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죽헌-허난설헌 생가터
익숙한 강릉의 낯선 여행
봄꽃보다 진해라 조선여인의 향기
박경일 기자
▲ 가는 봄비가 먹빛 기와를 촉촉이 적시는 날, 검은 대나무(烏竹·오죽)를 둘러친 오죽헌에 들었다. 600년의 시간을 건너온 오죽헌 마당의 율곡매는 분분히 지고 말았지만, 어제각 주위를 둘러친 오죽의 연초록 새잎이 꽃보다 더 아름답다. 오죽헌은 비록 압축성장의 시대에 우악스럽게 복원돼 옛 맛을 잃었지만 사임당과 율곡의 정신만은 오롯이 느낄 수 있다.
▲ 오죽
강릉. 이곳보다 더 익숙한 여행지가 또 있을까요. 동해를 찾는 이들이 먼저 가닿게 되는 바다가 바로 강릉의 바다입니다. 강릉에 닿고 난 뒤에야 ‘다 왔다’는 안도감 속에서 다음 목적지를 고르게 되지요. 목적지가 어디건 동해로 향하는 여정의 출발은 강릉입니다. 예컨대 양양이나 속초를 최종 목적지로 정했다면 차로 강릉까지 가는 길은 ‘이동’일 뿐이고, 강릉에서부터 양양이나 속초로 향하는 길에 올라야 비로소 ‘여행’이 된다는 것이지요.
강릉의 명소는 익숙합니다. 경포대와 선교장, 오죽헌…. 사실 익숙하다는 것은 어찌보면 ‘좀 낡았다’는 뜻이기도 하지요. 이렇듯 잘 알려진 명소는 ‘우등생의 모범답안’과도 같습니다. 젊은이들로 북적이는 정동진 일대를 빼놓는다면, 강릉의 명소들은 주로 단체여행객이나 중년 이후의 관광객들로 가득합니다. 경포해수욕장은 밋밋하고, 선교장은 가보지 않았어도 다녀온 듯하고, 초당두부도 굳이 일부러 찾아가야 할 만큼 특별하달 것이 없지요.
그럼에도 봄날의 강릉을 찾아갑니다. 하나둘 꽃송이를 틔운 벚나무를 만나기 위한 것도, 긴 여정을 앞둔 겨울 철새들이 마지막 깃털을 고르는 경포호의 정취를 보러 떠난 길도 아니었습니다. 눈길을 휘어잡는 절경보다는 그곳에 오롯이 깃든 정신을 만나러 가는 길입니다. 사실 강릉의 진면목은 빼어난 경치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경포호에 뜨는 다섯 개의 달과 같은 비유적인 흥취나, 그곳을 거쳐간 옛사람들의 은근한 향기가 으뜸인 것이지요.
강릉에는 조선시대 전혀 다른 삶을 살았던 두 여인의 자취가 남아 있습니다. 한 곳은 신사임당의 오죽헌이고, 또 한 곳은 허난설헌의 생가터입니다. 두 곳 모두 순백의 자두꽃이며 분홍빛 벚꽃, 붉은 명자나무꽃이 만발해 있지만, 상춘의 나들이로 휙 스쳐 가기에는 아쉬운 곳들입니다.
먼저 들른 곳은 오죽헌입니다. 아들이 없는 친정에서 아들잡이를 하며 시집간 뒤에도 오죽헌에 머물던 신사임당은 이곳에서 셋째 아들 율곡 이이를 낳았습니다.
오죽헌에는 사임당과 아들 율곡이 두고 보았다는 600년 된 홍매화가 있습니다. 아쉽게도 때가 늦어 매화는 다 지고, 남은 꽃잎만 분분히 날리고 있었습니다. 눈앞의 매화가 400여년 전쯤 사임당이, 또 그의 딸 매창이 빠른 붓으로 탐스럽게 그려냈던 바로 그 매화입니다. 매화나무는 그때도 제법 아름드리였겠지요. 오죽헌의 매화나무 앞에 서면 시간을 생각하게 됩니다.
사실 이름난 오죽헌보다는 초당의 솔숲을 끼고 있는 허난설헌의 생가터가 더 발길을 오래 붙잡습니다. 신사임당이 가부장적 사회의 모범적인 여인상이라면, 그 정반대 쪽에 허난설헌이 있습니다. 시대와 불화했으며 비극으로 점철된 생을 살았던 허난설헌의 삶은 짧고도 강렬합니다. 그가 남긴 시구절은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아릿아릿하고, 또 핏빛처럼 선명합니다.
스물일곱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면서 ‘자신의 작품을 모두 불태우라’는 유언을 남겼다는 허난설헌의 비극적인 최후에 가슴이 아려옵니다. 그래서일까요. 생가터 안채에 꽃을 떨구고 있는 늙은 매화는 마치 고통스럽게 가지를 뒤틀고 서있고, 꽃망울을 하나둘 틔우고 있는 벚나무도 고목의 늙은 가지가 힘겨워 보였습니다.
저 늙은 가지는 기억할까 여인의 눈물을…
강릉 생가에 깃든 허난설헌·신사임당의 자취
▲ 허난설헌 생가터의 고옥에는 오래 묵은 벚나무와 늙은 매화나무가 마치 시대와 불화했던 허난설헌의 고통스러웠던 삶을 상징하듯 가지를 뒤틀고 서있다. 난설헌은 비극적인 삶을 살면서 한번도 꽃을 피우지 못했지만, 고옥 앞 마당의 벚나무는 가지마다 꽃눈을 달고 화사한 꽃을 틔울 준비를 하고 있다.
▲ 오죽헌의 율곡매는 수령이 600년이니 신사임당과 율곡이 살았을 당시에도 제법 아름드리였을 터다.
▲ 오죽헌 별당. 오른쪽 방이 사임당이 율곡을 낳은 몽룡실이다.
# 허난설헌의 비극적인 삶을 되돌아보다
허초희(許楚姬)를 아시는지. 400여년 전 질곡 시대의 한복판에서 고통과 비극 속에 살면서도 빼어난 시를 남긴 비범했던 조선시대의 여인. ‘눈 속에 난초가 있는 집’을 호로 쓴 그가 바로 ‘난설헌(蘭雪軒)’이다.
그는 우리 역사에서 ‘최초의 국제적 베스트셀러 작가’였다. 짧은 생을 살다 간 허난설헌의 시는 그의 유언에 따라 대부분 불태워졌지만, 동생 허균이 필사해 남겨놓은 213편의 글만으로도 탁월한 솜씨를 들여다볼 수 있다. 이수광의 ‘지봉유설’에 실려 전하는 허난설헌의 빼어난 시 ‘채련곡’을 읽어본다.
‘가을의 호수는 맑고도 넓어 푸른 물은 구슬처럼 빛나는데 / 연꽃 무성한 곳에다 목란 배를 매어 두었네 / 임을 만나 물 건너로 연밥 따서 던지고는 / 행여나 누가 보았을까봐 한나절 혼자서 부끄러웠네’
연밥을 던져주는 것은 사랑 고백을 의미한다. 그는 평생을 갈망하고 꿈꾸었지만 단 한번도 연인을 가져보지 못했고, 지아비의 사랑도 받지 못했다. 난설헌의 문학적인 성취의 뒤편에는 더할 수 없는 비극적인 삶이 자리잡고 있다.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재능을 펼칠 기회조차 허락되지 않던 당시의 시대 분위기에다, 기생집을 전전하던 남편, 그리고 재주를 질시하던 시어머니와의 끝없는 불화, 그리고 두 자녀의 죽음…. 그의 삶은 질곡과 고통의 연속이었다.
난설헌은 마치 예언처럼 ‘부용꽃 스물일곱 송이가 붉게 떨어지니 / 달빛 서리 위에서 차갑기만 해라’<‘몽유기’ 중에서>란 시구절을 남기고 스물일곱 살이 되던 해에 눈을 감았다. 죽어서도 난설헌은 남편과 합장되지 못하고 생전에 잃은 남매의 무덤 곁에 함께 묻혔다. 그는 남매를 잃고 가엾은 그들의 영혼을 위로하며 ‘통곡과 피눈물로 목이 메인다’고 썼다.
그가 죽고 18년 뒤 중국에서 발간된 ‘난설헌집’은 중국 지식인들 사회에서 일대 선풍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명나라 사신으로 조선에 왔던 주지번은 허난설헌의 시를 대하고는 ‘빼어나면서도 화사하지 않고, 부드러우면서도 뼈대가 뚜렷하다’고 감탄했다. 이어 ‘난설헌집’은 일본에서도 출간됐다.
허난설헌이 행복했던 때가 있었다면 그것은 고향인 강릉에서 보냈던 어린 시절뿐이었으리라. 그가 고향 땅을 그리며 쓴 시를 읽는다. ‘나의 집은 강릉 땅 돌 쌓인 갯가로 / 문앞을 흐르는 물에 비단옷 빨았네 / 아침이면 한가롭게 목란 배 매어 놓고 / 짝지어 나는 원앙새만 부럽게 바라보네’ <죽지사3 전문>
# 허난설헌의 생가터서 뒤틀린 꽃가지를 쓰다듬다
허난설헌의 생가터는 강릉시 초당동에 있다. 허난설헌이 ‘비단옷을 빨았다’던 개울에는 아직도 맑은 물이 흘러 경포호로 흘러들고 있었다. 물가를 끼고 훤칠한 소나무들이 줄지어 서있는 초당 솔숲 역시 그때 모습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터다. 당시도 소나무 숲을 스치는 솔바람 소리가 이렇듯 청량했으리라.
실제 허난설헌이 살았던 생가는 남아 있지 않다. 동생 허균이 역모를 꾀했다는 죄목으로 능지처참되고 멸문지화를 당해 집안이 풍비박산나면서 생가도 허물어졌다. 그러다가 200년 전쯤 집터에 다시 집이 지어졌고, 허난설헌의 어머니와 성이 같은 강릉 김씨가 살다 몇 사람의 주인을 거쳐 지금은 강릉시가 소유하고 있다. 이 집이 ‘허난설헌 생가’가 아니라 ‘허난설헌 생가터’라고 불리는 까닭이 바로 이 때문이다.
허난설헌의 작은 오빠 허봉은 창원부사를 역임했으나 율곡 이이를 비판하다 탄핵돼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된 뒤 벼슬을 버리고 금강산에 들어가 객사했다. 일곱 살 터울 동생인 허균 역시 여섯 번의 파직과 세 번의 유배를 거쳐 좌참찬까지 올랐으나 역모죄로 저잣거리에 죽은 채로 매달렸다.
이런 비극의 가족사가 깃든 생가터에 세워진 집은 기품이 있으면서도 정갈하다. 솟을대문 앞에 늙은 벚나무들이 오랜 세월을 증거하며 서있고, 안채 마당에는 가지를 뒤튼 매화나무가 있다. 생가터 안팎으로 만발한 꽃들은 평생 한번도 피워낸 적 없는 허난설헌의 삶과 영혼을 위로하는 것일까. 분분하게 날리는 매화 꽃잎 속에서 시대와 불화했던 한 여인의 비극적인 삶을 돌이켜본다.
# 오죽헌에서 이상적인 여인상을 만나다
비극적인 생을 산 허난설헌과 가장 반대되는 삶을 살았던 인물이 바로 신사임당이다. 같은 지역인 강릉에서 나고, 비슷한 시대를 살았으며, 두 사람 모두 예술적인 재능을 갖추었지만 이들의 삶의 행로는 전혀 달랐다.
신사임당은 그림에 천부적인 재능을 지니고 있었지만 당시의 보수적인 여성적 가치의 틀에서 한발짝도 나서지 않았다. 남편을 보필하고 자식을 잘 키운 가부장적 사회의 이상적인 여인상으로 인정받았다.
사임당은 아들 없는 가문의 딸로 태어나 아들 노릇을 하며 친정의 대를 잇는다는 명분으로 친정살이를 했다. 그가 친정살이를 하던 곳이 바로 오죽헌이다. 셋째 아들 율곡을 낳은 곳도 오죽헌 현판이 붙은 옆방 ‘몽룡실(夢龍室)’이다.
오죽헌은 사임당이 태어나 자랐고, 시집간 뒤에도 다시 내려와 생활한 곳이지만 사임당보다 율곡의 자취가 더 짙다. 예컨대 오죽헌 처마 아래 아름드리로 자라난 600년 수령의 홍매화에는 ‘율곡매’란 이름이 붙어 있다. 사임당이 이 나무를 손수 가꾸었고, 그가 남긴 ‘묵매도’ 등의 그림도 이 매화를 보고 그린 것일 터. 심지어 맏딸의 이름까지 ‘매창(梅窓)’이라 지었을 정도로 사임당의 매화사랑이 각별했음에도 오죽헌의 고매화는 ‘사임당매’가 아닌 ‘율곡매’일 뿐이다.
# 오죽헌보다 난설헌의 자취에 더 끌리는 까닭
오죽헌(별당)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주거건축물이다. 1450년에 지어졌으니 무려 560여년의 시간이 차곡차곡 쌓인 집이다. 별채 뒤편의 툇마루에 걸터앉아 율곡매를 바라보거나, 기와담을 넘어 안채를 들여다보면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오랜 시간의 저편으로 여행하는 기분이다. 오죽헌 주위로 심어진 오죽(烏竹)은 물론이거니와 성성하게 가지를 뻗고 선 소나무들의 위용이 자못 당당하다.
그러나 여기까지다. 오죽헌의 사랑채와 안채, 행랑채 등을 갖춘 고택은 1975년 이른바 ‘오죽헌 정화사업’ 당시 철거됐다가 1998년에야 복원된 것이고, 율곡의 초상을 모신 사당인 ‘문성사’도 그 무렵 시멘트로 기둥을 세워 지었다.
압축성장 시기의 우악스러운 성역화 사업으로 오죽헌의 겉모습이야 흐트러졌지만, 집에 깃든 사임당과 율곡의 정신과 기운은 아직도 정갈하다.
하지만 강릉에서 오죽헌보다 허난설헌의 생가터에 자꾸 더 마음이 가는 것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음지에 있었던 비극적인 삶이 가진 향기 때문이리라. 오죽헌과 난설헌의 생가터를 돌아보면 조선시대 가부장적 사회에 순응했고, 그 아들 율곡도 유교이론과 부국강병설을 권력에 제공했던 사임당의 양지의 삶, 그리고 율곡을 비판하다 유배된 뒤 숨진 오빠 허봉과 역모로 능지처참된 일곱 살 터울 동생 허균과 함께 금기와 반역의 한복판을 비극적으로 살았던 난설헌의 음지의 삶을 자꾸 비교해보게 되리라.
양양 쏠비치 전망 좋아… 물회 ‘무제한 리필’
가는 길·묵을 곳·먹을 것
◆ 오죽헌·허난설헌 생가터 가는 길 = 영동고속도로를 따라 종점까지 가면 바로 강릉이다. 터널이 뚫리고 도로가 직선화되면서 강릉까지는 3시간 안쪽이면 넉넉히 가닿는다. 오죽헌을 가려면 강릉나들목으로 나와 경강로를 타고 강릉시청 방향으로 가다가 홍제교차로에서 좌회전한다. 여기서 7번국도를 따라 강릉문화원 앞을 지나 강릉대 앞길로 접어들면 바로 오죽헌이다. 워낙 유명한 곳이라 강릉시내 곳곳에 위치를 알리는 이정표가 있다. 허난설헌 생가터는 경포호의 남쪽에 있다. 강릉시내 한복판인 강릉역오거리에서 YMCA쪽으로 방향을 잡아 교통로와 동명로를 따라 직진한 뒤 한전 사옥을 지나 좌회전해서 들어가면 된다.
◆ 어디서 묵고 무엇을 맛볼까 = 경포해수욕장 일대에는 호텔과 모텔은 물론 제법 분위기 있는 펜션들도 많다. 굳이 해수욕장이 아니더라도 강릉의 해안을 따라 포구마다 펜션이나 모텔들이 즐비하다.
그러나 가족들과 함께 하는 여정이라면 최고의 숙소는 단연 양양 쏠비치다. 지중해풍의 리조트와 낭만적인 바다의 정취가 그렇게 잘 어우러질 수 없다. 특히 불을 켠 리조트앞 밤 바다의 모습이 압권이다. 코앞에 바다를 끼고 있는 콘도미니엄 B, C동이 가장 전망이 좋다. 강릉에서 양양 쏠비치까지는 40분 남짓 소요되지만, 오가는 시간을 투자하는 것이 전혀 아깝지 않을 정도다.
강릉 사천면 사천진 포구에는 물회집들이 들어서 있다. 이중 ‘진보수산’(033-644-1712)이 가장 푸짐하게 물회를 내온다. 이른바 ‘양푼이 물회’(사진)인데, 오징어와 가자미, 해삼과 전복을 초고추장에 비벼 말아낸 물회가 졸깃하고 상큼하다. 1만원짜리 물회를 인원수대로 주문하면 무제한 ‘리필’까지 해준다. 조개와 새우 등을 넣어 끓여내는 해물뚝배기(1만원)도 얼큰하다.
강릉 도심에서는 이른바 ‘대학로’로 불리는 신영극장 일대의 골목에 있는 ‘금학칼국수’(033-646-0175)를 추천할 만하다. 워낙 깊숙이 숨어 있어 현지인들에게 물어서 찾아가야 한다. 30여년의 내력을 가진 집으로 메뉴는 칼국수와 콩나물밥 단 두 가지. 된장을 풀고 고춧가루를 가미한 국물에다 얇게 밀어낸 칼국수를 말아서 내오는데, 칼칼하면서도 깊은 맛이 일품이다
<출처> 2009. 4. 1 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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