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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수상 및 후보시

2009 무등일보신춘당선시 : 아르정탱 안을 습관적으로 엿보다 / 윤은희

by 혜강(惠江) 2009. 1. 2.

 

                    <2009 무등일보신춘문예 당선시>

 

    아르정탱 안을 습관적으로 엿보다

 

                  윤 은 희

 

 

          

 

1
골목의 연탄 냄새 부풀어 전생의 어스름 빛으로 울적한 저녁
길바닥의 검푸른 이끼들 엄지손톱 半의 半 크기 달빛에 물들었다
아르정탱Argentan * 에 맨발로 들어가 자주 꾸는 꿈 벗어두고 나왔다


예전에 방앗간이었다는 전설 알고 있다
아,르,정,탱, 하고 불러보는데 안쪽 벽 타고 ‘돌돌돌’ 물소리 흘러내린다
남자들의 이야기 소리, 쉼 없는 흐름에 세월 함께 묻혀졌다
무대 뒤쪽 갤러리 프리다 칼로는 디에고 리베라의 The Flower Vendor를
힐끔, 끌어당기고 있었다
사계절의 호흡이 울다가 지쳤나보다

3
나무로 된 제단(祭壇)은 사라지고 없었지만
높지 않은 천장과 벽을 지나 기억字 다락방에 들어갔다
먼지 깔린 마루 위, '다락방의 미친 여자'가 눈꺼풀 깜빡인다
습기 묻어 닳은 웃음 나무 계단을 미친 듯 닦고 있다
안타깝게도 그곳에는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는 없었다

4
하루 종일 굶었다
마티니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소리에 은그릇 반짝거림이 딸꾹질 한다
이슬 맺힌 잎사귀 후려치는 듯, 벽난로의 기둥이 꽃화분 훔쳐보고 있다

5
미친 여자의 하이힐처럼 똑딱대는 子正무렵
오늘은 '도둑맞은 시간에 걸어오는 연인에 대해 이야기 해 볼까 합니다
연인을 능욕한 천박한 권태는 그녀의 머리카락 끝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손도 닿기 전에 시들기 시작하는 마른 허브잎
그날은 불안을 잠식하는 비를 맞고 집으로 돌아 왔다
의심은 달착지근한 냄새로 붙어 있었다

 

6

詩를 생각하다 그만,
생선 눈알처럼 벌겋게 달구어진 子音들, 꼭꼭 밀어 넣어 반죽한다
슬픔 뚝뚝 떠내어 ‘대리만족’ 이라는 수제비를 굽는다
기호를 품지 않은 낱말 대리만족을 모른다
세상의 조롱거리 내 몫이 아니지

 

7
물안개 추파秋波처럼 미끄러지다 까무러치는 호수 주변을 손잡고 뛰었다
파르테논 신전 앞에서, “그대에게 사랑을” 고백하겠다던 맹세는 황사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갑자기 입술의 냄새는 서걱거리는 먼지처럼 까칠해졌다
사나흘 내린 비 끝에 다시 아르정탱에 갔습니다
본능의 능숙함이 당신의 입술을 더듬거렸습니다.당신의 입술은 나의 미각만을 기억할 뿐
두 시 방향으로 기운 햇살의 온화함이 묻어 있어요

8
주인장
오늘은 Leonard Cohen의 Famous Blue Raincoat를 들을 수 있겠소 
내 인생이 파편으로 취급당하고 싶지 않아서 그렇지요
약하게 슬어지는 音調, 불구가 된 기억에는 없다
건너 편 테이블의 핑크재킷과 홍차 사이에는
말해야 하는 것이 있음에도 말할 수 없는 어색함 감돌았다
다만 성스런 스푼이 빛바랜 비단옷 차림으로 춤추고 있다

9
그날은 
교리의 꽃봉오리에 충실한 교회 사람들
마음씨 좋지만 우둔한 젊은 청춘들 빈틈없이 가득 차 있었다
매끈하게 빠진 조약돌 하나 주머니에 넣고 땀이 나도록 문질러도
손이 헤지 않을 그런 신부와 결혼식이 있을 예정입니다
각별한 의식儀式
주인장이 누구에게나 봄소식 하나 던져 준 날이다

10
오늘은
여자들 불편하게 하는 소박한 음악 연주회가 있어요
콘트라베이스를 든 남자의 팔뚝이 검게 그을다만 남성성을 과시하고 있어요
첼로의 숨결소리, 매일 밤 떠오르는 해가 되었다
그렇다고 카스트라토를 죽이지는 마세요
수족관의 주홍빛 물고기들
살아, 살아 외침을 거듭하고 있다
함께 살고 싶어 안달하는 소년 소녀를 위로하는
무조건적인 달, 높이 떠올라
호수는 물안개의 소름으로 노닥거리고 있었다
(손끝 적셔주는 빗방울 떨어져 분열증 낚아챌 때, 정신과적 치료가 필요해요)

11
한 사람이 두 사람을 기다린다
서로 같은 나라 말을 쓰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한 사람은 표준말에 서투르고, 다른 한 사람은 사투리에 서투르다
그런데 표준말을 잘하고 또한 사투리도 잘하는 사람이 죽는다
무슨 뜻, 어떤 의도였는지 아무도 모른다
관객들은 짐작만 할 뿐

12
남자 둘 여자 하나
쭈그린 술친구들입니다
한 사람의 맹세가 나뭇가지 위 잔설殘雪에 반짝이고 있어요
술 그리고 여름날의 여자만 저울질하겠다 말했지요
맥주의 쓴맛을 혀 위에 굴리며 곁눈짓으로 농담을 엿들었다
혼자 잠드는 침대처럼 사는 게 아쉽다고 느껴질 때면
Bevinda의 “다시 스무살이 된다면”이 떠올랐어요

13
'장미빛 인생'을 닮지 않은 
장미 입술에 입맞춤 한다고 장미가 웃겠어요
오히려 우리가 울었지요
그대 떠났을 때 나는 온통 그림자로 드리워질 거예요건너 보이는 트라이엄프 아파트의 커튼 찢겨져 방향 없이 나부낀다
不在의 냄새, 비온 후의 버섯이 되었다

14
서리 내리는 차가운 11월
골목길 빠져나오는데
검은 상복 벗어던지지 못한 숙녀의 얼굴 빤히 쳐다보는 여름날의 구름은 못내 불편하다
잘못 보낸 시간의 보복을 염려하고 있는가
구름의 맥박은 거의 고동치지 않았다

15
밤이면 내 꿈을 흔들어 놓던 그대는
홀린 듯 둥글게 닫힌 가방을 열고 몰래 감추어둔 햇빛을 쏟아 부었다
- 숨쉬기 운동에는 적당한 햇빛이 필요해

16
큐피드의 화살을 맞고서,
미처 빠져 나오지 못한 경절형 심장이
베네딕트 여자 봉쇄 수도원 55m 종루에 사로잡혀 길게 하품하더니
졸음을 재촉하고 있다
다트의 화살은 한 방울의 피도 남기지 않고 쏟아내는구나

17
빵 굽는 냄새 속,
기억은 회초리 맞은 情에 사로잡혀
한낮의 깊은 그림자 소진해 버렸다
걸어 두어 목이 잘린 꿈 외투 걸치듯 입고 나왔다

 

* 대구 수성구 파동 664번지에 있는 카페

 

 

 

심사평(시) -김 종 시인

 

시적 요건 장치 담긴 총체적 기상도



  '신춘문예'는 한 신문사의 대단한 일년농사다.
그리고 이 일을 기다리는 많은 사람들에겐 두꺼운 지층을 열고 나온 새싹의 그 파릇한 정신과 가능성을 보여드리는 일이다.

  세상이 저물고 나서야 떠오르는 얼굴, 새해의 일출이다. 무등산의 저 너른 오지랖을 덮어버릴 넘치는 그 일출 같은 생명력이 당선자라면 이것만으로도 '신춘문예'가 작품을 읽어낸 독자들에게 보답하는 의미가 될 것이다.

  예심을 거쳐 최종심에 남겨진 작품들은 '트래픽 잼', '새벽, 삼당 민박집 콩밭을 걸으며', '엄마가 움직이지 않아요', '프레임 아웃', '하회탈', '딱지를 접으며', 그리고 당선작으로 뽑은 '아르정탱(Argentan)안을 습관적으로 엿보기' 등이었다.

  이들 작품들은 저마다 신인에게 필요한 패기와 발랄함, 시적 개성 등이 숨쉬고 있어서 어느 작품을 당선에 올려도 손색이 없겠다 싶었다. 허나 선택에는 항시 '보다 더 좋은'이라는 조건이 걸리는 터여서 '아르정탱…'이 뽑힌 것이다.

  당선작은 우선 시적 길이부터가 근년의 경향에서 조금 예외이다싶게 장시적 모습을 띠고 하나의 이야기를 담아낸 작품이다. 그리고 당선작이 지닌 장시가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지만 여기에는 갖가지 시적 여러 요건이나 장치들이 담겨 있어서 그야말로 시에 대한 총체적 기상도를 읽어낼 수 있다.

  이같은 길이를 파탄 없이 끌고 가는 시인의 저력이 돋보였고 후일의 야심 또한 읽을 수 있었다. 적어도 손끝에 달린 몇개의 감각과 재주로 세상에 덤비는 얄팍함도 덜어낼 수 있었다. 덧붙여 동반 응모작품 또한 고른 수준을 보인 점도 이 시인을 더욱 미덥게 한 부분이다.

  그래서 '아르정탱…'에게 새로운 세계를 찾아가는 '당선작'이라는 배 한척을 내어드리기로 한 것이다. 응모자 모두의 건승을 빈다.


 

<당선소감> 숨쉬기 운동에는 적당한 햇볕이 필요해 - 윤은희       


  지난 두 해 동안 詩와 나는 서로 의존하며 살아왔다. 시가 그 모습을 가지게 되는 시각화(visualization) 작업을 통해, 이해하고 양육하며 내 인생이 파편으로 취급당하지 않도록 협력하였다

  당선 소식을 접하는 순간, 상상력의 요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부자가 된 기분이다. 거친 들판을 가로질러 별안간 봄이 오는 것 또한 보인다.   詩의 양식을 혼자 먹어야 하듯이 시인에게는 남몰래 흘리는 눈물이 있다. 그러나 오늘의 그것은 슬픈 교만이 깃든 기쁨의 눈물이 되리라

  벽돌이 가득 든 배낭을 어깨에 올려놓은 중압감을 잠시 내려놓고 기쁨은 상속된다는 의미를 새긴다 .   이 시대 여성의 미덕이 ‘타인을 배려하는 윤리ethic of care'라면 그 주제어에 대한 가치 깊은 천착(穿鑿)이야말로 사회적 약자에 대한 여성의 문학적 역할과 그 파급효과를 기대해 볼 수 있으리라.

  당선작이 ‘잘 빚어진 항아리’와 같은 훌륭한 작품은 아닐지라도 “결정본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보르헤스의 말을 변명으로 대신하면서 앞으로도 동서양을 가로지르는 글읽기와 글쓰기는 계속할 것이다.

  부족함이 많은 저에게 도약할 수 있는 열정의 꿀씨를 던져주시어 초심자의 마음으로 자신을 독려하고 삭정(削正)하라는 심사위원님들께 머리 숙여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호흡이 긴 시”,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는 말로 시 앞에서 직면하는 법을 가르쳐 주신 울산대 구광렬 교수님, 17년 동안 시와 반시를 이끌어온 구석본 교수님 그리고 손진은 교수님, 김상환 선생님, 고희림 시인께도 감사의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아울러 사랑을 표현하기에 서툴기만한 가족과 시와 반시 전체 회원님들 이 기쁨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  새해에는 언어의 영매가 되어 글을 쓰는 작가가 되고 싶다는 소망이 넓어진다.

 

         ▲경북 경주 출생 /   ▲계명대 일반대학원 영문학과 졸업 
 

 

 

<출처> 2009. 1. 1 / 무등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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