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영덕 망일봉
그 정상에서 잠시 세상 시름 잊다
박경일 기자
▲ 망일봉으로 향하는 오솔길을 걷는 이들을 위해, 도로로 잘린 능선과 능선을 이어 세운 구름다리. 아치형 다리 위에 서면 시원스레 펼쳐진 바다와 하늘을 붉게 적시며 떠오르는 해를 대할 수 있다.
‘푸른 바다(blue sea).’ 경북 영덕의 도로 갈림길에 새로 놓은 방향표지판마다 ‘푸른 바다’란 명칭이 표시돼 있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도처에서 만난 그 명칭은 바로 ‘바다로 가는 길’을 표시하는 것이었습니다. ‘푸른 바다’를 알리는 화살표를 따라가면 그곳에는 진짜 동해의 짙고 푸른 바다가 있습니다.
영덕군 영해면소재지에서 방향표지판을 따라 ‘푸른 바다’로 향하는 길. 그 길은 제법 해발 고도가 높은 고개를 구불구불 넘어 언덕 아래 사진리의 포구마을로 내려섭니다. 그 길의 정상에 서면 양쪽 비탈면 사이로 푸른 바다가 펼쳐집니다. 그 고갯길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도로 위 양쪽 비탈면을 잇는 철제 구름다리입니다. 도로를 내면서 잘린 능선과 능선을 잇는 구름다리는 ‘망일봉(望日峰)’으로 향하는 등산로입니다.
망일봉은 이름하여 해를 보는 봉우리입니다. 망일봉을 오르는 등산로는 고려말 최고의 시인이었던 목은 이색의 생가터에서 시작해서 ‘목은 이색 등산로’라고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왼쪽 어깨에 바다를 끼고 걷는 이 길은 부드러운 능선이 이어져 있어 등산로라기보다는 가벼운 트레킹코스에 더 가깝지요. 지금이야 알려지지 않은 한낱 작은 봉우리에 불과하지만, 망일봉은 조선시대만 해도 꽤나 유명했던 곳이었나 봅니다. 조선 중기 풍기 군수였던 주세붕은 망일봉에서의 해돋이를 보곤 어찌나 감동했던지 “겨드랑이에 날개가 생겨 날 수가 있다면 아득히 만장 구름 위로 한번 날아보련만…”이라고 적었습니다.
여행자들은 영덕에서 바다로 난 길을 따릅니다. 대진항을 지나 축산, 경정, 강구까지 이어진 영덕의 바다는 단번에 매혹될 만큼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은 풍광이 내륙의 안쪽에 있었습니다. 영덕의 괴시리부터 인량리, 원구리, 오촌리, 갈천리 일대에는 오랜 세월에 삭아가는 기와가 얹힌 옛 집들이 즐비했습니다. 영덕의 깊은 오지에서 만나는 옛 집들은 경북 안동 일대의 으리으리한 고택이나, 남도의 풍류 넘치는 은둔형 고택들과는 또 다른 느낌입니다.
때로 생각지도 않던 풍경과 마주칠 때면 이런 곳을 왜 여태 몰랐을까 싶습니다. 몇번이고 영덕을 거쳐갔지만, 그때마다 바다에만 눈이 팔렸던 탓이겠지요. 영덕의 바다에 바짝 붙어 능선을 오르는 망일봉, 그리고 깊은 오지에 들어선 늙은 고택들이 영덕을 다시 보게 합니다. 그리고 깨닫습니다. 사실 여행을 풍성하게 하고 아름다운 자연과교감케 하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자연과 누대에 걸쳐 지켜온 삶의 향기라는 것을 말입니다.
▲ 영덕 해맞이공원 인근의 언덕에 세워진 풍력발전단지.
▲ 오십천 위로 날아가는 오리떼.
▲ 영해에서 사진리 포구마을로 내려가는 굽잇길.
▲ 망일봉으로 향하는 소나무숲 오솔길(오른쪽 사진). 자그마한 절집 장육사.
▲ 겨울 강의 풍경을 간직한 오십천(오른쪽 사진). 인량리 전통마을의 당산나무와 당집.
경북 영덕의 해안은 같은 동해를 끼고 있지만 북쪽의 울진이나 남쪽의 포항해안과는 사뭇 다르다. 다른 곳들은 백두대간이나 낙동정맥의 산줄기가 다 내려와서 낮아진 평지 쪽에 너른 해안선이 펼쳐져 있지만, 영덕은 제법 높은 산들이 해안을 막고 서있다. 가파른 벼랑 아래에 해안이 발달했고, 옹색하게 포구마을이 자리잡은 형국이다.
이런 지형탓에 영덕의 해안가에 바짝 붙어 솟은 고개에 오르면 바다 풍경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고갯마루에 서면 시선이 높으니 눈에 들어오는 바다의 폭도 두꺼워진다. 산에 올라 시선을 높이면 수평선이 높이 올라와 바다가 마치 벽에 바른 벽지처럼 드넓게 펼쳐지는 것이다.
이런 풍경을 가장 가까이에서 내려다볼 수 있는 산행코스가 바로 ‘망일봉’으로 오르는 길이다. 한옥들이 즐비한 괴시리 전통마을 안쪽의 목은 이색 생가에서 출발하는 이 등산코스에는 ‘목은 이색 등산로’란 이름이 붙어있다. 등산로라고 하지만 예부터 축산면과 영해면 사진리, 대진리 주민들이 영해 5일장을 보기 위해 생선과 건어물을 지게에 지고, 머리에 이고 넘어다니던 산속 오솔길이었다. 오솔길은 한때 해돋이 정취가 일품이었다는 망일봉으로 이어지고, 여기서 능선을 타고 다시 봉화산까지 간다.
망일봉은 조선시대 때부터 해돋이의 명소였던 모양이다. 지금이야 인근 주민들도 잘 모르는 이름 없는 봉우리에 불과하지만, 조선시대 영덕을 찾은 선비들은 망일봉에 앞다퉈 올랐다. 조선 중기 영해 부사였던 고용후와 풍기 군수였던 주세붕은 이곳에 올라 해돋이를 지켜본 감동을 시로 남겼다.
이른 새벽 그 망일봉을 따라 오르는 길.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산 속으로 난 조붓한 오솔길은 온통 짙푸른 소나무들로 울창하다. 장쾌한 바다 풍경을 기대했지만, 아쉽게도 숲길에서는 소나무 가지에 시야가 가려 탁 트인 바다 풍경은 만날 수 없다. 그 대신 산 능선과 능선을 잇는 등산로에 놓인 아치교의 난간에서 빼어난 일출 풍경을 만날 수 있었다. 이 아치교는 영덕읍에서 사진리로 포장도로가 잘라놓은 능선을 잇기 위해 지난해 9월에 세워진 것. 다리는 이동의 효율성을 위해 놓은 것이 아니라, 느릿느릿 걷는 이들에게 풍경을 선사하기 위한 것이다.
아치교 난간에 서면 저 아래 구불구불 언덕을 내려가 자그마한 포구마을에 가닿는 도로와 드넓은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바다는 새벽의 푸른빛으로 가득한데 구름 뒤로 해가 솟으면서 붉은 기운이 번진다. 밤바다에서 조업을 마친 배들이 포구로 들어오고 있었다.
목은 생가에서 아치교로 들기 직전 왼쪽 샛길로 접어들면 바다에 바짝 다가앉은 봉우리 위로 오르게 된다. 이쪽에서는 바다와 함께 바다를 끼고 이어진 대진~축산간 해안도로가 손에 잡힐 듯 내려다보인다.
영덕은 바다를 끼고 있는 도시지만, 영덕에는 바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영해면에는 눈이 시원해지는 너른 들녘도 있고, 지품면에는 오십천 물길을 따라 끝간 데 없이 펼쳐진 과수원들이 있고, 창수면 일대에는 인적이 드문 오지마을들이 있다.
영덕을 찾은 이들은 대개 바다만 보고 돌아오지만, 영덕은 바다 말고도 여러가지 표정을 가지고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눈길을 붙잡는 것은 단연 고색창연한 옛 집들이다.
영덕은 대갓집들이 많고 문중의 종가들이 즐비해 예부터 ‘작은 안동’이라고 불렸다. 이에 걸맞게 내륙 안쪽 마을 곳곳에는 한옥들이 들어서있다. 괴시리 전통마을이 그 중 규모가 큰 곳이다. 괴시리는 영양 남씨 괴시파의 400년 세거지다. 너른 영해의 들판을 바라보고 있는 마을에는 대남댁, 물소화고택, 해촌고택 등 전통 한옥들이 흙담을 끼고 옹기종기 맞붙어 있다. 집 하나하나의 정취는 나무랄 데 없고 잘 정비돼 깔끔하지만, 주민들이 떠나면서 빈 집들이 즐비해 ‘사람 사는 향기’를 잃은 것이 아쉽다.
괴시리에 버금가는 곳이 인량리 일대의 마을이다. 한때 8개 성씨의 종택이 있었다는 인량리는 재령 이씨, 안동 권씨, 평산 신씨 가문들이 저마다 세력을 과시하고 살던 곳이다. 갈암종택과 용암종택, 충효당을 비롯해 한옥들이 즐비하다. 또 인량리 남쪽의 원구리에는 고색창연한 한옥들이 마치 유적처럼 서있다.
이곳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곳이 경수당 종택. 무안 박씨 영해파의 종택인 이곳에는 퇴계 이황이 쓴 편액을 내걸고 있다. 뒷마당에서는 울릉도에서 가져다 심었다는 700년 된 향나무의 귀기 어린 자태를 만날 수 있다.
또 오촌리 일대에도 면운재 고택 등 기품 있는 한옥들이 즐비하다. 이런 마을이 특히 각별한 것은 삶의 냄새가 난다는 것. 장작불을 들인 종택의 안채에서는 마을 할머니들이 이불을 나눠 덮고 10원짜리 내기 화투에 열중하고 있었다.
창수면 운서산 기슭의 장육사로 가는 길. 장육사는 고려때 고승 나옹선사가 지었다고 전해오는 절집이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 없이 살라 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 하네…”로 시작되는 선시로 유명한 나옹선사는 이곳 영덕에서 난 뒤 스무살이 돼서 출가하기 전까지 이곳에서 자랐다.
창수면 신기리에는 나옹선사의 유적지가 남아 있다. 700여년 전 나옹선사가 출가하면서 꽂아놓은 지팡이가 낙락장송이 된 반송으로 자랐다는 곳이다. 1965년 반송은 고사했고, 영덕군에서는 지난해 10월 그 자리에 다시 소나무를 심어 놓았다.
장육사는 대웅전의 후불탱화와 벽화, 법당 천장의 주악비천상 외에는 그리 특별하달 것 없는 자그마한 절집이다. 굳이 장육사까지 가닿지 않더라도 절집 가는 길에서 마주치는 화수루와 까치구멍집은 놓치지 말아야 하는 곳이다.
화수루는 단종의 외종숙인 일가가 세조에게 화를 당한 뒤 유배돼 여생을 보낸 곳이다. 이후 단종이 복위되자 대봉서원이 건립됐는데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화수루만 남게 됐다. 2층에 누각을 두르고 뒤편에 단층 건물을 세운 이 집은 지을 당시의 모습을 거의 완벽하게 지니고 있다.
화수루 곁에는 초가를 얹은 까치구멍집이 있다. 까치구멍집이란 대청과 부엌을 건물안으로 들이고 지붕에 구멍을 내서 연기가 빠져나가도록 한 집이다. 이런 집들은 그저 ‘관람’의 시선으로 바라보기보다는, 누각에 올라서 주변 풍광을 내다보거나 집안에 들어 실제 생활을 한다고 가정하면서 조목조목 뜯어봐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집이 가진 진면목이 보인다.
영덕에는 사실 여행 명소들이 즐비하다. 강구와 축산을 잇는 이른바 ‘강축 드라이브 코스’나 창포 해맞이 공원, 강구항, 풍력발전단지 …. 이즈음에 살이 꽉 차는 영덕 대게와 쫄깃한 자연산 전복의 명성도 익히 알려져 있다. 이런 풍경은 후포에서 강구까지 7번 국도와 20번 지방도로를 번갈아 타고 가면 다 만나는 곳들이다.
그러나 영덕의 진면목은 이렇게 드러난 곳에만 있지 않다. 소박한 옛 오솔길에도 빼어난 절경이 있고, 내륙 안쪽에 오래된 삶의 정취를 간직한 숨은 풍경도 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이런 인문의 풍경과 마주할 때 여행의 감동은 더 깊어지는 법이라 믿는다.
◆ 영덕 가는 길 = 수도권에서 가자면 영덕은 멀다. 영동고속도로 만종분기점에서 중앙고속도로로 갈아타고 서안동나들목으로 나온다. 여기에서 34번 국도를 타고 안동으로 접어들어 임하댐을 지나 진보로 가서 황장재를 넘으면 영덕읍내다. 읍내를 지나 내처 더 가면 곧 대게로 유명한 강구항이다. 수도권에서 출발한다면 4시간30분은 잡아야 한다.
영동고속도로로 강릉을 지나 동해고속도로로 동해까지 가서 7번 국도를 따라 내려오는 방법도 있지만, 더 멀고 시간도 더 걸린다. 망일산이나 전통마을은 강구 북쪽의 영해면 쪽에 있다. 강구에서 영해까지는 4차선으로 확장된 7번 국도를 타고 가도 좋지만, 해안선에 딱 붙어서 가는 20번 국도로 이동하는 편이 훨씬 더 낫다.
묵을 곳, 먹을 것
◆ 어디서 묵고 무엇을 맛볼까
일찌감치 관광지로 개발된 영덕은 숙소 사정이 좋다. 삼사해상공원 일대에는 깔끔한 호텔과 대형 모텔이 몰려 있다. 숙소간 경쟁이 치열해 주중에 한해 3만원도 안 되는 값에 방을 내주는 호텔도 있다. 가족여행이라면 깔끔한 시설의 오션뷰 가족호텔(054-732-0700)을 추천할 만하다.
삼사해상공원 입구의 동해해상호텔(054-733-4466)은 주말 7만~8만원을 받지만, 평일에 한해 숙박비를 2만9000원까지 깎아준다. 인근에 삼사파크모텔, 글로리모텔 등도 있다. 영해면 쪽에는 이렇다 할 숙소가 없다.
사실 경북 일대에서는 남도와 같은 맛깔스러운 음식 맛을 기대하기란 어렵다. 경북 일대를 대표하는 먹을거리들도 대부분 조리하지 않은 원재료 그대로의 음식이 대부분이다. 이즈음 최고의 맛을 낸다는 영덕 대게도 그렇고, 자연산 전복도 그렇다. 영덕 대게는 어디든 똑같은 방식으로 쪄내는 것이고, 전복도 썰어 내면 그뿐인 음식이다.
곁들이 음식이라도 흐들스럽게 내놓는 집이 있으면 좋으련만 그것도 찾아보기 어렵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가격인데 매일 경매가격이 들쑥날쑥하고 확보하는 대게의 품질도 달라지므로 이것도 식당 선택의 기준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대게를 내놓는 집 중에서 이렇다 하게 추천할 만한 곳은 없다. 그건 곧 대게를 맛보러 어느 식당에 들어가더라도 실패할 확률이 낮다는 것을 뜻한다.
<출처> 2009-01-28 / 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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