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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수상 및 후보시

2009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시 : 저녁의 황사 / 정영효

by 혜강(惠江) 2009. 1. 3.

 

                   <2009년 신춘문예 시 당선작>

 

                     저녁의 황사

 

                              정영효

          
이 모래먼지는 타클라마칸의 깊은 내지에서 흘러왔을 것이다

황사가 자욱하게 내린 골목을 걷다 느낀 사막의 질감
나는 가파른 사구를 오른 낙타의 고단한 입술과
구름의 부피를 재는 순례자의 눈빛을 생각한다
사막에서 바깥은 오로지 인간의 내면뿐이다
지평선이 하늘과 맞닿은 경계로 방향을 다스리며
죽은 이의 영혼도 보내지 않는다는 타클라마칸
순례란 길을 찾는 것이 아니라 길을 잃는 것이므로
끝을 떠올리는 그들에게는 배경마저 짐이 되었으리라
순간,잠들어가는 육신을 더듬으며
연기처럼 일어섰을 먼지들은
초원이 펼쳐져 있는 그들의 꿈에 제(祭)를 올리고 이곳으로 왔나
피부에 적막하게 닿는 황사는
사막의 영혼이 타고 남은 재인지
태양이 지나간 하늘에 무덤처럼 달이 떠오르고 있다
어스름에 부식하는 지붕을 쓰고 잠든 내 창에도
그들의 꿈이 뿌려졌을 텐데
집으로 들어서는 골목에서 늘
나는 앞을 쫓지만 뒤를 버리지 못했다
멀리 낙타의 종소리가 들리고
황사를 입은 저녁이 내게는 무겁다

 

 

심사평 - 삶의 체험을 유려한 시적 언어로  

 

 

  특별한 작품이 있었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전체적으로 응모작의 수준은 높았다.현실투쟁적인 작품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도 금년도 응모작들의 한 경향이었으며 추상적 의식을 실험하는 작품도 크게 눈에 띄지 않았다.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올라온 열 분의 시편을 읽은 뒤 최종심의 대상을 네 편으로 압축하였다.류성훈의 ‘월면 채굴기’,최호빈의 ‘얼음묘지’,정영효의 ‘저녁의 황사’,정재영의 ‘윤회’ 등이 그것이다.‘월면 채굴기’는 사물을 관찰하는 시각도 독특하고 언어구사도 유려했다.‘얼음묘지’는 이미지의 전개가 참신했으며 ‘저녁의 황사’는 상상력의 전개가 돋보였다.‘윤회’ 또한 나무의 생애를 통해 인간의 삶을 유추하는 통찰력이 자연스러웠다.장점과 더불어 단점도 각각 가지고 있었는데 심사과정에서 우리들이 주목한 것은 체험의 구체성이었다.언어의 유려함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체험을 어떻게 형상화시키느냐에 관심을 가지고 응모작을 검토하였다.

 

  최종적으로 ‘월면 채굴기’와 ‘저녁의 황사’가 검토의 대상이 되었는데 두 편의 시가 만만치 않은 수준을 지니고 있어 상당한 시간 동안 논의를 거듭하였다.‘월면 채굴기’는 ‘병들도 힘 빠질 무렵’과 같은 뛰어난 구절을 구사하는 시적 능력을 보여주고 있었으나 후반부 처리가 조금 약해 보였다.같은 응모자의 ‘하늘은 연직선 쪽으로’도 함께 논의했으나 체험의 구체성이 조금 부족하다고 판단되었다.‘저녁의 황사’는 사막으로부터 발 딛고 있는 현실로 상상력을 끌어오는 상상력이 자연스러웠으며 ‘사막에서 바깥은 오로지 인간의 내면뿐이다’나 ‘연기처럼 일어섰을 먼지들’과 같은 구절들을 통해 자신의 표현 능력을 보여주었다.다른 응모작 ‘마방’이나 ‘바람과의 여행’이 영상물을 통한 간접 체험을 다룬 것이라면 ‘저녁의 황사’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서의 이야기를 유려하게 형상화했다는 점에 우리들은 주목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월면 채굴기’와 ‘저녁의 황사’가 질적으로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은 아니다.두 분 다 충분히 당선권에 드는 작품이라고 판단하였지만 전체를 아우르는 한 편의 작품을 정해야 하는 아쉬움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 황동규·최동호

 

 

 

당선소감 - “詩라는 아포리아에서 계속 길을 잃고 싶어”

 

 

  ‘언젠가’라는 말을 믿으며 지냈다.그 ‘언젠가’가 일찍 온 것인지 늦게 온 것인지는 모르지만 단어와 단어 사이,문장과 문장 사이를 부유하던 밤들은 행복했다.비록,때로는 절망으로 때로는 자괴감으로 가득했던 순간들일지라도 그 속에 희망이 있었음은 분명하다.그리고 모든 것이 지금이라는 출발을 만들기 위한 시간이었다고 확신한다.시라는 아포리아에서 계속 길을 잃고 싶다.

 

  감사드리고 싶은 분들을 호명하는 것으로 들뜬 소감을 채운다.존경하는 어머니 서 여사,사랑하는 누나들과 매형들.시를 쓰는 걸 모르고 지내줘서 오히려 감사하다.귀여운 조카들.유성,정우,수인,재욱에게도 지금만은 부끄럽지 않은 삼촌이 된 것 같다.빈자리를 채워주신 삼촌들과 숙모들,고모와 고모부께도 머리 숙여 감사의 인사를 올린다.문학이라는 무거운 짐을 안겨준 동국대 국문과와 문창과 선생님들,선후배들에게 모든 영광을 돌린다.

 

  특히 홍신선 선생님과 김춘식 선생님,허혜정 선생님이 아니었다면 이 글은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내게 가장 엄한 독자였던 용목 형,상우 형,판식 형.결핍과 오기를 키워준 덕희와 수호.폭탄주 같은 시분과원들.경성대 민족 국문과 사람들과 감전동 식구들,그리고 나를 알고 있는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끝으로 부족한데도 기회를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치열하게 살겠다는 말로 인사를 대신하고 싶다.

 

 

<출처> 2009. 1. 3 / 서울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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