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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서울

세종대왕기념관 탐방

by 혜강(惠江) 2008. 12. 17.

세종대왕기념관 탐방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청량리동 산 1-157

 

 

글·사진 남상학

 

 

 * 기념관 뜰에 세운 세종성왕기념탑 *


  겨울 어느 포근한 날 오후, 세종대왕기념관을 찾았다. 국문학을 공부한 사람으로서 서울에 살면서도 세종대왕기념관을 방문하지 못한 것이 못내 송구하던 차에 죄송한(?) 마음으로, 한편 큰 기대를 안고 방문했다.


  세종대왕기념관은 1956년 510돌 한글날 기념식장인 경기여자고등학교 강당에서 학․예술계와 교육계 중진 다수와 28개 문화단체 대표들이 발기․창립한 세종대왕기념사업회가 주축이 되어 건립되었다. 기념사업회는 세종성왕의 성덕과 위업을 추모하고 성왕의 민족 자주 정신과 애민 정신 및 과학스런 창조정신을 온 국민에게 계승시켜 민족중흥의 역사적 과업을 수행하는데 기여하고자 1968년 9월 10일 기공식을 거행, 1970년 1월 19일에 준공식을 거행하고, 준비과정을 거쳐 1973년 10월 9일 개관식을 거행함으로써 탄생시켰다.  이 기념관은 세종대왕 재위 시절의 업적을 기념하고 관련 유물들을 모아놓은 박물관으로서 지금 세종대왕기념사업회가 운영하고 있다. 

 

 

*정원에 세운 조형물과 기념관 *

 

 

  총면적 3,750평 대지에 750평 2층 건물로 지은 이 기념관은 1층의 세종문화진영실에 일대기실(一代記室), 한글실, 과학실, 국악실 등 4개 전시실을 마련하여 세종문화의 제반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2층에는 두 개의 간당을 비롯하여 각종 회의실, 연구실, 회의실, 사무실의 시설이 갖추어져 있고, 주변 경내에는 세종성왕 기념탑과 신도비를 비롯하여 구(舊)영릉에서 발굴한 각종 석물, 수표석, 해시계, 물시계 등의 문화재가 설치되어 있다.

 

  기념관 입구를 들어서니, 마침 한글학회 창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회가 이곳에서 열려 입구에서부터 청사초롱을 내걸고 방문객을 맞이했다. 정문을 들어서서 언덕길 우측에  비각이 있고 비각 안에 신도비가 있다. 이것은 구 영릉터(헌인릉 영역 내, 태종릉 옆)에서 발굴한 것으로 그곳에서 발굴한 석물과 함께 1974년 세종대왕기념관으로 옮겨 설치한 것이다.  


* 정면에서 본 기념관(위), 로비에 걸린 대형액자(가운데)과 세종실록(아래) * 



  신도비를 지나 언덕길이 끝나는 곳에서 왼쪽으로 보이는 건물이 기념관이다.  기념관이 생각보다 왜소하다는 인상이 들고 정원도 잘 정리되지 않은 상태였다. 예식홀을 안내하는 입간판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로비에 ‘세종어제 훈민정음 서문’이 쓰인 대형 액자가 벽에 걸려 있고, 그 아래 진열장에 진열된 세종실록이 세종대왕박물관이라는 인상을 풍겼다.  그런데 입장하려 하니 안내양이 사진촬영이 절대 금지라고 했다. 후랫쉬를 사용하지 않기로 하고 간신히 양해를 얻어  블로그에 올릴 사진 몇 장을 찍기로 했다.   



* 전시관 입구의 박물관현판(위)과 안내도(가운데), 세종대왕 어진(아래) *



  관람순서는 1층 세종대왕박물관이라는 간판을 따라 들어가 일대기실로부터 시작된다. 69평으로 된 일대기실에는 세종대왕의 어진과 세종대왕 재위 32년 동안의 업적(왕자시절의 독서도, 즉위도, 대마도 정벌도, 주자소도, 집현전 학사도, 지음도, 서운관도, 육진개척도, 이만주 정벌도, 측우기도, 훈민정음 반포도, 전제상정도, 내불당도, 강무도 등)을 14폭 동양화로 제작해 진열하여 대왕의 일대기를 이해할 수 있게 했다.  

 

* 한글실에 갈린 액자(위), 용비어천가(가운데), 삼강행실도(아래) *

 

   그 다음 한글진열실에는 세종대왕 때 지은 《훈민정음》을 비롯한 《용비어천가》, 《석보상절》,《월인천강지곡》, 《동국정운》, 《홍무정운역훈》등의 간행도서, 세종 이후의 간행 도서, 옛 활자 관계도서, 한글기계화 자료(타자기), 한글 글씨 병풍 등이 진열되어 있다. 국문학도(國文學徒)인 나로서는 한글진열실에 오래도록 머물며 훈민정음(訓民正音)을 만드신 세종의 위대한 업적 앞에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다.


* 전시된 각종 서적(위), 타자기들(아래) *

 

조선의 넷째 임금인 세종(1397-1450)은 태종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폐위된 양녕대군 대신 왕세자에 책봉되고 두 달 후에 왕위에 올랐다. 세종은 태종이 이룩해 놓은 안정된 왕권을 바탕으로 정치, 경제, 문화, 과학 등 사회전반에 걸쳐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다. 워낙 슬기롭고 능한 왕이라, 나라 안팎을 지키고 백성을 위하는 일을 많이 벌이면서, 무엇보다도 교육에 각별한 정성을 기울였다. 세종대왕의 약사를 간추려 보면,         

 

   세종의 성명은 `이도`이며 자는 원정(元正)이고, 시호는 '세종 장헌 영문 예무인성명효대(世宗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이다. 

   1397년(1세) 4월 10일(양력 5월7일) 태종의 셋째 아들로 한양에서 탄생하다. 
   1408년(12세) 2월 충녕군에 책봉되고 결혼하다. 
   1412년(16세) 5월 충녕대군에 진봉되다. 
   1418년(22세) 6월 왕세자로 책봉된다.
   1418년(22세) 8월 10일 왕위에 오르다. 
   1419년(23세, 세종 원년) 6월 대마도를 정벌하다.
   1420년(24세, 세종 2년) 3월 집현전의 기구를 확장, 궁중에 설치하다.
   1421년(25세, 세종 3년) 3월 주자를 만들어 인쇄술을 개량하다. 
   1423년(27세, 세종 5년) 9월 조선통보 화폐제를 창설하다. 
   1430년(34세, 세종 12년) 12월 [농사직설]을 전국에 펴내다. 
   1430년(34세, 세종 12년) 12월 아악보를 이룩하다.
   1431년(35세, 세종 13년) 3월 [태종실록] 편찬을 마치다. 
   1431년(35세, 세종 13년) 4월 광화문을 세우다.
   1432년(36세, 세종 14년) 1월 [팔도 지리지]를 편찬하다. 
   1432년(36세, 세종 14년) 6월 [삼강 행실도]를 편찬하다. 
   1433년(37세, 세종 15년) 6월 사군을 설치하여 국경이 압록강에 이르게 하다. 
   1433년(37세, 세종 15년) 8월 혼천의(천체 측정기)를 제작하다. 
   1434년(38세, 세종 16년) 7월 동활자 갑인자와 물시계(새로운 자격루)를 사용하다.
   1434년(38세, 세종 16년) 10월 앙부일구(해시계)를 제작하다. 
   1435년(39세, 세종 17년) 7월 경복궁 안에 주자소를 설치하다. 
   1437년(41세, 세종 19년) 4월 일성정시의(주야측우기)를 만들다. 
   1437년(41세, 세종 19년) 9월 야인(여진)을 정벌하고 6진을 설치하여 국경이 동북
으로 두만강에 이르게 하다.
   1441년(45세, 세종 23년) 8월 측우기를 제작하여 이듬해 5월에 측우하는 제도를 
정하여 실시하다. 
   1442년(46세, 세종 24년) 8월 [고려사]를 편찬하다. 
   1443년(47세, 세종 25년) 11월 전제를 정하는 관서(전제 상정소)를 설치하다. 
   1443년(47세, 세종 25년) 12월 [훈민정음](한글)을 창제하고 언문청을 설치하다. 
   1445년(49세, 세종 27년) 4월 [용비어천가]를 짓다.
   1446년(50세, 세종 28년) 9월 [훈민정음](한글)을 반포하다. 
   1447년(51세, 세종 29년) 7월 [석보상절],[월인천강지곡]을 편찬하다. 
   1447년(51세, 세종 29년) 8월 숭례문(남대문)을 개축하다. 
   1447년(51세, 세종 29년) 9월 [동국정운]을 편찬하다. 
   1448년(52세, 세종 30년) 7월 궁 안에 불당을 건립하다.
   1449년(53세, 세종 31년) 12월 [석보상절],[월인천강지곡]을 간행하다. 
   1450년(54세, 세종 32년) 2월 17일(양력 3월 16일) 승하하다.

 

  대왕은 즉위한 뒤 4년(1422)부터 책을 인쇄하는데 기초가 되는 활자의 글씨체 개량을 직접 지휘할 만큼 글에 대한 관심과 재능이 많았다. 이러한 정성과 뛰어난 자질은 세종 25년(1443) 음력 12월에 몸소 훈민정음 곧 한글을 만들어냄으로써 유감없이 빛을 내었다. 특히 집현전을 통해 인재를 배출하고 훈민정음을 보급하는 등 모든 분야에 민족 문화 민족의 우수성을 살려 국가의 틀을 확고하게 다졌다. 훈민정음의 창제 동기와 목적에 관하여는 세종대왕의 서문(序文)에 잘 나타나 있다.

 

* 간송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훈민정음 해례본》의 원본 *

 

 

  “우리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는 서로 잘 통하지 아니한다. 이런 까닭으로 어리석은 백성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아,  내가 이것을 가엽게 생각하여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니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쉬이 익혀서 날마다 쓰는 데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國之語音 異乎中國 與文子不相流通 故愚民 有所欲言而 終不得伸其情者多矣 予爲此憫然 新制二十八字 欲使人人易習便於日用耳)

 

* 세종어제 <훈민정음 서문>이 적힌 벽화 *


  
    그의 서문에는 자주정신(自主精神) ․ 애민정신(愛民精神) ․  실용정신(實用精神)이 배어 있다. 종재왕의 국가통치 철학과 백성에 대한 사랑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만약 세종대왕게서 훈민정음을 창제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당시에는 한자(漢字)를 모르면 자신의 생각과 뜻을 마음대로 나타내지 못하는 백성들이 너무나 많았다.  한자를 사용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가지나 남의 글이 불편이 크고 자주민으로서의 체면이 유지 될 수 없다.  한 마디로 말한다면 대왕의 훈민정음 창제로 우리는 우리 고유한 글자를 갖게 되었으며, 편리한 언어생활을 하고 되었으며, 문화민족으로서의 긍지를 얻게 되었고 참다운 역사시대를 열게 된 것이다. 참다운 인류의 역사는 언어의 기록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던가? 

  훈민정음이 만들어지기 전에도 우리나라의 언어 기록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신라 시대에도 한자의 음(音)과 훈(訓)을 따서 만든 이두문자(吏頭文字)로 어설프지만 의사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한자라는 남의 글을 빌려 우리의 언어를 담았을 뿐이며, 이러한 기록은 우리 조상들의 살아 움직이는 모습을 바로 전해주기에는 부족한 점들이 너무도 많다. 그러므로 우리말을 자유자재로 표현할 수 있는 우리글 훈민정음 창제야말로 참된 우리 겨레의 역사시대의 출발을 의미하는 것으로 우리 겨레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시기를 긋는 사건이다.

  세종대왕은 창제과정에서 당시 최만리(崔萬里) 등의 반대상소를 물리치고, 박팽년(朴彭年)·최항(崔恒)·신숙주(申叔舟)·성삼문(成三問)·강희안(姜希顔)·이개(李塏)·이선로(李善老) 등 집현전 학자들로 하여금 연구를 수행하게 하였는데 이들을 흔히 집현전 8학자라 불린다. 

 

* 훈민정음해례본 복사본(세종대왕의 서문과 글자의 제자원리 및 음가, 운용법을 설명한 책)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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