‘원(院)’이 있던 자리. 원은 원래 관에서 운영하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이곳 미륵원은 회덕 황씨 일가에서 운영하던 ‘사설여관’이었다. 대전에서 손꼽히는 부호였다는 회덕 황씨 집안은 거처를 제공하며 보시를 하고, 대신 길손에게서 새로운 소식을 전해듣기도 했을 터다. 미륵원터를 지나면 곧 관동묘려다. 관동묘려는 조선전기의 문신 송유의 어머니인 류씨 부인의 묘. 개성에 살던 류씨 부인은 스물두 살 때 남편을 잃은 뒤 친정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노비도 없이 아이를 업고 500리길을 걸어 시댁인 이곳까지 내려왔다. 시댁에서조차 ‘부모님 말을 따르라’며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류씨 부인의 간청으로 이곳에 머물게 됐다. 류씨 부인이 업고 온 아들이 바로 조선전기의 문신인 송유였고, 이때부터 호서사림의 대표적인 가문인 은진 송씨가 이곳에 뿌리를 내리게 됐다. 이런 연유로 은진 송씨 가문은 물론이고 대전 시민들도 관동묘려를 성지처럼 여기고 있다.

 


# 그저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가을의 대청호반



대청호반길은 모두 6개 코스지만, 걷기 여정에는 3코스만 한 곳이 없다. 1코스는 대청댐 호반의 나무데크 길을 왕복하는 코스로, 가볍게 산책한다면 모를까 걷기를 즐길 만한 코스는 아니다. 2코스도 여수바위 능선에서의 조망이나, 대청호에 가장 가깝게 나있다는 1㎞ 남짓 이어지는 산책로를 제외하고는 그다지 감흥이 없다. 4코스는 벚나무 단지의 꽃길이 있긴 하지만, 봄철에나 그 정취를 느낄 수 있을 듯하고 5코스는 걷기 코스라기보다는 백골산성으로 오르는 힘겨운 등산코스와 다를 바 없다. 6코스가 그중 낫긴 하지만 ‘경치좋은 곳’이라 이름붙여진 조망처가 대청호의 만수위로 물에 잠겨 있어 아쉽다.


짐작하다시피 ‘대청호반길’은 제주 올레길에서 시작한 지방자치단체들의 이른바 ‘걷는 길 만들기’ 열풍 대열에 대전시가 합류하면서 만들어낸 길이다. 시작은 늦었다. 대전시가 대청호반길 조성에 나선 것은 지난 1월부터. 답사부터 코스확정, 시설물 설치, 코스 개장까지 불과 4개월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렇게 짧은 시간에 걷는 길 6개 코스와 자전거 길 3개 코스가 만들어졌다.

그래서일까, 길은 이어지지 않고 코스마다 툭툭 끊어진다. 3코스 외에는 깃든 이야기도 빈약하고 붙여진 길의 이름도 건조하다. 아예 3코스와 4코스 사이에 난데없이 나중에 만들어진 6코스가 끼어들기도 한다. 그럼에도 가을날 대청호반의 경치는 그저 그것만으로도 빼어나다. 몇개 코스를 정해 걷는 것도 좋겠고, 걷기 코스로 연결된 도로를 따라 차로 이동하면서 짧은 구간을 걸어보는 것도 늦은 가을의 정취를 만끽하는 훌륭한 여정이 된다.

 

 

 




가는 길


수도권에서 가자면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대전 못 미쳐 신탄진나들목으로 나와 좌회전해 신탄진 사거리까지 가서 대청호, 대전 방면으로 우회전한다. 이후 대청호수길로 들어서 9㎞쯤 가다 옥천 추동 방면으로 우회전한다. 다시 1㎞쯤 가서 이정표를 보고 냉천길 쪽으로 우회전하면 대청호반길 3코스가 시작되는 ‘찬샘마을’이다.

 


묵을 곳·먹을거리


  대전에는 특급호텔부터 모텔급까지의 숙소들이 즐비하다. 대청호반길 3코스가 있는 동구 쪽에도 샤토그레이스(042-639-0111), 엠페러(042-256-7000), 태웅관광호텔(042-224-8000) 등이 있다.

 

 대청호반길 곳곳에는 이름난 맛집들이 숨어있다. 대청호에서 잡아올린 물고기들로 매운탕이며 조림 등을 내는 집들인데 허름하지만 오랜 시간 한자리를 지켜오면서 이어진 손맛으로 평균 이상의 맛을 자랑한다. 관동묘려 입구의 냉천골할매집(042-273-4630)이 가장 알려진 곳. 인적드문 길 끝에 있지만 점심시간이면 몰려든 차량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펄펄 살아있는 자연산 메기와 ‘빠가사리’로 끓여내는 매운탕이 알아준다. 대청호를 코 앞에 마주보고 있는 추동집(042-274-1590)은 옻닭을 전문으로 내놓는 집. 민물새우로 끓이는 새우매운탕도 이름이 났다. 레스토랑 ‘더 리스’(042-283-9922)는 낭만적인 느낌이 물씬 나는 곳이다. 브라질식 바비큐를 차려내는데, 점심에는 바비큐에 샐러드바를 뷔페식으로 이용하고 저녁에는 바비큐까지 무제한 제공해준다.

 

 

 

<출처> 2010. 11. 10 / 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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