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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경북. 울산

경북 예천, 암반위 절묘히 앉은 정자 ‘산수화’가 되다.

by 혜강(惠江) 2010. 6. 30.

 

경북 예천

 

암반위 절묘히 앉은 정자 ‘산수화’가 되다

 

 

예천 = 글·사진 박경일기자

 

 

 

▲ 물굽이가 휘감아 도는 초간정을 건너편에서 올려다보면 정자가 깃들 자리를 발견해낸 이의 눈썰미와 그 정자가 들어서면서 비로소 완성된 풍경을 대할 수 있다. 정자와 풍경은 마치 딱맞는 조각 퍼즐을 끼워넣은 것처럼 기가 막히게 어우러진다

 

 

 곧 장마입니다. 남쪽에 머물고 있는 장마전선이 슬금슬금 올라오면 지루한 장마가 시작될 터입니다.  추적추적 내리는 장맛비는 여행자의 발을 묶겠지만, 어떤 곳에서는 비가 오히려 여행의 운치를 더해주기도 합니다. 비가 내리는 날, 오래된 정자나 고택 앞에 서면 사위는 호젓해지고, 고택의 기둥이며 처마가 더 선명해지고 뚜렷해집니다.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낙수소리와 호박잎에 듣는 빗소리. 고택의 마당에 타탁타탁 비가 떨어지면 코 끝을 스치는 흙냄새….

  그 정취를 찾아갑니다. 비가 내리는 날에는 뭐니뭐니해도 ‘구경’이 최고입니다. 경북 예천에는 구경거리들이 도처에 있습니다. 그중 첫손으로 꼽을 만한 것이 황홀하리만치 아름다운 풍류를 지닌 정자입니다. 

 

  먼저 용문면 죽림리의 초간정. 400여년 전에 세워진 여섯칸짜리 정자는 물이 휘돌아가는 암반 위에 절묘하게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초간정은 독특하게도 정자 안에 들어서 밖의 풍경을 내다보는 것보다, 건너편 바위에 걸터앉아 정자를 바라보는 맛이 10배쯤 훨씬 더 좋습니다.

 

  물굽이는 짧고, 풍광의 규모도 작긴 하지만 그윽한 산수와 정자가 한데 어우러져 펼쳐보이는 아름다움은 강렬합니다. 평범하고 밋밋하던 물굽이가 굽이치면서 바위를 돌아나가는 짧은 구간에 이토록 딱맞는 퍼즐조각처럼 그림같은 정자를 들여놓은 이의 눈썰미에 감탄할 따름입니다.

 

  너른 백사장이 펼쳐진 내성천변의 정자인 선몽대는 초간정과는 반대로 안에 들어 밖을 내다보는 맛이 각별한 곳입니다.  툇마루에 나앉으면 내성천 물길과 십리 백사장이 정자 안으로 가득 밀려듭니다. 그뿐일까요. 선몽대로 드는 천변 길은 먹빛 짙은 산수화 속으로 드는 듯합니다. 물가에는 몇백년의 시간을 건너왔을 소나무, 은행나무, 버드나무,  향나무 등의 노거수들이 아름다운 숲을 이루고 있습니다. 노송 그늘에 앉으면 청량한 솔바람이 맑고 물도 맑아, 마음까지 순하게 맑아집니다.

 

  또 한 곳, 예천의 정자로 초간정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병암정을 어찌 빼놓을 수 있을까요. 정자가 담아온 시간이 110여년 남짓에 불과한데다 근래 새로 손을 봤는지 정자에서 느껴지는 시간의 깊이가 묵직하지는 않지만, 병풍처럼 펼쳐진 우람한 바위 위에 올려지은 정자와 그 아래 수련이 피어난 연못에 석가산을 두고 정원으로 다듬어낸 정취가 그윽한 곳입니다. 높은 바위 위에 정자를 얹고 그 아래 연못을 둔 모습은 다른 어떤 곳에서도 본 적이 없는 창의적인 공간입니다. 정자 말고도 예천에는 유연하게 휘어진 돌담길과 고택이 들어선 금당실 마을이 있고,  당당하게 ‘석송령’ ‘황목근’이란 이름을 호적에 올리곤 제법 넓은 땅과 재산을 가진 600년생 소나무와 팽나무도 있습니다.

 

  내성천이 둥글게 감아돌아 좁은 목을 한 삽만 떠낸다면 그대로 섬이 되고 말 것 같은 회룡포야 예천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명소이지요.  예천에서 이런 구경거리들을 하나하나 짚어가자면 하루 이틀로는 턱없이 모자를 터입니다. 비가 내리지 않는다면 좋겠지만, 비가 내린다 해도 그 아름다움이 조금도 가려지지 않는 곳. 오히려 비 내리는 정취를 호젓하게 즐길 수 있는 곳. 그곳이 바로 예천입니다.

 

 

그림같은 정자, 600년 고목… 그리고 江 ‘비오는 날의 하모니’

 

 

▲ 내성천 물줄기가 휘돌아나가는 회룡포마을의 속칭 ‘뿅뿅다리’에 걸터앉아 물에 발을 담그면 강변마을의 평화로움을 온몸으로 느끼게 된다.

 

▲ 수련이 피어난 연못을 정원으로 삼고 병풍같은 바위 위에 올라앉은 병암정은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풍경을 빚어낸다

 

 

# 초간정, 정자 하나를 풍경 속에 퍼즐처럼 딱 맞춰 끼워넣다 


  경북 예천은 풍모가 빼어난 정자를 여럿 가지고 있다. 그중에서도 첫손으로 꼽을 만한 곳이 바로 용문면 죽림리의 초간정이다. 소백산 자락의 용문산에서 내려온 물이 운암지와 금당지에 담겼다가 다시 흘러내려 바위를 만나 짧게 굽이치는 곳, 그곳에 초간정이 있다. 깊은 산중도 아니고 긴 숲그늘을 드리운 곳도 아니지만, 물을 굽어보는 바위 위에 터를 닦아 앉힌 정자의 풍모는 더없이 매혹적이다. 맑은 물과 아름드리 소나무가 바위와 함께 어우러져 말 그대로 ‘한 폭의 그림’과도 같은 전경을 선사한다.

 

  초간정은 조선 선조 때 학자인 권문해가 1582년 지은 것이다. 초간정이란 이름의 내력은 전해지지 않지만, 아마도 중국 당나라 때의 시인 위응물이 지은 ‘간변유초(澗邊幽草)’란 시구에서 따온 것이리라. 벼슬에서 뜻을 얻지 못하고 그윽한 곳에서 홀로 지조를 지키는 것을 비유한 시다. 정자는 내건 편액에 걸맞게 고고하면서도 단아한 멋이 풍긴다.

 

  초간정은 정작 정자에 들어 내다보는 경치보다는, 건너편 바위에 걸터앉아 건너다보는 경관이 훨씬 더 빼어나다. 물 건너편에서 정자를 바라보노라면 마치 딱 맞는 퍼즐조각을 끼워넣듯 정자를 앉혀놓은 눈썰미에 탄성이 절로 나온다. 눈 앞의 경관에서 정자를 지워버린다면 그 감흥은 절반에도 채 못 미치리라. 그곳의 풍경은 정자가 있음으로써 완성된다. 풍경 속에 정자가 앉아있는 것이 아니라, 정자가 저 스스로 풍경이 돼서 빼어난 아름다움을 연출하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훗날 초간정을 중수하며 남긴 기록에서도 그 자리에 초간정을 세운 권문해의 ‘안목’을 거론한다. 정자가 들어선 자리를 “긴 벌판 넓은 언덕의 한 모퉁자리 있어 조금도 스스로 광채를 드러내지 못했던 곳이라 모두들 길 옆에 버려둔 곳”이었다며 “공(권문해)이 하루아침에 그것을 찾아냈다”고 했다.



# 바위와 연못, 백사장과 물길이 정자를 더 아름답게 치장하다 



  초간정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초간정 못지않은 정자인 ‘병암정’이 있다. ‘병암(屛巖)’이라 하면 ‘병풍같은 바위’를 일컫는 것이겠다. 이름 그대로 정자는 병풍처럼 펼쳐진, 집채보다 훨씬 더 큰 바위 위에 번쩍 올라 앉아있다. 정자는 처음 지어진 지 110년 남짓인데다, 근래에 손을 본 모양인지 말끔하게 단장돼 있어 그윽한 맛은 덜하다. 하지만 바위 저 아래쪽에 정원으로 삼은 연못을 끼고 있어 독특한 정취를 빚어낸다. 우리 땅의 정자들이 앉은 자리나 모습이 죄다 비슷비슷하다지만, 이곳 병암정의 풍경이나 정취만큼은 닮은 곳을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독창적이다.

 

  연못 주변으로는 소나무며 왕버드나무 아름드리 고목들이 늘어서 있고, 연못에는 빼곡히 자라난 연잎 사이 붉은 수련이 활짝 꽃을 틔웠다. 연못 한가운데는 석가산을 상징하듯 섬도 떠있다. 연못에서 바위와 그 위에 얹혀진 정자를 올려다보는 맛도, 정자에 들어 발 아래로 연못을 내려다보는 맛도 그만이다. 병암정은 구한말 법부대신이었던 이유인이 세운 옥소정을 예천 권씨 문중에서 1920년에 사들여 병암정이라 이름을 고쳤다. 정자 곁에는 예천 권씨의 별묘를 따로 세워 선조들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호명면 백송리에는 또다른 풍광을 품고 있는 ‘선몽대’가 있다. 퇴계의 종손인 우암 이열도가 1563년에 내성천변에 세운 정자인데, 툇마루의 기둥이 시멘트로 세워지는 등 이곳저곳이 훼손돼 정자 자체가 지닌 옛맛은 좀처럼 느낄 수 없다. 대신 정자 안에 걸린 현판과 목판은 유심히 봐둘 만하다. 현판의 글은 퇴계의 솜씨이고, 나붙은 목판의 시들은 약포 정탁, 서애 류성룡, 청음 김상헌, 한음 이덕형 등의 것이다.

 

  선몽대에서 보아야 할 것을 꼽는다면 첫째는 그곳으로 드는 입구에 내성천을 끼고 서있는 노거수들이다. 몇백년을 묵었음직한 우람한 소나무, 은행나무, 버드나무들이 가득하고, 내성천변에는 십리 백사장과 굽이도는 물길이 펼쳐진다. 두번째로는 정자의 툇마루에 앉아 내성천을 내다보는 풍경을 빼놓을 수 없다. 내성천의 물길과 천변의 너른 백사장의 모습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부드럽게 그윽하다. 흰 백사장이 펼쳐진 내성천을 내다보는 데 이보다 더 나은 자리가 있을까. 풍경은 마치 산수화의 화폭처럼 가로로 길게 펼쳐진다.



# 땅을 갖고 세금을 내는 두 그루 나무 앞에서 터지는 탄성 

 

  예천을 찾았다면 만나봐야 할 나무가 두 그루 있으니, 그것이 바로 석송령과 황목근이다. 예천군 감천면 천향리의 석송령은 나라 안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나무라 할 만하다. 석송령은 알려져 있다시피 토지를 소유하고 나라에 세금을 내고 있는 나무다. 600여년 전 풍기 일대에 큰 홍수가 났을 때 석관천 상류에서 떠내려오던 나무를 어떤 이가 건져내 심은 것이라 전해지는데, 아들이 없던 이 마을의 이수목이란 노인이 1927년에 자신의 소유 토지를 이 나무에게 상속 등기해주면서, ‘석(石)’씨 성에다가 영험한 소나무란 뜻으로 ‘송령(松靈)’이란 이름을 지어줬단다. 당시 석송령이 상속받은 땅은 대지가 3937㎡(약 1190평)이고 논밭이 5087㎡(약 1538평)다. 이때부터 석송령은 땅을 가진 부자나무가 됐고, 매년 종합토지세와 교육세를 꼬박꼬박 납부하고 있다.

 

  석송령에 얽힌 이야기들도 많다. 일본 순사가 군함의 재료로 쓰고자 나무를 베려고 자전거를 타고 개울을 건너오다 핸들이 꺾이면서 넘어져 목이 부러져 죽었다고도 하고, 6·25전쟁 때 인민군이 석송령 나무 아래를 야전병원 막사로 썼는데, 일대가 쑥대밭이 될 정도로 폭격 피해를 입었음에도 나무는 무사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런 특별한 내력이나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석송령은 엄청난 크기와 빼어난 수형만으로 보는 이들의 탄성이 터지게 한다.

 

  석송령처럼 토지를 소유한 나무가 전국에 두 그루가 더 있는데, 그중 하나가 역시 예천군 용궁면 금남2리에 있는 500년 된 팽나무 ‘황목근’이다. 황목근은 5월에 노란 꽃을 피운다 해서 황(黃)씨 성을, 근본있는 나무라 해서 ‘목근(木根)’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나무는 석송령만큼 우람하지는 않지만 들판에 우뚝 서있는 모습이 자못 당당하다. 황목근 앞에는 8년 전에 새 눈을 냈다는 이른바 늦둥이 ‘아들나무’가 황목근을 빼닮은 수형으로 자라고 있다.

 


# 회룡포 마을에 들어 ‘평화롭다’는 느낌을 깨닫다

  예천에서 가장 이름난 명소로는 회룡포를 들 수 있다. 회룡포는 낙동강 지류인 내성천이 마을을 휘감아 흐르는 마을이다. 물방울 모양의 형상이라 잘록한 땅 한 삽만 떠내면 그대로 섬이 됐을 곳이다. 회룡포를 찾는 이들은 대개 마을 앞산 비룡산 자락의 전망대 ‘회룡대’에 오르지만, 회룡포마을은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것보다는 길을 찾아 마을로 드는 편이 더 낫다.

 

  회룡포 마을은 이즈음 펜션이나 민박집이 들어서고, 산책로가 조성되는 등 한창 관광지로 개발되고 있지만, 마을에서 눈길을 확 휘어잡을 만한 풍경은 그닥 없다. 그러나 강변마을의 평화로운 정취 속에서 한나절을 느긋하게 느끼고 싶다면 이곳만한 데가 없다. 물가를 따라 산책을 하면서 군데군데 지어진 정자에 올라 도시락을 까먹어도 좋겠고, 백사장을 끼고 흐르는 내성천을 구멍뚫린 공사용 철판을 이어붙인 이른바 ‘뿅뿅다리’로 이리저리 건너는 것도 즐겁겠다.

 

  다리 아래 물바닥은 흰 모래로 가득하고, 물은 바지를 걷어붙이면 건널 수 있을 정도로 수심이 낮다. 보행자 둘이 마주치면 서로 어깨를 부딪쳐야 건널 수 있는 좁은 뿅뿅다리에 걸터앉아 물에 발을 담그고 고즈넉한 강변마을의 정취를 만끽하거나, 맨발로 백사장을 천천히 걸으면서 발끝에 느껴지는 모래의 촉감을 느껴본다면 일상에서는 좀처럼 느껴볼 수 없는 ‘평화롭다’는 느낌을 온몸으로 알게 될 터다.
 
 
 
 

가는 길

  영동고속도로 여주갈림목에서 중부내륙고속도로로 갈아타고 문경새재 나들목에서 나와 우회전해 3번 국도를 따라 상주·문경 방면으로 향한다. 호계면 사무소를 지나 영강교 앞에서 안동·예천 방면으로 좌회전해 34번 국도를 따라간다. 산양면, 용궁면사무소를 지나서 직진하면 예천읍에 이른다. 초간정과 병암정은 용문면에 있다. 읍내에서 예천상수도수원지를 지나는 928번 지방도를 따라가면 병암정과 초간정을 차례로 만난다. 초간정에서 더 들어간 곳에 있는 절집 용문사도 들러볼 만하다. 회룡포 마을은 개포면소재지를 지나 내성천 물줄기를 끼고 이어진 길을 따라 차로 들어갈 수 있다. 선몽대는 예천읍의 남쪽에 있다.


 

묵을 곳 먹을 것


  예천은 숙소사정이 열악한 편이다. 회룡포 마을에는 회룡포황토민박(054-655-3973) 등 민박집들이 몇곳 있는데, 주말이나 휴가시즌에는 사람들이 몰리니 일찍 예약해야 한다. 전망대 가는 길목의 강변에도 몇곳의 펜션과 민박집이 있다. 읍내에서는 한국관광공사로부터 ‘굿스테이’ 인증을 받은 파라다이스모텔(054-652-1108)이 가장 깔끔하고 시설이 좋다.


  먹을거리로는 용궁면의 순댓국이 유명하다. 용궁시장 주변에 순댓집이 몇곳 있는데, 그중 단골식당(054-653-6126)이 가장 알아주는 곳. 깔끔한 맛의 순대국밥(3500원)도 좋지만, 맵게 양념해 석쇠에 구워낸 돼지불고기(7000원)와 오징어구이(6000원)가 특히 일품이다. 예천 읍내에는 청포묵 비빔밥과 갖가지 반찬류를 내주는 청포정식으로 유명한 ‘전국을 달리는 청포집’(054-655-0264)이 이름난 곳이다.

 

 

 

<출처> 2010. 6. 30 / 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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