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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경북. 울산

경북 성주의 ‘만추’, 숨어있던 ‘가을 길’ 발견

by 혜강(惠江) 2008. 11. 15.

                                   

경북 성주

숨어있던 ‘가을 길’을 발견하다

 

박경일기자

 

 

 

▲ 경북 성주의 독용산성으로 오르는 길. 좁긴 하지만 유연한 곡선으로 이어진 이 길에 들어서면 온통 화려한 단풍에 멀미가 날 것같다. 이런 길이 부드러운 능선을 따라 무려 6㎞가 넘게 이어진다.

 

 

▲ 조선후기 공조판서를 지낸 이원조의 만귀정이 있는 옥계천의 구시폭포. 물이 흘러내린 소(沼)가 말구유같다고 해서 ‘구시’라는 이름이 붙었다.

 

 

 경북 성주의 옥계천. 바위를 타고 흘러내리는 맑은 물이 마치 흰 천을 펼친 것 같다고 해서 ‘포천(布川)구곡’이라고도 불리는 물길을 거슬러 올라 만귀정(晩歸亭)을 만났습니다. ‘너무 늦게 돌아왔다’고 해서 ‘늦을 만(晩)’자에 ‘돌아올 귀(歸)’자를 써서 이름으로 삼은 정자랍니다. 그 만귀정에 딸린 한 칸짜리 자그마한 누각의 이름도 범상치 않습니다. ‘만산일폭루(萬山一瀑樓)’. 누각에 올라 사방으로 난 문을 활짝 열었습니다. 열어젖힌 네 개의 문마다 가을색 가득한 산수화 네 폭이 눈 앞으로 황홀하게 밀려들었습니다.

  “이제 새삼 초조하고 황망스러운 마음으로 무엇을 욕심낼 것인가 / 돈도 지위도 바라지 않고 / 죽어 신선이 사는 나라에 태어날 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중략)…/ 잠시 조화의 수레를 탔다가 이 생명 다하는 대로 돌아가니 / 주어진 천명을 즐길 뿐 무엇을 의심하고 망설이랴.”

  중국 동진·송대의 시인 도연명의 ‘귀거래사’의 한 구절입니다. 평택현의 지사였던 도연명은 권세를 다 던지고 고향으로 돌아가며 이 시를 읊었다지요. 어디 도연명뿐이겠습니까. 세속의 끈을 놓고 자연으로 되돌아가려는 꿈이야, 도회지에서 번잡스러운 삶을 사는 사람들이 늘 꾸는 것이지요. 더구나 세상 일이 죄다 뒤숭숭한 요즘은 그 꿈이 더 간절하지요.

  만귀정의 주인은 조선후기 공조판서를 지냈던 응와 이원조입니다. 열여덟의 나이에 문과에 급제하고 스물한살에 벼슬에 나섰지만 노론이 득세하던 당시 남인이었던 그의 벼슬살이는 그야말로 고난의 연속이었지요. 그는 결국 쉰여덟의 나이에 파직을 당합니다. 경상좌도 암행어사가 ‘긴히 쓸 데가 있다’며 요구한 돈 300냥을 마련해주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이었지요. 그리고 나이 예순이 되던 해 고향인 성주로 내려와 정자를 지었는데, 그곳이 바로 만귀정입니다. 마흔한 살에 고향으로 돌아간 도연명에 비한다면, 정자의 현판 이름대로 그의 귀향은 ‘너무 늦었던’ 셈이지요.

  가을이 깊어가는 만귀정과 만산일폭루에서 만난 풍경은 만추의 정취로 가득했습니다. 맑은 물이 흘러내리는 구시폭포에는 낙엽들이 소복이 쌓였고, 온통 노랗고 붉게 물든 단풍은 사각사각 잎을 떨구고 있었습니다. 누군가 ‘올 가을 최고의 정취를 꼽아달라’고 한다면, 두말 않고 이곳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만귀정에서 시작한 성주 여행은 꼬리에 꼬리를 뭅니다. 만귀정을 지은 이원조의 고향마을은 고택들이 즐비한 한개마을입니다. 돌담길을 낀 한옥들이 빚어내는 고즈넉한 아름다움도 좋지만, 북쪽으로 사립문을 낸 ‘북비고택’에 얽힌 사도세자의 이야기며, 제주에서 가져다 심었다는 귤나무에 매달린 탱자열매의 향이 발길을 붙잡았습니다.

  이곳 말고도 성주에서 찾아가볼 만한 곳을 골라내자면 숨부터 가빠옵니다. 먼저 가야시대에 쌓았다는 독용산성으로 나있는 6km가 넘는 외줄기 능선 길을 빼놓을 수 없지요. 차를 타고 오르는 낙엽 수북한 그 길에서 마주친 가야산 자락과 독용산 일대의 화려한 가을단풍은 ‘장엄하다’는 표현으로도 부족했습니다.

  이름난 유학자 한강 정구를 배향한 회연서원의 가을풍경은 숨이 턱 멎을 정도였답니다. 서원을 관리하는 후손은 ‘며칠만 일찍 왔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했지만, 이보다 더 나은 풍경이 있으리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서원에서 시작해 대가천 물길을 끼고 멀리 김천까지 이어지는 무흘구곡의 절경을 따라가는 것도 포기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경북 성주. 여행지로는 낯선 곳입니다. 기껏해야 ‘성주참외’ 정도로만 알려졌을 뿐, 성주는 특별한 인연이 없는 이들이라면 지도를 펼쳐놓고도 한참을 짚어봐야 찾아낼 수 있는 곳입니다. 다 돌아보고서야 비로소 알았습니다. 성주 땅이 얼마나 빼어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으며, 또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는지….

  이렇듯 아름다운 곳이 왜 알려지지 않았을까,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곳이 있습니다. 때론 독자들의 손목을 잡아끌고 함께 찾아가보고 싶은 곳이 있습니다. 그 목록의 ‘가을편’ 첫 줄에다 경북 성주의 이름을 적어놓습니다. 단언컨대, 아무런 망설임도 없습니다.

 

 

제방 쌓아 수해예방, 고을 원님보다 존경

 

기생 공덕비 ‘앵무빗돌’

 

 

 성주군 용암면사무소 부근에서 ‘앵무빗돌’을 만났다. 구한말 유명한 기생이었다는 염롱산(廉롱山)이 매년 큰물이 져 논밭이 쓸려나가자 용암면의 두리방천 제방을 쌓는 데 큰 공을 세워 마을주민이 세워준 공덕비라고 했다.

 고을의 세도가나 원님을 기리는 공덕비는 수없이 보았으되, 기생을 위해 주민들이 세워준 공덕비는 이것이 유일한 듯 싶었다. 이 비석을 ‘앵무빗돌’이라고 부르는 것은, 염롱산이 앵무란 이름으로 더 유명한 기녀였기 때문이다.

 염롱산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사실 롱산이란 이름도 앵무새가 많기로 이름난 중국의 산 이름이라 본명인지도 분명하지 않다. 빗돌 앞에서 이른바 ‘대구삼절’로 불려 유명했던 기생 앵무를 떠올렸지만, 생몰연대가 차이가 나서 혹시 같은 이름의 기생이었을 수도 있겠다.

 경상감영 교방의 관기였던 대구 기생 앵무는 국채보상운동에 거금을 내놓기도 했고 독립만세를 외쳤던 기생조합사건에 연루되기도 했던 올곧은 기생이었다. 빗돌을 쓰다듬던 주민 홍영기(68)씨는 “무관심 속에 묻힌 그의 삶을 찾아주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가을 끝자락 따라 익어가는 옛 이야기


 

▲ 성주 한개마을 한주종택 사랑채에는 높이 치켜올려 지어진 정자인 한수헌이 딸려있다. 한수헌의 난간에 기대고 앉아서 탁트인 가을 풍경을 내다보노라면 옛 선비들의 풍류가 그대로 전해지는 듯하다.

 

 

▲ 뒤주에 갇힌 사도세자의 구명을 간하다가 곤장을 맞고 벼슬자리에서 쫓겨난 이석문이 말년을 보낸 북비고택.

 

 

 가야산 북쪽 자락의 경북 성주 땅은 참으로 ‘깊은’ 곳이다. 그 아름다움이 외지인들에게 알려지지 않아서 깊기도 하거니와, 전해오는 이야기들도 깊고, 그곳에 깃든 정신 또한 깊다. 또 그곳은 가을 또한 다른 곳보다 유독 더 깊다.

 성주에서의 여정은 만귀정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성주 땅에 깃든 이야기를 거꾸로 거슬러 짚어가는 지점이기도 하고, 자칫 늦어지면 만귀정 계곡의 가을 정취를 놓칠까 염려되기 때문이다. 만귀정은 조선후기 공조판서 등을 지낸 이원조가 만년에 고향 땅으로 낙향해 세 번을 옮겨가며 지은 정자다. 그는 요직을 두루 역임하고 60세가 되던 해에 성주 땅에 낙향해 정자에 ‘늦게(晩) 돌아왔다(歸)’고 현판을 내걸고, 책을 읽고 학문을 닦으며 소일했다.

 맑은 계류가 흐르는 옥계천변에 들어선 만귀정은 송구스러울 만큼 쉽게 가닿는다. 옥계천(포천)구곡을 따라 정자 입구의 음식점까지 차로 오를 수 있다. 차를 두고 걸어봐야 5분 거리도 안 된다. 그 짧은 걸음이 미안할 정도로 만귀정 주변의 가을풍경은 그림처럼 아름답다.

 뒤로는 우뚝 솟은 가야산의 칼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쳐 있고, 맑은 계류에는 곱게 물든 단풍잎이 비쳐 가을빛이 짙다. 계곡 아래 맑은 소(沼)가 말구유처럼 생겼다고 해서 이름붙여진 구시폭포에는 소복하게 낙엽들이 떠내려왔다.

 만귀정 아래 계곡 옆 암반에는 한 칸짜리 자그마한 누각이 있다. ‘만산일폭루(萬山一瀑樓)’. ‘일만 개의 산에서 내려온 물이 하나의 폭포로 내려온다’는 뜻이다. 현판 하나에도 ‘수만가지 사물과 현상의 원리는 하나’라는 뜻을 담고 싶었던 것일까. 이즈음 만산일폭루에 들어 사방으로 난 문을 열면 일만 개의 산에서 쏟아지는 가을빛이 좁은 누각 안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가을이 다 가기 전에 만귀정을 들르게 된다면 가을의 쓸쓸함이, 혹은 빼어난 누각의 정취가 ‘돌아갈 곳’ 혹은 ‘돌아갈 때’를 생각케 할지도 모르겠다.

 만귀정의 주인, 이원조의 고향은 월항면의 한개마을이다. 500여년을 이어내려온 성산 이씨의 집성촌인 한개마을은 소박한 돌담을 따라 오래 묵은 한옥들이 들어서 있다. 도처에 세월의 흔적이 가득한 한옥마을의 가을정취는 무딘 글솜씨로는 차마 형언해낼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다.

 한개마을의 중심에는 대감댁이라고도 불리는 ‘북비고택’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이원조가 살았던 집이다. 북비(北扉). 북쪽으로 사립문을 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택호(집의 이름)의 연원을 따지자면 이원조의 증조부 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증조부 이석문은 사도세자의 호위무관이었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음을 앞뒀을 때, 이석문은 어린 사도세자의 아들(훗날 정조임금이 된다)을 업고 어전에 나선다. “뒤주 위에 돌을 얹으라”던 추상같던 영조의 호령에도 끝까지 사도세자의 구명을 간하던 그는 결국 곤장을 맞고 벼슬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낙향한 그는 북쪽으로 문을 내고는 매일 새벽 사도세자의 묘를 향해 재배했고, 그런 그를 사람들은 ‘북비공’이라고 불렀다. 훗날 다시 벼슬이 내려졌지만, 그는 평생을 벼슬자리에 나가지 않았다.

 한개마을에는 북비고택이 아니라도 높이 치켜올려진 운치있는 정자를 갖춘 한주종택도 있고, 이원조가 제주목사 직에서 물러나면서 가져온 세 그루의 귤나무 중 하나가 성성하게 살아있는 교리댁도 있다. ‘강남의 귤이 위수를 넘으면 탱자가 된다’고 했던가. 200여년의 세월에 귤나무는 가시가 돋친 탱자가 됐고, 가지 끝에는 향긋한 내음의 노란 탱자열매가 열렸다. 한개마을이 각별한 것은 마을 주민들의 후덕함 때문이다. 시도 때도 없이 들어서는 외지사람들이 귀찮을 법도 하건만, 교리댁을 지키던 후손은 낯선 방문객에게 탱자를 쥐어주기도 했고, 한주종택에서 만난 후손은 멀리 가야산을 내다보라 정자 위로 오를 것을 권하기도 했다.

 내친 김에 더 거슬러 올라가보자. 한개마을의 성산 이씨들은 모두 광해군 때 문과에 급제한 이정현의 후손들이다. 이정현을 가르친 스승이 바로 성주가 자랑하는 대학자 정구다.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 학문을 이어받은 대학자인 정구는 성주 땅에서 평생 344명의 후학들을 길러냈다. 수륜면 신정리의 회연서원이 바로 그가 후학들을 길러내던 옛 초당 자리에 들어선 서원이다.

 회연서원의 늦가을 풍광 앞에 누구를 세워놓은들 감탄하지 않을 수 있을까. 2층 누각 ‘견도루(見道樓)’에 올라 서원을 내려다보면 앞마당은 400년 된 느티나무가 떨군 낙엽들로 가득하다. 지붕의 기왓골마다 수북이 쌓인 갈색 낙엽과 노랗게 반짝이는 은행잎들, 거기다가 감나무 고목의 가지에 휘어질 듯 매달린 붉은 감까지 가을의 색감을 보탠다. 마침 서원 안팎을 둘러보던 후손은 “며칠만 더 일찍 오지 그랬느냐”고 아쉬워했다. 지금은 절반 넘게 ‘잎새’를 떨군 서원 앞의 느티나무가 온통 붉게 물들었던 광경은 혼자 보기 아까운 풍경이었다고 했다.

 정구는 중국의 무이구곡을 본떠 서원 앞으로 흘러가는 대가천을 오르내리며 경관이 뛰어난 아홉 곳을 골라 하나하나 이름을 붙였으니, 그것이 무흘구곡이다. 구곡 중에서는 3곡 배바위와 4곡 선바위가 가장 빼어나다. 특히 선바위는 우뚝 솟은 30m 암봉에 뿌리를 내린 소나무가 자라고 있어 신비로움을 더해준다. 굳이 구곡이 아니라도 성주댐을 지나면서 펼쳐지는 드라이브 코스의 풍광은 가히 점입가경이다.

 성주 땅에는 독용산성이 있다. 독용산(955m)을 끼고 해발 720m에 세워진 독용산성은 영남지방의 산성 중에서 그 규모가 가장 크다. 성곽을 쌓은 연원은 성주가야 시대까지 올라간다. 독용산성을 찾아가는 것은 산성을 보러가는 목적보다는 화려한 단풍을 만나기 위함이다. 산 아래서 산성 쪽으로 능선을 오르는 임도는 폭이 좁은 데다 대부분의 구간은 가드레일도 없는 아찔한 벼랑길을 달려야 한다. 하지만 도로포장이 정갈하게 돼있는 데다 길의 높이와 굽이도 부드러워 미리 겁부터 낼 일은 아니겠다.

 이 길에서는 단풍을 가깝게 혹은 멀게 욕심껏 볼 수 있다. 굽이를 돌 때마다 빼어난 조망이 펼쳐진다. 길 옆과 건너다 보이는 산자락을 물들인 현란한 단풍들로 멀미가 다 날 정도다. 저 멀리 구름을 이고 있는 가야산의 산봉우리가 첩첩이 이어져 있는 풍경도 한눈에 다 들어온다. 이런 능선길은 무려 6㎞ 넘게 이어진다.

 성주에서는 세종대왕자태실도 건너 뛸 수 없는 곳이다. 선석산 자락 아래 수양대군(세조)을 비롯한 세종대왕의 적서 18명 중 큰아들 문종을 제외한 17왕자의 태실과 단종의 태실이 있다. 마치 호위하듯 산들이 삼면을 둘러싼 한가운데 봉긋하게 솟은 봉우리 정상에 태실이 있다. 태실이란 왕실의 번성을 위해 왕자의 태를 묻은 곳.

그러나 세종의 바람과는 달리 왕자들의 우애는 계속되지 못했다. 둘째 아들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을 축출하고 왕위를 찬탈하고 만다. 이후 단종 복위를 꾀했던 안평대군과 금성대군, 한남군, 영풍군, 화의군은 태와 비석이 파내져 산 아래로 던져졌다. 그러나 당시 민심은 세조 편이 아니었던지, 세조가 즉위한 뒤 태실 앞에 세운 비석을 백성들이 돌로 찍고 갈아내는 바람에 글자를 거의 알아볼 수 없게 됐다고 전한다.

 성주 땅은 수많은 이야기들과 아름다운 가을의 풍광으로 가득찬 곳이다. 그 아름다움을 만나보려면 이 가을이 더 물러가기 전에 찾아가야 한다. 그러자면 바쁘다. 이번 주말이라면 그리 늦지는 않을 것이고, 다음주라면 장담할 수 없다.

 

가는 길

  수도권에서 가자면 영동고속도로로 여주분기점에서 중부내륙고속도로를 타고 성주나들목으로 나오는 것이 가장 빠르다.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간다면 왜관 나들목으로 나와서 국도 33호선을 타고 10분만 달리면 성주에 닿는다. 만귀정과 무흘구곡, 독용산성, 회연서원은 성주읍에서 서쪽으로 치우쳐 있고, 한개마을은 읍의 동쪽에 있다. 이동의 효율성으로만 보자면, 만귀정과 독용산성 무흘구곡을 둘러본 뒤에 회연서원을 거쳐 한개마을과 세종대왕자태실의 순서대로 도는 것이 낫다. 다만 길이 좁은 독용산성은 서둘러 가는 것이 좋겠다.

 

묵을 곳 · 먹을 것

 

 

  성주는 숙소사정이 열악한 편이다. 읍내에 몇 곳의 모텔이 있지만, 가족단위 여행에는 적당하지 않다. 모텔 중에는 새로 지은 에이스모텔( 054-933-5454 )이 깔끔한 편이다. 숙박료는 3만원으로 저렴한 편이다. 가족과 함께하는 여행이라면 만귀정 가는 길의 옥계천(포천구곡)을 따라가면 한여름 물놀이객을 받던 민박집들이 드문드문 있다. 펜션 형태의 깔끔한 민박집들도 있다. 이즈음에는 예약없이 찾아가도 쉽게 방을 잡을 수 있다.

 맛집은 이렇다 할 곳이 없다. 청국장을 내놓는 성주읍의 왜관식당( 054-932-9554 )이 제법 이름이 난 곳. 그렇다고 굳이 먼길을 돌아 찾아갈 것까지는 없겠고, 오가는 길에 들르면 좋을 곳이다. 성주 시외버스터미널 옆의 감골식당( 054-931-3100 )에서 정식(1만원)을 주문하면 시골집에서 받는 것과 같은 토속적인 밥상을 내온다. 이즈음 도회지에서는 쉽게 맛볼 수 없는 등겨장도 맛볼 수 있다.

 

<출처>2008-11-12 / 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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