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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충청남도

공주·부여-백제의 찬란했던 꿈, 그 흔적을 찾아서

by 혜강(惠江) 2010. 10. 3.

                                                  

 

공주·부여-백제의 찬란했던 꿈, 그 흔적을 찾아서

 


공산성 | 무령왕릉&국립공주박물관 | 고마나루 | 계룡산  백제문화단지

|부소산 낙화암 | 정림사지&국립부여박물관  궁남지 | 백제왕릉원 |  

 

 

 

글·사진 민병준

 

 

       

▲ 백제의 대표 정원으로 꼽히는 궁남지.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 연못이다. 

 

 

 서기 660년, 역사에서 사라진 뒤 희미한 그림자로만 기억되던 고대 왕국 백제. 1,350년이 지난 2010년 가을, 백제의 고도(古都) 부여·공주에서 펼쳐지는 세계백제대전을 앞두고 백제는 화려한 부활을 꿈꾸고 있다. 금강 물줄기 따라 찬란하고 수준 높은 문화를 전파했던 고대 왕국 백제의 옛 향기를 맡으러 길을 떠나보자.

 

  백제의 고도 공주·부여 여행은 늘 한 코스로 엮인다. 올해엔 때맞춰 9월18일부터 10월17일까지 두 고을에서 세계백제대전이 펼쳐진다. 따라서 이런저런 다양한 행사에 빠져들다 보면 1박2일로는 일정이 부족할 수도 있겠다.

  공주·부여는 지리상으로 우리나라 중간쯤에 자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논산·천안고속도로, 당진·상주고속도로, 공주·서천고속도로가 지나기 때문에 접근성도 아주 좋다. 당연히 전국 웬만한 대도시에서는 2~3시간 이내에 도착할 수 있다.  수도·영남권 등에선 자연스레 공주를 먼저 들르게 된다. 첫날 아침 공주에 도착하면 곧바로 공산성으로 간다. 성벽을 따라 거닐며 성안 구석구석 천천히 둘러봐도 1시간30분 정도면 충분하다.

  이어 무령왕릉과 국립공주박물관을 구경한다. 무령왕릉이 있는 송산리고분군 주변의 산책로도 빼놓지 말자. 국립공주박물관은 무령왕릉에서 나온 유물과 충남지역에서 발굴한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두 군데 모두 돌아보는 데 1~2시간 정도 걸린다. 이곳을 나와 고마나루(곰나루)관광지를 살펴본다. 비록 4대강 공사로 어수선하지만 고마나루 솔밭 산책도 빼놓을 수 없다. 점심은 이학식당의 국밥으로 해결한다.

 

           

 

   주요 여정을 백제 옛 유적 답사에 맞췄다 해도 공주·부여 나들이에서 계룡산 산행을 빼놓을 수 없다. 갑사에서 자연성릉을 돌아오는 원점회귀 산행의 경우 5시간 정도 걸리므로 일정을 잘 잡아야 한다. 최소 오후 1시엔 산행을 시작해야 저물기 전에 하산할 수 있다. 산행시간이 빠듯하면 갑사나 신원사만이라도 들러보자.

  아니면 안전하게 여행 첫날 아침에 계룡산 산행을 먼저 하고, 오후에 공주 시내를 둘러보는 일정도 괜찮다. 이 경우 관람시간이 제한된 무령왕릉·국립공주박물관을 먼저 들르고, 18:00 이후에도 입장 가능한 공산성·고마나루는 저녁 산책 코스로 삼으면 된다. 숙박업소는 부여보다 공주에 많다.

  이튿날 부여로 들어선 뒤, 동선을 고려한다면, 규암면 합정리의 백제문화단지를 먼저 들른다. 이곳은 ‘2010 세계대백제전’ 개막식 행사가 펼쳐지는 9월17일부터 개방한다. 그 이전엔 방문해도 관람할 수 없다. 방대하게 꾸며놓았기 때문에 구석구석 둘러보려면 1시간 이상 걸린다.

  이어 부소산에 오른다. 삼충사, 부소산성, 사자루, 낙화암 등을 잇는 걷기 아주 좋은 산책로가 여러 갈래로 연결돼 있다. 정점은 낙화암이다. 여유롭게 둘러보려면 산책만 왕복 2시간 정도 잡는 게 좋다. 고란사 아래 강변에서 황포돛배를 타면 구드래나루까지 갈 수 있다. 왕복·편도 모두 가능하다.

  부소산을 다녀온 다음 정림사지, 국립부여박물관, 궁남지를 차례를 차례로 둘러보면 된다. 모두 각각 30분~1시간 정도 걸린다. 귀갓길엔 능산리의 백제왕릉원에 들러 백제의 사비시대를 이끌었던 왕들도 만나보자.   

 

           

 

  백제의  고도(古都) 충남 부여·공주가 긴 잠에서 깨어나 부활을 앞두고 있다. 신라의 고도 경주는 일찍이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역사 유적지로 이름을 올렸고, 최근엔 양동마을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는 등 그 기세가 하늘을 찌를 정도다.

  이런 가운데 공주·부여는 한반도에서 신라·고구려와 함께 자웅을 겨뤘던 백제의 화려한 영광을 되찾기 위해 애쓰고 있다. 그래서 2015년 ‘공주·부여 역사유적지구’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해 지난 1월 공주·부여 지역의 19개 유산을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으로 등재시키기도 했다.

  이번 9월18일(토)부터 10월17일(일)까지 30일 동안 공주와 부여에서 동시에 열리는 세계대백제전도 옛 백제의 영광을 되살리기 위한 노력의 하나다. 이 행사는 매년 가을마다 열리던 이전 축제와는 규모부터 다르다. 이 기간에 공주·부여를 찾는다면 미처 알지 못했던 백제의 찬란했던 문화에 놀라고, 백제의 못 이룬 꿈에 탄식하며 눈물을 흘릴 것이다. 자, 백제의 옛 도읍지로 시간 여행을 떠나보자. 

 

 

 

 ▲ 공산성 야경. 밤에도 성문을 열어놓기 때문에 저녁 산책을 즐길 수 있다.


 

공산성 

 

웅진시대 도읍을 지켜주던 금강가의 산성


 

공주 시가지와 금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공산성(公山城, 사적 제12호)은 백제가 한강의 한성에서 금강의 웅진으로 천도한 후, 다시 사비(부여)로 옮길 때까지인 웅진시대(475~538년)에 도읍을 지키던 산성이다.

  공산성엔 지금 정문 역할을 하고 있는 서문의 금서루(錦西樓), 공산성의 북문으로서 강을 건너다닐 때 왕래하는 남북통로의 관문이었던 공북루(拱北樓) 등 모두 4개의 문루가 있다. 공북루 밖엔 1910년도까지만 해도 섶다리가 있었다고 한다. 1920년대엔 공주 갑부 김갑순이 자기 돈으로 배다리를 만들고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이용료를 받았다. 1932년 금강철교가 세워지면서 모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지금은 금강교와 백제큰다리가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공북루 남동쪽에 있는 만하루(挽河樓)는 금강을 지키는 군사적 기능을 수행하는 동시에 금강의 경승도 즐길 수 있는 누각이다. 현판 이름도 ‘강물을 끌어당기는 누각’이란 뜻으로 매우 서정적이다. 누각 바로 아래 금강이 흐르고 있음을 염두에 두고 지은 이름이다.

  쌍수정(雙樹亭)은 조선시대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하여 왔을 때 머물던 곳. 두 그루의 아름드리나무에 기대어 한양을 걱정하던 인조. 난이 평정됐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이 쌍수에 정삼품 벼슬인 통훈대부(通訓大夫)의 벼슬을 내렸다고 한다. 전설에 따르면, 인조가 공산성에 머물 당시 임씨라는 농부가 찰떡을 만들어 임금님께 바쳤는데, 신하들 중 아무도 떡 이름을 모르자 임서방이 만든 맛있는 떡이라 하여 ‘임절미’라 부른 것이 지금의 인절미로 바뀌었다고 한다.
  

 

▲ 공산성 수문병 임무교대식. 휘장과 창을 든 수문병들을 보면 잠시나마 웅진백제 시대로 돌아간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된다.

 

  이 외에도 공산성엔 영규대사가 의병을 훈련시킨 영은사, 동성왕 때 건립했다는 호화연회장 임류각터, 추정 백제왕궁 전각터 등이 자리하고 있다.  보통 산성이라 하면 성벽 주변에 나무가 없어 햇살 때문에 답사에 곤혹스러울 때가 있지만, 공산성은 우리나라에서 숲이 가장 좋은 산성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아름드리나무가 많아 봄가을은 물론 한여름에도 뙤약볕 걱정을 붙들어 매도 좋은 곳이다. 공산성 성안을 성벽 따라 한 바퀴 천천히 산책 삼아 답사하는 데 1시간~1시간30분 정도 걸린다.

  한편, 매년 4월부터 10월까지 7·8월의 혹서기를 제외하고 매주 토·일요일 웅진백제 수문병의 근무교대의식이 열린다. 휘장과 창을 든 수문병들이 성을 따라 길게 늘어선 모습은 잠깐 동안이나마 웅진백제 시대로 돌아간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한다. 백제왕, 왕비, 장수, 병졸, 평민복의 복장을 현장에 갖춰놓아 희망하는 관광객들이 체험이나 사진 촬영도 할 수 있다.

교통 >> ▲수도권→경부고속도로→천안분기점→논산-천안고속도로→공주나들목→2km→공산성 ▲영남권→경부고속도로→회덕분기점→호남고속도로지선→유성분기점→당진·상주고속도로→공주나들목→2km→공산성 ▲호남권→호남고속도로→논산분기점→논산-천안고속도로→남공주나들목→5~6km→공산성

숙식 >> 공주 시내와 금강 주변에 숙박업소와 식당 등이 많다. 공산성·무령왕릉과 가까운 금성동·웅진동에 강서장여관(041-853-8323), 장미장여관(041-856-0260), 오비파크여관(041-853-7300), 금강온천여관(041-856-8266), 크리스탈모텔(041-856-9102) 등이 있다. 시외버스터미널이 있는 금강 건너 신관동에도 금강관광호텔(041-852-1071), 호텔필름 37º2(041-857-7532~3), 위니텔(041-852-5999)을 비롯한 모텔급 숙박업소가 많다.

별미 >> 중동 이학식당의 따로국밥이 유명하다. 이 식당은 1940년대 공주장터를 오가던 5일장 상인들을 상대로 조그맣게 시작했는데, 이곳 국밥 먹으려고 대전서 90리 길을 걸어오기도 했을 만큼 맛있는 집으로 유명했다. 따로국밥 1인분 6,000원. 전화 041-855-2455

 

 

          

1 무령왕릉이 자리한 송산리 고분군. 주변의 산책로도 예쁘다.

2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석수. 발굴 당시 제일 먼저 사람들의 눈에 띄었던 유물이다.

3 국립공주박물관 전시실에 복원해 놓은 무령왕과 왕비의 목관. 

 

 

무령왕릉&국립공주박물관

찬란했던 웅진백제 문화를 알 수 있는 유물 가득

  공산성을 나온 뒤 백제의 영화를 살펴볼 수 있는 송산리고분군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송산리고분군은 웅진백제시대의 왕과 왕족의 무덤이 모여 있는 곳으로 현재 무령왕릉을 비롯해 7기의 고분이 있다. 무령왕릉 발굴 비화는 아직도 세상 사람들의 입을 떠돈다.


  1971년 봄, 문화재관리국은 문화유적 정비계획 하나를 확정했다. 다름 아닌 송산리고분군 정비계획이었다. 당시 청룡·백호·현무·주작의 사신도가 그려진 전축분인 6호분이 특히 중요했다. 그해 무더운 7월, 6호분의 침수를 막기 위해 무덤 뒤쪽의 나지막한 산 앞에서 배수로 공사를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인부의 삽 끝에 무엇인가 걸렸다. 전돌이었다. 20세기 한국고고학 사상 가장 위대한 발견은 이렇게 시작됐다. 그런데 시간을 갖고 해야 할 발굴작업이었건만, 입구를 뜯어낸 지 불과 15시간 만에 작업이 끝나고 말았다. 가장 위대하면서도 동시에 가장 치욕적이기도 한 이 발굴작업은 전 세계 고고학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정도로 날림 발굴이었다는 오명을 쓰고 있다. 


  어쨌든 이렇게 발견된 무령왕릉에선 백제 웅진시대의 면모를 밝혀주는 세기의 유물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다. 도굴 당하거나 훼손되지 않고 온전히 발견된 유일한 백제 무덤이었던 것이다. 이로써 역사에 비밀스럽게 묻혀 있던 백제의 찬란한 면모를 드러내게 됐다.

  삼국사기에 ‘키가 여덟 자이고 눈매가 그림과 같았으며, 인자하고 너그러워 민심이 따랐다’고 묘사된 무령왕이 묻힌 석실 내부는 불교적 내세관의 극치인 극락세계다. 아쉽게도 무령왕릉 내부는 관람할 수 없다. 습기 등으로부터 보존을 위해 1997년 영구적으로 폐쇄했기 때문이다. 무령왕릉이 자리한 송산리고분군 언덕 산책길은 호젓하다. 고분이 자리한 부드러운 언덕길을 거닐다 공주 시가지를 내려다보며 웅진시대 백제의 영욕을 가만히 되짚어보자.

 

 

      

               ▲ 무령왕릉에서 발굴된 유물을 전시하고 있는 국립공주박물관. 

 

 

무령왕릉 발굴 유물들을 전시해 놓은 국립공주박물관

  국립공주박물관은 무령왕릉과 1km 정도 떨어져 있다. 무령왕릉이 있는 송산리고분군 언덕 뒤쪽으로는 국립공주박물관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다. 이 길을 따라 걸으면 박물관까지는 10분 정도 걸린다. 승용차가 무령왕릉 주차장에 있을 경우엔 다시 이 길로 되돌아야 한다.

  국립공주박물관은 무령왕릉실, 충청남도의 고대문화실, 야외정원의 3곳의 상설전시공간과 1곳의 특별전시실을 운영하고 있다. 1층 무령왕릉실은 백제의 왕릉 중 주인공이 확인된 유일한 왕릉인 무령왕릉에서 발굴한 유물들이 전시돼 있다. 총 108종 2,906점의 발굴 유물 가운데 묘지석, 왕의 관식, 다리작명 은제팔찌 등 1,000여 점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왕과 왕비의 목관도 복원해 놓았다.

  2층 충청남도의 고대문화실은 천안 용원리유적, 공주 송산리고분, 공산성 출토품 등 웅진백제시대를 전후한 이 지역의 주거, 분묘, 성곽, 대외교류 관련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다. 4~5세기 무렵 공주 지역 지방 세력의 존재를 밝혀준 공주 수촌리 백제고분 출토품들도 눈길을 끈다. 이와 함께 통일신라 이후 이 지역의 백제 전통을 보여주는 계유명 천불비상 등 찬란한 불교미술품들을 볼 수 있다. 야외정원엔 공주 반죽동의 대통사지에 있던 석조와 대통사지에서 출토됐다고 전하는 돌사자 등 70여 점의 석조미술품들이 전시돼 있다.

  한편, 세계대백제전 기간엔 기획특별전으로 ‘백제의 관모전(冠帽展)’이 준비돼 있다. 공주박물관 유물과 공주 웅진시대 유물에 일본에서 공수해 온 유물도 전시된다. 이런 유물들을 꼼꼼히 관람하는 데 아무리 짧아도 1시간은 잡아야 한다.


 

             

               ▲ 고마나루 항공사진. 가운데 은빛모래 깔린 곳이 고마나루, 강 건너 오른쪽에

              솟은 산이 전설에 나오는 연미산이다./ 공주시청 제공     

 

고마나루

곰과 인간에 얽힌 슬픈 전설 전하는 나루터

  국립공주박물관 입구에서 고마나루(곰나루)는 아주 가깝다. 이곳 고마나루관광지엔 새로운 충남인의 상징을 형상화한 웅비탑, 공연장, 어린이수영장 등이 갖춰져 있다. 도로 건너 강변으로 들어가면 고마나루가 보인다. 고마나루 앞은 모래사장이 넓게 펼쳐진 곳이었는데, 4대강 공사 여파로 현재는 모래를 파헤쳐 어수선하다. 이미 고마나루 일대는 준설 작업으로 상당 부분 훼손된 상태다. 또 하류의금강보가 완성되면 고마나루의 너르던 모래사장도 대부분 사라지게 된다.

  고마나루 한쪽 솔밭엔 아담한 사당이 세워져 있다. 바로 전설의 그 곰을 위로하기 위해 지었다는 사당으로 웅신단(熊神壇) 또는 웅사당(熊祠堂)이라고 한다. 1972년 이 자리에서 돌곰상(높이 34cm, 폭 29cm)이 발견됨으로써 전설은 증명됐고, 곰사당이 예전부터 존재했었을 것으로 보고 사당을 세웠다. 그때 발견된 돌곰상은 현재 공주국립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이 사당에 있는 돌곰상은 모형이다.

  고마나루 맞은편엔 전설의 곰이 살던 연미산(239m)이 솟아 있다. 연미산은 ‘공주의 시작’과 ‘백제의 마지막’을 말없이 지켜본 증인이다. 공주를 옛날엔 순우리말로 고마나루, 곰나루 등으로 불렀고, 한자로는 웅진(熊津), 웅주(熊州)로 적었다. 그러다 고려 초 지금의 공주(公州)로 바뀌었다. 여기에 전해오는 전설은 언제 들어도 짠하다.

  아득히 먼 옛날, 강 건너 연미산 동굴에 살던 처녀곰이 나무꾼 총각을 사랑해 그를 잡아와 남편으로 삼았다. 자식을 둘이나 낳았다. 세월이 흐르면서 인간세상이 그리워진 나무꾼은 어느 날 동굴에서 도망쳐 강을 건넜다. 이를 알아챈 아내곰은 돌아오지 않으면 자식들을 모두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나무꾼은 끝내 듣지 않고 강을 건넜다. 결국 아내곰은 두 자식을 안고 강물에 뛰어들고 말았다. 그 후 이 지역엔 계속 흉년이 들고 세찬 강물결에 배가 뒤집혀 사람들이 죽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마을 사람들은 죽은 아내곰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사당을 세웠다. 그 뒤로는 그런 일이 생기지 않았다고 한다.

  또, 저 연미산은 백제의 마지막을 선포한 이른바 ‘취리산 회맹(就利山 會盟)’ 바로 그 자리다. 백제가 멸망하던 그해, 660년. 부여에서 공주로 피해 온 의자왕과 태자 효가 공산성에서 결전을 준비하다 항복하고 말았다. 부여 사비성을 지키던 왕자 융도 항복했다. 이렇게 백제가 멸망한 뒤 의자왕과 태자 효, 왕자 융 등은 모두 당나라로 압송됐다. 의자왕은 압송 직후 시름시름 앓다가 5년 만인 665년 한 많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러자 당 태종은 왕자 융을 웅진도독으로 앉히고 공주 취리산에서 백제와 신라가 회맹(會盟)을 맺게 했다.

 

 

         

           ▲ 1 고마나루관광지에 세워져 있는 웅비탑. 2 곰나루 한쪽 솔밭에 세워진 웅신단.

        전설의 곰을 위로하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삼국사기는 당시 당 태종의 칙사인 유인원과 신라 , 패망한 백제의 왕자 융이 함께 취리산에 올라 산천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백마의 피를 함께 마신 뒤 화친의 맹약문을 읽었다고 전한다. 이 맹약문은 신라의 종묘에 보관했고 제수용품은 제단의 북쪽 아래에 묻었다. 그리고 1343년이 흐른 2008년 12월 공주대박물관 발굴팀은 연미산 정상에서 정연하게 축조된 석축제단을 찾아냈다. 이로써 삼국사기의 취리산이 지금의 연미산일 가능성이 한층 높아졌다.

  세계대백제전 기간 동안 고마나루관광지 일대에선 다양한 행사가 펼쳐진다. 고마나루 수상공연장에서 펼쳐지는 ‘사마(무령왕)이야기’가 가장 큰 이벤트. 고마나루의 금강설화와 백제시대 영웅을 판타지로 꾸민 이 공연엔 150여 명의 전문 배우가 출연해 관람객을 화려했던 백제시대로 이끈다. 고마나루와 연미산, 금강 물줄기 등 실경과 어우러지는 연출이 백미다. 공연은 9월18일(토)부터 10월2일(토)까지 15일간 매일 19:30~20:40에 진행된다. 요금은 S석 어른 2만원 / 청소년 1만4,000원 / 어린이 1만원, A석은 1만원 / 7,000원 / 5,000원, B석은 5,000원 / 3,500원 / 2,500원.

  한편, 10월17(일) 열리는 폐막식은 18:00부터 2시간 동안 고마나루 예술마당에서 진행된다. 식전행사로는 충남국악단 오프닝공연, 박동진 판소리 전수관 공연 등이 준비돼 있다. 식후엔 인기가수 축하공연, 폐막 불꽃놀이가 진행된다.

  

공주 계룡산

닭볏을 쓴 용의 머리에 올라 옛 백제 땅을 굽어보네

 

  이번 여정의 목적이 금강을 따라가며 공주와 부여 곳곳에 서려 있는 백제의 꿈을 엿보는 것이라 해도 어찌 백제인들에게 신앙의 대상이었던 계룡산 산행을 빼놓을 수 있으랴. 백제의 옛 도읍인 공주 남쪽에 솟은 계룡산은 주봉인 천황봉(845m)에서 관음봉(816m), 삼불봉(775m)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마치 닭볏을 쓴 용의 형상을 닮았다는 산이다.

 

 

 


           ▲ 계룡면의 계룡저수지에서 올려다본 계룡산. 백제인들의 정신 깊숙이 자리 잡은

 

성스런 산이다.

 

 

 

 

   계룡산에선 동학사 코스가 대표적이지만, 공주 시내 쪽에서 접근할 땐 갑사~금잔디고개 코스와 갑사~연천봉 코스가 있다. 이 두 코스를 연결하는 갑사~금잔디고개~자연성릉~관음봉~연천봉~갑사 원점회귀 코스는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는 명품 코스다.

  공주의 볼거리들을 모두 둘러보고 계룡산 갑사로 가면 아무리 빨라도 오후 2시 이전에 도착하기 힘들다. 갑사 원점회귀 코스 산행 시간은 5시간 정도 걸린다. 따라서 최소 오후 1시엔 산행을 시작해야 저물기 전에 하산할 수 있다. 세계대백제전이 열리는 9월18일(토) 공주 지역 일몰 시간은 18:35 무렵이다. 만약 하산 시간이 빠듯하다면 무리하게 원점회귀 산행을 시도하는 것보다 갑사나 신원사 구경만으로 아쉬움을 달래는 것도 괜찮다.

  예부터 ‘춘마곡 추갑사’라 했다. 봄 경치는 마곡사요, 가을 경치는 갑사라는 뜻이다. 매표소를 지나 갑사까지 이어지는 길 양쪽으론 수십 년 묵은 아름드리나무가 울창하다. 이 길을 흔히 ‘갑사 오리길’이라 부른다. 단풍 드는 가을엔 제법 운치가 넘치는 길이다.

  

 

  이곳엔 탐방객들을 위한 자연탐방로가 조성돼 있다. 오리숲 초입엔 참나무, 느티나무, 산벚나무, 말채나무, 회화나무 등 수백 년 된 거목이 가득해 숲의 진면목을 느낄 수 있다. 계룡산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서비스하는 ‘오리숲이 들려주는 이야기’라는 체험형 교육 프로그램에 참가하면 전문해설사의 안내를 받으며 숲의 생태와 문화유산 등을 둘러볼 수 있다. 이 코스는 약 1.2km로 1~2시간 정도 걸린다. 무료다.

 

 

 

            

     ▲ 자연성릉 너머에 쌀개봉이 솟았고, 그 왼쪽으로 계룡산 최고봉인 천황봉이 보인다. 

 

 

 420년 고구려에서 온 승려 아도화상이 창건했다는 갑사는 계룡산을 대표하는 아름다운 절집이다. 신라 화엄십찰의 하나였던 갑사 경내엔 철당간지주(보물 제256호)와 부도(보물 제257호) 등의 문화유산이 있다. 개울 건너의 대적전은 고찰 향기가 진하다. 

 

  갑사 앞으로 이어지는 산길을 100m 정도 오르면 삼거리. 왼쪽은 금잔디고개, 오른쪽은 연천봉 코스다. 어느 길로 가든지 한 바퀴 돌아서오지만 많은 등산인들은 왼쪽의 금잔디고개 코스를 선택한다. 갑사구곡의 8곡에 해당하는 용문폭 시원한 물줄기를 구경하고 신흥암을 지나 금잔디고개까지 가는 데 1시간30분 정도 걸린다. 


  금잔디고개에선 상신리, 남매탑, 자연성릉 방향으로 길이 나뉜다. 맨 오른쪽 길을 선택하면 계룡의 주릉이요, 아름다움의 핵심인 자연성릉으로 이어진다. 삼불봉에서 자연성릉을 거쳐 관음봉 천황봉으로 이어지는 깎아지른 바위 성벽은 계룡산이 왜 ‘닭볏을 쓴 용’으로 불리는지 알게 해준다. 설악 용아장성을 닮은 듯 울퉁불퉁 솟은 자연성릉의 기묘한 경관에 감탄하며 오르락내리락 하다보면 어느덧 관음봉 정상에 닿는다. 1시간30분 정도 잡아야 한다.

 

 

           

               ▲ 계룡산 산신령에게 제사 지내던 신원사 중악단.


 

  관음봉에선 계룡산의 전체 골격이 한눈에 다 들어온다. 남쪽으로는 옹골차게 솟은 쌀개봉 암릉 너머로 천황봉이 우뚝 솟아 있고, 그 동쪽으론 천황봉~황적봉 능선이 장하다. 동북쪽으론 지나온 자연성릉이 힘차게 굽이치는데 그 너머로는 신선봉~장군봉 능선이 길게 휘감아 돈다. 이 두 능선은 동학사계곡을 학이 날개를 펼친 듯 껴안고 있다. 뒤돌아보면 문필봉~연천봉 능선이 포근하게 고왕암과 신원사가 있는 계곡을 감싸고 흐른다. 고왕암은 백제 마지막 왕인 의자왕의 아들 융 왕자에 얽힌 전설이 전해오는 암자다.

  관음봉 너머의 안부 갈림길. 여기에서 왼쪽의 너덜지대로 내려서면 동학사계곡으로 이어지고, 오른쪽으로 가면 문필봉(756m), 연천봉(739m)을 거쳐 갑사계곡을 통해 갑사에 다다른다. 관음봉에서 1시간30분이 조금 더 걸리는 내리막이므로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즐기며 가자.

  시간이 허락한다면, 산행 후 갑사를 빠져나와 계룡산 남쪽에 있는 신원사도 들러보자. 백제 말기인 651년 보덕이 창건했다는 이 절집은 덜 알려져 있는 덕에 아직 한적한 산사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계룡산신을 모셔 놓은 중악단(보물 제1293호) 등도 볼 수 있다.
계룡산국립공원 사무소 042-825-3002~3, 갑사 분소 041-857-5178, 042-825-2570


숙식>>  갑사 입구에 청수장여관(041-856-5181), 황금산장여관(041-856-4660), 산장가든여관(041-857-5065) 등의 숙박시설이 있다. 그 주변의 통나무식당(041-857-5074), 초원식당(041-857-5074), 서울식당(041-881-5566) 등 대부분의 식당은 더덕구이, 버섯찌개, 빈대떡, 도토리묵을 판다. 산채비빔밥 6,000원, 산나물찌개백반 7,000원, 버섯찌개 1만원.

교통 >>  공주→32번 국도(유성 방면)→청벽대교→691번 지방도→갑사 시설지구 주차장 / 공주→23번 국도(논산 방면)→계룡면소재지→갑사 시설지구 주차장 <공주 시내에서 20~30분 소요>

 

 

           

             ▲ 생활문화마을 기와집들. 귀족들이 살았던 곳이다.

 

 

백제문화단지

백제의 과거를 재현한 한국형 역사공원

  계룡산 갑사 시설지구에서 부여로 가려면 계룡면 상정리에서 697번 지방도를 타고 이인면 소재지로 간 다음 40번 국도를 타면 된다. 이 경우 ‘백제큰길’로 불리는 공주~부여 간 651번 지방도를 타지 못한다는 아쉬움이 있다. 만약 계룡산을 먼저 들렀고, 공주에서 직접 부여로 간다면 당연히 고마나루에서 백제큰길을 타는 게 낫다. 백제큰길은 금강을 오른쪽에 끼고 가지만 강변 풍치가 빼어나게 좋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소박한 강변 풍광과 더불어 공주와 부여를 드나들던 옛 백제인들을 상상으로나마 그려볼 수 있다.


  백제가 후반기에 등을 기댔던 금강은 공주에서는 웅진강, 부여에서는 백마강 혹은 사비강으로 불렸다. 흔히 알려진 백마강은 금강 가운데 부여군 규암면 천정대에서 세도면 반조원리까지 16km 구간을 말한다.

  백제는 삼국 가운데 가장 먼저 한강 유역을 차지한 뒤 아시아 각국과 교류하며 찬란한 고대 문화를 창조했다. 또한 700년 가까운 장구한 역사를 갖고 있지만 660년 패망하면서 잊힌 왕국이 됐다. 의자왕, 낙화암, 삼천궁녀 등이 백제의 마지막에 대한 편린들이다.

  부여군 규암면 합정리에 들어서게 될 백제문화단지는 장구한 역사와 찬란한 문화를 재현하기 위해 짓고 있는 시설이다. 1994년부터 올해까지 17년간 329만4,000㎡에 6,904억원을 투자해 조성하고 있다. ‘아시아 최대 역사테마파크’라는 이 단지가 완성되면 2010 세계대백제전 주 무대로 활용된다.

  ‘백제의 과거 모습을 완벽히 재현한 한국형 역사공원’이라는 평가를 받게 될 백제문화단지는 크게 역사재현촌, 백제역사민속박물관, 연구교육촌 등으로 나뉜다. 연구교육촌엔 2000년 백제 연구와 학술교류를 위해 문을 연 한국전통문화학교를 비롯해 숙박·레저시설도 포함돼 있다.

  역사재현촌은 한성백제의 궁성인 한강 위례성을 본뜬 성과 충남도 16개 시군이 기증한 명품 소나무 600여 그루로 조성한 솔숲에 둘러싸여 있다. 이곳엔 개국촌·왕궁촌·전통민속촌·군사통신촌·장제묘지촌·산업교역촌·풍속종교촌 이렇게 7개의 촌락이 들어섰다.

  삼국시대 왕궁의 모습을 최초로 재현한 사비궁은 전문가들의 철저한 고증을 거친 작품이다. 웅장한 규모도 눈길을 끌거니와 단청을 잘 입혀 단아함을 살렸다는 평이다. 왕궁 정문으로서 2층에 누각이 있는 승명문을 비롯해 정무를 보는 정청, 중궁전, 동궁전, 서궁전, 건물과 건물을 잇는 회랑 등의 건물로 이뤄져 있다. 왕궁의 가장 큰 기둥은 수령 300여 년의 나무를 사용해 높이 10m, 지름 0.6m 규모로 제작했다. 백제 건축양식의 특징을 살려 기둥의 윗부분에 서까래 모양의 부재가 있는 하앙 구조로 지었다.

 

  
▲ 39m에 이르는 오층목탑이 돋보이는 능사. 능사란 백제금동대향로, 창왕명석조사리감이 발굴된 ‘능산리사지’를 줄여 부르는 이름이다.

 

  무려 39m에 이르는 오층목탑이 돋보이는 능사는 백제금동대향로(국보 제287호)와 창왕명석조사리감(국보 288호)이 발굴된 백제 사찰 ‘능산리사지’를 줄여 부르는 이름이다. 백제금동대향로가 출토된 능산리 절터를 정밀 발굴한 결과 건물 흔적에 따라 오층목탑과 금당, 강당, 회랑 등 13개 건물을 고증을 살려 복원했다. 멀리에서도 시선을 확 끄는 오층목탑은 정림사지 오층석탑을 많이 닮아 단아한 미가 풍긴다. 이 단지는 드라마 ‘아이리스 2’의 배경으로도 쓰일 예정이다.

  한편, 9월17일(금)엔 15:00부터 2시간 동안 백제문화단지 특설무대에서 ‘1400년 전 대백제의 부활’이란 주제로 세계대백제전 개막행사가 진행된다. 식전엔 백제역사재현단지와 세계대백제전 홍보동영상이 상영되고 충남국악단·교향악단·백제음원(오악사)의 공연이 펼쳐진다. 식후엔 혼불 점화 및 개막축하 공연이 준비돼 있다. 또한 사비궁에선 30일 동안 ‘사비궁의 하루’란 체험 프로그램(10:00~18:00)도 진행한다. 백제문화단지 관람료 어른 9,000원, 청소년 7,000원, 어린이 6,000원.

  2006년 3월 개장된 이후 4년 만에 관람객 100만 명을 훌쩍 넘어선 백제역사문화관. 1층은 백제의 역사와 생활문화, 2층은 백제의 신앙과 문화 교류를 주제로 4개의 상설전시관과 기획전시실 등을 갖췄다. 생활문화관은 1400년 전 백제시대의 장터, 항구의 모습과 왕궁 조회 장면, 백성들이 성을 쌓는 모습 등이 모형으로 복원돼 있다. 이와 함께 무령왕릉, 정림사지 오층석탑, 미륵사지석탑, 금동대향로, 서산마애삼존불 등 주요 유적·유물의 복제품도 전시돼 있다. 칠지도, 서산마애삼존불 등은 첨단 영상기법으로 소개해 실물을 눈앞에서 보는 것 같다.

  백제역사문화관은 출토 유물을 전시하는 기존 박물관의 전시기법에서 탈피해 모형과 그래픽, 입체 영상기법을 도입했으며 관광객을 위해 탁본과 옥새찍기, 백제문양 틀에 찰흙찍기 등 체험 공간도 마련했다. 요금은 어른 1,500원, 어린이 800원. 주차료는 무료. 전화 041-830-3482

  숙식>>  백제역사문화관 앞에 지어진 나선형 구조의 부여리조트(041-939-1100)는 다목적 콘도미니엄으로 8월 24일부터 운영을 시작했다. 지하 1층, 지상 10층 규모의 숙박시설과 회의 등 각종 행사가 가능한 컨벤션센터, 목욕, 수영장 시설을 갖췄다.

2013년까지 식물원, 생태공원을 비롯해 아울렛 매장, 대중 골프장 시설을 갖춰 휴식과 교육, 레저, 쇼핑 기능까지 아우르는 복합 시설로 거듭날 예정이다.

 

 

부소산 낙화암

삼천궁녀는 백제의 마지막을 상징하는 슬픈 전설

  금남정맥의 마지막 봉우리인 부소산(106m). 이곳에 쌓은 부소산성은 왕궁과 부여 시가를 수비하던 백제 최후의 보루였다. 백제의 충신들인 성충·흥수·계백 장군의 넋을 기려 지은 삼충사, 새까맣게 타버린 곡식이 지금도 발견되는 곡식창고를 지나 반월루로 가는 동안 군데군데 띠처럼 쌓아올린 토성의 흔적들을 보게 된다. 이렇게 반월루, 궁녀사, 사자루, 백화정을 차례로 지나 낙화암에 올라선다.  

 

 
▲ 삼천궁녀가 뛰어내렸다는 슬픈 전설이 전해오는 낙화암. 정상엔 백화정이 세워져 있다.

  

  나당연합군이 밀려들자 삼천궁녀가 백마강으로 몸을 던졌다는 전설이 전하는 낙화암에 오르면 넉넉한 부여 들판이 백마강 너머로 펼쳐진다. 호사가들은 3,000명이라는 숫자를 놓고 진위 여부를 따지지만, 이는 단순히 의자왕이 거느렸던 후궁의 숫자가 아니라 당시에 피 흘리며 쓰러져간 수많은 백성들의 상징이 아니겠는가.

  낙화암 오른쪽 아래 절벽을 에돌아 내려서면 꽃다운 혼을 날린 궁녀들이 몸을 던지기 전 스스로 명복을 빌었을 법당이 있다. 고란사(皐蘭寺)다. 창건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없다. 백제 때 왕을 위한 정자였다고도 하고, 백제 왕실의 내불당으로서 비빈들의 기도처였다는 설도 있다. 여하튼 이 절집은 백제의 멸망과 함께 소실됐던 것을 고려 현종 때 삼천궁녀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다시 지은 것이다. 

 

 

▲ 백제의 충신들인 성충·흥수·계백 장군의 넋을 기려 지은 삼충사.

 

  아담한 법당 뒤꼍으로 돌아가면 고란초 다소곳이 피어난 절벽 아래엔 궁녀들의 눈물인 듯한 석간수가 솟는다. 궁녀들은 이 샘물을 왕에게 바칠 때 고란샘물임을 알리기 위해서 고란초 이파리를 두어 개 띄워 바쳤다고 한다. 속설에 이 샘물을 한 모금 마시면 3년이 젊어진다 한다. 어떤 욕심쟁이는 너무 많이 마셔 결국 아기가 됐다는 전설도 있으니 한두 모금으로 만족하는 게 좋겠다.

  고란사 아래 선착장에서 황포돛배 백마강 유람선이 출발한다. 유람선에 몸을 실으면 배는 강물을 따라 흘러간다. 황포돛을 달았지만 동력선이다. 스피커에서는 백마강에 얽힌 전설과 대중가요 ‘꿈꾸는 백마강’이 흘러나온다.

  “백마강 달밤에~ 물새가 울어~ 잃어버린 옛날이 애달프구나~ 저어라 사공아~ 일엽편주 두둥실~ 낙화암 그늘아래 울어나 보세~”

  고란사 유람선 선착장부터 구드래 유람선 선착장(뱃길 1.5km)까지는 백마강을 따라서 유람선으로 이동한다. 관광객들은 보통 고란사에서 구드래선착장까지 편도로 많이 간다. 이 경우 구드래선착장에서 주차장까지 15분 정도만 걸으면 된다. 


  낙화암은 해진 저녁이나 새벽에도 입장이 가능하다. 만약 부여에서 하룻밤 묵는다면 달밤의 산책이나 아침 산책도 즐길 수 있다. 낙화암 입장료 어른 2,000원, 어린이 1,000원. 주차료는 없다.


  숙식>>  부여읍 쌍북리에 백제관광호텔(041-835-0870), 명진모텔(041-835-0371~2), 맛나뚝배기(041-834-1231), 구교리에 삼정부여유스호스텔(041-835-3101~5) 구드래황토정(041-834-6263) 등이 있다. 구드래나루터 주변에도 구드래돌쌈밥(041-836-9259), 향우정(041-835-0085), 솔내음레스토랑(041-836-0116), 나루터식당(041-835-3155) 등 식당이 많다. 관북리엔 크리스탈모텔(041-835-1717), 백제의집(041-834-1212) 등이 있다.

 

 

 

          

       ▲ 백제 영욕의 역사를 지켜본 정림사지 오층석탑. 단아한 미학의 표본으로 꼽힌다. 

 

 

 정림사지&국립부여박물관

 

 

찬란했던 사비백제의 진수를 만난다

  부여엔 백제 영욕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채 1,400년 동안이나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석탑이 있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이다. 당시 백제의 처절한 마지막 장면을 피눈물 흘리며 지켜봤을 정림사지 오층석탑. 이 탑은 백제탑의 완성품이면서 그 뒤로 백제 땅에 나타나는 여러 탑들의 전범이 됐다.

   그렇지만 1층 몸돌엔 당나라의 소정방이 새겼다는 ‘대당평제국비명(大唐平濟國碑銘, 위대한 당나라가 백제를 평정하고 기념으로 탑에 새긴 글)’이라는 치욕적인 상처를 입고 있다. 다행히 21세기까지 살아남아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았다’는 백제 미학의 상징을 온몸으로 증거하고 있다. 바로 옆엔 정림사지박물관이 있다.

 



                            

 

  정림사지를 나와 동쪽으로 난 길을 하나만 건너면 국립부여박물관이다. 이곳은 백제시대의 유물 1만5,000여 점을 소장하고 있는데 그 중 1,200여 점의 중요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그 가운데에 백제금동대향로가 있다. 문화해설사들도 이 유물의 설명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백제금동대향로는 ‘중국 향로의 형식을 바탕으로 하였으되 조형성이나 회화적인 구도, 크기조차 중국을 뛰어 넘는 탁월한 예술적 감각과 독창성을 발휘하고 있다’는 평을 듣고 있는 작품. 동양인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불교와 신선사상이 잘 드러나 있는 이 향로는 백제가 부여로 도읍을 옮긴 후 정치적으로 안정을 되찾은 7세기 초 백제인들의 정신세계와 예술적 역량이 함축돼 이루어진 백제공예품의 진수인 것이다.

  한편 세계대백제전 기간엔 ‘백제의 기와’ 기획특별전이 진행된다. 이때는 국립부여박물관 유물과 부여 사비시대 유물뿐만 아니라 일본 유물도 특별 전시된다. 입장료 무료, 주차도 무료. 전화 041-830-2330

 

 

남지

무왕 탄생 설화 전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 연못

  부여에서 가장 백제다운 유적지를 꼽으라면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 연못이라는 궁남지(宮南池)를 언급하는 전문가들이 적지 않다. 백제의 뛰어난 미적 감각과 수준 높았던 생활 문화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 1 부여에서 가장 백제다운 유적지로 꼽히는 궁남지. 2 궁남지 포룡정. 백제 무왕의 어머니가 용꿈을 꾸고 무왕을 잉태했다는 설화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삼국사기엔 ‘물을 20여 리나 되는 긴 수로로 끌어들여 주위 물가엔 버드나무를 심었으며 물 속에 섬을 쌓아 방장선산(方丈仙山)을 본떴다’고 기록하고 있다. 백제 사람들은 이것을 ‘뜬 섬’이라고 불렀다. 아쉽게도 삼국사기에 나와 있는 수로와 물가, 섬이 어떤 생김새로 꾸며져 있었는지 현재로서는 전혀 알 길이 없다.

  지금의 궁남지는 1965년에 복원한 것인데, 원래 규모의 3분의 1쯤이라 한다. 우리에게 선화공주와의 사랑으로 잘 알려진 무왕이 ‘큰 연못’에 배를 띄우고 놀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처럼 원래의 궁남지는 뱃놀이를 할 정도로 규모가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궁남지는 사계절 인기 있는 곳이지만, 여름엔 연못을 가득 뒤덮은 연꽃을 구경할 수 있어 좋다. 궁남지엔 백제의 마지막 여름날 백마강으로 몸을 던진 삼천궁녀의 슬픈 넋인 듯한 붉은 홍련이 가장 많다.  연못 가운데의 ‘뜬 섬’엔 포룡정(泡龍亭)이라는 현판이 걸린 정자가 있다. 이는 백제왕의 어머니가 궁남지에 살던 용이 나타나자 의식을 잃은 뒤 무왕을 잉태하게 됐다는 탄생 설화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정자가 있는 뜬 섬은 살짝 하늘로 솟구친 무지개 형태의 나무다리를 건너서 갈 수 있다. 정자에 기대 연못을 바라보면 연못 수면에 무왕과 선화공주의 다정한 모습이 아로새겨진다.

 

  

▲ 궁남지 연꽃. 매년 여름이 되면 궁남지에선 연꽃 축제가 열린다.

 

 

백제왕릉원

사비백제 다스리던 왕과 왕족들이 잠든 ‘능산리고분군’

  부여 궁남지에서 논산 방향인 동쪽으로 3~4km 정도 떨어져 있는 백제왕릉원(사적 제14호). 능산리 산기슭에 있다고 해서 ‘부여능산리고분군’으로 불리는 유적지다. 이곳엔 사비백제를 다스렸던 왕과 왕족들이 묻혀 있다. 538년 부여로 도읍을 옮긴 성왕은 국호를 남부여로 바꿨다. 이때부터 660년 나당 연합군에게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의 120여 년을 사비백제시대라고 한다.

  능역 들머리에 있는 백제고분모형전시관에서 백제의 무덤 형식을 먼저 이해하고 가자. 이곳엔 청룡, 백호, 주작, 현무의 사신도가 그려진 무덤을 모형으로 전시하고 있다. 전시관 옆의 절터도 허투루 보지 말자. 바로 저 유명한 백제금동대향로가 발굴된 능산리사지다. 1993년 이 절터의 건물지 서쪽 한 구덩이에서 백제금동대향로가 출토되면서 백제의 수준 높은 금속공예기술이 널리 알려졌다. 또 절터의 중앙부 목탑 자리에서 출토된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엔 20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어 사리를 봉안한 연대와 공양자를 분명히 알 수 있다. 사리감의 명문(銘文)엔 ‘백제 창왕 13년 (567년)에 정해 공주가 이 절을 지었다’고 적혀 있다.

  백제금동대향로 발굴 비화도 드라마틱하다. 출토지인 능산리절터는 원래 사유지인 논이었다. 능산리고분군을 찾는 관광객들이 늘어나자 부여군에서는 이곳을 주차장으로 쓰려고 매입했다. 박물관 팀이 발굴조사를 시작했고, 다양한 백제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1993년 12월 12일 오후 4시30분, 발굴 작업도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었다. 그런데 절집 공방의 물구덩이라고 추측되던 곳에 있는 잘게 부수어진 기와조각이 한 연구원의 눈길을 끌었다. 그는 그곳을 파내려갔다. 1m 정도 파냈을 때 불에 탄 흔적이 있는 기와, 백제금동불상 방배편이 모습을 드러냈다. 발굴단은 야간 작업이라는 특단의 결정을 내린다. 이윽고 4시간이 지난 오후 8시30분, 백제금동대향로는 1,400여 년이란 긴 잠에서 깨어나 비로소 세상의 빛을 보았다. 보존상태도 완벽했다. 백제금동대향로가 오랜 세월에도 깨끗하게 보존될 수 있었던 이유는 진흙과 범벅돼 진공 상태에서 보관됐기 때문이다. 

  이젠 백제왕릉원을 둘러보자. 7기의 왕릉들은 산기슭에 사이좋게 어울려 모여 있다. 남향이라 그런지 아늑하고 편안한 느낌이다. 1915~1937년 사이에 일본학자가 여러 차례 조사했으나 대부분 도굴돼 유물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왕릉 조성 시기는 사비시대인 6세기 중엽~7세기 중엽으로 보고 있는데, 학자들은 맨 앞줄 가운데 있는 2호분이 부여로 천도한 성왕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다. 편년이 가장 앞서기 때문이다.

  성왕은 태자(위덕왕)가 관산성(충북 옥천)전투에 나섰을 때 이를 격려하기 위해 50여 명의 호위병만을 거느리고 가다가 신라군에게 잡혀 목숨을 잃은 임금. 성왕의 시신에 대한 설은 여럿이다. 그 중에서 신라가 머리를 북청 계단 아래에 묻어 조정 대신들이 밟고 다니게 하였다는 설이 가장 많이 알려져 있다. 결국 성왕의 시신은 온전하지 않았으며, 몸만 고국으로 돌아온 뒤 여기에 묻힌 것이다.

  이런저런 사연을 되새기며 왕릉원을 한 바퀴 돌아서 오는 데 20~30분 정도면 충분하다. 왕릉원 입장료 어른 1,000원, 어린이 400원. 주차는 무료. 041-830-2521

 

 

 

[ 행사 ]
세계 대백제전!

9월18일부터 10월17일까지 30일간 공주·부여에서 펼쳐져

 

 

        

         ▲ 하늘에서 내려다본 백제왕릉원. 맨 앞줄 가운데 있는 2호분이 성왕의 무덤이라

           한다. / 부여군청 제공 

 

 

  2010 세계대백제전은 ‘1,400년 전 대백제의 부활’이라는 주제로 9월 18일(토)부터 10월 17일(일)까지 30일간 백제의 고도인 부여와 공주 등에서 펼쳐진다. 대백제전 대표프로그램 22개와 공주시 프로그램 36개, 부여군 프로그램 34개 등 모두 92개 프로그램이 선을 보이는 초대형 역사문화축제다. 평일의 경우 상설행사 위주로 축제를 운영하고, 관람객이 몰리는 주말과 휴일엔 대표 프로그램을 집중 배치 운영한다.

공주는 금강변 고마나루가 주행사장. 세계역사도시전 및 퍼레이드 교류왕국 등이 펼쳐지는 예술마당과 수상공연장이 자리 잡았다. 고마나루∼연문광장∼공산성∼금강으로 이어지는 구간이 일자형 동선으로 배치되며, 고마나루과 연문광장 사이에 ‘곰두리열차’를 운행한다.

 부여의 주행사장인 백제문화단지에선 개막식과 사비궁의 하루, ‘사비의 꽃’ 영상 등이 펼쳐지고, 백마강변에선 수상공연 ‘사비미르’와 ‘기마군단 행렬’이 이어진다. 백제역사재현단지∼백마강변∼시가지로 이어지는 동선에 백제역사재현단지와 백마강변을 오가는 ‘사비왕궁열차’가 운행된다.
<문의>공주시청 문화관광과 041-840-2817, 부여군청 문화관광과 041-830-2010

 

<출처> 2010. 9 / 월간산 49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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