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골공원
3·1운동의 현장, 탑골공원을 찾아서
글·사진 남상학
종로 한복판, 대형 건물로 둘러싸인 도심 속에서 작지만 공원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는 곳. 인사동 들머리 오른쪽에 있으면서도 노인들의 놀이터로 전락해 버린 곳. 그럼에도 그 역사적 가치와 의미는 여전히 살아있다.
종로의 대로를 향해 나 있는 정문은 '삼일문'이란 현판을 달고 있다. 도로변에는 바삐 지나가는 사람들로 동적인 느낌이 들지만, 삼일문을 통과하는 순간 그 느낌은 정적인 것으로 바뀐다. 천천히 산보하거나 의자에 앉아 사색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문과 담장을 사이에 두고 마치 다른 세상처럼 서로 대비되고 있다.
현재의 탑골공원이 있는 자리는 고려 시대에는 흥복사(興福寺)라는 절이 있었다. 그러나 태종의 억불정책 때문에 절은 없어지고, 세조 10년(1464) 5월에 다시 절을 세워 원각사(圓覺寺)라 하였다. 기본적으로 억불정책이 진행되던 시기였지만 왕에 따라 불교를 신봉하기도 하였으니, 일시적으로 탄압이 약화된 결과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완성된 사찰에는 본당인 대광명전(大光明殿) 이외에 많은 건물이 있었지만, 두드러진 것은 세조 10년 전국에서 모은 동 5만근으로 주조하여 완성한 원각사종(국보 제2호)과 13년(1467) 4월 8일에 완성하여 그 안에 분신사리와 새로이 번역한 원각경(圓覺經)을 안치하였다고 하는 10층 석탑이었다.
그러나 성종 이후 억불정책은 다시 강화되었고 결국 연산군 10년(1504)에 이르러 폐사되었고, 다음해 기생과 악사들을 관장하는 장악원(掌樂院)을 이 자리로 옮겼다. 이후 폐사가 된 이곳을 종과 탑, 그리고 비석만이 지켰다. 그중 원각사 종은 광해군 이후 종각 즉 지금의 보신각에 매달리게 되었다. 범종으로서가 아니라 한양 사람들에게 시간을 알려주는 역할로 자신의 임무를 바꾼 것이다. 그나마 1985년 새 종이 만들어지면서 지금은 박물관으로 옮겨져 쉬고 있다.
탑과 비만이 쓸쓸하게 남아 있던 이곳이 다시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897년이었다. 대한제국 광무 원년인 1897년 정부의 고문자격으로 와 있었던 영국인 고문 J.M.브라운(John Mcleavy Brown, 백탁안(柏卓安))의 건의에 따라 서구식 공원으로 설계하여 이곳에 남아 있던 원각사탑의 이름을 따 파고다공원이라 하였다. 이로써 기록상 우리나라 최초의 공식 공원이 되었다. 탑동공원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공원이 된 당초에는 빈 땅에 간단히 울타리를 두르고 몇 십 그루의 나무를 심고 의자를 갖다 놓은 정도에 불과했으나, 그 동안 공원의 북서쪽 둘레에 있던 파고다아케이드가 임대기간 만료로 철거됨에 따라, 1983년에 투시형 담장을 설치하고 서문(西門)과 북문(北門) 등 사주문을 복원하여 공원 부지도 확장·정비하여 조상의 독립정신을 기리는 사적공원(史蹟公園)으로 면모를 일신시켰다. 현재의 면적은 1만 5,720㎡. 1991년 10월 25일 사적 제354호로 지정되었고, 1992년 이곳의 옛 지명을 따라 파고다공원에서 탑골공원으로 개칭하였다.
그러나 탑골공원은 단순한 쉼터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삼일문을 지나면 바로 오른편에 있는 '3·1독립선언기념탑'과 손병희 선생의 동상이 이를 말해준다. 탑골공원은 1919년 3.1운동당시 독립선언문(獨立宣言文)이 낭독된 역사의 현장이었다. 당시 아침부터 파고다공원에는 4,000~5,000명의 학생들이 모여들었는데 정오를 알리는 오포(午砲) 소리가 울리자 학생 정재용(鄭在鎔)이 공원 내의 팔각정에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에 학생들은 태극기를 꺼내 흔들며 일제히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공원을 나설 때는 수만의 군중이 호응하여 함께 시위행진을 감행하여 대한문(大漢門)으로 향하였다. 전국에 번진 3․1운동 만세시위는 이렇게 탑골공원에서 점화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시위는 약 3개월여에 걸쳐 들불처럼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심지어는 만주, 연해주, 하와이에서까지 시위가 전개되었다.
역사적인 장소인 팔각정은 이제는 더 깔끔하게 단장된 채 공원의 한 요소로서 쉼터로서의 역할을 계속하고 있다. 안내문을 살펴보니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건축가라고 하는 심의석이 건축했다는 내용이 보인다. 아울러 대한제국 황실의 음악연구소 시설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지금 팔각정 계단에는 노인들을 비롯해 휴식을 즐기는 사람들이 앉아서 담소를 나누고 있다. 그날의 함성을 듣고 있을까? 나는 그날을 상상 속에 그려보며 '3.1절 노래'(정인보 작사 / 박태현 작곡)>를 혼자 중얼거린다.
기미년 3월 1일 정오 / 터지자 밀물 같은 대한독립 만세
태극기 곳곳마다 삼천만이 하나로 / 이날은 우리의 의요 생명이요 교훈이다
한강물 다시 흐르고 백두산 높았다 / 선열하 이 나라를 보소서
동포여 이날을 길이 빛내자
3․1독립선언기념탑은 3․1만세운동의 역사적인 장소에 빛나는 3․1정신을 후세에 전하고자 1980년에 건립한 것으로 기념탑에는 3․1독립선언서 전문이 적혀 있다. 그 내용은 조국의 독립을 선언하고, 인도주의에 입각하여 민족자결주의 바탕으로 비폭력적이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할 것을 천명한다는 것을 담고 있다. 이것은 오늘날 전해오는 세계 각국의 독립선언과 비교해 볼 때 전혀 손색이 없는 명문으로 평가되고 있다. 여기 <己未 獨立 宣言書(기미독립선언서)> 전문을 옮겨본다.
"吾等(오등)은 玆(자)에 我(아) 朝鮮(조선)의 獨立國(독립국)임과 朝鮮人(조선인)의 自主民(자주민)임을 宣言(선 언)하노라. 此(차)로써 世界萬邦(세계만방)에 告(고)하야 人類平等(인류평등)의 大義(대의)를 克明(극명)하며, 此(차)로써 子孫萬代(자손만대)에 誥(고)하야 民族自存(민족자존)의 正權(정권)을 永有(영유)케 하노라.
半萬年(반 만년) 歷史(역사)의 權威(권위)를 仗(장)하야 此(차)를 宣言(선언)함이며, 二千萬(이천만) 民衆(민중) 의 誠忠(성충)을 合(합)하야 此(차)를 佈明(포명)함이며, 民族(민족)의 恒久如一(항구여일)한 自由發展(자유발 전)을 爲(위)하야 此(차)를 主張(주장)함이며, 人類的(인류적) 良心(양심)의 發露(발로)에基因(기인)한 世界改造(세계개조)의 大機運(대기운)에 順應幷進(순응병진)하기 爲(위)하야 此(차)를 提起(제기)함이니, 是(시)ㅣ 天 (천)의 明命(명명)이며, 時代(시대)의 大勢(대세)ㅣ며, 全人類(전인류) 共存同生權(공존동생권)의 正當(정당)한 發動(발동)이라, 天下何物(천하하물)이던지 此(차)를 沮止抑制(저지억제)치 못할지니라.
舊時代(구시대)의 遺物(유물)인 侵略主義(침략주의), 强權主義(강권주의)의 犧牲(희생)을 作(작)하야 有史以來 (유사이래) 累千年(누천년)에 처음으로 異民族(이민족) 箝制(겸제)의 痛苦(통고)를 嘗(상)한 지 今(금)에 十年 (십 년)을 過(과)한지라. 我(아) 生存權(생존권)의 剝喪(박상)됨이 무릇 幾何(기하)ㅣ며, 心靈上(심령상) 發展(발 전)의 障碍(장애)됨이 무릇 幾何(기하)ㅣ며, 民族的(민족적) 尊榮(존영)의 毁損(훼손)됨이 무릇 幾何(기하)며, 新銳(신예)와 獨創(독창)으로써 世界文化(세계문화)의 大潮流(대조류)에 寄與補裨(기여보비) 할 機緣(기연) 을 遺失(유실)함이 무릇 幾何(기하)ㅣ뇨.
噫(희)라, 舊來(구래)의 抑鬱(억울)을 宣暢(선창)하려 하면, 時下(시하)의 苦痛(고통)을 擺脫(파탈)하려 하면, 將來(장래)의 脅威(협위)를 芟除(삼제)하려 하면, 民族的(민족적) 良心(양심)과 國家的(국가적) 廉義(염의)의 壓縮銷殘(압축 소잔)을 興奮伸張(흥분 신장)하려 하면, 各個(각개) 人格(인격)의 正當(정당)한 發達(발달)을 遂(수) 하려 하면, 可憐(가련)한 子弟(자제)에게 苦恥的(고치적) 財産(재산)을 遺與(유여)치 안이하려 하면, 子子孫孫 (자자손손)의 永久完全(영구 완전)한 慶福(경복)을 導迎(도영)하려 하면, 最大急務(최대 급무)가 民族的(민족 적) 獨立(독립)을 確實(확실)케 함이니,二千萬(이천만) 各個(각개)가 人(인)마다 方寸(방촌)의 刃(인)을 懷(회) 하고, 人類通性(인류 통성)과 時代良心(시대 양심)이 正義(정의)의 軍(군)과 人道(인도)의 干戈(간과)로써 護援 (호원)하는 今日(금일), 吾人(오인)은 進(진)하야 取(취)하매 何强(하강)을 挫(좌)치 못하랴. 退(퇴)하야 作(작) 하매 何志(하지)를 展(전)치 못하랴.
丙子修好條規(병자수호조규) 以來(이래) 時時種種(시시종종)의 金石盟約(금석 맹약)을 食(식)하얏다 하야 日本 (일본)의 無信(무신)을 罪(죄)하려 안이 하노라. 學者(학자)는 講壇(강단)에서, 政治家(정치가)는 實際(실제)에 서,我(아) 世宗世業(세종세업)을 植民地視(식민지시)하고, 我(아) 文化民族(문화민족)을 土昧人遇(토매인우)하야, 한갓 征服者(정복자)의 快(쾌)를 貪(탐)할 뿐이오, 我(아)의 久遠(구원)한 社會基礎(사회기초)와 卓 (탁락) 한 民族心理(민족 심리)를 無視(무시)한다 하야 日本(일본)의 少義(소의)함을 責(책)하려 안이 하노라.
自己(자 기)를 策勵(책려)하기에 急(급)한 吾人(오인)은 他(타)의 怨尤(원우)를 暇(가)치 못하노라. 現在(현재)를 綢繆(주 무) 하기에 急(급)한 吾人(오인)은 宿昔(숙석)의 懲辨(징변)을 暇(가)치 못하노라. 今日(금일) 吾人(오인)의 所任 (소임)은 다만 自己(자기)의 建設(건설)이 有(유)할 뿐이오, 決(결)코 他(타)의 破壞(파괴)에 在(재)치 안이하도다.
嚴肅(엄숙)한 良心(양심)의 命令(명령)으로써 自家(자가)의 新運命(신운명)을 開拓(개척)함이오, 決(결)코 舊怨(구원)과 一時的(일시적) 感情(감정)으로써 他(타)를 嫉逐排斥(질축 배척)함이 안이로다. 舊思想(구사상), 舊勢力(구세력)에 羈 (기미)된 日本(일본) 爲政家( 위정가)의 功名的(공명적) 犧牲(희생)이 된 不自然(부자 연), 又(우) 不合理(불합리)한 錯誤狀態(착오상태)를 改善匡正(개선 광정)하야, 自然(자연), 又(우) 合理(합리) 한 正經大原(정경대원)으로 歸還(귀환)케 함이로다. 當初(당초)에 民族的(민족적) 要求(요구)로서 出(출)치 안이 한 兩國倂合(양국 병합)의 結果(결과)가, 畢竟(필경) 姑息的(고식적) 威壓(위압)과 差別的(차별적) 不平(불평) 과 統計數字上 (통계 숫자상) 虛飾(허식)의 下(하)에서 利害相反(이해상반)한 兩(양) 民族間(민족간)에 永遠(영 원)히 和同(화동)할 수 업는 怨溝(원구)를 去益深造(거익 심조)하는 今來實績(금래 실적)을 觀(관)하라.
勇明果敢(용명과감)으로써 舊誤(구오)를 廓正(확정)하고, 眞正(진정)한 理解(이해)와 同情(동정)에 基本(기본)한 友好的(우호적) 新局面(신국면)을 打開(타개)함이 彼此間(피차간) 遠禍召福(원화 소복)하는 捷徑(첩경)임을 明知(명 지)할 것 안인가.
또, 二千萬(이천만) 含憤蓄怨(함분 축원)의 民(민)을 威力(위력)으로써 拘束(구속)함은 다만 東洋(동양)의 永久(영구)한 平和(평화)를 保障(보장) 所以(소이)가 안일 뿐 안이라, 此(차)로 因(인)하야 東洋安危 (동양 안위)의 主軸(주축)인 四億萬(사억만) 支那人(지나인)의 日本(일본)에 對(대)한 危懼(위구)와 猜疑(시의) 를 갈스록 濃厚(농후)케 하야, 그 結果(결과)로 東洋(동양) 全局(전국)이 共倒同亡(공도 동망)의 悲運(비운)을 招致(초치)할 것이 明(명)하니, 今日(금일) 吾人(오인)의 朝鮮獨立(조선 독립)은 朝鮮人(조선인)으로 하여금 正當 (정당)한 生榮(생영)을 遂(수)케 하는 同時(동시)에, 日本(일본)으로 하여금 邪路(사로)로서 出(출)하야 東洋(동 양) 支持者(지지자)인 重責(중책)을 全(전)케 하는 것이며, 支那(지나)로 하야금 夢寐(몽매)에도 免(면)하지 못 하는 不安(불안), 恐怖(공포)로서 脫出(탈출)케 하는 것이며, 또 東洋平和(동양 평화)로 重要(중요)한 一部(일부) 를 삼는 世界平和(세계 평화), 人類幸福(인류 행복)에 必要(필요)한 階段(계단)이 되게 하는 것이라. 이 엇지 區區(구구)한 感情上(감정상) 問題(문제)리오.
아아, 新天地(신천지)가 眼前(안전)에 展開(전개)되도다. 威力(위력)의 時代(시대)가 去(거)하고 道義(도의)의 時代(시대)가 來(내)하도다. 過去(과거) 全世紀(전세기)에 鍊磨長養(연마 장양)된 人道的(인도적) 精神(정신)이 바야흐로 新聞明(신문명)의 曙光(서광)을 人類(인류)의 歷史(역사)에 投射(투사)하기 始(시)하도다. 新春(신춘) 이 世界(세계)에 來(내)하야 萬物(만물)의 回蘇(회소)를 催促(최촉)하는도다. 凍氷寒雪(동빙한설)에 呼吸(호흡) 을 閉蟄(폐칩)한 것이 彼一時(피 일시)의 勢(세)라 하면 和風暖陽(화풍 난양)에 氣脈(기맥)을 振舒(진서)함은 此一時(차 일시)의 勢(세)ㅣ니, 天地(천지)의 復運(복운)에 際(제)하고 世界(세계)의 變潮(변조)를 乘(승)한 吾人 (오인)은 아모 躊躇(주저)할 것 업스며, 아모 忌憚(기탄)할 것 업도다.我(아)의 固有(고유)한 自由權(자유권)을 護全(호전)하야 生旺(생왕)의 樂(낙)을 飽享(포향)할 것이며, 我(아)의 自足(자족)한 獨創力(독창력)을 發揮(발 휘)하야 春滿(춘만)한 大界(대계)에 民族的(민족적) 精華(정화)를 結紐(결뉴)할지로다.
吾等(오등)이 玆(자)에 奮起(분기)하도다. 良心(양심)이 我(아)와 同存(동존)하며 眞理(진리)가 我(아)와 幷進 (병진)하는도다. 男女老少(남녀노소) 업시 陰鬱(음울)한 古巢(고소)로서 活潑(활발)히 起來(기래)하야 萬彙군象 (만휘 군상)으로 더부러 欣快(흔쾌)한 復活(부활)을 成遂(성수)하게 되도다. 千百世(천 백세) 祖靈(조령)이 吾等 (오등)을 陰佑(음우)하며 全世界(전세계) 氣運(기운)이 吾等(오등)을 外護(외호)하나니,着手(착수)가 곳 成功(성 공)이라. 다만, 前頭(전두)의 光明(광명)으로 驀進(맥진)할 따름인뎌.
<公約三章(공약 삼장)>
ㅡ. 今日(금일) 吾人(오인)의 此擧(차거)는 正義(정의), 人道(인도),生存(생존),尊榮(존영)을 爲(위)하는 民族的 (민족적) 要求(요구)ㅣ니, 오즉 自由的(자유적) 精神(정신)을 發揮(발휘)할 것이오, 決(결)코 排他的(배타적) 感情(감정)으로 逸走(일주)하지 말라.
ㅡ. 最後(최후)의 一人(일인)까지, 最後(최후)의 一刻(일각)까지 民族(민족)의 正當(정당)한 意思(의사)를 快(쾌) 히 發表(발표)하라.
ㅡ. 一切(일체)의 行動(행동)은 가장 秩序(질서)를 尊重(존중)하야, 吾人(오인)의 主張(주장)과 態度(태도)로 하 야금 어대까지던지 光明正大(광명정대)하게 하라.
朝鮮建國 4252년 3월 1일
그 곁에 손병희 선생 동상이 있다. 손병희 선생은 동학의 3대교주로서 이름을 천도교로 바꾸고 발전의 기반을 닦았다. 교주를 그만둔 후 그는 천도교의 정신적인 지도자로서 보성중학교(나중에 보성고보)를 인수하여 교육 사업에 힘쓰면서 여러 종교계 인사들로 민족 대표 33인을 구성했다. 이들이 중심이 되어 독립선언서를 기초하고, 독립선언 날짜를 정하는 준비 작업을 추진했다. 즉 3·1운동의 계획은 이들 민족 대표 33인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막상 3월 1일이 되자 이들은 사태가 커질 것을 우려하여 결국 음식점인 태화관에 모여 자신들끼리 독립선언서를 낭독함으로써 아쉬움을 남겼다.
3․1정신을 기리는 것으로 이 외에도 3․1정신찬양비와 각 지역별 3·1운동의 모습을 동판에 조각한 부조(浮彫)들이 있어 전국 각지로 번진 3·1운동의 모습을 전하고 있다. 서울에서의 시위 장면은 물론 북쪽의 함흥, 심지어는 남쪽의 제주도에서의 모습도 보인다. 그 중 단연 눈길을 끄는 것은 아우내 장터에서 시위를 주도하는 유관순의 모습이다.
또 공원의 한편에는 33인 중 한 사람이었던 한용운 선생의 선사비가 눈에 띈다. 그의 저항시 '님의 침묵'은 언제나 우리의 가슴에 남아있다. 그는 1897년(고종 16) 출생하여 1944년 타계한 승려이자 시인이며 독립운동가이다. 그는 불교계를 대표하여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당시의 함성소리를 떠올리며 바로 곁에 있는 비각으로 발길을 옮겼다. 팔각정 뒤의 원각사지10층 석탑과 함께 비각 안의 원각사비는 이곳이 본래 절이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국보 제2호인 원각사지 10층 석탑은 조선시대의 석탑으로는 유일한 형태로 높이가 무려 약 12m가 된다. 화려한 조각이 대리석의 회백색과 잘 어울려 더욱 아름답게 보인다. 탑을 받쳐주는 기단(基壇)은 3단으로 되어있고, 위에서 보면 아(亞)자 모양이다. 기단의 각 층 옆면에는 여러 가지 장식이 화사하게 조각되었는데 용, 사자, 연꽃무늬 등이 표현되었다.
탑신부(塔身部)는 10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3층까지는 기단과 같은 아(亞)자 모양을 하고 있고 4층부터는 정사각형의 평면을 이루고 있다. 각 층마다 목조건축을 모방하여 지붕, 공포(목조건축에서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위에 얹는 부재), 기둥 등을 세부적으로 잘 표현하였다. 우리나라 석탑의 일반적 재료가 화강암인데 비해 대리석으로 만들어졌고, 전체적인 형태나 세부구조 등이 고려시대의 경천사지 10층 석탑과 매우 비슷하여 더욱 주의를 끌고 있다.
탑의 윗부분에 남아있는 기록으로 세조 13년(1467)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으며, 형태가 특이하고 표현장식이 풍부하여 훌륭한 걸작품으로 손꼽히고 있다. 현재 원각사지 10층 석탑은 보호를 위해 투명한 유리 보호각으로 씌워져 있다.
비둘기들의 놀이터가 되는 바람에 그 배설물이 대리석 탑을 훼손시키는 것을 막기 위해 세운 고육지책의 결과이다. 때문에 사진을 찍을 때는 빛이 반사되어 잘 찍히지 않는다. 또한 높이가 주변의 장벽과 철 구조물 때문에 깔끔하게 석탑만 찍어내기가 그리 쉽지 않다.
팔각정 오른쪽에 4.9미터 높이의 보물 3호인 대원각사비(大圓覺寺碑)가 있다. 이것은 조선 세조11년(1465)에 흥복사 터에 중건한 원각사의 중건 내력을 기록한 것으로, 탑과 함께 이곳이 절이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또 하나의 흔적이다. 거북받침의 머리는 콧구멍이 뻥 뚫린 것이 돼지의 외모여서 다소 바보스럽게 보이기는 하나 그 우직함 때문에 몇 백 년 동안 이곳을 지키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높이 4.9m, 나비 1.3m의 비에는 앞면에 김수온(金守溫)이 글을 짓고 성임(成責)이 글씨를 썼으며, 뒷면의 추기는 서거정(徐居正) · 정난종(鄭蘭宗)이 각각 짓고 썼다. 대리석제의 비는 마모가 심하여 글씨를 알아볼 수 없는데, 다행히 비문의 내용이《속동문선(續東文選)》에 실려 있다.
또 하나, 이곳에는 앙부일구 대석이 있다. 이곳에서 우연히 발견한 해시계인 앙부일구는 세종 때 발명되어 물시계인 자격루와 함께 조선시대의 표준시계의 역할을 했다. 앙부일구는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던 당시의 운종가 즉 종로에 설치되어 일종의 공중시계로 사용되기도 했다. 안내문에는 19세기 초까지 종로를 지키고 있다가 사라진 후 대한제국시대 전차 공사 중 발견되어 이곳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이곳에 남아 있는 대석은 앙부일구를 설치한 받침대이다.
3·1운동의 함성소리가 메아리치는 듯한 탑골공원은 조선불교의 흔적, 나아가 세종시대의 과학, 최초의 공원의 모습 등 많은 볼거리, 생각거리를 제공해 주고 있어 역사와 문화 교육의 장(場)으로 안성맞춤이다.
그러나 탑골공원을 찾는 이들이 곤혹스럽게 하는 것은 이 공원이 갖고 있는 역사 의의를 잠시 나마 헷갈리게 하는 모습들을 발견할 때다. 어린아이들에게 굳이 보여주고 싶지 않은 어른들의 추태가 간혹 연출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누구를 막론하고 연중 무료로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장소이긴 하지만, 우리 모두가 좀더 정숙한 마음가짐으로 경건한 분위기를 만들어 가야할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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