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천골 계곡, 그 입구에서 만나는 고즈넉한 폐사지
강원 양양군이라면 대번에 바다부터 떠올리게 되지만, 백두대간으로 경계를 이룬 양양의 서쪽은 산이 깊고, 숲이 짙다. 홍천과 인제를 끼고 있는 양양의 서쪽은 때묻지 않은 자연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다. 홍천과 양양은 구룡령이, 인제와 양양은 한계령과 조침령이 구불구불 고산준령을 넘어가며 잇는다.
한계령이야 일찌감치 관광객들의 발길로 다져져 너른 길이 난 곳. 그러나 외지인의 발길이 뜸한 구룡령과 조침령은 펄떡펄떡 뛰는 날것 그대로의 자연을 관통한다. 건장한 숲을 지나고, 맑은 개울을 건너서 감자꽃이 흐드러진 산촌을 지난다.
그렇게 홍천에서 굽이굽이 구룡령을 넘거나 조침령을 넘어 후천의 물길을 따라가다 응복산의 깊은 계곡인 미천골로 들어선다. 미천골로 들면 먼저 ‘미천(米川)’이란 이름의 기원이 됐다는 선림원지에 들르는 것이 순서다. 지금은 덩그러니 빈터만 남아 있지만, 계곡 초입에는 신라 법흥왕때 순응법사가 세웠다는 선종계열의 기도처인 선림원이 있었다.
선림원은 한때 1000명이 넘는 승려들이 머물던 선종계열의 대찰이었다. 미천이란 계곡의 이름도 절집에 어찌나 수도승들이 많았던지, 쌀 씻은 물이 10리를 흘렀다고 해서 붙여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대찰이 대홍수와 산사태로 통째로 매몰되면서 폐사됐다. 화엄교종이 득세하던 신라시대만 해도 ‘이단’ 취급을 받았던 선종을 따르며, 이렇듯 깊은 산중에서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용맹정진하던 승려들도 한순간에 산사태로 모두 묻히고 말았으리라.
절집의 빈터에는 삼층석탑과 석등, 홍각선사탑비, 부도가 서있다. 모두 일련번호로 매겨진 보물들이다. 눈길을 끄는 것이 보물 444호로 지정된 삼층석탑. 그 중 형태가 온전할 뿐더라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 양식이 온전하게 남아 있는 석탑은 팔부중상 문양의 섬세함과 균형감 있는 자태가 특히 빼어나다. 대개 옛 절집의 흔적만 남아 있는 폐사지에 서면 적요한 느낌이 앞서지만, 선림원지에서는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이, 청아한 물소리와 짙은 숲과 같은 청정한 자연에 눈과 귀가 먼저 열리기 때문이리라.
# 계곡을 따라 이어진 손대지 않은 원시림의 숲
미천골 계곡에는 국립자연휴양림이 들어서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미천골이 알려진 것도 휴양림이 조성된 뒤부터다. 미천골 휴양림은 경북 봉화의 청옥산 휴양림과 함께 열광적인 마니아층을 거느리고 있는 곳으로 꼽힌다. 청옥산 휴양림이 쭉쭉 뻗은 장쾌한 수림이 특징이라면, 미천골 휴양림은 무려 8㎞에 이르는 수려한 계곡과 폭포, 극상림을 이룬 원시림의 정취가 빼어나다. 지난해 경북 봉화 일대의 집중호우로 피해를 본 청옥산 휴양림은 오는 연말까지 문을 닫아걸었지만, 미천골은 워낙 계곡이 깊어서인지 수년전 한계령과 양양 일대를 죄다 쓸어버렸던 수해에도 조금도 다치지 않았다.
미천골 휴양림은 짙은 숲도 좋지만, 계곡 이쪽 저쪽의 골에서 맑은 물을 보태는 폭포들이 특히 아름답다. 휴양림 내의 임도를 따라가다 보면 도처에 폭포가 있다. 휴양림 안에 이름을 가진 폭포는 큰샘실폭포와 상직폭포의 두 곳. 큰샘실이란 크고 작은 수많은 샘과 암벽 사이로 솟는 물이 실폭포를 이루고 이 실폭포가 하나의 큰 물줄기처럼 보인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상직폭포는 높이가 무려 70m에 달해 비 내리는 날이면 우르릉거리며 쏟아지는 물줄기가 장관을 이루는 곳이다. 이곳 말고도 계곡으로 흘러드는 물길의 계곡 좌우의 골짜기에는 제법 큰 물줄기를 내리꽂는 폭포들이 도처에 비밀처럼 숨어 있다.
숲그늘이 짙은 야영장에는 때이른 캠핑족들이 텐트를 치고 숲과 계곡이 뿜어내는 정취를 만끽하고 있다. 더러는 숲길을 산책하고, 더러는 한낮 시린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있다. 미천골 휴양림은 매년 피서철로 접어들면 휴가객들로 넘쳐난다. 동해를 지척에 두고 있어, 바다와 계곡을 오가며 더위를 피할 수 있다는 절묘한 위치 덕이다. 그러나 휴가시즌을 살짝 피하거나, 휴양림을 지나 계곡을 더 거슬러 올라가면 한적하고 고즈넉한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다.
# 차단기를 넘어 불바라기 약수로 가는 길
미천골에서는 굳이 계곡을 더 거슬러 오르지 않더라도, 휴양림 안에 머무는 것만으로도 청정한 자연의 아름다움을 충분히 즐길 수 있다. 휴양림 계곡이 끼고 있는 숲길이 8㎞에 달하니 그 안에서 자연을 만끽하는 것으로도 부족함이 없다. 그럼에도 굳이 휴양림 계곡 끝에서 불바라기약수까지 4.8㎞의 임도 걷기를 권하는 까닭은, 그 길에서 휴양림에서와는 전혀 다른 풍경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휴양림 안의 길에서는 바라보는 풍경이 가깝고, 어디서나 쪼그려 앉으면 계곡의 맑은 물에 손을 담글 수 있다. 활엽수들이 울창해 초록색 그늘이 드리워진 길에서는 자연의 풍경이 아기자기하게 펼쳐진다.
그러나 휴양림을 지나고 차단기를 넘어 거친 비포장 임도로 들어서면서 길의 느낌은 완전히 달라진다. 불바라기까지 이어진 임도에는 아기자기한 풍경 대신 ‘거대하고 깊은’ 풍경이 기다리고 있다.
임도에는 숲그늘이 옅어서 시야가 탁 트인다. 그 길에서는 건너편 산자락과 그 능선에 치솟은 수목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부챗살처럼 가지를 펼친 침엽수들과 군데군데 서있는 고사목들이 웅장하다. 임도를 따라가며 점차 고도를 높이다 보면 물소리가 발 아래쪽에서 들려온다. 까마득한 벼랑 아래로 우당탕탕 계곡물이 굽이쳐 흘러간다.
건너편의 능선이나 발 아래 계곡 모두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전인미답의 공간들이다. 설악산이며 오대산 국립공원 내의 짙은 원시림들이 ‘출입금지’로 청정한 모습을 갖추고 있다면, 이쪽 산과 계곡은 도무지 사람이 손을 대려 해도 댈 수조차 없을 정도로 깊고 험해서 원시상태 그대로 남겨진 것들이다. 이런 원시림의 풍경을 바라보며 천천히 걷노라면 마치 웅대한 자연 속으로 저절로 빨려들어가는 느낌이다.
휴양림 끝의 차단기를 넘어 1시간30분쯤 걸으면 불바라기약수 입구에 닿는다. 임도에서 짙고 서늘한 계곡으로 내려서 물길을 따라 오르면 곧 비밀스럽게 감춰진 두 개의 폭포가 나타난다. 오른쪽이 황룡폭포고, 왼쪽이 청룡폭포다. 폭포는 공작처럼 화려하다. 이끼를 타고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부챗살처럼 퍼진다. 불바라기약수는 청룡폭포 중턱의 바위틈에서 난다.
불바라기란 이름은 인근에 철이 많이 나서 한때 산 아래 마을의 대장간이 불바다를 이뤘다고 해서 붙여진 것이라기도 하고, 탄산 성분이 강해서 입에 머금으면 불처럼 뜨거운 느낌이 든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얘기도 있다. 약수를 마셔보면 아마도 뒤의 이야기가 더 수긍이 가게 된다. 비릿한 쇳내와 함께 알싸한 탄산이 입안에서 ‘싸아’ 소리를 내며 뜨겁게 터진다.
가는 길
양양의 미천골은 가는 길도 빼어나다. 수도권에서 미천골에 가닿으려면 한계령과 구룡령, 조침령 중 한 곳을 넘어야 한다. 먼저 한계령을 넘어 오색을 지나 양양에 못미쳐서 구룡령 가는 길로 접어들어 미천골로 드는 길. 한계령을 넘으면서 펼쳐지는 기암괴석의 빼어난 정취를 만끽하면서 가는 길이다.
그러나 이즈음에는 구룡령이나 조침령터널을 넘는 길이 더 운치가 넘친다. 홍천을 지나 오대산 북쪽 자락을 스쳐 굽이굽이 구룡령을 넘어가는 길과 내린천 물길을 따라 새들도 자고 간다는 조침령(鳥枕嶺) 터널을 관통하는 길은 때 묻지 않은 산골마을의 정취가 그대로 남아있다. 특히 구룡령과 조침령 일대의 산촌에는 이즈음 감자꽃이 한창이다. 산자락을 갈아 만든 밭에는 흰 꽃잎과 노란 꽃술의 감자꽃이 가득하다.
묵을 곳 & 먹을 것
캠핑장비가 있다면 휴양림의 야영장에 텐트를 치는 것이 최고다. 미천골 휴양림의 숙소는 매월초 인터넷으로 선착순 예약을 받는데, 본격적인 휴가시즌이 아니라면 평일에는 간혹 빈방이 나오기도 한다. 미천골 휴양림은 다른 곳과는 달리 휴양림 안에 민간이 운영하는 펜션과 민박집들이 여럿 있다. ‘불바라기산장’ 등의 펜션들은 가격이 다소 비싸긴 하지만 카페도 갖추고 있고, 내부시설도 오히려 휴양림보다 낫다.
휴양림에서 나와 56번 국도를 타고 양양쪽으로 1.5㎞쯤 내려가면 황룡마을이다. 마을에는 민박집들이 있고, 공동으로 운영하는 ‘황토집’도 짓고 있다. 맛집으로는 양양읍내에 막국수와 냉면을 내는 ‘양양면옥’이 있다. 가자미회를 썰어넣은 새콤달콤한 회막국수로 유명하다.‘맛고을메밀국수’도 알아주는 곳이다.
* 불바라기산장(지역번호 033) 673-4589
* 황토집 (01...
* 양양면옥 671 - 2505 / 맛고을메밀국수 : 673 - 1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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