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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수상 및 후보시

2009 평화신문 신춘문예 당산시 : 낯익은 가방 / 김상현

by 혜강(惠江) 2009. 2. 7.

 

               2009 평화신문 신춘문예 : 시부문 당선작

 

              낯익은 가방 - 김상현

 

 

   캄보디아 어느 시골길을 김순임의 이름이 써진 책가방이 달리고 있어요.
 바나나 파초 잎 사이로 난 붉은 수채화길 위를 싱싱 달리고 있네요.
 소녀는 자전거를 탔어요.
 
 노오란 색 그 가방, 한국에서 온 거래요.
 김순임이라는 어린 아이가 쓰고 물려 준, 아주 멀리까지 던져 준,
 노오란 색 그 가방이 연둣빛 완두콩처럼 아직 여물지 않은 캄보디아 소녀의 마른 어깨에서
 황홀하게 흔들거려요.
 
 유골탑을 지나고 망고나무 아래서 자전거는 멈춰 섰어요. 유골탑에는 마을의사, 학교선생님, 안경을 낀 사람, 펜을 지녔다는 이유로 죽은 유골들이 동공이 사라진 더 큰 눈을 하고 김순임의 이름이 써진 책가방을 바라보네요.
 
 지뢰로 한 쪽 다리를 잃은 아버지가 목발을 짚고 망고나무 밑에 서 있어요. 아직 소녀는 뒷모습만 보여요. 이국 아이의 이름이 매직으로 커다랗게 쓰인 낡은 가방 속에는 딸아이의 꿈이 가득 담겨져 있다는 것을 목발의 아버지는 알고 있어요.
 
 소녀가 지나간 그 길 위로 노란나비 떼들이 날아가고 있어요. 아이들이 맨 노오란 가방에는 은하유치원, 샛별유치원이라는 한글글자가 선명해요. 유치원이 끝났나 봐요.

 

 

 

2009 평화신문 신춘문예]시 부문 심사평 "



   최종심까지 올라온 작품은 박종영의 '구형텔레비전', 이금미의 '거미의 집', 최정아의 '세한 달', 김상현의 '낯익은 가방' 등 네 편이었다.

 그 중에서 '구형텔레비전'은 지나치게 산문성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거미의 집'은 불필요한 사족이 많고 응집력이 약하다는 점에서 먼저 제외됐다.

 따라서 자연히 '세한 달'과 '낯익은 가방' 두 편이 남게 됐다. '세한 달'은 전체적으로 시적 긴장을 팽팽히 유지해 나가는 솜씨가 돋보였다. 적재적소에 언어를 배치할 줄 아는 감각적 능력 또한 돋보였다. 그러나 지나치게 묘사에만 의존해 내용이 부족한 공허한 시가 되고 말았다. 시는 묘사로도 이뤄지지만, 동시에 그 묘사의 대상이 품고 있는 내용으로도 이뤄진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당선작은 '낯익은 가방'으로 결정됐다.

 '낯익은 가방'은 감동이 있는 시다. 우리나라 유치원 아이들이 사용하던, '김순임'이라는 한글 이름이 쓰인 가방을 내란으로 피폐한 캄보디아 아이들이 메고 다니는 풍경을 잔잔하게 서정적으로 다룬 시로, 시를 발견한 눈도 탁월하지만 시적 형성력 또한 억지가 없고 자연스러웠다. 다소 평이한 진술적 형식이 단조롭다고 할 수 있으나 그 단조로움이 오히려 큰 호소력으로 작용했다. 그것은 이 시에서 맑고 고요하고 따뜻한 평화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앞으로 한국 시단을 이끌어갈 시인으로 대성하길 바란다.

심사위원 : 김종철(시인)ㆍ정호승(시인)


* 시부문 당선자 김상현씨 당선소감ㆍ약력 "

       ▲ 김상현 시인

   악어무리가 새끼 누우 한 마리를 갈기갈기 찢어먹고, 사자가족이 병든 얼룩말의 내장을 나눠 먹는 동물의 왕국, 텔레비전 모니터는 피투성이다. 피를 닦아내고나면 다시 히잡과 차도르가 피에 물들고, 겁에 질린 아이는 다리가 없다. 중동전쟁을 방영하는 텔레비전 화면, 여전히 모니터는 피투성이다.

 신춘문예 당선 통보를 받은 기쁜 날에 텔레비전 뉴스는 '팔레스타인'의 '가나'라는 마을, 무너진 건물 잔해 속에서 100구의 어린아이 시신이 발견됨으로써 이스라엘의 침공으로 죽은 팔레스타인 사람은 무려 1300명에 이른다는 비보로 텔레비전 모니터는 피로 흥건히 적셔있다.

 내가 여행한 베트남과 캄보디아에서도 전쟁과 학살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된 적이 있다. 이 생명 파괴의 시대에 '시 쓰기'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고 절망감이 들다가도 세상을 향해 내가 날릴 수 있는 화살은 이것밖에 없다는 남루(襤樓)가 다시 시를 쓰게 만들었다.

 신이 허락한 생명의 반환점인 회갑을 넘으면서 몸을 가볍게 하기 위해 버리고 갈 것과 가지고 갈 것을 정리한 적이 있다. 결국 '시 쓰기'라는 내 영혼과의 대화 채널만은 끝까지 열어 놓기로 결심을 했다.

 당선의 기쁨을 누워계신 93살 어머니께 전해드리고 싶다. 그러면 내 손을 잡고 감사의 기도를 해주실 것이다. 생명 회복, 생명 애정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시를 뽑아주신 평화신문과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깊은 감사를 드리며 더욱 더 정진하는 자세로 보답하고자 한다.
 
 ▨약력=▲1947년 전북 무안 태생 ▲1973년 한양대 산업공학과 졸업 ▲1992년 시 전문지 「시와 시학」으로 등단 ▲시집 : 「달빛 한 짐, 바람 한 짐」(삼영출판사), 「싸리나무숲에 서리꽃 피면」(대교출판사), 「노루는 발을 벗어두고」(시와시학사), 「사랑의 방식CD」(현대시), 「기억의 날개」(대교출판사), 「어머니의 살강」(예일기획), 「거멀장한 바가지가 아름답다」(문학과경계), 「꽃비노을」(시선사) ▲소설집 : 장편 「미완의 휴식」(대교출판사), 단편집 「시내산 옥탑방」(기독교타임즈) 등 ▲산문집 : 「하늘에 떠있는 섬」(대교출판사), 「사람에게도 향기가 있다」(대교출판사) 등

<출구> 2009. 2. 8 / 평화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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