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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전라북도

김제 벽골제, 새해 '희망'을 만나는 땅

by 혜강(惠江) 2010. 1. 6.

 

김제 벽골제 

 

새해 '희망'을 만나는 땅, 김제 

 

박경일 기자

 

 

 

▲ 밤새 사르륵 사르륵 눈이 내린 이튿날 아침, 김제 들판에 경계없이 눈 평원이 펼쳐졌다. 아직 아무도 밟지 않은 벽골제의 눈밭에 용 두마리만 깨어나 상서로운 기운을 내뿜고 있다. 올해는 호랑이의 해지만, 용꿈은 늘 길한 법. 신년 벽두에 용의 기운을 받으러 전북 김제 땅으로 떠난 길이다.

 

 

  발톱을 세운 두 마리 용이 시린 겨울 하늘을 배경으로 우람하게 서있습니다. 이 곳은 벽골제의 땅 전북 김제입니다. 아시다시피 벽경제는 농사를 위한 수리시설입니다. 지금은 5개 중 2개의 수구(水口) 흔적만 남아있고, 제방 안쪽에도 물 대신 가을걷이가 다 끝난 황량한 벌판만 담겨 있지만, 한때 이곳은 ‘용(龍)의 공간’이었습니다.

  고대 농업국가에서 통치행위란 곧 물을 잘 다스리는 일과 다름없었습니다. 농업국가에서 물이야말로 백성들에게는 생명줄이었던 까닭입니다. 수리를 관장하는 것은 통치자의 가장 위대한 능력이었지요. 왕의 상징이 물을 관장하는 상상의 동물인 용에 비유됐던 것도 아마 다 그런 이유 때문일 겁니다. 예로부터 물을 잘 다스린 군주는 백성들로부터 추앙을 받았고, 반대로 가뭄과 홍수가 빈발하면 처참한 죽음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절대군주라도 사실 가뭄과 홍수만큼은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일이긴 했겠지만요.

  김제의 벽골제에는 대나무를 쪼개 만든 두마리 용의 조형물이 세워져 있습니다. 새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두마리의 우람한 용이 발톱을 세운 채 맞서고 있는 형상입니다. 벽골제 부근의 호수에 살았다고 전해지는 백룡과 청룡입니다. 신년 벽두에 광활한 지평선이 펼쳐지는 전북 김제 땅을 찾아간 것은 용이 가진 상서러운 기운을 마주해보자는 뜻입니다. 한해의 마지막 날이 가까워와야 겨우 지난날을 되돌아보고, 새해 첫날이 돼서야 비로소 앞으로의 기원에 두손을 모으는 것이 부끄럽긴 하지만, 그래도 새로운 날들 앞에서 다시 희망의 손을 모으게 됩니다.

  김제에는 벽골제 말고도 한해의 소망을 마음에 담아 고요하게 무릎을 꿇을 만한 곳들이 곳곳에 있습니다. 우리 땅에 단 하나 남았다는 삼층전각인 미륵전이 있는 금산사가 그렇고, ‘돌아올(歸) 것을 믿는다(信)’는 뜻을 담은 고즈넉한 절집 ‘귀신사(歸信寺)’가 그렇습니다. 여기다가 금산사 아랫마을에 있는 100년이 넘는 내력의 금산교회, 그리고 크림색 외벽의 단아한 수류성당을 보탭니다. 금산교회에서는 예배를 알리는 낡고 오래된 종탑에서 울리는 뎅그렁 종소리와 낡은 독일제 풍금의 나른한 소리가 들릴 것 같았고, 수류성당에서는 흰 칼라의 교복을 입은 갈래머리 여학생 같은 단정함이 느껴졌습니다. 이렇게 소박하고 오래된 교회와 성당에서의 기도는 아마 하늘에 좀 더 가까이 올라가겠지요.

  갔던 길을 되짚어 돌아나오는 길. 다시 들른 벽골제 제방 위의 들판에서는 몇명의 소년들이 겨울 하늘에 방패연을 띄워 올리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저마다 자신의 꿈을 띄우듯 힘차게 얼레를 풀어 연을 높이, 더 높이 날렸습니다. 광활한 김제의 들녘에 서서 아이들이 띄워올린 연을 올려다보면서 가슴에 품은, 아직도 따스하게 팔딱이는 ‘새해의 희망’을 가만히 만져보았습니다.

 

 

 

김제 벽골제, 한 들녘서 ‘만석꾼의 精氣’ 받아볼까

 

 

▲ 김제 금산사는 모악산의 능선이 다 내려온 곳에 자리잡고 있어 절집 어디에서도 시야가 탁 터진다. 마침 밤새 눈이 내려 금산사 일주문으로 드는 길에 눈꽃이 피어났다.

 

 

# 벽골제의 용에게서 상서로운 기운을 받다



  지금으로부터 1700여년전. 백제 침류왕때 지어진 전북 김제의 벽골제에는 용 두마리가 살고 있었다. 늘 성질이 착해 사람을 도왔다는 백룡(白龍)과 심술궂어 때때로 벽골제의 둑을 무너뜨리곤 했다던 청룡(靑龍)이다. 용의 전설은 일제강점기이던 1925년 간선수로 공사와 섬진강댐 건설로 벽골제가 논이 되면서 깃들 곳조차 잃었다. 벽골제도 이름만 남아서 거대한 물줄기를 가뒀던 위용을 기억하고 있다.

  그럼에도 벽골제를 찾아가는 것은, 그곳에 서면 거칠 것 없이 넓게 펼쳐진 세상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벽골제는 둘레만 44㎞가 넘었고, 김제평야로 드는 물을 모두 가뒀던 위용을 자랑했지만, 지금은 물이 있던 자리는 모두 논이다. 물이든 논이든 벽골제의 제방에 오르면 사방으로 거칠 것 없이 펼쳐진 들판과 마주친다.

  김제 사람들은 김제·만경평야를 일러 ‘징게맹경 외애밋들’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징게맹경’이란 김제와 만경을 뜻하는 사투리이겠고, 외애밋들이란 ‘김제와 만경을 채운 논들이 한 배미로 시원스럽게 트였다’는 뜻이다.

  이렇듯 외배미로 이어진 ‘징게맹경’에 물을 대던 벽골제의 기능은 저수지였으되, 사실 벽골제의 의미는 단순히 물을 담아두거나 흘려보내는 역할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농경시대에 물을 다스리는 일인 ‘치수(治水)’는 목숨보다 소중했던 것이었을 터. 그건 바로 통치자의 몫이었다. 왕권의 상징이 용이 된 것도 따지고 본다면 용이 물을 다스리는 상상의 동물이기 때문이리라.

  벽골제 제방 아래에는 철근틀에 대나무를 엮어 만든 두마리 용의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용 한마리의 길이가 54m. 몸통 직경이 2m에다 높이는 15m에 이른다. 실제 용이 있다면 딱 이 정도의 크기일 것 같다.

  어느 쪽이 전설 속의 백룡이고 어느 쪽이 청룡인지는 알 수 없지만, 금세 하늘로 차오를 듯 생동감이 넘치는 용의 조형물 앞에 서면 상서로운 기운이 느껴진다.

  새해 벽두에 벽골제로 향하는 여정은 외배미들에서 가슴이 탁 트이는 풍경을 만나고, 벽골제에서 용이 가진 상서로운 기운을 받는 일이겠다.



# 짚신에 묻은 흙 털어 만든 산을 되질하던 논

 

벽골제는 고대 농경사회에서는 천수답의 숙명을 거역하는 기념비적인 최첨단 건축물이었을 터. 이후 조선시대까지도 벽골제는 그 규모만으로도 적잖은 이야깃거리들을 거느리고 있다. 그런 이야기 중 몇가지.

벽골제 인근의 부량면 용성리에는 ‘신털미’란 이름의 산이 있다. 사실 산이라고 하기에는 심히 민망스러울 정도로 턱없이 작은 언덕이다. 눈길이 가는 것은 ‘신털미’란 이름이다. 어찌 이런 독특한 이름이 붙었을까. 조선 태종 때 백성 1만명을 동원해 벽골제 보수공사를 했는데, 일하다 지친 인부들이 소나무 그늘 자리를 찾아 이곳까지 모여들었단다. 인부들은 이곳에서 짚신에 엉겨붙은 진흙을 털어냈는데 그게 모여 산이 됐고, ‘신을 털었다’는 뜻이 그대로 이름이 됐다는 이야기다.

신털미산 바로 아래 포교마을의 작은 밭. 지적대장의 주소로 치자면 ‘답(沓) 137번지’는 ‘되배미’로 불렸던 곳이다. ‘되배미’란 곡식을 계량할 때 쓰는 ‘되’에다가 논을 셀 때 쓰는 ‘배미’를 붙인 말. 이런 이름이 붙은 연유는 이렇다. 벽골제 보수공사에서 가장 중요했던 일은 동원된 1만여명의 인부들을 정확히 세서 작업에 투입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나온 기막힌 아이디어. 먼저 됫박으로 쌀을 되듯 일정한 규격의 논 안에 인부들을 빽빽이 세워 인원을 센다. 그후에는 투입되는 일꾼들을 먼저 논으로 들게 해 사람을 곡식처럼 되질해가며 숫자를 헤아렸다.

김제는 너른 평야를 거느리고 있어서인지 유독 농사나 곡식과 관련된 이야기 또는 구경거리들이 많다.

김제시 장화동 후장마을에는 말 그대로 ‘집채만 한 쌀뒤주’가 있다. 한때 구례 군수를 지냈던 만석꾼 정준섭씨가 고종때인 1864년에 만들어 사용했던 것. 만석꾼 토호였던 그의 집에 식솔과 과객들이 어찌나 많았던지 평범한 크기의 뒤주로는 도저히 쌀을 보관하기가 마땅찮아 아예 마당에 쌀뒤주를 짓고 초가지붕을 이어 올려 하나의 별채 건물로 세웠다. 뒤주에는 쌀 70가마니가 들어간단다. 집채만 한 쌀독을 마당에 지어 뜨끈한 밥을 나눴던 정이 훈훈하다. 여기다가 김제시 죽산면 죽산리에는 일본인 지주 하시모토의 농장 사무실도 오가며 들러볼 만하다.



# 시간 켜켜이 쌓인 법당, 교회서 소망 기원

 

▲ 수류성당

 

 

▲ 금산교회

 

 

 

 신년초에 김제 땅을 여행한다면 오랜 내력을 지닌 절집이나 교회 혹은 성당을 찾아 무릎을 꿇어 보는 것도 좋겠다. 김제에는 이름난 절집인 금산사가 있고, 100넘은 내력을 지닌 금산교회가 있다. 또 소박한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는 단아한 풍모의 수류성당도 있다.

  너른 마당을 품고 있는 금산사에서는 단연 미륵장륙상을 모신 우람한 목조 삼층 미륵전이 대표선수격. 그러나 절집 뒤편으로 물러나 앉은 대적광전, 나한전, 조사전 꽃문살의 아름다움도 그에 못지않다. 창호 문살에 새겨진 문양을 들여다보노라면 계절을 잊고 고운 색감으로 피어난 화려한 꽃을 보는 듯하다.

 금산사 인근에는 작은 절집 귀신사가 있다. 어디 절집 이름을 ‘귀신(鬼神)’으로 삼았을까 싶어 유심히 보니 ‘돌아올 귀(歸)’에 ‘믿을 신(信)’이다. 절집에서 만난 처사는 ‘돌아와서 믿는다’고 절집의 이름을 풀이해줬지만, 어쩐지 ‘돌아올 것을 믿는다’는 제멋대로의 해석에 더 마음이 간다.

  금산사 아래 용화마을에는 100년 넘는 내력의 금산교회가 있다. 1904년 미국인 선교사 레위스 테이트 목사가 김제에서 가장 부잣집 마방(馬房)에 말을 맡기고 하룻밤을 묵었단다. 이때 선교사를 만나 감화를 받은 지주 조덕삼은 독실한 기독교인이 됐고, 1908년 사재를 털어 지금의 금산교회를 짓도록 했다.

  금산교회는 모악산 너머에 있던 전주 이씨 집안의 재실을 해체해다 지은 것. 한쪽 모서리 방향에 ㄱ자로 두칸을 더 달아서 다섯칸자리로 만들었다. 교회를 ㄱ자형으로 지은 것은 당시 구습에 따라 남자석과 여자석을 따로 내기 위한 방편.

  100년 더 된 교회지만 기둥 하나 서까래 하나 상하지 않고 원형대로 남아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다. 특히 고린도전서를 옮겨 쓴 천장의 상량문은 마치 어제 쓴 것처럼 선명하다.

  여기에 한 곳을 더 보탠다면 금산면 화율리에는 크림색 외벽이 단아한 수류성당을 들 수 있겠다. 박해를 피해 숨어든 천주교 신자들이 이 자리에 처음 성당을 세운 지는 100년도 넘었지만, 지금의 성당건물은 6·25전쟁에 다 불타버린 것을 다시 세운 것이다.

 

 

 

“새해 덕담이 고작 ‘돈 많이 벌라’니…”

김제의 큰 스승’ 학성강당 김수연 옹

 

전북 김제시 성덕면 대석리에는 ‘학성강당(學聖講堂)이 있다. 옛 서원의 시간이 그대로 고여 있는 곳이다. 의관을 정제한 스승 앞에 제자는 무릎을 꿇고 예를 다한다. 스승은 제자에게 가르침과 잠자리를 내주고, 제자들은 제 먹을 것을 가져와 학당에 기거하며 스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는다. 자고 생활하는 것은 모두 무료. 제자로부터 돈을 받지 않으니 스승은 ‘훈장’이 아니라 ‘선생’이다.

“언제부턴가 사람들이 돈과 바꿀 수 있는 가치로만 모든 걸 재잖아. 새해 덕담이라고 상대에게 던진다는 게 고작 ‘돈 많이 벌라’는 것이니….”

평생 한학을 닦아오며 학성강당을 54년째 지켜오고 있는 큰 스승 김수연(85·사진)옹. 그는 강당을 찾아드는 제자들에게는 범접할 수 없는 ‘하늘’이다. 밤늦은 시간까지 책을 펼쳐들고 있던 그에게 “새해에 마음에 담아두고 살 만한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청했다. 김옹은 모든 목적이 ‘돈’이 되는 ‘요즘 사람들’의 경박함에 혀부터 차고는 “사람들이 제 본성이 순선(純善)한 줄 먼저 아는 것이 순서”라고 했다. 저마다 타고난 순한 본성을 힘써 지키는 것이 바른 삶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라는 것이다.

“사람의 본성은 누구나 순선한 법인데 ‘육체의 핏기운’이 달라 저마다 행동하는 것이 다르지. 본성이 마음으로 거울처럼 드러나서 맑은 성품이 되려면 수양을 쌓아야 하는 법이야.”

김옹이 말하는 ‘본성’이란 ‘마음’과는 다르다. 본성이란 말 그대로 타고난 성품을 뜻하며, 그 본성이 늘 마음으로 드러나도록 공부하며 자신을 되돌아봐야 한다는 것이다. 김옹은 “육신은 모두 저 하고 싶은 대로 하려 한다”며 “이런 ‘핏기운’을 잠재우고 내 몸을 다스리는 것은 공부밖에 없다”고 했다. 가령 입은 늘 달고 맛있는 것을 찾고, 눈은 좋은 구경을 찾고, 몸은 놀고 싶은 것이 당연한 이치지만, 내 정신을 순선한 본성대로 이끌어서 내 몸을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다. 풀어보자면 바른 삶을 살자면 공부를 해야 한다는 얘긴데, 공부가 어디 말처럼 쉬울까. 굳이 공부하지 않아도 삶에서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김옹은 고개를 가로젓고는 “‘부자 되라’는 덕담을 나무랐더니, 이젠 아주 돈을 벌지도 않고 부자부터 되겠다는 거냐”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곤 김옹은 자신이 써서 벽에 내건 글귀를 가리켰다. 궁리수덕지원(窮理修德之源).‘이치를 궁구하는 것은 덕을 닦는 근원’이란 뜻이다. 평생을 공부에 바쳤고, 칠순을 넘기면서부터 자주 코피를 흘리면서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은 한학자는 세상 사람들에게 “‘이치를 궁구하는 일’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라”는 말을 전했다. 본성이 순선하니 이치를 알게 되면 행하는 것이 모두 바를 터. 김옹은 “바른 삶을 산다는 것이 그저 지켜지는 일은 아닌 법”이라며 “어떤 행동이 바른 것인지를 늘 짚어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혹시 김제에 가게 되거든 학성강당을 찾아가 옷깃을 여미고 김옹에게서 새해에 지키고 살 만한 화두 같은 말씀 한마디 얻어온다면 크게 남는 장사겠다. 김옹의 가문에 13대째 내려오고 있다는, 100가지 꽃으로 담가 100일을 익힌다는 백화주(百花酒)가 내달이면 잘 익을 것이라니 그 맛까지 보고 올 수 있다면 더 좋겠고



◆ 김제 가는 길 = 수도권에서 가자면 서해안고속도로를 타고 가는 게 간명하긴 하다. 그러나 경부고속도로로 천안분기점까지 가서 천안~논산간 고속도로로 갈아타고 다시 공주분기점에서 공주~서천간 고속도로로 갈아탄다. 이어 서김제나들목으로 나와서 김제시내를 나와 29번 국도를 타고 가다보면 왼쪽에 벽골제가 있다. 벽골제에서 금산사쪽으로 가려면 김제시내로 다시 돌아나와서 712번 지방도로를 타고 전주 방향으로 가다 팥정이사거리에서 우회전하면 된다. 금산교회와 귀신사는 금산사 인근에 있다. 금산면 화율리의 수류성당은 712번 지방도로를 돌아나와 신흥교에서 좌회전해 막다른 길을 따라들어가면 가닿는다.


◆ 어디서 묵고 무엇을 맛볼까 = 금산사 일대에 모악산유스호스텔(063-548-4401)과 모악산장(063-548-4411) 등을 비롯해 민박 10여곳이 있다. 김제시내에는 샵모텔(063-548-5900) 등 최근 들어선 깔끔한 모텔들이 있다. 김제의 맛집이라면 총체보리를 먹여 키운 한우를 내놓는 총체보리한우촌(063-543-0076)이 첫손에 꼽힌다. 모악산 도립공원내 금산사 상가에는 김제회관(063-548-4097), 군산식당(063-548-0069) 등 산채백반과 비빔밥 등을 내놓는 식당들이 즐비하다. 금산사에서 귀신사쪽으로 가는 길에는 게장을 내놓는 밥도둑게장마을(063-548-5288)도 찾아가볼 만하다.

 

 

 

<출처> 2010. 1. 6 / 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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