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 시티
순식간에 사라진 지갑, 소리 질러도 키득키득
조선닷컴
* 소칼로 광장의 시민들은 평온하다.
여행은 다람쥐 쳇바퀴 돌듯 평범한 일상에서 탈출하며 겪는 일련의 행동들이다. 떠날 때는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는 설렘이나 두려움 등이 앞서나, 현지에서 소소한 사람들의 일상과 마주하게 되면 어느덧 긴장의 끈은 사라진다. 일전에 가본 국가를 다시 방문하게 될 때는 더욱 그러하다.
멕시코의 저가 국내선 항공인 인터젯 항공을 타고 멕시코 시티 ‘베니또 후아레스 국제공항’에 내린 시간은 오후 1시30분. 짐을 찾아서 공항 청사를 나서며 ‘범죄로 악명높은 도시’인 멕시코 시티에 왔으니 정신 똑 바로 차려야 겠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사실 멕시코 시티는 전체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치안이 불안한 도시 중 하나다. 특히 지하철에서 많이 발생하는 강·절도는 도시 슬럼화와 함께 멕시코가 안고 있는 가장 큰 골치덩어리다.
이를 알면서도 택시를 타지 않고 무거운 짐을 남부여대(男負女戴)하듯 끌고 메고 지하철역으로 간 게 실수였다. 그 동안 많은 해외 경험, 특히 멕시코에 대한 잦은 출입국으로 긴장이 풀린 탓이었다.
* 사람이 많이 모이는 버스터미널. 신종플루에 대한 우려는 아직 엿보이지 않았다
멕시코 시티의 지하철역은 서울의 지하철과 유사해 편안하게 느껴졌다. 사람이 많은 차내에서는 노약자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모습도 보였다. 몇 달전 ‘신종플루 발원지’라 불리며 전세계를 공포속으로 몰아넣었던 것을 감안하면 이 온화함과 평온함이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지하철 역사는 물론이고 객차 안에도 마스크를 착용한 사람들은 찾기 어려웠다. 불과 몇 달전의 모습들이 ‘언제 그런 적이 있었을까’하는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목적지 소칼로(Zocalo)역으로 향하는 2호선. 소칼로역에 가까워졌을 때 문쪽에 있는 여자가 “이번 정거장에 내리냐?”고 물었다. “나도 이번에 내린다”고 답하고 객차에서 내려 짐을 끌다가 일순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주머니를 뒤져보니, 꽁꽁 단추까지 채워놓았던 바지 주머니속 지갑이 없었다. 뒷머리에 철퇴를 맞은 양, 머릿속이 하얘지고 다리에 힘이 풀렸다. 가지고 있는 전재산을 다 잃어버린 것이다.
지하철내 안전요원에게 말해서 소칼로역 안내사무소로 갔지만, 사무소에서는 아무것도 협조해 줄 수가 없다고 했다. 너무 분해서 일단 경찰을 불러달라고 요청했다. 그때 필자의 휴대폰으로 누군가 음식점에서 필자의 신용카드를 사용했다는 문자메시지가 들어왔다. ‘이 사실을 경찰에게 알려 범인을 잡아야 한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자, 사무실 직원들은 그제서야 경찰에 전화를 했다. 그러나 경찰은 몇 시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사무실 전화도 못쓰게 하는 터라, 지하를 벗어나 1층 광장에서 비싼 로밍폰으로 서울에 전화를 걸어 은행과 카드사에 분실신고를 했다. 한국에서 가져간 자동 로밍 서비스 휴대폰은 비싼 로밍요금에도 불구하고 통화가 자주 끊겼고, 수신상태도 엉망이었다. 현지인들은 광장 한 가운데서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필자의 모습을 키득거리며 지켜봤다.
* 필자가 부른 경찰은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 소칼로역 입구의 특이한 차림의 소년.
* 광장 한켠에서 주술적인 정화의식을 하고 있는 모습
'방랑자의 난동’에 지쳤는지 역 사무실 측에서 멕시코 시티 주재 한국대사관에 연락을 취했다. 송금요청 등 대사관 측에 도움을 얻기 위해 택시를 탔다. 하지만 이번에는 택시 운전사가 말썽이었다. 여기 택시들은 택시면허를 돈주고 사는 경우가 많다는 얘기는 들었었는데, 주소도 알려준 시내의 한국대사관을 못찾고 헤메다니...
겨우 대사관에 도착해, 서울 가족들에게 긴급 송금을 요청하고 한숨을 돌렸다. 그러면서 억울한 사정을 대사관 직원에게 토로하자, “여기 경찰들은 너무 부패해서 그렇게 주의를 줘도 별 이득이 없으니 그냥 선생님이 참으시는 것이 좋을 겁니다”라는 답을 들었다. 해외에서 교민과 방문객들을 위해 노력하는 대사관 측 입장을 생각하면 이해는 가지만, 왠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나라도 이제는 경제력이나 국력이 세계 어디가도 무시 당할 만큼의 약소 국가가 아닌데도 아직 해외에서 입지는 그렇지 못한 것 같았다.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게 날이 저물었다. 지친 몸을 이끌고 비교적 치안이 안전하고 한국 교민들의 식당도 많다는 소나로사(Zona Rosa)의 호텔로 향했다. 멕시코 시티에 오기 전에 우려했던 신종플루는 없었지만, 그 보다 더 큰 위험을 만나다니... 쉽게 잠들 수 없는 밤이다.
<출처> 2009. 10. 31 / 조선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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