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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경북. 울산

‘신라 고도(古都)’의 신록엔 ‘조선’이 숨쉬고 있었다.

by 혜강(惠江) 2009. 5. 6.

 

경북 경주 

‘신라 고도(古都)’의 신록엔 ‘조선’이 숨쉬고 있었다

조선의 자취를 찾아… 색다른 경주 여행

 

문화일보 박경일기자

 

 

 

 

▲ 옥산서원 앞을 휘감고 흐르는 자계천변에는 수백년 묵은 아름드리 거목들이 어둑한 숲을 이루고 있다. 자계천의 암반을 흘러내리는 자그마한 폭포와 물길을 건너는 다리, 그리고 순백으로 피어난 이팝나무꽃들이 한데 어우러져 정취를 더하고 있다.

 

 

  옥산서원으로 드는 길은 수백년이 넘은 회화나무와 굴참나무, 향나무들이 숲을 이뤄 그야말로 울울창창합니다. 서원 앞을 흘러내리는 물에는 자줏빛(紫) 시내(溪)라 해서 ‘자계천’이란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천변에는 지금 이팝나무꽃이 소담스레 피어 온통 흰 눈이 내린 것 같습니다.

   자계천 물줄기가 바위 사이로 자그마한 폭포를 이뤄 흘러내리는데, 그 개울을 건너는 외나무다리에 걸터앉았습니다. 청아한 물소리와 신록의 가지를 흔들고 지나는 바람소리에서 봄의 향기가 묻어납니다. 아, 참으로 평화로운 봄날입니다.

  이곳은 경주입니다. 벚꽃이 다 지고 난 이즈음의 경주는 한가롭기 그지없습니다. 사실 경주는 벚꽃이 만개해 인파로 북적일 때보다는 아무래도 이렇듯 호젓한 시간이 더 어울리지 싶습니다. 그런 호젓함을 즐기려면 알려진 유물과 유적지들이 즐비한 경주의 한복판에서 조금 뒤로 물러서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경주가 신라의 고도(古都)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경주에 신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세월의 깊이와 왕도의 화려함에 뒷전으로 밀리고 말아 아는 이들이 적긴 하지만, 경주에는 조선시대 유림의 흔적들도 곳곳에 있습니다.

  경주에는 안동의 하회마을과 함께 양반마을의 전형으로 꼽히는 양동마을이 있고, 그 마을에서 나고 자란 조선 중종 때 문신 회재 이언적이 벼슬에서 물러나 은거했던 세심마을이 있습니다.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간 것 같은 양동마을의 정취도 좋지만, 그보다 이언적이 마흔 한 살의 나이에 관직에서 물러나 은거했던 독락당과 그를 배향한 옥산서원은 그 주인이나 시간의 무게를 빼고도 더할 수 없이 아름다웠습니다.

  자계천을 끼고 세워진 독락당은 온통 독(獨)과 락(樂)의 공간입니다. 집을 낮추고 겹겹이 낮은 담을 쌓아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게 했습니다. 높은 담을 쌓아 자신을 가린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몸을 숙여 낮췄던 셈이지요. 독락당에서 가장 빼어난 곳이라면 바로 자계천변의 너럭바위에 한쪽 기둥을 딛고 선 운치 있는 정자인 계정(溪亭)입니다. 독락당에 은거했던 이언적은 계정에서만큼은 숨을 열고 자연을 고스란히 정자안으로 들여놓았습니다. 짙은 숲에 물이 어우러진 계정의 정취는 탄성을 자아냅니다.

 

 

 



  독락당을 굽이돈 자계천이 흘러내리는 쪽에는 옥산서원이 있습니다. 서원으로 향하는 길에는 한데 어우러진 거목들이 시간의 깊이를 그려 보입니다. 찾아드는 이 없는 서원은 물소리와 이따금 흔들고 가는 바람소리뿐 고즈넉합니다. 서원의 낡은 현판을 하나씩 읽어봅니다. 한석봉의 글씨는 흔하고, 추사 김정희와 퇴계 이황 솜씨까지 보입니다.

  경주시내에서는 시대와 불화했던 천재 매월당 김시습의 흔적을 찾아 남산에 올랐습니다. 금오산과 고위산을 거느리고 있는 남산은 골짜기마다 150곳이 넘는 절집과 석불, 석탑이 들어서 신라시대 장엄한 불국토를 이뤘던 곳이지만, 남산에 꼭 ‘신라의 것’들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남산 용장골에는 세조의 왕위 찬탈 소식에 책을 다 불태우고 평생을 유랑했던 김시습이 금오산실을 짓고 7년간 머물며 ‘금오신화’를 썼다는 용장사터가 있습니다. 그 절터의 뒤 깎아지른 벼랑에서 삼층석탑과 마주쳤습니다. 불과 4.5m의 높이에다 옥개석도 군데군데 깨져 나가긴 했지만, 바위 위에 우뚝 서서 저 아래 사바세계를 내려다보는 석탑은 병풍처럼 둘러쳐진 건너편 산의 능선들과 어우러져 웅장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남산 석탑엔 600년 전 김시습의 한숨 들리는 듯

 

 

 

경주 남산의 용장사터 위쪽 암반에 세워진 삼층석탑. 군데군데 깨진 탑은 그 자체로는 별다를 게 없지만, 탁 트인 공간과 높이가 함께 어우러지면서 웅장하고 경건한 느낌을 준다.

 

 

# 신라의 도시 경주에서 ‘조선의 시간’을 찾아 나서다

  경주를 찾는 사람들은 대개 도심 한복판의 신라 유적지들을 바쁘게 둘러보고 돌아간다. 그도 그럴 것이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경주의 유적들은 몇 날 며칠을 봐도 다 보았다 할 수 없는 탓이겠다. 경주에는 1000년이란 시간이 만들어낸 거대한 왕릉과 세월이 묻어나는 유적, 수많은 절집터에다 시간이 깎아낸 불상들까지 마음을 사로잡는 풍광이 도처에 있다. 여기다가 깃든 이야기들은 또 얼마나 많은지…. 그래서 누구나 경주에 도착하는 순간, 도무지 어디서부터 어떻게 봐야 할지 막막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경주는 거대한 시간의 지도를 펼쳐놓은 것 같은 땅이다. 석굴암과 불국사, 첨성대, 포석정, 대릉원, 천마총…. 목적지는 분명하되 이를 어떻게 골라내고 순서를 정해 돌아보느냐가 관건일 뿐이다. 그곳에 ‘무엇이 있느냐’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보느냐’의 문제라는 것이다. 하나라도 더 보기 위해 바지런히 발품을 팔아도 좋겠고, 책 몇 권 사들고 몇 곳만 골라서 꼼꼼히 들여다보는 방법도 있겠다. 어느 것도 그른 방법이 아니고, 또 어떤 것도 전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다.

   사정이 이러하니 ‘경주를 여행하는 법’에 대해 말하겠다면 도무지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난감할 따름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자주 놓치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수밖에 없겠다. 그렇게 찾아 나선 것이 바로 경주에 켜켜이 잠겨 있는 ‘조선의 시간’들이다.

   경주에서 조선의 시간을 가장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곳은 안강의 양동마을이다. 편안할 안(安)자에 편안할 강(康)자를 쓰는 이름답게 안강 일대에는 형산강이 유순하게 흘러가고 너른 평야와 무릉산, 도덕산의 부드러운 산세가 어우러져 있다. 양동마을은 경주 손씨와 여강 이씨가 세거해 누대에 걸쳐 살아온 곳. 경주 도심이 마치 신라의 시간으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을 준다면, 안강의 양동마을에서는 조선시대의 짙은 향취가 느껴진다. 마치 시간을 건너뛰며 여행을 하는 기분이다.

 

# 시선을 가리는 독락당과 자연을 끌어안은 계정

 

조선 중종 때의 문신인 이언적이 낙향한 뒤 지은 독락당의 계정.

 

 

  양동마을이 조선시대 고택들의 전시장 격이라면, 인근의 세심마을은 조선 중종 때의 문신인 회재 이언적의 자취를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사간으로 있으면서 중종의 사돈이자 당대의 실력자였던 김안로의 등용을 반대하다 관직에서 쫓겨난 이언적, 그는 고향 땅인 양동마을이 아니라 그 옆의 세심마을로 물러나 자계천변에 집을 지었다. 그 집의 사랑채가 바로 독락당이다.

   독락당은 고택의 풍모가 아름답기도 하지만, 여러모로 독특한 공간구조를 갖고 있다. 집 밖에서는 도무지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는다. 둘러친 담들이 낮은데도 그렇다. 담을 높이는 대신 집을 낮춰 지었기 때문이다. 집이 곧 깃들어 사는 이의 정신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독락당만큼 집주인의 마음과 자세를 그대로 드러내는 집도 흔치 않을 터다. 양동마을 대지주의 집에서 태어나 유복한 삶을 살다 정계로 진출했던 그는 권력다툼에 패해 낙향한 뒤 세상으로 향한 문을 모조리 닫고 싶었을 게 틀림없다. 그럼에도 그는 담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집을 낮추는 방법을 택했다.

   그러나 독락당에도 유일하게 ‘열린 곳’이 있으니 바로 정자인 계정(溪亭)이다. 물을 끼고 있는 반석에 세워진 정자는 아름답기 그지없다. 이언적이 지어 붙인 택호 ‘독락(獨樂)’은 자연과 벗 삼아 노니는 도가적인 그런 즐거움이 아니라 벼슬에서 물러나 ‘홀로 학문하는 즐거움’을 일컫는 쪽에 더 가깝지 싶다. 그렇다면 독락당의 계정에서 그는 술 몇 잔에 취해 음풍농월하기보다는 청량하고 촉촉한 물의 기운 속에서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으리라. 계정에 올라 자계천을 바라보며 이언적이 지은 한 줄 시구절을 떠올린다.

   봄 깊은 산야에 온갖 꽃이 새롭고 / 한가히 봄을 읊으며 혼자 걷다 개울가에 선다 / 봄의 신에게 묻노니 섬기는 분이 누구신가 / 붉고 흰 온갖 빛깔 천진한 마음에서 난 것이리라.

   아마도 봄의 한가운데를 통과하고 있는 이즈음 무렵이었으리라. 그가 독락당 계정에 올라 잠시 책을 접어두고 정자 아래 흐르는 물을 내려다보며 시를 짓는 모습이 선연하게 그려진다.

 

 

# 옥산서원의 짙은 숲에 들어 현판의 글씨를 읽다

 

 

 


   독락당 인근에는 옥산서원이 있다. 이언적이 세상을 뜬 지 20년 뒤에 지어진 서원이다. 서원으로 드는 길에는 귀하다는 회화나무가 10여그루에 이르고, 수백년 된 굴참나무와 느티나무, 이팝나무, 향나무들이 우람한 수형으로 짙고 어둑한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이팝나무에는 지금 순백의 꽃들이 마치 눈송이처럼 피어났다. 어디 나무뿐일까. 서원 앞으로는 자계천이 흐르는데, 너럭바위를 도는 물굽이가 자그마한 폭포를 만들어내고 있다. 물길에는 시멘트로 만들긴 했으되 외나무다리도 놓여 있다. 그저 ‘그곳에 있는 것’만으로도 저절로 풍류가 느껴지는 공간이다.

   옥산서원은 서원 앞의 짙은 숲과 물이 워낙 빼어나지만, 안으로 들어서도 볼거리들이 즐비하다. 먼저 눈여겨볼 것은 마치 서예전시장을 방불케 하는 현판들이다. 서원의 정문인 ‘역락문(亦樂門)’은 한석봉의 글씨다. 문을 들어서 만나는 이층 누각인 ‘무변루(無邊樓)’와 서원의 주건물인 ‘구인당(求人堂)’ 현판 역시 모두 한석봉의 솜씨다. 구인당 앞에 걸어둔 옥산서원이란 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것이다. 애초에는 토정 이지함의 조카로 명필로 이름을 날렸던 이산해의 글씨가 걸려 있었다는데, 화재로 서원을 보수하면서 헌종 임금이 추사에게 현판을 다시 쓰도록 해 앞쪽에 추사의 현판을, 안쪽에는 이산해의 현판을 걸도록 했단다. 한석봉의 글씨는 독락당에서도 보이는데, 계정에 붙은 ‘계정(溪亭)’과 ‘인지헌(仁智軒)’이란 현판이 그의 솜씨다. 또 계정의 한쪽 작은방 위에 있는 현판 ‘양진암(養眞庵)’은 퇴계 이황의 글씨다.



# 경주 남산에서 시간이 만들어낸 흔적들을 만나다

 

 

▲ 경주 남산은 불국토를 이루려던 신라인들의 꿈과 기원이 남아 있는 곳이다. 암봉을 깎아 세운 마애불 앞에서 몇 시간째 두 손을 모으고 있는 이는 무슨 소원이 그리도 간절할까.



   신라시대 불국토를 이뤘다는 경주 남산에서도 ‘조선의 시간’을 만날 수 있다. 남산이란 경주의 남쪽에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금오산과 고위산을 한데 이른다. 마치 주름치마와 같은 수많은 골짜기마다 불상과 탑들이 1000년의 세월을 건너와 우뚝 서 있다. 금오산에서 용장골로 내려서는 암반에는 삼층석탑이 있다. 남산에서 가장 큰 절집 용장사가 있던 곳인데, 절집 위쪽의 암봉에다가 석탑을 앉혀 놓았다. 군데군데 깨진 삼층석탑은 그 자체로야 별다를 게 없지만, 바위에 올라서 저 아래 사바세계를 내려다보는 탑의 모습은 병풍처럼 펼쳐진 산의 능선과 어우러지며 위엄을 갖추고 있다.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기운과 정신이 느껴지는 곳. 여기 서면 누구든 마음을 빼앗기고 말 터다.

   용장사는 세조의 왕위 찬탈 소식을 듣고 책을 다 불사른 뒤 평생을 유랑했던 매월당 김시습의 흔적이 있는 곳이다. 절집은 비록 다 허물어져 돌무더기만 남아 있지만, 방랑길의 김시습은 서른 한 살 때 폐허가 된 용장사터에 금오산실을 짓고 7년을 머물며 ‘금오신화’를 썼다. 번뇌와 병마에 시달리며 용장사에 은거하던 김시습도 600년 전쯤 이곳 삼층석탑이 서 있는 암릉에 올라 저 아래 떠나온 세상을 내려다보았으리라.

   남산의 삼릉골로 올라 용장골 삼층석탑을 보고 내려서는 길에 다리쉼을 하다 제법 큰 돌 하나가 발에 챘다. 옥개석의 문양이 뚜렷한 돌은 아마도 이 골짜기에서 수백년 동안 탑으로 서 있다가 무너져 내린 것인 듯 싶었다. 1000년도 더 된 시간의 저쪽에서 자연의 바위가 석탑이 돼 산 아래 마을들을 굽어보고 있다가 허물어져 다시 뒹구는 돌이 돼 자연으로 되돌아가는 중이었다.

   경주에서는 오랜 시간을 지나와 우뚝 서 있는 유물들도 기특하지만, 어쩌면 이런 유물들이 관통해온 시간이 더 소중한 게 아닐까. 석탑으로 서 있다가 다시 자연으로 되돌아가고 있는 돌 하나도, 간절하게 불국토를 이루려 했으나 끝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바라보았을 신라인들의 삶도, 유배와 낙향을 거듭하며 경주로 찾아들었던 조선시대의 선비들의 정신들도 다 그런 소중한 유물이 아닐까. 몇 개의 유물과 불상과 석탑이 아니라 비바람에 깎이고 시간에 무너지는 것들의 아름다움. 그런 아름다움이 바로 경주에 있다.

 

 

 

 

어디서 묵고 무엇을 먹을까

 

가는 길

  경주까지는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가면 된다. 수도권에서 가자면 내내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가는 것보다, 영동고속도로로 여주갈림목에서 중부내륙고속도로를 타고 김천분기점까지 가 경부고속도로로 갈아타고 가는 것이 더 빠르다.

  먼저 옥산서원과 독락정이 있는 안강 쪽으로 가려면 경부고속도로 도동나들목에서 대구 ~ 포항 간 고속도로로 갈아타고 북영천나들목으로 나와 28번 국도를 타고 가는 것이 빠르다. 경주시내에서는 925번 지방도로를 타고 서경주역을 지나자마자 우회전해 68번 국도에 올라 형산강을 따라 안강까지 간 후 28번 국도를 만나 좌회전하면 옥산서원 이정표를 만난다. 경주시내에서 차로 50분쯤 걸린다.

 

묵을 곳 & 먹을 것

  경주는 워낙 일찌감치 개발된 관광지이니만큼 숙소들도 다양하다. 보문호를 둘러싸고 호텔이 즐비하고 콘도미니엄도 곳곳에 있다. 최근에는 펜션들이 붐을 이루고 있다. 가족 단위 관광객이라면 호텔보다 콘도가 더 낫다. 콘도 중에는 보문호를 바로 옆에 끼고 있는 대명리조트 경주가 단연 돋보인다. 개관한 지 올해로 3년째인데 시설 관리가 워낙 잘돼 객실이 깔끔하고 고급스럽다. 리조트 내의 물놀이 시설도 충실해 가족과 함께 즐기기에 좋다.

 경주는 관광객들이 몰리는 곳이라 다양한 메뉴의 맛집들이 많긴 하지만, 시기에 따라 음식이 고르지 않고 들쑥날쑥한 편. 경주하면 쌈밥집을 연상할 정도로 위세를 떨쳤지만, 이즈음에는 쌈밥집에서 내오는 메뉴들이 다소 부실해졌다는 평을 듣고 있다.

 경주에는 또 두부집들이 즐비한데 황남동 부근의 황남 맷돌 순두부(054-771-7171)가 추천할 만하다. 순두부 맛도 좋지만, 두부와 고기완자를 섞어내는 모듬전도 괜찮은 편이다. 횟집을 찾겠다면 감포항보다는 아예 포항으로 나가 죽도시장을 들러보는 것이 좋겠다.

 

 

<출처> 2009. 5. 6 - 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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