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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전라북도

33㎞ 새만금방조제 따라 가는 ‘이색(二色) 여행’

by 혜강(惠江) 2010. 4. 15.

새만금방조제’ 33㎞

 

인간은 아프게 금을 그었지만, 자연은 넉넉히 품어 주었습니다

 

 

박경일기자

 

 

 

▲ 새만금 안쪽 바다에 고즈넉하게 떠있는 어선. 곧 매립이 시작돼 육지가 될 새만금 안쪽 바다에는 아직도 2000여척의 어선들이 고기를 잡거나 조개를 캐고 있다.

 

 

새만금방조제가 시작되는 전북 군산의 비응도 한쪽 끝에 섰습니다. 방조제가 바다 위로 그은 가물가물한 직선의 끝을 해무(海霧)가 빨아들였습니다. 총연장 33㎞. 그 길에 오르자 절로 탄성부터 나왔습니다.

 

달려도 달려도 끝이 나지 않는 길. 달리다 보면 그곳이 바다를 막은 방조제인지, 도로인지 잊게 하는 길. 가물가물한 직선 도로를 따라 바다 위를 달리다 딱 중간쯤에서 길 바깥쪽으로 고군산군도의 신시도 끝이 걸쳐졌고, 그 뒤로 선유도, 무녀도, 방축도 같은 섬들이 주르륵 펼쳐졌습니다.

 

신시도를 지나 두리도, 비안도가 휙휙 차창 밖으로 지나갔고, 군산에서 출발한 지 30분 만에 부안 땅에 당도했습니다. 오는 27일 새만금방조제 위로 난 도로가 개통됩니다. 1991년 방조제 기공식을 한 지 무려 19년 만에 완성된 이른바 ‘간척의 역사’를 이제 누구나 실제로 딛고 달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새만금방조제에 놓인 도로는 국도가 돼서 ‘77번’이란 번호를 부여받게 됩니다. 동해안을 따라가는 국도에 7번이란 번호가 붙여졌듯, 인천을 출발해 서해안을 따라 내려가는 국도에는 ‘77번’이란 번호가 매겨진 것입니다.

무수한 찬반 논란과 수없는 설계 변경으로 우여곡절 끝에 완성된 새만금방조제는 단순한 방조제의 의미를 뛰어넘습니다. 세계 최대 규모라는 새만금방조제는 간척 기술의 집약이기도 하고, 사회 갈등 속에서 강행된 우리 사회 정책 결정의 옳고 그름을 가늠할 수 있는 시험대이기도 합니다.

이런 묵직한 의미 말고도, 단순한 여행자의 눈으로 보더라도 새만금방조제는 다층적인 의미를 가집니다. 방조제는 그것 그대로 대역사를 관람하는 ‘목적지’가 되기도 하고, 군산과 부안을 잇는 ‘지름길’이 되기도 하고, 신시도와 선유도로 이뤄진 고군산군도로 넘어가는 ‘다리’가 되기도 합니다. 목적지이자, 지름길이자, 다리가 되는 새만금방조제의 도로를 먼저 달려 봤습니다.

새만금방조제는 바다 위로 서사(敍事)의 금을 그었지만, 방조제가 그은 금의 안쪽이나 바깥쪽의 서정(敍情)은 아직도 살아 있었습니다. 방조제가 그은 금의 바깥쪽에 있는 신시도의 월영봉에서는 고군산군도의 올망졸망 떠있는 섬들이 그림 같았고, 매립을 기다리는 안쪽의 바다에는 아직도 고깃배들이 갈매기들을 끌고 오가고 있었습니다.

 

 

 

새만금방조제 따라 가는 ‘二色 여행’

 

‘근대사 寶庫’-‘자연의 신비’ 30분거리로 좁혀지다

 

 

▲ 김제의 망해사에서 바라본 낙조 풍경. 수평선 끝으로 가물가물하게 보이는 새만금방조제가 바다를 막으면서 망해사 앞은 담수호가 됐다. 새만금 매립공사가 끝나면 망해사 앞의 호수는 유장한 만경강의 강줄기가 된다. 망해사가 바라보고 선 것이 바다에서 호수로, 다시 강으로 바뀌는 셈이다.

 

 

# 새만금방조제, 그 자체만으로 관광지가 되다

총연장 33㎞. 그러나 새만금방조제가 시작되는 군산 비응도에서 부안까지 실제 차를 타고 달리며 재 본 거리는 31㎞ 남짓이었다. 출발 지점이나 종료 지점의 어디쯤에서 잘못 가늠한 탓이겠는데, 그만큼 새만금 일대의 땅과 바다는 경계가 모호하다. 33㎞면 어떻고, 31㎞면 어떠랴. 이제 막 시작된 새만금 안쪽 바다의 매립이 이뤄지고, 복합도시와 레저, 생태공간이 조성된다면 그마저도 가늠할 수 없으리라.

새만금방조제에 대해 한마디로 말하자면 ‘감탄부호’ 딱 하나만으로 족하다. 바다를 가로지르는 방조제 위로 난 길은 도대체 인간의 시선 한계를 넘어선다. 길 끝이 해무에 덮여 안개 속으로 사라졌지만, 청명한 날에도 방조제의 끝을 눈으로 확인할 수 없다. 그저 바다 위로 난 왕복 4차선 도로가 소실점을 향해 치닫는 모습만 보일 뿐이다.

새만금방조제의 군산쪽 출발점은 비응도. 섬이었으되 간척으로 육지가 돼 버린 곳이다. 여기서 시작하는 길은 다른 방조제와는 사뭇 다르다. 다른 방조제들은 둑을 세우고 둑 아래 내륙쪽에 길을 놓아 바다로 향한 시선을 차단했다. 바람이 강한 데다 자칫 사고가 날 경우 안전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새만금방조제도 애초에 그렇게 설계됐다. 부안 쪽 일부 구간은 실제로 그렇게 시공됐다. 그러나 관광 목적을 위해서는 바다를 조망하면서 달릴 수 있어야 한다는 이유 때문에 중도에 설계가 변경됐다. 그래서 새만금방조제 대부분의 구간에서는 시원스레 터진 바다를 내다보며 달릴 수 있다.

방조제 길 곳곳에는 기념탑과 조형물이 서 있다. 자맥질하는 고래의 꼬리를 형상화한 조형물부터, 돛을 형상화한 구조물 아래 벤치도 놓여 있다. 워낙 방조제가 길어 곳곳에 쉬어갈 수 있는 휴게소들도 들어서 있다. 조망이 좋은 곳에 위치한 휴게소들은 저마다 독특한 모양으로 설계돼 있다. 도로 양쪽으로 놓인 보행로까지 붉은색과 초록색으로 치장돼 있는 것이 다소 촌스럽긴 해도, 관광지의 들뜬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새만금방조제 길을 달려 보겠다면, 낙조 무렵을 택하는 편이 낫겠다. 바다까지 붉게 물들이며 노을이 질 때, 그 바다 위로 난 직선 주로를 달리면서 차창 밖으로 점점이 떠 있는 섬을 내다보는 맛을 무엇과 바꿀 수 있을까. 비응도에서 출발해 야미도와 신시도를 거쳐 가력도를 지나 부안에 닿는 30분여 동안 오른쪽 차창을 통해 낙조의 붉은빛이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모습을 다 가슴에 담을 수 있다. 물론 운전자는 빼고….

 


# 새만금방조제, ‘육지와 섬을 잇는 다리’가 되다

군산과 부안 딱 중간쯤에서 새만금방조제는 고군산군도에서 가장 큰 섬인 신시도를 딛고 지나간다. 신시도의 입장에서 본다면 방조제는 섬을 육지와 연결하는 연륙도 역할을 하는 셈이다. 군산항에서 배를 타고 가야 했던 신시도에는 새만금공사로 방조제가 놓이면서 여객선이 닿지 않는다. 육로로 통해 가자니 새만금 공사로 도로 출입이 통제되고, 배로 가자니 객선이 닿지 않았던 것. 그러나 이제 새만금방조제 도로가 개통되면 신시도는 두 발로 걸어서 들어갈 수 있는 섬이 된다.

신시도가 육로로 연결됐다지만, 섬 마을로 드는 도로는 아직 놓이지 않았다. 섬 서쪽에 우뚝 솟은 월영봉의 낮은 목을 타고 가파른 길을 걸어 넘어야 한다. 하기야 방조제에서 섬 안쪽까지 잇는 차로가 놓인 대도 외지인들의 차량 통행은 금지될 성싶다. 섬 안쪽이 차로 다닐 만큼 먼 거리가 아닌 데다, 모든 도로가 차량 교행이 불가능할 정도로 비좁기 때문이다.

내년에 신시도에서 무녀도를 잇는 다리가 놓여 이미 무녀도와 연륙교로 연결된 선유도와 장자도까지 일대 섬이 모두 다리로 연결된 이후에도 섬 안에는 자동차를 들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고만고만한 섬들에 외지 차량 스무대만 들어가도 섬 전체 도로가 마비될 것임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기 때문이다.

신시도로 드는 도로가 나도 그 길은 걷는 길로 내버려 두던가, 셔틀버스를 운행하게 되리라. 사실 기왕에 놓인 선유도와 무녀도, 장자도를 잇는 다리가 있다지만, 그것도 죄다 차량 통행이 불가능한 ‘도보용’ 다리들이다. 그래서 고군산군도의 섬들은 방조제가 건설되고, 다리가 놓여도 예전의 호젓한 풍광을 그대로 지니게 될 것이다. 반가운 일이다. 신시도와 무녀도를 연결하는 다리가 놓이는 2012년쯤이면, 군산에서 새만금방조제를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신시도와 무녀도, 장자도, 선유도를 다 돌아볼 수 있게 된다.

새만금방조제 완공에 맞춰 신시도를 찾아간다면 월영봉과 대각산을 잇는 트레킹 코스를 밟아 봐야 한다. 두 봉우리 모두 해발 200m를 넘지 않지만, 그 정상에 서면 고군산군도의 절경을 만끽할 수 있다. 신시도 마을로 향하는 고갯마루 월영재에 오르면 새만금방조제의 신시도 배수갑문이 발 아래로 보인다. 만경강 하구 갑문을 열 때면 마치 홍수가 난 댐의 수문을 열어 놓은 듯 우당탕거리며 흘러내려간다.

월영봉을 오르는 조붓한 등산로에서는 신시도초등학교 학생들이 길목마다 이정표처럼 걸어 놓은 글귀들을 만난다. 월영봉 정상은 ‘하늘 가운데 자리’이고, 내려서는 길은 ‘바람 열린 너울길’이다. 신시도 마을이 보이는 능선은 ‘보이는 저 마음들’이고, 바닷가 쪽에 다 내려서면 ‘두고 온 세상 옷깃’이다. 아이들이 써놓은 글귀들은 월영봉에 오르면서 펼쳐지는 고군산군도의 절경 중간중간에 넣어주는 추임새와도 같다.

 

 


# 새만금방조제, 물리적 거리를 당기는 지름길이 되다


새만금방조제는 바다를 막는 방조제이기도 하고, 육지와 섬을 잇는 다리이기도 하지만, 군산과 부안을 연결하는 지름길이기도 하다. 군산에서 부안까지는 구불구불 국도를 타고 100여㎞를 1시간30분가량 달려 가야 했지만, 새만금방조제가 열리면서 이제 30분 안쪽에 닿게 됐다. 군산과 부안. 육로로는 멀지만 애당초 바닷길로는 잠깐이긴 했다. 고군산군도가 군산 아래쪽으로 늘어서 있어 방조제가 지나는 가력도는 물론이고 그 앞의 비안도도 행정구역으로는 군산 땅이었지만, 오히려 부안쪽에서 훨씬 더 가까웠기 때문이다.

새만금방조제 위로 새로 난 지름길에는 ‘77번 국도’란 명칭이 부여됐다. 동해안의 등뼈 따라 내려가는 도로에 7번 국도란 이름이 붙여졌다면, 이쪽 서해안의 가슴지느러미쪽을 따라 내려가는 길에는 7이란 숫자가 두 번 겹친 77이란 번호가 붙여진 셈이다. 인천에서 출발하는 77번 국도는 줄곧 서해안에 딱 붙어서 이어진다. 간혹 바다를 만나 끊어지기도 하지만 77번 국도는 군산에서 새만금방조제를 타고 부안을 지나 영광, 함평, 신안, 장흥, 보성을 넘고 여수, 남해, 통영을 지나 부산까지 닿는다. 국도를 L자로 잇는 총연장 897㎞의 길고도 긴 길이다.

새만금방조제는 여행목적지를 군산과 부안을 한데 묶는 역할을 한다. 군산과 부안은 올 연말까지 1000만명이 찾을 것으로 예상되는 새만금방조제의 후광효과를 저울질하느라 여념이 없지만, 결국 전혀 다른 두 여행지의 매력이 뒤섞이면서 서로를 보완하게 될 것이다. 군산이 일제강점기의 근대문화유적을 풍성하게 갖고 있다면, 부안은 내소사며 변산 등의 빼어난 자연자원을 갖고 있다. 여행객들이 새만금방조제로 30분 거리로 좁혀진 두 곳 중 한 곳을 포기할 리는 만무하다.

지름길이 놓인다면 옛길은 잊어지게 마련. 새만금이 잇는 군산과 부안 사이에 끼어 있는 김제가 바로 그런 형국이다. 그러나 옛길에는 쓸쓸하지만 달큰한 시간이 담긴다. 그 맛을 보는 데는 김제의 절집 망해사만 한 곳이 없다. 한때 바다였으되, 지금은 새만금으로 가둬진 호수를 내려다보고 있는 망해사. 방조제가 놓인 뒤에도 망해사의 저물녘 노을은 여전히 가슴이 저릿저릿할 정도로 아름답다.

 

 

추억 + 65년 내공… ‘옛날 빵’ 인기 빵빵

 

한국 최고(最古) 빵집 '이성당'

 

 

 

군산에는 65년 동안 매일 빵을 구워내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빵집이 있다. 중앙로 사거리의 ‘이성당’. 이성당이 문을 연 것은 광복된 해인 1945년. 당시 조천형(1979년 작고)씨 형제가 1930년대 초반 일본인 주인이 화과자를 만들던 빵집을 인수했다. 빵집 경영은 줄곧 조씨의 부인 오남례(76)씨가 맡아 왔다. 오씨는 지난 2003년 경영권을 며느리 김현주(48)씨에게 넘긴 뒤에도 하루도 거르지 않고 빵집에 나와 손님을 맞고 있다.

“그때는 가마에 장작불을 때서 빵을 만들었어. 기술이나 재료가 좋아졌다지만 아무래도 맛은 옛날만큼은 못한 것 같아.”

시집와서 몇 년 동안 하루 하나씩 ‘앙꼬빵(팥앙금빵)’을 먹었다던 오씨는 “갓 구워낸 달달한 팥이 든 그때의 앙꼬빵이 어찌나 맛이 좋던지 지금도 잊지 못한다”고 입맛을 다셨다. 그러나 이성당에는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세련된 진열에는 파운드케이크며 쇼콜라를 비롯해 크림치즈빵과 요플레빵 같은 고급 빵들이 쌓여 있다. 그러나 아직도 손님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빵은 앙금빵과 야채빵, 고로케 등이다. 모두 문을 열 때부터 만들어 오던 것들이다. 군산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이 세 가지 빵만큼은 다른 곳에서 절대로 ‘흉내 낼 수 없는 맛’이라고 인정한다.

일제강점기 개항돼 일찌감치 서구 문물을 받아들인 군산에는 광복 이후 빵집들이 잇달아 문을 열었지만, 지금은 이성당만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아직까지도 빵이 나오는 시간이면 매장이 손님들로 북적인다. 그 비결은 ‘추억의 맛’이 가진 힘일까. 며느리 김씨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김씨는 “추억이 절반이라면, 나머지 절반은 온전히 빵맛 때문”이라고 했다.

65년의 시간을 담고 있는 이성당이 반가운 것은 분점 하나 내지 않고도 경쟁력을 잃지 않은 채 당당하게 살아남아 있기 때문이다. 매뉴얼화된 프랜차이즈 빵집들이 감히 넘볼 수 없는 시간과 정성, 정직한 재료, 그리고 맛까지 두루 겸비했으니, “이성당이 앞으로도 지나온 시간만큼은 넉넉히 살아있을 것”이란 김씨의 자신있는 말에도 믿음이 갔다.

 

 

<출처> 2010. 4. 14 / 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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