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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 및 정보/- 이집트, 아프리카

이집트, 아기예수 피난교회와 모세기념교회

by 혜강(惠江) 2009. 8. 5.

 

 성지순례 (39) : 이집트

 

아기예수 피난교회와 모세기념교회(벤 에즈라 회당) 

 

- 이집트에 있다는 이유로 예나 이제나 심한 박해를 받고 있다

 

 

 

 글·사진 남상학 

 

 

 

 * 아기예수 피난교회 및 모세기념교회 안내도

 


 구 카이로 지역에는 아기예수가 헤롯의 박해를 피해 애굽으로 피난했을 때 머물렀던 곳이며, 나일 강변에 버려진 모세를 바로왕의 공주가 건져냈다는 곳이다. 이를 기념하여 아기예수 피난교회와 모세기념교회가 세워져 있다.  



1. 아기예수 피난교회(아부사르가 교회)




  구 카이로 근교에는 아기예수가 헤롯왕의 박해를 피해 육신의 부모와 함께 애굽으로 피난 (마 2:13-18)왔을 때 머물던 장소를 기념하여 세운 아기예수 피난교회가 있다.  현지에서는 예수피난 교회를 '아부사르가 교회'라고 부른다.

  아부 사르가(Abu-Serga)는 성인 사르가(Saint Sergius)의 아랍어이다. 예수님의 가족이 잠시 이집트에서 피난 생활을 하던 거처라고 전해진 곳에 교회를 세우고 성인 사르가에게 헌정되었기 때문에 아부사르가 교회라고 명명되었다.

  원래 이 교회가 세워지기 전에는 로마의 사원이 있었고, 이 로마의 사원 동굴에 예수님이 머물렀다고 한다. 그러다가 7세기에 콥트교인들이 이 건물을 교회로 개조하여 사용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예배를 드리는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개신교에 소속된 교회지만 교회 내부의 분위기는 그리스정교회의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교회 내의 열두 제자를 상징하는 고린도 양식의 12개의 기둥이 있는데, 11개 기둥은 대리석으로 되어 있고 왼쪽에서 두 번째 기둥은 조금 다르게 되어 있다. 화강암으로 된 이 기둥은 가룟유다를 상징한다고 한다.


  그리고 안쪽 지하 동굴이 보존되어 있는데 지금은 들어가지 못하도록 철책이 쳐져 있다. 강물이 스며들어 내부를 공개하지 않고 있다고 하는데 왠지 수긍이 가지 않는다. 사제들이 사진 촬영을 엄격하게 통제하고 있어 사진을 찍지 못했다.  

  교회 주변에는 20여 가구의 크리스챤 가족이 거주하는 집들이 있다. 이집트에는 기독교들이 최고로 많을 때는 인구의 74%까지 육박했으나 그 후 기독교에 대한 탄압과 핌박이 계속되면서 점차로 줄어들어 현재는 8%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러나 이곳에 거주하는 기독교인들은 끝까지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아이가 태어나면 몸에 십자가 문신을 하는 등 비장한 각오로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 아기예수 피난교회

 

* 들어가는 입구와 복도 

 

* 아기예수피난교회 내부 

 

* 아기예수피난교회 내부에 걸린 성화

 

* 들어가는 골목에서 판매하는 성화 및 서적 

 

 

 



2. 모세의 기념회당(벤 에즈라 회당)

 


  아기예수 피난교회로부터 불과 300-400m 떨어진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유대인과 콥틱교인들은 이곳을 바로의 딸이 모세를 건져낸 곳으로 보고 있다. 처음의 위치는 나일 강변이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나일강의 수위가 낮아져서 주변에서 나일강은 볼 수 없다. 그러나 회당 뒤편에 우믈이 있는데 이 우물은 회당 밖 지하로 연결되어 물이 흐르고 있다고 한다. 나일강변에 버려진 모세를 바로의 공주가 물에서 건져낸 곳이 바로 이곳이라 하여 이 우물을 ‘모세의 샘’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지역은 애굽의 수도였던 곳은 아니고 바로의 별궁이 있던 지역이었다는 설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또한 전승에 의하면 모세가 출애굽하기 전에 마지막 기도를 드린 장소라고도 전해지고 있다. 이 때 모세는 이곳에 머물렀다는 증거가 될 만한 표지(標識)를 남겨두었다고 한다. 그런데 바벨론 포로기에 예레미야와 함께 이집트로 돌아온 유대인들이 모세의 표지를 발견하고서 그곳에 예레미야의 이름으로 회당을 지었다.

  이 회당 안에는 히부리어로 쓰인 두 개의 판이 보이는데 모세가 이 장소에서 기도하고 하나님께 응답을 받았다는 내용이 쓰여 있다. 또 회당 안에는  토라, 탈무드, 시가서가 보존되어 있다.  회당 주변에는 오래된 무덤들이 있는데. 예례미아 선지자가 바벨론 군사들에게 끌려와 이곳에서 죽었다는 학설도 있다. 교회 안에 예례미아 가묘가 있다.

  후에 이 회당은 콥틱교인들에게 넘어가 8세기 초까지 ‘가브리엘 교회’로 불렸다. 그러다가 이것이 아랍인에 의해 파괴되었다가 1,115년에 랍비 아브라함 벤 에즈라가 예루살렘에서 이곳으로 내려와 그 자리에 회당을 다시 지었다.  현재의 회당의 이름은 그의 이름을 따라 명명된 것이다.

  1894년에 미국의 역사학 교수 Shichter는 오래된 토라가 보관되어 있던 ‘게니쟈’를 발견했다. 이곳에 옛 회당이 있었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그는 여기서 다양한 시대의 10만 권의 책들을 발견했는데, 이 중에는 ‘벤 시라의 책’과 당시 이스라엘인들의 애굽 생활상을 볼 수 있는 결혼 약정서나 무역 맹세서와 같은 문서들도 있다.  이곳도 아기예수 피난교회와 마찬가지로 이집트 경찰이 입구에 지켜 무분별한 출입자들을  통제하고 있었다.

 

 

* 모세 기념 유대회당(벤 에즈라 회당)

 

* 모세기념교회 안내판(상), 골목(중), 모세기념교회(하)

 

* 모세기념교회 내부(강단)

 

* 두 기념교회를 알리는 거리의 간판과 상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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