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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 및 정보/- 이집트, 아프리카

이집트 피라미드와 스핑크스, 파라오들에 대한 인간 숭배의 극치

by 혜강(惠江) 2009. 8. 4.

 

성지순례 (38) : 이집트 피라미드와 스핑크스

 

파라오들에 대한 인간 숭배의 극치

 

 

 

·사진 남상학 

 

 

 

 

 * 카이로 기자 지구에 서 있는 세 개의 피라미드

 

 

    피라미드(pyramid)는 일반적으로 정사각뿔 꼴의 고대 유적을 가리킨다.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고대 중국, 중앙아메리카 등 많은 문명권에서 피라미드 형태의 유적을 만들었다. 피라미드가 지어진 연대는 대체로 BC 2680년 경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한다. 아브라함이 BC 2100년경 애굽으로 이주하였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렇다면 그보다 500년 전에 해당한다.

  피라미드의 어원은 고대 그리스어 '피라미스'이며, 이집트인은 '메르라'라고 불렀다고 한다. 현재 80여 기가 알려져 있으나 대부분 카이로 서쪽 아부 라와슈에서 일라훈에 이르는 90㎞인 나일 강 서안 사막 연변에 있다.  우리가 주로 관람하는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는 기자(Giza) 지구에 있는데, 카이로 중심에서 서쪽으로 약 13㎞ 정도 떨어진 사막지대에 서 있다.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의 피라미드 

 



  우선 피라미드는 그 크기와 규모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기자(Gyzah) 지구에 들어섰을 때 정면으로 보이는 피라미드는 세 개였는데 가장 큰 피라미드는 쿠프 왕의 것이며, 나머지는 카프레 왕의 것, 맨카우리 왕의 것이라 한다. 그중 가장 큰 것은 쿠프왕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 크기가 밑변 230m, 놀이 약 140m 정도가 된다고 한다.

 

  현재 피라미드에 대해 남아있는 최고(最古)의 기록은 그리스 역사가인 헤로도토스의 《역사》2권에 있는데, 거기에는 '기자의 대(大) 피라미드 하나를 건설하려면 2.5t의 돌덩어리 230-240 만개가 필요하며, 10만 명이 3개월 교대로 20년에 걸쳐 지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피라미드는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문화재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규모의 그 많은 피라미드를 어떻게 쌓았을까?  재료가 되는 돌덩이는 나일강이 홍수가 났을 때 멀리 960㎞ 떨어진 상류로부터 배로 옮겨왔고, 이 돌들을 밀고 끌어서 하나하나 깎고 다듬어서 쌓는 데는 주로 노예와 전쟁 포로들이 담당하였다고 한다.


  피라미드의 가장 경이로운 점은 아마도 그 거대한 구조물의 방향일 것이다. 각 능선은 거의 정확하게 동서남북을 가리키고 있다. 그 각도의 오차는 진북(眞北)에서 5분 밖에 벗어나 있지 않을 정도로 너무나도 미미한 것이어서, 우연의 배열의 결과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현대 20세기의 건축물로도 따라갈 수 없는 정확성은 도저히 인간의 작품이라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이다.

 

  105 m 높이의 '상승통로'는 완벽한 배열에서 1cm 도 벗어나지 않으며, 이 피라미드가 건조될 당시 천구(天球)의 북극에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던 용 자리의 알파 별을 지표로 삼아 이 통로를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학자들도 있다.



  이런 놀라운 배열로 미루어 보아, 피라미드는 단순한 무덤이 아니라, 해시계이고, 달력이고, 동시에 천문대였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원래의 높이는 147 m 지만 이 피라미드는 동지무렵에는 80 m 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봄에는 그 길이가 거의 0으로 줄어든다. 따라서 그림자의 길이를 이용하여 하루의 시간을 재고, 계절을 식별하고, 한해의 정확한 길이를 측정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집트의 피라미드 안에는 시신을 안장하는 공간 외에 생전에 사용하던 각종 생활 기구와 용품, 때로는 왕비와 하인들을 함께 같이 매장하기도 했다고 한다. 죽은 이들을 위해 수십만의 산 사람들이 죽어가며 건설했다는 이 믿기지 않은 얘기가 엄연한 현실이고 보면, 파라오(성경상의 바로왕)들, 파라오에 대한 인간 숭배와 그들의 우상 숭배가 얼마나 극도에 달했는지 가히 짐작이 간다.

 

  또 죽은 후에 내세를 생각해서 자신의 미이라와 함께 물건들을 함께 넣어 살아가기를 기대했다면 죽어서도 영화를 누리려는 인간의 욕심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을 것만 같다.


  아주 좁은 통로를 고개와 허리를 숙이고 계단을 내려가면 왕의 시신을 안치한 석실에 다다르게 되는데, 3평 정도의 공간에는 전시된 물건이나 안내 표지판, 그 외 아무것도 없이 썰렁했다. 그 많은 노역(勞役)으로 완성한 것들이 이렇게 허무한 것을 알았다면 무고한 일은 저지르지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어 씁쓸한 느낌이었다. 

 



 *권력의 상징, 인간 숭배의 극치, 피라미드

 

*묘지 입구와 지하계단 및 내부 

 

* 피라미드 앞에는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낙타 투어가 있다.  

 

 * 피라미드를 배경으로 우리 일행이 기념사진을 찍었다. 

 

* 아내인 이종임 권사(좌)와 친구 김영주 권사(우)

 

 * 우리 부부도 촬영 포인트로 이동하여 기념사진 한 컷

 

 

 

피라미드를 지키는 수호신 스핑크스

 


  기자의 두 번째 피라미드 옆을 지나 2-3백m 내려가면, 피라미드만큼 유명세를 타고 있는 또 하나가 있는데, 카프레 왕의 피라미드 앞을 수 천 년이 넘도록 굳건히 지키고 있는 거대한 스핑크스이다.



  스핑크스란 이집트어로 후 헤레마쿠트 (Hu Heremaakhut) , 지평선 위의 호루스, 아랍이름은 '아불 훌'로서 '공포의 아버지'란 뜻을 지니며, 사막의 보호자로서 숭배되어 왔다. 현세의 무덤지기 신으로서, 내세의 보호자로서, 후기에는 신전지기로 기능하였다. 대 스핑크스는 피라미드처럼 돌을 쌓아 만든 게 아니고 원래 있던 바위산을 통째로 조각한 것이다. 전체가 하나의 석회 바위로 구성되어 있는데 길이 48.2m x 높이 21.0m 에 해당된다.   건설 이후 한동안 모래에 파묻혀 있었다가 투트모세 4세에 의하여 발굴되었다. 사람머리와 사자의 몸으로 형성을 이루고 있다.



   아랍군의 침입 후에는 코가 깎여 나갔고, 영국군에 의해 수염이 무참히 뽑혀 나가, 현재는 흉한 모습으로 바뀌어 공포의 모습은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뽑혀 나간 수염은 런던 대영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앞다리 사이에 투트모세 4세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는데, 꿈의 계시로 인해 모래 속에 파묻힌 스핑크스를 발굴하고 그 꿈의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카프레 왕에 의해 BC 2500년경 건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스핑크스에 풀리지 않는 새로운 의문점이 제기되고 있다. 우선 카프레 왕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는 제작법이 다르고 석재의 산지와 공법도 다르다. 그리고 최근 스핑크스 주위에 있는 벽에서 큰 홈들이 무수히 발견되었는데, 지질학자들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 홈들은 홍수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그 정도의 홍수는 1만 년 전 빙하기가 끝날 때에나 있었다. 하지만 빙하기에 이런 거대한 석상을 세울 만큼의 문명이 있었다고 생각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는 역사적 근거로 널리 받아들여진 것은 현재로서는 없다.



  스핑크스가 세워진 앞 광장에선 매일 밤 소리와 빛의 쇼가 열린다. 어둠 속에서 화려한 조명, 웅장한 효과음과 함께 피라미드와 스핑크스가 등장하는 광경은 관광객에게는 잊지 못할 구경거리라고 한다. 

 

 

 

* 피라미드를 지키고 있는 스핑크스, 거리와 각도를 조정하여 촬영해 본 것 

 

* 일행의 뒤로 스핑크스와 피리미드가 보인다.

 

* 스핑크스, 피라미드를 배경으로 인증샷

 

*스핑크스 탐방을 마치고 어느 기념품 판매장에서 휴식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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