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원 한탄강 궁예길(DMZ 두루미길) 걷기
천년 전 ‘그 사내’ 울분 삼킨 채 한탄강은 흐르네…
김화성 전문기자
도저히 입 떼지 않아
군내는 고사하고 입 안 그득 곰팡이 슬었을 듯한
그 사내와
천 길 불길 속에서 녹고 녹아
마주선다.
장까지 다 녹아 아, 아 다시 비로자나불로
태어난 사내
(나 이곳에 앉아 있으려니
그대들 이 자리에 피안에 이를 절집 한 채 지을지니)
이제 입 열어 세상 향해
“이놈들!”하고
대갈일성 함직도 한데
여전히 입 꾹 다물고만 있는
오늘도 다만 천 길 불길 속 견디고만 있는 그 사내
붉디붉은 해
뉘엿뉘엿
오늘도 천년의 그 어깨 너머로 넘기고만 있다.
- 윤석산의 ‘그 사내’에서
‘그 사내’는 철원 도피안사(到彼岸寺)에 묵묵히 앉아있었다. 국보 제63호 철조비로자나불좌상. 쇠로 된 몸. 군더더기 없는 몸매. 수수한 옷차림. 씩씩하고 당당한 기상. 갸름한 볼에 적당히 붙은 살집. 이 ‘무쇠 사나이’는 1100년이 넘도록 ‘무(無)’자 화두 하나 들고 묵언정진하고 있었다. 그는 언제 이 저잣거리의 들끓는 번뇌를 끊을 수 있을까. 언제 저 건너 깨달음의 세계로 갈 수 있을까. ‘피안에 이르는 절집’이라는 이름은 과연 가당키나 한 것인가.
서기 865년 세상은 어지러웠다. 관리들은 백성의 피를 빨았다. 도적들은 날뛰고, 떼강도가 설쳐댔다. 신라 경주귀족들은 권력다툼에 날 새는 줄 몰랐다. 나라는 있으나마나였다. 철원사람들은 ‘변방의 우짖는 새들’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타는 목마름으로 ‘메시아’를 기다렸다. 말세에 나타난다는 미륵부처를 애타게 찾고 있었다. 결국 밥술깨나 먹는 1500명의 농민이 한 푼 두 푼 모아 ‘불상’을 모시기로 했다. 불상은 ‘쇠 둘레’ 사람들답게 쇳물을 부어 만들었다. 거무튀튀한 얼굴에 담백한 옷 주름선. 영락없는 농투성이들이었다. 소박하고 꾸밈이 없었다.
905년 궁예(?∼918)가 철원에 미륵왕국을 건설했다. 철원농부들이 ‘쇠 부처’를 모신 지 딱 40년 만이었다. 철원사람들은 그를 열광적으로 맞았다. 궁예는 신라왕족의 후예였다. 후궁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어릴 때 왕궁에서 쫓겨났다. 비렁뱅이, 나무꾼 등 밑바닥생활을 하며 겨우 배고픔을 달랬다. 절에 들어가 중이 된 것도 어쩌면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을 것이다. 궁예는 가슴속에 늘 큰 뜻을 품고 있었다. 하나는 ‘삼한통일’, 또 하나는 ‘모두 다 잘사는 미륵세상 건설’이 바로 그것이었다. 궁예(弓裔)라는 이름도 ‘활 잘 쏘는 고구려 시조 주몽의 후예’라는 뜻이다. 스스로 고구려의 후예임을 자처했다.
궁예는 처음 영월 평창 울진 강릉 등 동쪽을 휩쓸며 점점 서쪽으로 진격했다. 그의 주력은 대부분 농민군이었다. 궁예는 그 누구보다도 ‘새 세상’을 바라는 그들의 마음을 훤하게 꿰뚫고 있었다. 궁예는 그들과 똑같이 자고 뒹굴며 거친 밥을 먹었다. 896년 마침내 개성의 왕건이 스스로 고개를 숙이고 들어왔다. 그것은 궁예가 육지뿐 아니라 해상세력까지 완전히 장악했다는 것을 뜻했다.
신라 말
고려 초
풍운아 궁예
역사에 반눈 감고
말세 미륵을 참칭한 업보로
누대 퇴락한 왕조의 말고삐를 잡고 떠돌다가
태봉국 황성옛터에 눈 오는 밤
평복하고 실실 반눈 뜬 채
홀로 등극한 지존이 되어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은 풍수잡고
천하명당 DMZ에 철저히 뼈를 숨기다
- 이원철의 ‘DMZ·40-궁예’에서
○ 가는 곳마다 기기묘묘한 바위 그리고 궁예의 흔적
철원평야는 한반도의 ‘뱃살부위’나 같다. 젖과 꿀이 흐르는 기름진 땅이다. 이곳을 차지하는 자는 배고픔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궁예가 이곳에 도성을 정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였다. 하지만 전란이 끊이지 않았다. 먼저 차지하려고 서로 총칼을 디밀었다.
철원평야는 6·25전쟁으로 허리가 동강났다. 또 그 남은 벌판마저 한탄강(140km)이 남북을 가르며 흐른다. 강 동쪽은 산악이고, 서쪽이 들판이다. 강은 평평한 들판을 마치 ‘대못으로 깊게 후벼 판 듯’ 흐른다. 양쪽 둑이 깎아지른 기암절벽이다. 양수시설이 없다면 아무리 물이 많아도 ‘그림의 떡’이다. 조선시대 농부들이 그 강물을 댈 수 없어 탄식했다고 해서 한탄강이라고 했다는 말까지 있다. 우스개 말이지만 고개가 끄덕여진다. 한탄강은 ‘큰 여울’이라는 뜻. 그만큼 굽이굽이 절벽을 휘감고 돌아간다. 금강산에서 발원하여 평강-철원을 거쳐 연천에서 임진강과 몸을 섞는다.
궁예길은 바로 그 한탄강 둑을 따라 걷는 길이다. 절벽 위 어깨를 ‘즈려밟고’ 걷는 길이다. 한탄대교가 있는 승일공원에서 시작한다. 승일교(총길이 120m)는 한탄대교 바로 옆에 있다. 반은 북한이 러시아식으로 짓고, 나머지 반은 남쪽에서 미국식으로 지었다. 철원이 6·25전쟁 이전에 북한 땅이었던 탓이다. 전쟁 이전에 북쪽에서 공사를 시작했다가 중단된 것을 전쟁이후 남쪽에서 마무리했다. 철원사람들은 당시 이승만(李承晩) 대통령과 북쪽의 김일성(金日成) 주석의 가운데 한 자씩 따서 ‘承日橋(승일교)’라고 했다고 말한다. 그럴듯하지만 막상 다리이름은 한글로 돼 있다.
궁예길은 가는 곳마다 기기묘묘한 바위들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임꺽정이 무술을 닦았다는 고석정(孤石亭), 명주실 꾸러미가 끝없이 풀릴 정도로 깊다는 송대소, 수염고드름 위로 왁자하게 쏟아져 내리는 직탕폭포…. 강물은 꽁꽁 얼어붙었다. 그 얼음 위 눈밭엔 사람발자국으로 어지럽다. 깎아지른 절벽 틈새마다 선사시대 사람들의 흔적이 적지 않다. 돌도끼 마제석기 타제석기 조개껍데기 물고기 뼈 등이 심심찮게 나온다. 옛날 철원평야엔 고인돌도 무수히 많았다고 한다.
엉겅퀴야 엉겅퀴야/철원평야 엉겅퀴야
난리통에 서방 잃고/홀로 사는 엉겅퀴야
갈퀴손에 호미잡고/머리 위에 수건 쓰고
콩밭머리 주저앉아/부르느니 님의 이름
엉겅퀴야 엉겅퀴야/한탄강변 엉겅퀴야
나를 두고 어디 갔소/쑥국소리 목이 메네
- 민영의 ‘엉겅퀴 꽃’에서
보랏빛 엉겅퀴 꽃. 넘어져 무릎에 피가 날 때 찧어 바르면, 금세 피를 엉기게 하는 엉겅퀴. 나물로 먹고(가시나물), 된장 고추장에 박아 장아찌로 먹는 풀. 민영 시인의 고향은 철원평야 비무장지대(DMZ) 안쪽 월하리(月下里·달 아랫마을)다. 그 바로 아래가 지금 남아있는 ‘달 우물마을’ 곧 월정역(月井驛)이다.
천년을 살며 푸른빛의 청학이 되는 두루미
궁예길 한탕강 코스는 두 가지다. 하나는 승일교∼직탕폭포(4.8km)로 가는 짧은 코스. 그곳에서 곧바로 택시(1만 원 정도)나 승용차를 이용해 도피안사로 가면 된다. 또 하나는 직탕폭포에서 대위리까지 6.4km를 더 거슬러 올라가는 긴 코스다. 역시 대위리에서 택시나 승용차를 이용해야 한다. 도피안사∼노동당사∼백마고지기념관 코스는 민통선 밖이라 통행이 자유롭다.
광복 이전 철원은 한반도 교통의 중심지였다. 철원∼내금강으로 이어지는 금강산전철(116.6km·1931년 개통)까지 있었다. 금강산전철은 24개 역이 있었으며 3시간이 걸렸다. 서울 용산역에서 경원선을 타고 2시간(101km)을 달려와 구름다리로 이어진 철원역에서 ‘금강산전철’로 갈아타야 했다. 금강산전철 노선은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
두루미는 민통선 안에 들어가야 볼 수 있다. 민통선 안에 들어가려면 군부대 허락이 있어야 한다. 간단한 절차가 필요하다. 두루미는 우아하다. 새에게도 격이 있다면, 그 격이 여느 새와 한 차원 다르다. 두루미는 군자 같은 새다. 낟알을 주워 먹으면서도 촐랑대지 않는다.
철원평야 두루미는 흰 두루미와 재두루미가 대부분이다. 흑두루미는 어쩌다 가끔 보인다. 두루미는 보통 1m가 넘는다. 다리는 영덕대게처럼 가늘고 길다. 겅중겅중 걸음걸이가 태껸자세 같다. 한복차림의 조선 선비가 양반걸음으로 휘적휘적 걷는 것 같다. 퍼덕거리는 큰 날개는 영락없는 선비의 휘젓는 도포자락이다.
수놈이 바리톤으로 ‘뚜∼’ 하고 울면, 암놈들이 “뚜루∼뚜루∼” 소프라노로 맞장구친다. 철원평야의 오아시스 샘통 부근에 많다. 샘통은 1년 내내 얼지 않는 우물. 부근엔 동송저수지도 있다. 대머리 검독수리는 토교저수지에 많다. 요즘 토교저수지는 얼어붙어 두루미가 잘 가지 않는다.
흰 두루미는 크고 민감하다. 재두루미는 사람이 가까이 가도 둔감하다. 흰 두루미들은 사람 기척만 있어도 금세 날아가 버린다. 경계병의 날카로운 “뚜루∼”소리가 그 신호다. 반공중으로 편대를 지어 날아가는 두루미 떼는 황홀하다. 두루미는 학(鶴)이다. 흰 학은 천년을 살면 푸른빛의 청학이 된다. 그 청학이 산다는 곳이 바로 이상향 청학동이다. 청학이 다시 천년을 살면 검은 현학(玄鶴)이 된다.
천년 맺힌 시름을
출렁이는 물살도 없이
고운 강물이 흐르듯
학이 난다.
천년을 보던 눈이
천년을 파닥거리던 날개가
또 한 번 천애에 맞부딪노나.
산덩어리 같아야 할 분노가
초목도 울어야 할 설움이
저리도 조용히 흐르는 구나
- 서정주의 ‘학’에서
철원은 궁예의 나라이다. 어딜 가나 궁예의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철원평야 동남단엔 궁예 부하들이 슬피 울었다는 울음산(鳴聲山·명성산·해발 923m)이 있다. 궁성터로 정하려 했던 천황지(天皇地) 마을, 왕건에게 쫓기며 한탄했다는 군탄리, 동쪽에 막사를 설치했던 동막리, 궁예가 한숨을 쉬었다는 한잔모텡이골, 태봉국의 골(官·관)이 있었던 골말, 군량(軍糧)과 관련된 굴랑꿀, 궁예군사들의 훈련성터였던 성머리….
궁예도성은 DMZ 숲 속에 누워 있다. 직사각형의 황성옛터는 달빛만 고요하다. 궁예 시절 ‘한탄강 돌에 좀이 슬면 나라가 망한다’고 했다던가. 궁예도성 돌들은 푸른 이끼가 지쳐 굴 딱지가 되었다. 푸른 학이 깃들여 사는 ‘천년왕국 청학동’이 되었다.
▼ 철원에 새둥지 튼 청학동 훈장님 ▼
지리산 청학동 김봉곤 훈장(43)이 철원에 새 둥지를 틀었다. 김 훈장이 자리 잡은 곳은 한북정맥 복주산(해발 1141.9m) 복계산(1057m) 사이의 천하명당 우복동(又福洞). 2005년 김 훈장은 그곳 5000여 평에 한옥 16채를 짓고 정원 200명 규모의 한민족예절학교(033-458-1234)를 열었다.
김 훈장은 청학동에서 몽양당예절학교를 운영하며 20여 년 동안 아이들을 가르쳤다. 김 훈장이 청학동을 떠난 것은 그곳 rydbr환경이 예전만큼 못했던 탓. 전통서당교육은 때 묻지 않은 자연 속에서만 비로소 이뤄지는 법인데 갈수록 그 순수성이 퇴색됐던 것이다.
현재 김 훈장의 한민족예절학교는 유치원생과 초등학생들을 주 대상으로 한다. 서당한문공부는 기본이고 그 밑바탕에 ‘예’와 ‘효’를 강조한다. 보통 때는 토 일요일 1박 2일 코스로, 방학 때는 한 달 코스로 교육이 진행된다. 서울 경기지역 어린이가 많이 찾는다.
김 훈장은 청학동에서 태어나 20년 동안 서당공부만 한 현대판 선비. 판소리도 10년 동안 배우다 ‘명창에 이르지 못할 것’을 깨닫고 그만두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아이들에게 가끔 판소리와 민요가락도 가르친다.
어린이들은 감자 고구마 구워먹기, 약초 야생화 관찰, 토끼몰이, 가재잡기, 뗏목타기, 팽이치기, 활쏘기 등을 하며 신나고 즐겁게 공부한다. 옛날 서당식 교육 그대로이다. 김 훈장은 “어린이들은 놀 때는 자연 속에서 마음껏 뛰놀고, 공부할 때는 예와 효를 바탕으로 하는 전인교육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산 너머 화천 쪽에는 소설가 이외수 선생이 자리 잡고 있다. 김 훈장은 “이외수 선생과 내가 산을 사이에 두고 서로 등지고 있는 모양새”라며 너털웃음을 웃었다.
|트레킹 정보|
◇가는 길
▽승용차
△서울∼의정부 포천방향∼동부간선도로나 국도 43호선∼의정부 포천방면∼운천∼검문소∼신철원
△서울∼올림픽대로∼구리요금소∼퇴계원 일동방면 국도 43호선∼포천 운천방면 국도 43호선∼검문소∼신철원
◇민통선 출입시간
▽출발시간(자가용)=△동절기(11∼2월): 09:30,10:30,13:00,14:00(4회) △하절기(3∼10월): 09:30,10:30,13:00.14:30(4회)
▽25인승 이상 버스(20인 이상 탑승)=△동절기: 09:30∼14:00 개별 출입 가능 △하절기: 09:30∼14:30 개별 출입 가능 ▽휴관=매주 화요일, 어린이날, 명절(설날, 추석)
◇철새탐조
▽기간=28일까지 ▽코스=토교저수지, 평화전망대, 아이스크림고지, 철원두루미관 월정역사 ▽출발=고석정국민관광지(한탄강 관광사업소) ▽신청=단체 버스만 가능. 전화 예약 ▽예약처=철원군청 관광문화과(033-450-5365) 15∼20인 이하 신청 시 취소될 수 있음 ▽출발시간=매주 수, 토, 일요일 ▽문의=철원군청 관광문화과, 전적지관광사업소(033-450-5558).
◇먹을거리
△숯불민물장어 전문점 ‘잠곡댐’ 033-458-4969 △송어회 전문 ‘매봉산장’ 033-458-1959 △한우 전문 고석정 옆 ‘궁예도성’ 033-455-1944
<출처> 2010. 2. 5 / 동아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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