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근교 산책
서울 한복판에서 녹음에 홀리다
채지형 여행작가
창덕궁 옥류천으로 오르는 산책길.
나에게는 오랜 친구 같은 길 두 곳이 있다. 가까이 있어서 언제든 찾을 수 있고, 언제 찾아가든 마음이 포근해지는 산책길. 서울 중심에 있는 창덕궁과 부암동 백사실 계곡이 바로 그곳이다. 해가 쨍쨍 비치는 날은 물론이고 비가 오거나 눈이 오는 날도 상관없다. 언제 어떤 모습으로 가도 기다렸다는 듯 어깨를 다독여주고 따뜻하게 안아준다. 그 길 위에서 수백 년을 살아온 고목들이 귀에 대고 속삭인다.
“그래, 잠시 쉬어 가도 괜찮아.”
왕들의 산책길, 창덕궁 후원
초록이 그립던 5월 초, 창덕궁 후원으로 향했다. 엄청난 에너지를 뿜어낼 것 같은 한여름의 초록보다 야들야들한 연초록빛을 띤 5월이야말로 초록이 가장 아름다울 때. 이런 5월에 왕이 된 기분으로 창덕궁 후원을 거닐어보는 것은 어떨까 싶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 했던가. 전날에 한여름 날씨를 보이더니 갑자기 아침부터 먹구름이 끼고 부슬부슬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결국 창덕궁 후원에서의 아침 산책은 비와 함께 출발해야 했다.
궁궐 정문인 돈화문을 들어서면 신하들의 하례식이 있던 인정전과 국가의 정사를 논하던 선정전으로 이어진다.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창덕궁은 광해군 때 정궁으로 사용한 뒤부터 1868년 경복궁이 중건될 때까지 왕들이 정사를 보살펴온 법궁이었다. 왕이 정사를 보던 구역들이 차례로 나타난다.
옥류천 가는 길에 있는 취한정(맨 위 사진). 부암동 백사실 계곡(좌측 사진). 백사실 계곡의 연못(우측 아래 사진).
진정한 산책 코스는 30분쯤 걸어 들어가야 나오는 후원에 있다. 조선 태종 때 만들어진 후원은 ‘비원’이라고도 알려져 있는데, 조선시대에는 궁궐 북쪽에 있다고 해서 ‘북원’이라 불리기도 했다.
창덕궁 후원은 왕족들만을 위한 휴식처로 쓰이던 곳으로, 이곳에 가면 누구나 왕이 되어 산책하는 즐거운 상상에 빠진다. 조선시대 왕들의 시름과 고민을 다 받아주었을 수령 300년이 넘은 고목 아래를 거닐다 보면, 조선시대가 그다지 멀게 느껴지지 않는다.
우주를 담고 있는 연못, 부용지
창덕궁 후원은 부용지에서 시작된다. 사진 애호가들의 마음을 가장 설레게 하는 곳이 바로 부용지다. 단아하게 연못 옆에 자리하는 정자, 그리고 부용정과 주합루, 소나무가 수면에 그려내는 물그림자는 사진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꼭 자신만의 렌즈에 담고 싶어 하는 포토 포인트다.
사진을 좋아하는 사람들뿐이랴. 누가 꼽아도 부용지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연못이다. 아담해 보이지만 그 속에 들어 있는 뜻은 원대하다. 부용지의 사각형 연못은 땅을 상징하고, 가운데 떠 있는 둥근 섬은 하늘을 나타내 부용지 자체가 우주를 담아낸다. 부용지를 내려다보는 주합루와 영화당, 부용정이 부용지를 가운데 두고 짜임새 있게 자리해 정원의 조화미를 고조시켜 준다.
연못에 기둥을 내린 부용정은 십자 모양의 정자로, 주합루에서 바라본 모습이 연꽃이 떠 있는 모양이라고 해서 이 같은 이름이 붙었다. 이 일대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인 영화당은 왕족들의 휴식처이자 과거 시험장이기도 했다. 영화당 현판은 숙종의 아들인 영조의 친필이다.
부용지를 지나면 창덕궁의 가장 은밀한 곳, 옥류천으로 향하는 길이 나온다. 궁궐에 온 것인지 산림욕장에 온 것인지 구분이 안 갈 만큼 사방이 푸르름으로 뒤덮여 있다. 비가 오면 숲 향기는 더욱 진하게 풍긴다. 향기로운 숲을 따라 들어가면 소요정을 비롯해 청의정, 태극정, 취한정, 농산정 등 5개의 소박한 정자가 등장한다. 그리고 왕이 유상곡수를 즐기던 소요암이 나타난다. 소요암에는 인조의 ‘옥류천(玉流川)’이라는 어필과 숙종이 쓴 오언절구시가 새겨져 있다. 이제는 내려가야 하는 길. 창덕궁 후원을 뒤로하고 내려가는 길은 아쉽기만 하다.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부암동 백사실 계곡
친구와 둘이, 또는 혼자서 호젓하게 산책하고 싶다면 백사실 계곡을 추천한다. 누구든 백사실 계곡에 처음 가는 이라면 흥분을 감출 수가 없다. 서울 한복판에 이렇게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과 훌륭한 숲이 있는지 놀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백사실 계곡은 부암동 주민센터에서 북악산 자락을 따라 걸어올라가다 보면 나오는 곳으로, ‘오성과 한음’ 일화로 잘 알려진 백사 이항복의 별장터가 있던 곳이라 백사실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백사실 계곡의 미덕은 놀라울 정도로 울창한 산림이다. 서울 한복판에 이런 산림이 있으니 어딘가로 공간이동을 한 것 같다. 계곡을 따라 걷다 보면 물소리와 새소리에 먹먹하던 귀가 씻기고 싱그러운 초록에 눈이 밝아진다. 그뿐인가 이 계곡은 홍제천 최상류로 도룡뇽과 버들치가 살고 있는 1급수 지역으로, 도룡뇽 알주머니 수만 개가 발견되기도 했다. 계곡을 걷다 보면 우리 환경을 보존하기 위해 함부로 이곳에 사는 생명을 다루지 말아달라는 환경운동연합의 ‘개도맹 서포터즈’ 팻말도 볼 수 있다.
백사실 계곡 산책의 하이라이트는 이항복 별장터 부근의 연못이다. 지름이 약 20m 되는 연못 주위에 키 큰 나무들이 그림 같은 풍광을 만들어낸다. 주변에 놓인 돌의자에 앉아 있다 보면,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아득해질 정도로 현실감각이 사라진다.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자연과 함께 하나가 된 백사실 부근 건물터와 바위들을 만나는 것도 즐거움이다. 연못 부근에 있는 바위에는 ‘백석동천(白石洞天)’이라고 쓰인 큰 바위가 있는데, ‘동천’은 경치가 멋진 곳에 붙여지던 것이니 예전부터 이곳의 경치가 유명했던 모양이다. 문화재청은 백사실 부근 바위와 건물터 일대를 사적 제462호로 지정, 보호하고 있다. 백사실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로 뒷골이라는 곳이 있는데, 여기에서는 지금도 10여 집이 농사를 짓고 살아간다. 서울 한복판에서 짓는 농사라. 농사로 생업을 이어가는 이들을 보는 것도 새로운 상상력을 품게 해주기에 충분하다.
서울에 갈 곳이 없다고? 서울에 쉴 곳이 없다고? 생수 한 병 들고 부암동으로 가는 버스에 올라타보자. 숲 속 길을 걷다 보면 어떻게 하면 좀더 행복하게 살 수 있을지, 그 방법이 하나씩 펼쳐질 것이다.
TIP
창덕궁 창덕궁의 단점이라면 개별 관람을 할 수 없다는 것. 정해진 시간에 여러 사람과 함께 들어가서 산책을 하고 나와야 한다. 인터넷(http://www.cdg.go.kr)에서 예약해두는 것이 좋다. 자유 관람을 하고 싶다면 매주 목요일을 이용하자. 월요일은 쉬는 날이니 주의.
백사실 계곡 종로구 부암동에는 색색의 패브릭을 판매하는 ‘스탐티시’와 드라마 ‘커피프린스 1호점’에 나온 ‘산모퉁이’ 등 독특한 카페가 많다. 부암동 주민센터에서 출발해, 향긋한 커피 향이 풍겨나오는 ‘클럽 에스프레소’(02-764-8719)에서 커피를 한잔 마시고 환기미술관에서 작품을 감상한 뒤, 천천히 백사실 계곡 쪽으로 이동해도 좋다. 계곡을 산책하는 데는 넉넉잡아 2시간이 걸린다. 부암동 주민센터에서 출발하면 현통사를 지나 세검정 쪽으로 내려가게 된다.
<출처> 2009. 5. 19 / 주간동아 68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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