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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수상 및 후보시

2009 광주일보 신춘문예 당선시 : 증명사진 / 김재준

by 혜강(惠江) 2009. 1. 3.

 

                       [2009 광주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시] 

 

                                    증명사진

                                        김 재 준

 

창문 밖의 풍향계는 한사코 바람이 불어오는 쪽으로 머리를 곧추 세우며 떨고 있다 매서운 날들이 나를 후려왔듯이 바람의 거친 속도가 철봉 위에 다만 놓여있을 뿐인 저 화살을 어디론가 날아가게 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요동을 치며 제 자리에서 한없이 날고 있는 화살을 바라보며 멈춰 있는 것이 때로는 무서운 전진이라는 생각이 들어 이력서에 붙일 추운 얼굴에 밀랍 미소를 만드는 순간

팟, 빛의 칼날이 내려치는 2.5×3㎝의 단두(斷頭)
나는 잠시 시력을 잃고 보이지 않는 하얀 피를 흩뿌린다

자, 한 번 더 찍습니다
내일을 증명할 수 있다면 수십 번이라도 즐거이 목을 늘여놓을 것이다 절박한 시윗줄에서 날카로운 화살 한 대가 내 몸을 뚫고 날아오르자 망치를 맞는 젊은 쇳소리가 길게 울린다
나는 지을 수 있는 가장 온화한 얼굴로 빛의 칼날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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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심사평>  현대인의 고민 취업 예리한 관찰로 포착

 

  시에 기운이 없다. 살가운 서정의 만지작거림도 없고, 이 더러운 세상을 후려치는 거대담론의 포효도 없고, 형식의 실험을 위한 대담한 모험심도 없다.  시가 죽어 가는가? 기력은 시들시들하고, 목소리는 다 고만고만하다. 가족·밥·가난·고향과 같은 비슷비슷한 소재가 넘치고, 대부분 평서형 종결어미로 만족하고 거기에 그냥 머무른다. 사소한 이야기를 그저 사소하게 마무리하는 것으로 시인의 역할을 다했다고 볼 수 있을까? 예심을 통과한 작품들이 그렇다.   심사를 하는 내내 당선작을 내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조바심 때문에 더 유심히 응모작들을 읽었다. 일정한 수준에 근접했다고 판단해서 최종적으로 논의한 작품은 다섯 편이었다.

  정길호의 ‘아궁이 속으로 들어간 고래’는 온돌방의 고래와 바다의 고래를 말놀이 기법으로 형상화하고자 한 시이다.  그러나 그 둘 사이의 간극을 상상력으로 메우지 못해 뒷부분으로 갈수록 공허했다.
  이성임의 ‘클립 속의 여자’는 다른 응모작들을 포함해 단단한 언어 구성능력을 보여주지만 멋이 지나치고 소품에 그치고 있다.  오승근의 ‘소리를 줍다’는 시적 묘사에 공을 들인 시인데, 말투가 시를 앞서나간다. 시어와 일상어의 차이, 혹은 그 둘 사이의 절제를 좀 더 공부했으면 한다.   당선작과 함께 끝까지 겨룬 이혜경의 ‘가벼운 집’은 시를 전개하는 방식이 자연스럽고 시가 생기는 지점을 비교적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시적 대상을 너무 안이하게 이해하는 바람에 그 핵심을 집어내는 데 미흡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김재준의 ‘증명사진’을 흔쾌히 당선작으로 골랐다. 풍향계를 다룬 기성시인의 어떤 이미지가 연상되기도 했지만 취업이라는 현대사회의 다소 무거운 고민을 예리한 관찰과 안정된 문장으로 매우 잘 포착하고 있다.  대상과의 거리 조절에 의한 비유가 적절하고, 구조도 완결미를 갖추고 있다.  여기에 만족하지 말고 더 큰 시인으로 성공하기 바란다. -이문재, 안도현

 

<당선소감>  긴 시간 잠복, 불현듯 나타난 시에 감사

 

                                                                                         

 오늘 순천만 갈대밭을 다녀왔습니다.  석양 속에서 푸른 날들이었으나 마른 화살들로 가득한 벌을 걸으며 나는 이 벌판처럼 아름다운 과녁이었는가, 푸르게 날아와 주었던 캄캄하게 식어가는 내 화상들을 돌아보았습니다.

  이기적인 연인처럼 시에게 세상을 변혁하라, 길을 보여달라 악을 쓰다 차갑게 배신했지만 긴 시간 동안 잠복해 있다가 불현듯 나야 나, 이 사람아, 어깨를 쳐준 시에게 고맙고 미안했습니다.

  다락에 넣어둔 먼지 쌓인 꿈을 닦아주며 다시 써 볼 것을 권해준 기연이 씨.   나의 아내여, 당신이 베풀어준 이 많은 것을 나는 다 어찌 할 수 없습니다. 
해찬아 슬아야, 나의 신앙들아.   나는 너희에게 어떤 아버지일까.   주위에서 나를 닮았다

 

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두렵고 무서웠단다.  나의 시는 미래의 너희들에게 남기는 편지일 것이니, 내 심장의 소리와 색깔을 적을 것이다.  비루할지라도 아름답게 보아주렴.

  고마운 분들이 참 많습니다. 절벽에서 한 점 가능성을 귀히 여겨 손을 내밀어주신 정윤천 선생님, 시의 엄정함을 가르쳐 주신 강인한 선생님, 매 시편마다 쓴소릴 아끼지 않으셨던 큰누님 강정숙 선생님, 다시 시를 쓰는 길의 절반을 대신 걸어준 고성만, 조성국 형.  놀이터가 되어준 시인회의, 시마을과 시마을 동인, 영원한 마음의 고향 터앝문학동인회 그리고 광주일보사와 심사위원님들께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출처> 2009. 1. 1 / 광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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