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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충청남도

부여 백제문화단지, 고도목(古都木) 옛이야기를 품다

by 혜강(惠江) 2010. 9. 11.

부여 백제문화단지

고도목(古都木) 옛이야기를 품다

 

박경일 기자

 

 

 

▲ 부여의 성흥산성에 우람하게 버티고 서서 백제의 옛 땅을 굽어보는 느티나무 거목. 수령은 220년 남짓으로 백제의 역사와 비교하기에는 터무니없지만 나무둥치에 기대서 혼곤한 낮잠에 빠져든다면 꿈속에서 백제의 왕들을 만날 수 있을 듯싶다.

 

 

 

  백제의 옛 수도 부여는 언제나 ‘보는 곳’이 아니라 ‘듣거나 느끼는 곳’일 뿐이었습니다. 곳곳에 흩어져 있는 몇 기의 탑 그리고 박물관에 박제처럼 남아 있는 유물들…. 금동관의 화려함이나 미륵보살반가상의 조형적인 미감, 웃는 얼굴이 그려진 수막새의 천진함. 그런 것들은 박물관의 차가운 유리벽 너머에 갇혀 있을 뿐이었습니다. 정림사지 석탑과 같은 빼어난 백제 탑들도 있긴 하지만, 그것도 벌판에 덩그러니 혼자 서있는 것이어서 황량함을 안겨줄 따름이었습니다.



  부여의 대표적인 관광지 낙화암을 둘러보는 백마강 유람도 기실 ‘백마강 달밤에~’로 시작하는 뽕짝메들리가 겹쳐지면서 정작 백제가 아니라 1970~1980년대 풍경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아무리 ‘패망의 역사’라고는 하지만, 어지간한 감수성이나 상상력이 아니고서는 일반인이 부여에서 ‘백제의 우아한 향기’를 맡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1400여 년이란 가늠할 수 없는 시간의 깊이 때문이기도 하겠고, 신라에 철저하게 짓밟힌 탓이기도 합니다. 백제라면 그 찬란한 문화보다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는 낙화암이나 삼천궁녀 따위를 입에 올리는 후대 사람들의 무관심도 한몫을 했겠지요.



  이런 부여를 여행하는 방법은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옛 백제시대 역사와 유물, 그리고 유적지를 연결해가면서 그 안에 담겨 있는 역사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가는 여행법이야말로 부여를 제대로 보는 방법입니다. 실타래처럼 이어지는 이야기들을 따라가는 여정이 어찌나 흥미진진하던지요. 화려한 유물과 애잔한 역사, 그리고 역사의 간극을 메우는 상상력까지 더해지면 부여만큼 흥미로운 곳도 드물 듯합니다.



  그저 눈에 보이는 것들만 보려 했다면, 부여여행은 심심하고 재미없는 기억으로만 남을 터입니다. 그러나 이제 부여에도 ‘볼 것’들이 생겼습니다. 오는 18일 개막하는 ‘세계대백제전’을 계기로 부여에 백제문화재현단지가 들어섭니다. 규암면 합정리 일원의 100만평 땅에 금을 그어 부여도읍 시절 백제 사비성을 지었고, 당시 사찰과 백제마을 등을 재현했습니다. 여기에 들인 돈만 3117억원. 백제문화단지 전체에 쏟아부은 돈만 6094억원에 달합니다. 옛 도시 하나를 새로 지어낸 셈이지요.



  차분하게 차근차근 옛 문화를 복원하는 대신 한꺼번에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부은 것에서, 어쩐지 고대국가 백제에 대한 문화적인 관심이나 애정보다 관광객 유치로 발생할 이익을 쫓는 자본의 셈법이 먼저 읽히기도 합니다. 역사 자료부족으로 ‘복원’이 아닌 ‘재현’의 공간이 가진 한계는 역시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백제문화재현단지에 세워진 웅장한 사비성의 모습이나 능사의 오층목탑의 위용은 더없이 빼어났습니다.



  이로써 부여는 박물관의 유물이나 애잔한 이야기 말고도 풍성한 볼거리를 갖게 된 셈입니다. 부여 땅에 풍성한 볼거리가 들어선 지금, 괜한 걱정이 앞섭니다. 테마파크를 방불케 하는 화려한 볼 것들에 눈이 팔려 혹여 이야기와 역사읽기의 즐거움을 포기하지는 않을까 싶은 탓이지요.

  사실 새로 지어져 반짝반짝 윤이 나는 백제문화재현단지를 둘러보고, 대백제전 기간에 펼쳐지는 대규모 공연만 봐도 썩 괜찮은 여정이 될 듯싶지만, 애잔한 역사 속에서 1400년 전의 자취를 따라 낡고 오래된 것을 찾아가는 여정의 감동과 어찌 견줄 수 있겠습니까. ‘마음 여행’과 ‘보는 여행’. 이 두 여정이 한데 어우러질 때 부여로 떠나는 ‘백제여행’은 더 깊어지고 즐거워질 것입니다.

 

 

 
한편의 대하 드라마 '백제'
 
 

▲ 부여의 궁남지 연못에 뭉게구름이 떴다. 백제 별궁의 연못이었던 궁남지에서는 1400여년 전 백제인이 찍고 간 발자국이 발견됐다. 백제문화재현단지 내의 문화역사관에는 그 발자국 모형을 자신의 발에 겹쳐볼 수 있도록 해놓았다.

 
 
▲ 백제문화재현단지. 높이 솟은 것이 능사의 오층목탑이다.
 
 
▲ 고란사 아래 백마강에 떠 있는 황포돛배.
 
 
 

# 성흥산성에서 옛 백제의 땅을 굽어보다

  1400년 전 멸망한 백제의 땅. 부여는 다 사라지고 ‘없는 것’을 보아야 하는 곳이다. 어디서부터 여행을 시작해야 좋을까. 부여 땅에 당도하면 막막하다. 대개 관광안내도를 짚어가며 낙화암에서 유람선을 타고 부소산성이나 궁남지, 부여박물관 같은 이름난 관광지를 두서없이 돌아보지만 이런 식이라면 부여의 매력을 제대로 느낄 수 없다. 몇 안되는 유적을 감상하거나 경치만 보는 것으로 만족한다면 그래도 상관없겠지만, 곳곳에 백제의 화려한 역사가 스며 있는 부여에서 이런 식의 여정을 택하는 것이야말로 진정 뜯어말리고 싶은 일이다.



  부여에서는 ‘백제의 시간’을 따라가는 여정이 맞춤하다. 부여로의 여행은 백제가 수도를 웅진(공주)에서 사비(부여)로 옮겨가는 출발지점에서 시작하자. 그렇다면 임천면의 성흥산성이 첫 목적지로 적격이다. 왜 하필 성흥산성일까. 궁금증을 풀려면 삼국사기의 다음 대목을 들춰보면 된다. ‘백제 왕(동성왕)이 서울 서쪽의 사비(부여)벌판에서 전렵(사냥)을 했다.’ 야트막한 야산이 대부분인 부여 땅에 무슨 사냥할 만한 동물이 있었을까 싶지만, 동성왕은 도합 세 번이나 부여로 사냥을 나갔다. 그 무렵 웅진에서 괴이한 일이 끊이지 않았다. 도성 안에서 노파가 여우로 변해 사라지는가 하면, 산중에서 두 마리의 호랑이가 싸웠다. 늦서리가 내려 보리가 다 얼어죽었고, 5월부터 가을까지 비가 한 방울도 내리지 않았다.



  잇따른 불길한 징조로 웅진성의 민심이 동요할 무렵, 동성왕이 부여로 사냥을 내려간 것을 두고 후세 사가들은 ‘수도를 부여로 옮기고자 모색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해독한다. 사냥을 다녀온 뒤 동성왕은 부여 땅에 성흥산성(당시 가림성)을 쌓고, 지금으로 치자면 청와대 경호실장인 백가에게 성을 지킬 것을 명했다. 그러나 중앙정치무대에서 하루 아침에 지방성주로 밀려난 백가는 ‘몸이 아프다’며 버티다가 강제 전출됐다. 이때 원한을 품은 백가는 자객을 시켜 동성왕을 살해하고 만다.



  성흥산성에 올라보면 탄성이 절로 터진다. 성흥산은 해발고도는 250m에 불과하지만 옛 백제 땅의 부드러운 구릉들을 죄다 발아래로 굽어본다. 산성에 오르면 눈길을 붙잡는 것이 바로 우람한 느티나무다. 수형이 워낙 웅장한데다 주변이 암반이라 홀로 우뚝 서있는 기품이 장중하다. 느티나무 수령은 220년. 백제 역사와 비교하기에는 터무니없지만 우람한 나무둥치에 기대서 옛 백제 땅을 굽어보는 맛은 그야말로 일품이다.

  성흥산성을 찾았다면 산성 아래 절집 대조사(大鳥寺)를 놓쳐서는 안된다. 대조사에는 황금새의 전설이 전해내려온다. 이 절터에서 참선 중 잠이 들었다가 꿈속에 커다란 황금새 한 마리가 절터에서 날개를 젓는 모습을 봤다는 노승의 얘기를 듣고 성왕은 ‘사비성 천도의 시기가 왔다’고 판단했단다. 우람한 미륵불이 서있는 대조사에는 전설 속의 황금새는 없지만, 대신 난데없이 사슴 한 마리가 있다. 주지스님이 새끼 때 얻어다 기른 것이라는데, 길게 목줄을 매어 놓았지만 줄을 풀어도 절집을 떠나지 않는단다. 사람을 보면 피하지 않고 슬금슬금 다가온다.




# 능산리 고분군서 백제문화재현단지로 이어지는 길



  백제의 유물들 중에서 가장 화려한 아름다움을 뽐내는 것이 금동대향로다. 역동적인 용이 떠받친 몸체에는 삼신산을 비롯해 74개의 봉우리와 봉황, 호랑이, 사슴 등 39마리의 동물, 악사와 신선 등 16명의 인물, 그리고 6그루의 나무와 12개의 바위, 시냇물 등이 새겨져 있다. 삼라만상이 하나의 향로에 있다. 한마디로 걸작 중의 걸작인 이 향로는 ‘능사’에서 나왔다. 능사란 과연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부여읍 능산리. 일곱 개의 능이 모여 있다고 해서 능산리란 지명이 붙여진 곳이다. 왕족의 능이라 짐작은 되지만, 누구의 능인지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이미 도굴꾼들의 손을 탄 능에서는 이렇다할 유물이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1993년 능 옆에 바짝 붙은 절터에서 금동대향로가 나왔다. 절집 이름은 알 도리가 없다. 그저 능 옆에 있다고 해서 ‘능산리사지’라고 불렸고, 이를 줄여 ‘능사(陵寺)’라고도 불렸다.



  능은 누가 언제 지은 것일까. 비밀은 금동대향로가 나온 지 2년 뒤인 1995년에야 풀렸다. 목탑터에서 나온 석조유물(사리감)에 새겨진 글귀로 이 절이 백제 창왕이 아버지 성왕을 위해 지은 것임이 확인됐다. 그 시대로 되돌아가보자. 당시 백제 성왕은 신라와 손잡고 북벌에 나서 한성백제 옛 땅을 되찾기에 이르렀지만, 진흥왕의 배신으로 수복한 땅을 송두리째 빼앗겼다. 이때 성왕의 아들 여창(훗날 창왕)이 치를 떨며 신라정벌에 나선다. 원로대신들은 “때가 아니다”며 말렸지만, 창왕은 백제 출전을 고집했다. 결국 창왕은 신라군에 밀려 관산성에서 포위당하는 신세가 된다. 이에 성왕은 아들을 격려하기 위해 관산성으로 향했고, 그 길에서 매복 중이던 신라군에 붙잡혀 목이 잘린다. 백제는 치욕적인 대패를 당한다.

  자신이 고집한 전쟁터에서 아버지 성왕이 죽음을 당했으니, 창왕은 얼마나 참담했을까. 두고두고 자책하던 창왕은 출가해 스님이 되고자 했으나 신하들이 말려 고집을 꺾기도 했다. 창왕이 아버지를 위해 탑을 세우고 절을 지었으니 그곳이 바로 능사다.



  능사에서 나온 금동대향로는 부여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백제의 최고 유물이니 국립중앙박물관에 있을 것 같지만, 중앙박물관 개관 때 1개월쯤 서울로 나들이 간 것을 빼고는 출토 이후 줄곧 부여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그 화려한 향로 앞에서 어느 누가 탄성을 지르지 않을 수 있을까. 아름다움 속에 엿보이는 처연함. 창왕은 아마도 이 향로 앞에서 자신의 잘못으로 처참한 최후를 맞은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에 흐느끼며 향을 피워 올리지 않았을까.

# 왕흥사지에서 백마강에 배를 띄운 왕과 만나다

  부여에서 이곳은 좀 낯설 듯싶다. 왕흥사지. 백마강을 사이에 둔 낙화암 건너편 절터다. 3년 전 왕흥사지에서 백제고대사 발굴에 또 하나의 이정표가 될만한 유물이 출토됐다. 절터에서는 사리병, 사리함과 함께 지금도 만들 수 없을 정도로 정밀한 극세공품이 쏟아져 나왔다. 사리함에 새겨진 명문을 해독하니 창왕이 죽은 세 아들을 위해 지은 절이다.

  왕흥사지에서 발견된 사리병은 그야말로 화려하기 이를 데 없다. 동으로 만든 사리병 안에 은제 사리병이, 은제 사리병 안에 금제 사리병이 들어있다. 사리병에 새겨진 명문에는 ‘577년 창왕이 세 왕자를 위해 사리 2과를 묻었는데 신의 조화로 3과로 변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사리병에는 아무 것도 담겨 있지 않았다. 한번도 꺼낸 흔적이 없는 데도 사리는 없었다. 사리는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애초에 넣지 않았던 것일까, 아니면 2과의 사리가 3과가 됐던 것처럼 신의 조화로 3과의 사리가 다 없어진 것일까.

  이즈음도 발굴작업이 계속되고 있는 왕흥사지에 서면 사리보다는 1400여년 전 성대하게 펼쳐졌던 사리봉안식 광경이 떠오른다. 백제 왕이 수많은 신하를 이끌고 함께 배를 타고 백마강을 건너 절에 갔다는 것은 삼국유사 기록에 남아 있다. 부소산성에서 배를 타고 강을 건너 절에 들어와 향을 피우던 백제의 왕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1400년이란 가늠할 수 없는 세월을 지나 건너편의 낙화암 아래 백마강에는 황포유람선이 관광객을 싣고 미끄러지고 있다.

  왕흥사지의 사리병도 부여박물관에 있다. 그 정교함과 기법이 어찌나 현대적인지 백제시대의 것이란 게 도무지 믿기지 않을 정도다. 사리병에 가려 있지만 함께 왕흥사에서 출토된 다른 유물들도 감탄을 자아낸다. 그중 압권이 연꽃 모양의 운모판이다. 얇디 얇은 판의 두께는 0.8㎜다. 어찌 이렇게 정교하게 재단할 수 있었을까.

# 퍼즐맞추기로 1400년 전의 시간을 건너가다

  역사와 유물들을 쫓다가 뒤로 미뤄지고 말았지만, 오는 18일 부여와 공주, 논산 일대에서 개막하는 대백제전을 앞두고 부여에 새로 지은 백제문화재현단지도 여행 목적지로 빼놓을 수 없다. 백제의 궁궐인 사비성이 재현됐고, 백제의 절인 능사가 새로 지어져 있다.



  백제시대의 건축물은 남아 있는 것도 없거니와 기록도 전혀 없다. 그렇다고 재현 건물들이 그저 상상력으로만 지은 것은 아니다. 백제건축기술을 받아들여 지었다는 일본의 사찰을 돌며 건축물의 형태를 잡고, 출토된 건축물 파편을 한 조각씩 복원한 뒤 그와 비례한 형태를 도출해 건물을 지어가는 식이다. 한마디로 ‘퍼즐’을 맞춰가는 식으로 복원해낸 것이다. ‘이야기’만으로는 아쉬운 백제의 원형을 ‘보도록’ 해준다는 점에서 탁월하다.

  그러나 부여 여행에서 이곳을 마지막 목적지로 삼는 것이 더 좋겠다. 부여를 돌면서 박물관 유물에서 보았던, 석탑에서 보았던 문양이나 형태를 기억해두었다가 이곳에서 맞춰보는 재미가 쏠쏠하기 때문이다.

  백제문화재현단지에서는 건축물만 보지 말고 백제문화역사관을 꼭 들러보자. 백제에 대한 흥미로운 설명들로 가득하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이 궁남지에서 발견됐다는 백제인의 발자국이다. 길이 20㎝, 너비 10㎝의 백제인 발자국이 40㎝ 정도 보폭으로 일정하게 찍혀 있다. 발자국을 덮은 유리 위에 조심스럽게 발을 맞대보았다. 1400년 전의 그가 걸었던 것처럼….

 
   
“백마강 풍경, 예나 지금이나 별 다를 게 없어”
유람선 선장 이헌영씨

 

  지금이야 위세가 전 같지 않지만 가볼 만한 여행목적지가 통틀어도 몇 곳 안되던 시절에 부여는 최고의 여행지 중 한 곳이었다. 당시 부여 여행이라면 곧 ‘백마강 유람선’이었다.



  “40여년 전까지만 해도 장대를 젓는 배나 돛단배가 다녔어요. 유람선에다가 새우젓을 싣고 금강을 거슬러 강경까지 올라가는 돛배들이 한데 어우러지면 장관을 이뤘지요.”



  백마강 유람선 선장 이헌영(60·사진)씨는 어릴 때 백마강에 돛배들이 떠있던 시절을 마치 어제 일처럼 기억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씨는 대를 이어 백마강 유람선의 마스트를 잡고 있다. 학교 다닐 때도 배를 저어 강 건너 학교를 다녔다. 그러나 지금 백마강에는 낡은 동력선과 황포돛을 단 24t짜리 신형 유람선을 합쳐 24척의 배가 뜬다. 물론 배는 엔진으로 움직이고 돛은 모양새일 뿐이다. 돛배가 뜨던 시절과 지금의 백마강 풍경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하나도 없어요. 사자루에서 낙화암까지 올라가는 시멘트계단이 철거된 것 말고는 다 똑같아요. 모르긴 해도 백제 때도 지금과 별 다를 게 없었을 것 같아요.”



  달라진 것은 유람선 풍경이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유람선에 오르면 ‘꿈꾸는 백마강’ 같은 트로트 노래가 구성지게 울려퍼졌고, 배에 탄 이들은 한데 어우러져 춤을 췄다. 그때만 해도 대부분 단체 관광객들이라 마이크를 잡고 백마강에 얽힌 전설 몇 가지만 풀어내도 탄성을 지르거나 혀를 차곤 했다. 그러나 지금은 유적지 안내방송을 내보내도 귀를 기울이는 손님이 없어 ‘영 재미가 없다’고 한다.



  이씨는 오는 18일 세계대백제전이 개막하면 관광객들이 밀려들 것이라며 기대감을 감추지 않았다. 그러나 관광단지가 생기고 눈을 뺏는 새로운 곳들이 자꾸 생겨나는 것이 한편으로 걱정스럽기도 하다. 자꾸 관광지들이 만들어지면 낡은 흑백사진 같은 유람선을 얼마나 타줄까 싶은 생각 때문이다.



  그는 백마강에 오면 건조하는 데 4억원이나 들었다는 큰 황포돛배보다 촌스럽긴 해도, 작은 발동선을 타보라고 권했다. “부여에서는 깔끔하고 세련된 것보다 낡고 오래되고 애잔한 것이 더 어울린다”는 게 이씨의 지론이었다.

 

 

 
 
<출처> 2010. 9. 8 / 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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