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국내여행기 및 정보/- 전라북도

지리산 둘레길 800리, 터벅터벅 마음으로 걷는 길

by 혜강(惠江) 2009. 9. 18.

 

 

 지리산 둘레길 800리

터벅터벅… 마음으로 걷는 길

 

김선규기자



 

▲ 몸도 마음도 천천히 등구재를 넘은 사람들이 창원마을 들머리를 지나 금계마을로 향하고 있다

 

▲ 길 안내하는 강아지 전북 상황마을에 이어진 다랑이 논길. 강아지 한 마리가 앞서 가면서 길을 안내하고 있다.

 

 

▲ 밤엔 별천지 구경 지리산에 쏟아지는 별빛을 받으며 한 관광객이 밤길을 걷고 있다. 불빛이 적은 이곳에서 별잔치는 또 하나의 즐거움이다.

 

▲ 둘레길에서 만난 풍경들… 동네 들머리 당산나무 밑에서 손자를 등에 업은 할머니가 일 나간 자식들을 기다리고 있다.

 

▲ 복스러운 늙은 호박들이 누런 뱃살을 내놓고 초가을 저녁 햇살을 즐기고 있다.

 

▲ 둘레길에서 만난 늙은 농부의 손. 정직하게 살아온 흔적이 손 마디마디에 그대로 묻어 있다.

 

 

 터벅터벅 걷는다. 서두를 것도 없고, 급할 것도 없다. 그저 마음 가는 대로, 발길 닿는 대로 걸음을 옮긴다. 서서히 몰려드는 땅거미에 마을 너머 큰 산들이 아득해진다. 길가에 뒹구는 늙은 호박들이 저녁 햇살에 누런 뱃살을 내놓고, 논두렁에 핀 달맞이꽃들은 달 맞을 채비에 분주하다. 누렁이를 앞세우고 걸어가는 늙은 아낙은 일찌감치 저녁을 먹고 어디 마실이라도 가는가 보다. 지리산 둘레길에서 마주한 초가을 풍경에는 나락이 익어가는 구수한 냄새와 향긋한 칡꽃 향기까지 스며 있다.

 

지리산 둘레길은 모두 800여리(약 320㎞)로 3개 도(전남, 경남, 전북), 5개 시·군(구례, 하동, 산청, 함양, 남원), 16개 읍·면과 80여개 마을을 품고 있다. 지리산 주민들과 함께 지리산 보전운동을 펼쳐 온 ‘지리산생명연대’라는 시민단체가 2007년 설립한 ‘사단법인 숲길’에서 이 지리산 둘레길을 만들었다. 지리산 자락에 있는 마을들을 이어주는 옛길의 흔적을 하나하나 되살릴 이 길은 2011년까지 완성할 예정이며 9월 현재 주천~운봉, 운봉~인월, 인월~금계, 금계~동강, 동강~수철 등 5개 구간이 만들어졌다.

“꼬끼오~~.”


오랜만에 들어 보는 수탉 소리에 기분 좋게 잠을 깼다. 갖가지 나물로 정성껏 차린 밥상을 받고 다시 길을 나선다. 전북 남원의 매동마을 이장댁에서 하룻밤을 묵고 경남 함양의 금계마을을 잇는 10.68㎞의 둘레길을 걷기 시작한다. 들녘엔 조, 수수, 콩 등 온갖 곡식이 익어가고 물봉선화, 닭의장풀, 강아지풀이 길섶에 지천으로 피었다. 갈림길마다 나오는 이정표에 잠자리가 앉아 길을 안내한다. 산길이 끝나며 시작된 다랑이 논이 전북 상황마을과 경남 창원마을을 이어주는 등구재 너머로 계속된다. 한 평의 땅이라도 더 만들기 위해 수직으로 쌓아 올린 다랑이 논 축대가 이곳 민초들의 고단한 삶을 보는 듯하다.

둘레길을 걸으며 내 고향의 그리운 길들을 떠올린다. 어린 시절 할머니 손잡고 장을 보러 가던 길, 이웃집의 등 굽은 할아버지가 삽을 들고 물꼬 보러 다니던 길, 어머니가 외갓집에 다녀오시던 길…. 하지만 그 길들은 이제 찾아볼 수가 없다. 하루가 멀다 하고 깔리는 신작로에 고향 마을의 길들은 자동차 차지가 되어 버렸고, 이제는 길에서 이웃 사람들을 마주치기도 힘들어졌다.

지리산 둘레길은 삶의 이야기와 풍경이 녹아 있기에 기억의 저편에 있던 고향의 모습이 되살아나는 추억의 길이다. 오직 정상을 향해 오르고 다시 내려가는 길이 아니라 옆 사람과 눈높이를 맞추며 함께 걸어 가는 길이다. 천천히 걸으면서 그동안 잊고 지나쳤던 것들을 다시 떠올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내 주변의 소중함도 느끼게 되는 그런 길이다.

천천히 둘레둘레…. 올가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지리산 둘레길을 걸어 보면 어떨까. 저 멀리 천왕봉, 형제봉, 제석봉, 중봉 등 지리산 주능선이 둘레길 순례자들을 내려다보며 웃고 있다.

 

 

▲전북 남원시 산내면 매동마을에서 관광객들이 안개가 피어오는 마을을 뒤로한 채 아침햇살 속에 둘레길을 걷고 있다.

 

 

<출처> 2009. 9. 5 / 문화일보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