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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경북. 울산

경북 봉화 오지기행, 산도 깊고, 삶도 깊고… 인정은 더 깊다

by 혜강(惠江) 2010. 5. 27.

경북 봉화 오지기행

(명호면·재산면)

산도 깊고, 삶도 깊고… 인정은 더 깊다

 

박 경 일 기자

 

 

 

▲ 경북 봉화의 청량산 벼랑을 끼고 올라앉은 두들마을. 어찌 이리 깊은 곳에 마을이 들어섰을까 싶은 곳이다. 아침 햇살이 퍼질 무렵, 산자락 아래에서 안개가 피어올라 구름처럼 마을에 걸렸다.

 

  산간 내륙의 벽촌을 뜻하는 말인 ‘오지(奧地)’. 깊은 산중의 거칠고 황량한 땅을 지칭하는 말이지만, 뜻밖에도 한자를 풀자면 ‘아랫목 오(奧)’자를 씁니다. 아랫목 말고도 ‘그윽하다’
거나 ‘따스하다’는 뜻도 있더군요. 산간 오지의 깊은 마을들을 찾아나선 길에서 ‘오(奧)’자가 담고 있는 뜻에 무릎이 쳐졌습니다. 그렇더군요. 산은 어둑하게 깊고, 길도 거칠었지만 그 땅에 기대어 사는 이들의 삶은 어찌도 그리 따뜻하던지요.

  경북 봉화. 웬만한 곳들은 사통팔달로 아스팔트 도로가 이어지고, 외딴 소읍에도 노래방이며 PC방이 들어서는 세상. ‘요즘 세상에 어디 오지가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건 봉화의 깊은 땅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능선 너머 능선이 첩첩이 겹쳐지는 봉화에는 날것 그대로의 자연 속에 파묻힌 오지 마을들이 여전히 살아있습니다.

  봉화의 오지는 각박한 인심이나 셈부터 앞서는 도회지의 생활방식이 찾아들기에는 너무도 멀고 깊어서, 아직 헝클어버리지 못한 순박한 한세대 쯤 전의 삶이 있습니다. 부러 불편함을 찾아드는 이들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오지를 지키고 있는, 아니 오지를 떠나지 못하고 있는 이들은 거개가 그 땅에 뿌리를 내리고 누대를 살아온 사람들이랍니다. 그곳에 사는 이들은 더러 ‘세상 물정에 어두워서’라고 했고, 누구는 ‘세상에 나가면 죽는 줄 알았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사실 그들이 그 땅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고작 두서너 집들이 서로의 삶에서 만들어내는 아랫목과 같은 훈훈함 때문이겠지요.

  봉화에서 깊기로 이름난 명호면과 재산면 일대의 오지 마을을 찾아가봤습니다. 그곳으로 가는 여정은 내내 험하고 불편했지만, 행락과 나들이로는 얻을 수 없는 진한 감동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구불구불 가파른 산길을 올라 깎아지른 산중턱에 위태위태하게 들어선 두들마을에 구름이 걸려있는 풍광도 좋았지만, 그보다는 평생을 산중에서 살아온 청각장애인 노부부와 나눈 ‘따옴표’ 없는 대화와 초근목피로 연명했던 지긋지긋한 가난을 얘기하며 눈시울을 붉히던 합강마을 외딴집 부부의 사연이 더 마음을 덥혀주었습니다.

  여기 소개하는 오지들은 모두 승용차로는 당도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곳들입니다. 때로는 차를 두고 한참을 걸어야 하고, 물을 건너거나 숲길을 더듬어 걸어 들어가야 하는 곳입니다. 굳이 ‘찾아가보라’고 권유하지 않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다만 도회지의 삶이 팍팍하다고 느껴질 때,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치명상을 입었을 때, 간혹 흐려진 샛길이나 숨어있는 산중의 마을들을 찾아나서는 것이 때로는 훌륭한 치유가 될 수 있음을 알려주고 싶을 따름입니다.
 
 
 
하늘 아래 첫 동네 ‘사람 풍경’ 발길 붙드네
 
 
 

▲ 경북 봉화군의 명호면, 재산면 일대는 첩첩 능선의 산이 깊어 발길이 닿지 않는 낙동강변의 오지 마을들이 곳곳에 있다. 강변의 마을로 향하는 길은 거개가 험하고 거친 외길이다.

 

 

# 청량산 벼랑에서 낙동강을 굽어보는 오지 두들마을에 오르다

 

‘경북 봉화군 청량산 장인봉의 턱밑. 구름을 발 아래로 깔고 있는 깊은 산중에 두들마을이 있다. 청량산을 끼고 있는 낙동강변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잡은 오지 마을이다. 마을이래야 통틀어 네댓 가구가 사는 곳. 비탈진 길 끝에 회화나무 한 그루와 녹슨 함석지붕을 이은 집 몇 채. 이른 아침, 청량산 골짜기마다 피어오르는 안개가 마을을 촉촉하게 빨아들였다가 토해놓는다.

두들마을의 해발고도는 500m 남짓. 청량산 도립공원의 아스팔트 포장도로에서 찾아가는 거리도 그다지 멀지 않다. 그러나 두들마을의 ‘깊음’을 물리적인 거리나 높이로만 이야기할 수는 없다. 시멘트 도로가 난 이즈음에도 길은 뱀처럼 구불거리고 코가 땅에 닿을 듯 가파르지만, 길을 놓기 전에는 깎아지른 벼랑길을 네 발로 아슬아슬 타넘어야 마을에 당도할 수 있었다.

궁벽한 마을에서의 삶이란 오직 몸 하나로 지켜내야 하는 법. 두들마을 사람들은 산을 타고 넘으며 약초와 나물을 캐고, 비탈밭을 개간하면서 누대에 걸쳐 터전을 지켜왔다. 지금은 경작이 중단되고 그 대신 어린 묘목이 심어졌지만, 낭떠러지처럼 엄청나게 경사진 비탈밭의 흔적을 앞에 두면 그 밭에 바쳤을 마을 사람들의 노동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절로 숙연해진다.

두들마을에는 한때 대추농사가 성했다고 한다. 농사야 어찌어찌 짓는다고 하지만, 정작 난관은 대추를 내다 파는 것이었다. 산자락의 대추를 털어 지게에 지고 위태위태한 벼랑을 지나 손바닥만 한 마당에다 널고, 다 말린 대추를 다시 지게에 지고 험한 산길을 내려가 청량산 입구의 광석나루터까지 옮겼다. 이런 지게질을 하루에도 수백번 반복해야 했다. 그렇게 대추 판 돈으로 대처에 나간 자식들 학비를 댔다.

두들마을을 찾아간 날 주민들이 모두 산에 들었는지, 마을엔 정적만 감돌았다. 그러나 듣지 않는다고 모를까. 빨래가 내걸린 누추한 마을을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오지 마을을 떠나지 못한 이들의 고되지만 정직한 삶과 소박한 살림살이의 온기가 느껴진다. 이런 이야기가 없더라도 어떨까. 그저 폴짝 건너뛰면 맞은편 산자락에 닿을 것 같은 깎아지른 벼랑에서는 자연과 집이 어우러진 풍경만으로도 발길을 붙잡는다.

 

# 청량산 한복판 천애수골의 깊은 산중에서 만난 부부

난감했다. 도대체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가야 할까. 재산면 남면리에서 험한 비포장길을 따라 들어간 길 끝의 깊디깊은 산골마을 천애수골. 그 골짜기에는 세 가구가 산다. 그 중에서도 가장 깊은 골에 심원보(69)·임경자(62)씨 부부의 허름한 슬레이트 집이 있다. 마을 초입에서 경운기를 몰며 환한 얼굴로 손을 흔들어줬던 심씨 부부는 놀랍게도 청각장애인이었다. 단 한마디도 듣거나 말하지 못했다. 한글을 깨치지 못했으니 필담도 불가능했다. 수화조차 아예 배우지 못했다.

나이 하나를 묻는 데도 한참이 걸렸다. 주민등록증을 꺼내보이고 심씨의 주머니를 뒤지는 시늉을 하자 그제서야 주민등록증을 주섬주섬 꺼내보여줬다. 백지 한장을 꺼내놓고 서툰 그림을 그려가면서 ‘말 없는 인터뷰’가 시작됐다. 의사 소통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지만, 부부는 시루떡과 냉수를 내놓고 마주앉은 내내 환하게 웃었다.

심씨는 초등학교에 다니던 무렵 이곳 천애수골로 들어와 평생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고 했다. 두툼하고 거북등처럼 갈라진 손에서 거친 산자락에서의 농사일이 얼마나 고된 것인지 절로 느껴졌다. 이웃들은 꼭두새벽부터 밤늦도록 밭에서 사는 심씨 부부의 부지런함을 ‘초인적’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불편한 몸으로 2남3녀를 키워 대처로 내보냈던 것은 이런 고된 노동으로 가능했으리라.

심씨는 임씨와의 결혼이 재혼이었다. 전 부인과는 사별했다. 그 사연이 가슴 아프다. 18년 전쯤 심씨는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아내와 경운기를 타고 읍내에 장을 보러 갔단다. 전 부인 역시 청각장애인이었다. 거친 비포장길을 달리던 경운기에서 아내가 떨어졌지만, 소리를 들을 수 없는 심씨는 혼자 집에 돌아온 뒤에야 아내가 없어졌음을 알고 온 길을 되짚었다. 경운기에서 떨어진 아내는 심한 골절상을 입었고, 치료비를 대기 위해 기르던 소와 집, 밭까지 죄다 팔았지만 끝내 아내는 세상을 떴다.

농사 지을 땅까지 다 판 심씨는 고향을 뜰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강원 태백에서 산불감시원 일을 하며 10여년을 보냈지만 고향땅을 잊지 못해 7년 전쯤 자전거를 타고 고향을 찾아들었다. 태백의 배추밭에서 만났다는 새 부인 임씨와 함께였다. 천애수골을 지키고 있던 이웃의 도움으로 심씨는 옛 집터에 새로 집을 올리고 남의 땅을 부치면서 다시 고향에서의 삶을 지켜가고 있는 중이다.

심씨 부부와 이야기를 해가면서 이들끼리만 통하는 수화를 익혔다. 가령 주먹을 쥐어 머리 뒤로 갖다대면 그건 ‘할머니’를 뜻하는 것이었다. 쪽찐머리를 나타내는 것이리라. 턱 아래 수염을 쓰다듬는 시늉을 하면 세종대왕이 그려진 1만원권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수염을 쓰다듬다가 한 손으로 다른 손을 탁 내리치면, 그건 1만원의 절반인 5000원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농사일에는 이런 시늉도 필요없었다. 고추밭에 나선 심씨 부부는 신기하게도 그저 눈빛만으로도 서로가 필요한 것들을 딱딱 알아냈다.

 

# 도시를 떠나 귀농한 부부의 산촌 정착기

천애수골에는 심씨 부부 말고도 1년 전쯤 이곳에 터를 잡은 한현택(67)·김명희(60)씨 부부의 집도 있다. 젊어서 은행일을 했던 한씨는 명예퇴직후 충남 청양에 귀농해 12년 동안 농사를 짓다가 지난해 이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노후를 보낼 곳을 찾아 전국을 안 다녀본 곳이 없을 정도로 돌아보다가 이곳 천애수골을 택했다. 한씨가 안정된 직장을 마다하고 귀농을 결심한 것은 도회지의 삭막한 생활에 대한 염증 때문이었다.

한씨는 “도회지에서는 촘촘히 집과 집이 처마를 맞대고 있지만, 정작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지 않느냐”며 “여기는 깊은 산중에 몇 채 안 되는 집들이 띄엄띄엄 들어서 있긴 하지만 정서적인 가까움으로 말하자면 도회지에 댈 게 아니다”고 말했다.

한씨 부부는 텃밭에 도라지와 삼백초, 둥굴레, 곰보배추 등 약초를 심어 기르고 있다. 부부가 모두 약초에 관심이 있어서 이렇게 거둔 약초로 효소를 만든다. 약초 농사는 돈벌이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내 몸을 생각하고 주위 사람을 위해서 하는 것이다. 지금껏 이렇게 거둔 약초나 효소를 돈을 받고 판 적은 없고, 앞으로도 팔 생각이 없다. 다만 이들은 자신들의 약초나 효소가 아는 이들의 건강에 소용이 된다면 그보다 더 기쁜 일이 없겠다고 했다.

10여년 동안의 귀농생활에 이은 산촌마을로의 이주. “그러면 이제 행복하시냐”고 물었더니 한씨 부부는 활짝 웃으며 “이 정도면 됐다”고 했다. 한씨 부부는 요즘 뻐꾸기 소리에 잠이 깬다고 했다. 매일 새벽이면 집앞의 가까운 산자락에 깃들여 우는 뻐꾸기 소리와 그 뒤를 잇는 산새 소리로 아침을 시작한다는 것이다. 부인 김씨는 “계곡 아래에서 바람이 밀려올라오면 숲에서 파도소리가 난다”며 “마당에 나와 앉아 그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했다. 한씨는 “이렇듯 자연의 시계 속에서 살아가는 호사스러운 삶에 더 무엇을 바라겠느냐”고 했다.

천애수골의 나머지 한 집은 보덕암이란 토굴로 무학 스님이 기거하고 있다. 20여년 전쯤 이곳에 터를 잡았는데, 다른 계절에는 사찰에서 기거하거나 만행을 하다가 해마다 동안거때면 이곳에 들어 겨울을 난다고 했다.

 

# 집 한채가 한 마을이 되는 낙동강변의 합강마을이야기

낙동강이 굽어 흘러가는 명호면 삼동리 일대는 강으로 내려서는 길이 아예 없는 구간이 많다. 워낙 산이 깊은데다 곳곳에 소수력발전소가 들어서면서 길이 끊어진 탓이다. 이 일대에서 가장 깊은 곳이 바로 합강마을이다. 삼동2리 아래황새마을에서 거칠고 급한 비포장길을 따라 강쪽으로 들어서면 내리꽂듯 이어진 길 끝에 합강마을이 있다. 태백에서 흘러드는 낙동강의 본류와 재산천의 물길이 만나 합류하는 곳이라 합강마을이란 이름이 붙었다. 집 앞의 강은 바닥이 훤히 비칠 정도로 맑았다. 그 맑은 여울을 따라 물소리가 주변을 가득 채웠다.

합강마을은 예전에는 10여채의 집들이 있었지만, 지금은 김수동(70)·유내화(62)씨 부부가 사는 집 한채뿐이다. 달랑 한 집이 마을 이름을 갖고 있는 셈이다. 김씨는 6·25전쟁 당시 외갓집이 있던 이곳에 들어온 후, 단 한번도 마을을 떠나본 적이 없다. 김씨는 젊은 시절 이 마을에서의 기억은 배고팠던 기억밖에는 없다고 했다. 변변한 농토조차 없었던 김씨의 가족은 겨울이면 솔껍데기나 칡뿌리를 캐서 연명했다. 그나마도 먹을 것을 구하려면 잠시도 쉬지 않고 몸을 놀려야 했다. 진저리치도록 가난했던 시절이었다. 젊은 시절에는 고향을 떠나고 싶었지만, 챙겨갈 먹을 것이 없어 굶어죽겠다 싶어 집을 나서지 못했다는 농담 같은 이야기를 하다가 김씨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렇게 지독한 가난 속에서 김씨는 6남매를 길러냈다. 아이들은 산 하나를 넘어 마을의 학교에 다녀오면 코피를 터뜨리기 일쑤였다. 그도 그럴 것이 등하굣길이 웬만한 등산 종주코스를 방불케 할 정도니…. 그러나 김씨는 이제 이곳을 떠날 생각이 없다. 벌통이나 놓고, 가끔 천렵도 하면서 제 먹을 고추며 옥수수 따위를 심어 거두면서 보내는 시간들이 그렇게 편안할 수 없다. 몇년전 딸네 집에서 1년간 기거하며 서울살이를 해봤다는 부인 유씨도 “도회지는 당최 어지럽고 인심이 야박해서 살 곳이 못된다”며 “나가면 죽는 줄 알아서 못나갔던 시절도 있었지만, 지금은 서울의 몇억원 한다는 큰 집을 줘도 안 바꾼다”고 했다.


가는 길

두들마을은 청량산 도립공원 입구의 옛 매표소에서 청량사쪽으로 오르다가 하청량 못미쳐 왼쪽 산자락을 타고 오르는 시멘트도로를 따라 올라가면 된다. 차로 들 수는 있지만, 워낙 길이 가파른데다 굽어있어 걸어오르는 편이 더 낫다. 천애수골은 청량산 동쪽의 재산면 남면리 남면분교 폐교 자리를 끼고 드는 시멘트농로를 따라 산길로 접어들어가면 된다. 임도를 따라가다보면 삼거리가 나오는데 왼쪽으로 접어들면 천애수골이다. 이쪽도 길이 험해 사륜구동 차량도 힘겹다. 합강마을은 명호면소재지에서 35번 국도를 따라 현동 방면으로 향하다가 삼동슈퍼 못미쳐 합강 이정표를 보고 따라 들어가면 된다. 강변으로 내려서는 길이 워낙 가팔라서 아래황새마을에 차량을 놓고 걸어들어가는 편이 낫다.

 

 

 

<출처> 2010. 5. 26 /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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