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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수상 및 후보시

2009 영남일보 문학상 당선시 : 나무의 공양 / 이경례

by 혜강(惠江) 2009. 1. 2.

                      <2009 영남일보 문학상>

  

                나무의 공양

                            이 경 례

   
             그림=권기철

 

 

     졸참나무가 제 몸통을 의탁해왔네 지난 태풍에 겨우 건진 살림살이지만
     기와 불사를 생각하며 제 몸 선뜻 내 놓았다네
     오래도록 산문의 입구를 지켜 온 졸참나무와

     딱따구리, 한참을 골몰한 붉고 노란 머릴 조아리며
     하피첩서霞帖書를 떠올리다, 마침내 
     졸참나무, 거친 한 생의 피륙에다
     제가 살아온 산야의 사적비를 짜기로 했네

     구족口足 화가가
     붓을 입에 물고 넝쿨처럼 뻗어 오르는
     푸른 영혼을 펼쳐내듯
     한 땀 한 땀이 딱따구리 혼신의 필사

     졸참나무 나이테에 누가 바늘을 올렸나
     아득한 시간의 엘피판에서 흘러나오는
     여든 아홉 암자의 일천성인 득도의 날들과
     어느 날 산사의 소신공양燒身供養

     졸참나무의 한 생이 받드는 허공 속으로
     무거운 산 울대 오래 공명하는 딱따구리의 필력
     노을치마인 듯 소슬히
     산야가 제 온 몸 펼쳐 품안에 보듬는 저녁이라네

 

 

 

[심사평] "투명하고 맑은 서정의 힘 돋보여"

 

              이하석씨·김명인씨

이하석씨·김명인씨

 

 

  예심을 거쳐온 20여분의 작품들을 숙독하면서, 올해의 응모작들이 시적 다양성이나 인식의 틀에서

선자(選者)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여 안타까웠다. 그러나 습작기의 신인들에게서 흔히 살펴지는 판에

박힌 수사나 장식적 언술, 뿌리 없는 상상력과 모호한 주제들, 리듬을 사상(捨象)시킨 줄글체의 중언

부언들은 다소 걸러진 것 같아서 다행스러웠다. 마지막까지 선고(選考)의 대상이 된 작품들은 '무릎'

'유리주의' '흔적' '나무의 공양' 등이었다.

  '무릎'은 신체의 일부분을 일상의 틀 속에서 음미하면서 자성(自省)으로 이끌고 가는 노련함이 읽혔

다. 시어의 경제를 실천하면서도 환상을 끌어안는 견고한 짜임새가 돋보인다. 또 다른 응모작 '둘레'

도 이 응모자의 습작의 강도를 짐작하게 하는 작품이다.

 

  '유리주의'는 대상으로 집중하는 시선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삶의 음영을 겹쳐놓는 시적

사유의 힘이 돋보인다. 그럼에도 상상력의 결을 좀더 활달하게 풀어헤쳐보였으면 하는 아쉬움을 갖

게 만든다. 한 작품을 지탱해 줄여타의 시편이 없다는 것도 이 응모자의 한계라고 판단했다.

  '흔적'은 당선을 두고 마지막까지 겨룬 작품이다. 이 응모자가 선택하는 깊이 있는 시어들은 주제를

끌고나가는 끈질긴 사유의 힘과 어울려 상당한 설득력과 무게를 차지해 보인다. 그럼에도 당선작의

뒷자리에 설 수밖에 없었던 것은 어딘가 익숙한 수사로 가로질러 오는 언술들이 잦았던 탓이었다. 새

로운 도약을 위해서는 자신에게도 낯선 자리를 마련해주려는 용기가 필요하지 않을까.

  '나무의 공양'은 오래 묵힌 소재를 활달하고 투명한 상상력으로 맑은 샘물처럼 산뜻하게 변주한 작품

이다. 대상을 새롭게 부조하여 오롯이 완결된 한편의 서정으로 빚어내고 있어서 이 응모자의 숙련된 공

력을 느끼게 한다. 시가 직선도 곡선도 아닌 얼개를 갖고 있다는 것을 어느 정도 깨우친 결과이리라.

당선에는 다른 시편의 수준들도 함께 평가된 것임을 부언해둔다. 더욱 정진하길 당부한다.

■ 심사위원 이하석(시인), 김명인(시인·고려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당선소감> "이제 막 '비밀의 문' 암호 찾아낸 듯"

 

               

  무의미를 꿈꾸던 한때가 있었다. 부화하지 못한 말들이 슬어놓던 무덤을 세어보던 시린 새벽이 있었다.

까마득한 옛날이었던 것 같다. 어느새 푸른 길섶에 들어섰던 것일까. 새소리와 흔들리는 잎사귀 하나에

움트는 우주가 보이기 시작했다. 가파르다 생각한 오르막들은 더 멀리 바라다볼 수 있는 생각 언저리

나를 내려놓았다. 나를 돌려세우고야 비로소 다가오던 세상, 한 개의 돌을 움직이자 돌아가기 시작하

비밀의 문처럼 이제 막 해독한 암호처럼 세상을 읽기 시작한다. 나의 영혼으로 빚은, 그대와 나눌 수

는 단 하나의 소통방식.

  내 안의 소리에 귀 기울여 주신 김명인·이하석 두 분 선생님께 큰 감사를 드린다. 내 작은 소리가 오래된

우물처럼 세상의 귓가에 더 웅숭하고 깊은 파문을 울릴 수 있도록매서운 시의 들판을 헤매는 날이 많아질

것이다. 한 영혼이라도 떨게 할 수 있는 언어를 빚는 날까지 끝없이 나를 담금질하겠다.

  맵고 따뜻한 가르침으로 가능성의 끝간 데까지 이끌어주시는 경주대 손진은 교수님께 고마움을 전한다.

교수님으로 인해 시의 출렁거리는 넌출과 속 깊은 뿌리를 알게 되었다. 더 열심히 읽고 쓰는 불면의 날들

로 그 은혜를 갚아 나가고자 한다. 동리목월문학관과 경주대 사회교육원의 소중한 인연, 내 시의 덩굴손

을 더듬어 가면 오롯이 서 계시는 김성춘 선생님께도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 내 생의 소중한 분들께

도 여전한 사랑을 보낸다. 나의 웃음은 늘 누군가의 울음위에 열린다는 무거움이 있다. 詩로써 그 누군가

의 눈물을 닦을 수 있을까?
 이경례(울산시 남구 옥동)

 

 

<출처> 영남일보 / 2009. 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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