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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경북. 울산

신라 천년의 고도(古都), 경주 ①

by 혜강(惠江) 2008. 11. 12.

 

신라 천년의 고도(古都), 경주①

 

 

월간조선 통신원 김신묵의 해피투어

 

 

 

 

경주, 옛날에는 해외 여행이나 심지어 제주도 여행도 쉽지 않아서 신혼여행을 경주, 온양등지로 많이 갔었던것 같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지난날의 추억으로 버무려진 기억을 갖고 있는 경주. 그러나 그 당시 무엇을 보았는지? 그것들이 어떤 의미와 가치가 있는지는 잘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 또 현실이기도 하다.

 

신라 천년의 고도(古都) 경주(慶州). 고구려는 우리가 갈 수 없는 북쪽에 치우쳐 있고, 백제는 패망한 나라의 역사로 어두운 그늘 속에 묻혀 있다면 삼국을 통일한 신라의 문와 역사가 밝은 햇빛속에 고스란히 살아있는 곳 경주. 고려에게 짓밟히고 압살당하고 초토화되어 멸망한것이 아니라 국력이 다하여 신흥국가인 고려에 왕위와 나라를 바치 조용히 숨을 거두었던 나라 신라의 수도 서울이다.

 

30년만에 수학여행을 다시 가보는 기분으로 떠난 경주行. 경주는 지붕없는 박물관이라는 말을 경주 박물관에는 지붕이 없다는 얘기로 알고 있는 일행들과 다녀온 이야기. (우리 클럽 77회 정기여행... 1박 2일로 다녀온 여행입니다)

 

경주를 하루 이틀만에 둘러본다는건 불가능하다. 혹자는 경주를 제대로 보려면 한 달보아야 한다고 하지만 적어도 3, 4일은 보아야 어느정도 보았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쁘고 힘든 현대인의 일에서 그렇게 푸짐하게 시간을 내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어서 1박2일로 둘러보되 알차게 둘러보고경주지도를 놓고 며칠을 연구하고 또 고민한 주를 권역별로 나누어 돌아보기로 하였다.

 

경주자료들을 보면 경주관광을 시내권, 남산권, 불국사권 그리고 동해권으로 나누었으며 첨성대, 국립박물관등이 있는 시내권과 토함산등 이 있는 불국사권은 보편적으로 많이 알려지고 대부분 가본 곳이기에 이번에는 산자락 여기저기 볼거리가 숨어 있다는 남권과 감포까지 이어지는 동해권중점적으로 보기로 하였다.

 

서울에서 경주까지는 4시간 정도면 도착할 수 있다. 경주에 도착하니 톨 게이트가 한옥 지붕을 이고 선 모습이 전주의 톨게이트와 함께 매우 친숙해 보인다. 주말이다 보니 관광지 경주는 진입로부터 붐비고 있었다. 게다가 우리가 찾아간 날자 (4. 26~27일)에 갖가지 지역축제 행사등으로 경주는 매우 혼잡하고 복잡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해도 금강산도 식후경인 바 우리는 남산지역 끝자락쯤에 있는 용장리 오리고기집에서 점심을 먹었으며 점심을 먹고 난 후에는 가까운 남산 지을 먼저 둘러보기로 하였는 길옆에 있는 포석정에서부터 시작하게 되었다.

 


■ 포석정 (鮑石亭)

 

 

 

 

경주 남산 서쪽 35번 도로변에 위치한 포석정은 우리가 잘 아는대로 물이 흐르게 만어놓고 물 위에 술잔을 띄워 시를 읊었다고 하는 유희적 요소가 있는 사적이다. 927경애왕이 왕비, 궁녀, 신하들과 포석정에서 놀다가 견훤의 습격을 받아 죽은곳이며, 래서 결국은 패망할수 밖에 없었신라말기 왕조의 무능력과 부패를 당당하게(?) 설명하는 곳이기도 하다.

 

포석정은 신라 왕실의 별궁으로, 역대 임금들이 연회를 베풀던 곳이다. 지금은 정자의 건물이 모두 없어지고 마치 전복같이 생긴 석조 구조물만 남아 있는데, 화강석으만든 수구(水溝)의 길이는 약 6m다. 임금은 이곳에서 신하들과 더불어 잔을 띄우시를 읊었을 것으로 보인다. 석정에 대한 기록은 신라 제49대 헌강왕이 신하들과 어울려 여흥을 즐길 때 남산의 신이 왕앞에서 춤을 추자, 왕도 따라 추게되어 이로부터 어무산신무(御舞山神舞) 라는 신라춤이 만들어졋다고 전해 준다. 경애왕 4년(927) 후백제 견훤 군대의 습격을 받아 최후를 마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은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있었으나, 오늘날까지 그 자취가 이처럼 잘 남아 있는 것은 매우 드문 일로, 당시 사람들의 풍류와 기상을 엿 볼수 있는 장소이다.

 

포석정이 있는 자리는 경주 서쪽 후궁(後宮) 또는 이궁원(離宮苑)으로 면적이 3천평이 넘으며, 약 2~3킬로미터 상류의 안골 샘못으로부터 물을 끌어들인 것으로 여겨진다. 현재 수백년 고목의 뿌리가 자라면서 융기하여 지반이 들려진 탓에 전체적인 수평이나 높낮이가 틀려졌다고 하며 시작하는 곳에 큰 돌거북을 설치하여 그 거북의 입에서 물이 나오게 한 후, 그 물이 화강석으로 만든 수로를 따라 흐르게 하였는데 물이 그대로 흘러 간다면 2~3분안에 다 빠져나갈것이므로 그 시간 안에 詩作을 한다는것은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구부러지고 휘감아지게 만듦으로써 술잔이 곡수(曲水)부분을 빠져 나갈때에 멈추기도 하고 맴돌기도 하면서 흘러가므로써 대략 십여분정도가 걸리도록 정밀하게 설계한 지혜가 깃든 작품이라고 한다.

 

형태나 크기를 살펴보면 모양이 다른 63개의 화강암을 이용하여 수로를 구성하였으며, 석재의 높이는 20cm, 폭은 15cm 정도로 안정되어 있고 전체 모양이 전복을 닮아서 포석정(鮑石亭)이라 하였다고 한다. 포석정 동서의 긴 축이 10m, 폭은 약 7m로 수로의 길이는 약 22m에 이르는데 수로의 폭은 20~40cm로 일정치 않으나 대체로 평균 30cm 정도이며 깊이는 약 20cm, 수로의 입구와 구의 낙차는 40cm 정도이다. (설명판에 길이가 6m라고 한것은 시정하고 이렇게 자세히 기해야 할 듯 하다)

 

 

여기서 포석정과 신라 말기의 썩어빠진 왕조(?)에 대한 재평가, 재조명이 거론되고 있다. 경애왕이 살해당했다는 그 즈음은 이미 신라의 국운은 다하였고 왕건의 고려가 융성한 시기였으며, 곳곳에서 신라의 장수와 귀족들이 고려에 항복하고 투항해가며 이미 민심의 이반이 극에 달한 시기이다. 역사는 항상 승리한 자가 기록하는 것이니 삼국사기나 삼국유사가 신라 패망후 고려 시대에 쓰여진 이긴 자들의 기록이라고 본다면 결국은 이긴자가 기록을 통하여 패배한자를 한번 더 욕보이고 있는것은 아닐까 싶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경애왕의 마지막 모습을 보면 ‘경애왕 4년 (927) 11월, 견훤의 궁대가 왕경(王京, 경주)에 쳐들어왔다. 왕은 왕비, 궁녀와 포석정에서 잔치를 벌이느라 적이 오는 줄도 몰랐다.’ 고 되어 있고, 기록에 의하면 경애왕은 갑자기 후백제 견훤의 군사들이 쳐들어오는 것도 모를 정도로 소위 노천 파티를 벌이다가 습격을 한다. 경애왕은 호위병도 없이 병풍을 손수 가리고 광대들에게 군사를 막게 한 후 이궁(離宮)으로 달아났지만 곧바로 견훤에게 사로잡혀 왕비와 부하들 앞에서 자결한다. 이 기록만 보면 이미 저물어가는 왕조의 국왕이 적이 쳐들어온것도 모르고 여흥이나 즐기다가 사로잡혀 죽은것으로 되어 있고, 그리하여 신라는 망할수 밖에 없었무언의 당위성을 강조하는듯 하다.

 

그러나 경애왕이 살해된 날자가 음력 11월이면 양력으로는 12월인데 이렇게 추운 겨울에 포석정에서 술을 마시기 위해 왕비 등 문무백관을 대동하고 포석정에서 잔치를 벌였겠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또한 아무리 무능한 왕이라해도 적군이 경주 가까이까지 쳐들어와 있는데 술자리를 펴고 잔치를 벌이고 있겠는가 말이다? 경애왕이 일 년 중 가장 추운 날임에도 불구하고 포석정을 방문한 것은 쓰러져 가는 신라의 부흥을 위한 제사 혹은 기도를 드리기 위해서였을 거라는 주장인바, 삼국사기 中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연회를 벌이며 놀았다 (遊鮑石亭宴娛)’ 의 ‘유(遊)’를 ‘놀았다’가 아니라 ‘갔다’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포석정에서 가까운 남산 오릉에는 박혁거세, 유리왕, 남해왕 등 4명의 박씨 임금과 박혁거세의 부인 알령 왕비의 무덤이 있고, 신라 박씨 왕조의 발상지였던 남산은 불교가 수용되면서 많은 불교 유적이 자리 잡은 신라의 대표적인 신성지역이라서 박씨로 왕에 오른 경애왕은 하늘과 조상신들에게 간절히 기도하기 위해 이곳을 찾아 제를 올린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왕들이 잔치를 하거나 연회를 베푸는 장소는 안압지(雁鴨池)와 임해전(臨海殿)이 있는데 이런 곳을 두고 규모도 크지 않은 포석정에서 한겨울에 노천 파티를 연다는 것은 이해가 안 된다는 뜻이다.

 

포석정 주변에서 건물 흔적도 발견되었고, 1999년에는 ‘포석(鮑石)’이란 글자가 새겨진 기와조각도 발견되는등 포석정은 단순히 풍류를 즐기기 위한 오락시설이라기보다신탁이 행해지는 종교적인 장소였을 것이라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는것이다.

 

포석정 옆에 있는 우물터... 입구를 화강암으로 둥글게 조각하여 마감처리 한것으로 보아아서는 여염집 우물같지가 않다. 다만 관광객들이 빠질까 우려되어서인지 입구보다 조금 더 큰 무거운 돌멩이를 얹어 놓았다. 정확하게 어떤 우물인지는 설명도 없고, 문화해설사도 자신있게 말해주지 못한다.

 

포석정과 같은 유상곡수(流觴曲水)의 시회(詩會)를 갖는 역사는 중국 동진(東晉) 때의 절강성의 작은 도시 소흥(紹興)에서 명필 왕희지(王羲之, 321∼379)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하며 그후 중국, 일본, 한국등지에서 이러한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의 사적들이 발견되곤 하는데 그중 포석정이 가장 잘 보존된 곳이라고 한다.

 

한편 포석정은 경주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서울 창덕궁의 후원의 깊숙한 곳에도 있는데 조선시대에 임금들이 신하들과 둘러 앉아 술잔을 띄워보내면서 시를 지어 읊어야하는 시회(詩會)를 열었다고 한다. 인조 친필로 옥류천(玉流川)이라 씌여진 바위 아래의 널찍한 바위위에 물길을 파서 물이 휘감아 흘러 나가도록 함으로 경주의 포석정과 비슷한 기능을 하도록 하였으나 전체적으로는 작아 보인다.

 

천년신라의 古都... 경주(慶州)를 찾은 첫 발길이 신라의 패망을 지켜본 포석정이었다는 것이 조금아이러니일테지만 이 시작을 끝난 곳부터 보는것도 역사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막연히 신라 후기의 임금들은 이곳에서 주연이나 벌이다가 쳐들어온 적군에게 잡혀 죽었고, 그래서 신라는 망했다는 매우 위험한 생각들을 많이 정리 할 수 있는 장소였다. 여러가지 복잡한 생각으로 포석정을 떠난 우리는 본격적으로 남산지역 답사를 위한 등산로를 찾아 나섰다.

 

 

■ 삼릉골을 중심으로 남산 답사하기

 

 

 

 

포석정을 나와 조금 내려오면 삼릉(三陵)이 나오는데 삼릉 못미처에 삼불사(三佛寺)가 있다. 주차비나 입장료가 없어서 차를 대놓고 산행길에 나서기 좋은 곳이다. 우리는 이곳에 차를 대놓고 가벼운 복장으로 삼불사를 거쳐 정상(전망대)에 이르는 코스로 산을 올라 꼭대기 근처의 상선암까지 파죽지세(?)로 올라간 후 상선암에서 잠시 목을 축이고 휴식을 취한후 상선암 바로 위에 있는 마애불을 시작으로 삼릉까지 하산하는 계곡을 따라 계속 이어지는 부처님들을 만나면서 내려왔다. 남산만 둘러보자 해도 몇날 며칠을 지새워야 하겠지만 그 중 가장 화려한(?) 삼불사 => 상선암 => 삼릉 코스를 택한 것이다. 나머지 용장골이나 남산 부석 등의 볼거리는 다음을 기약하며 남겨놓을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삼릉골 (또는 냉골)을 둘러보는데만도 약 3시간 남짓 소요되며 하루 산행에 적당한 피로감부담해야 한다. 아쉽기는 남산의 각 골짜기와 계곡, 능선길을 상세히 그려놓은 안내지도가 없어 답답한 산행을 해야 했던 점이다.

 

 

ㅇ 배리(拜里) 삼존석불입상과 삼불사(三佛寺)

 

 

 

삼불사는 도로변에 가까이 있고, 그 바로 옆에 보물 제 63호 배리(拜里) 삼존석불입상이 있다. 이 세 분의 돌부처는 부근에 흩어져 누워 있던것을 1923년에 모아 세운것이라고 하는데 벽없이 지붕만 있는 보호각을 세웠다. 삼불사는 규모가 암자 정도 되는 본당과 산신당, 마당에 서있는 석탑이 전부인 작은 절이다. 절집 아래 화장실이 일본 승려 기부금 3천만원과 市費 3천만원으로 1991년에 지었다는 표석이 눈길을 끈다.

 

삼불사를 지나 이제 가파른 오르막길을 등산하듯 올라가야하는데 송림사이로 난 숲길은 제법 아늑하고 포근하다. 8부 능선까지는 아무런 석불하나 만날수 없어 우리가 길을 잘못 든게 아닌가 걱정하며 올라가야 했는데 마침내 나타난 부처님은 '선방곡 마애여래입상'이라는 입간판만 놓여져 있을 뿐 별다른 설명조차 없는것이 아마도 문화재적 가치는 없는 듯 싶었다. 계속 삼릉 계곡(삼릉골), 냉골로 불리우며 올라왔는데 갑자기 선방곡은 또 무언지? 선방사(禪房寺)라는 절이 있었다고 하더니 그 이름을 따서 그리 부르는듯 하였으나 이쪽 골짜기 석불들의 이름이 제각각인것이 조금은 못마땅했다.

 

마애여래입상은 선바위(立石)에 음각으로 새겨놓은것이 뚜렷이 식별되지는 않아 보였지만 1시간여만에 처음 만난 석불상인지라 어찌나 반가웠는지 한참을 머물며 들여보았다.

 

조금 더 올라가면 산아래 발밑이 시원하게 내려다보이는 암봉이 있고 정상 전망대로 올라가는 길과 오른쪽으로 상선암 내려가는 갈림길이 나타나는데 우리는 정상정복을 위한 산행길이 아니었으므로 오른쪽 상선암으로 방향을 꺾었다. 상선암은 작은 암자였는데 시원한 샘물로 목을 축이고 잠시 다리를 쉬어가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상선암에서 휴식을 마친 우리는 서둘러 하산을 할 참이었는데 누군가가 바로 위에 부처님이 한분 계시다고 한다. 귀가 솔깃하여 5분정도 위로 올라가보니 그냥 내려갔으면 너무나 서운했을뻔 할만큼 크고 멋진 석불이 거기 있었다. 크기 7m로 삼릉계곡에서는 가장 큰 석불이라는데 머리와 어깨 부분까지는 입체적으로 조각하였으며 그 아래로는 음각으로 선을 파내어 몸체를 표현 하였고 머리 뒷쪽 광배(光背)부분은 뒷바위를 파내다가 그만둔듯해보였다. 그래도 이제야 비로소 제대로 된 석불을 뵙고보니 감개가 무량하여 신발을 벗고 기도자리까지 올라 이리저리 둘러 보았다.

 

가슴이 후련해지도록 커다란 석불을 보고 내려가는 발걸음이 가볍다. 상선암에서 삼릉까지 내려가는 계곡길에는 서너개의 석불이 더 있다고 하여 기대감으로 하산을 재촉하는데 계곡 건너편에 높이 솟은 바위 위에 음각된 부처님을 발견하였다. 아무런 표시도 없고 이름도 없는것을 보니 역시문화재적 가치는 없는듯한데 그래도 이름은 지어주어야 하는것 아닌지? 아니면 그동안 아무도 못 본 것을 내가 발견한겐지.

 

그 다음에 만난 석불은 보물 제 666호 '삼릉계 석불좌상'인데 마침 완전 해체후 복구수리 중인지라 직접 볼 수는 없었다. 보물로 지정된 것을 보니 가장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불상인 듯한데 공사장에 걸린 사진으로만 보아야 했다.

 

다음에 한번 더 오라는 부처님의 뜻이려니 하고 발길을 돌리려는데 하산길로 바로 내려 가지 말고 약간 우회하면 부처님이 한분 더 계시다고 공사장 관계자가 일러주어 일행과 떨어져 혼자 돌아가니 과연 그곳에도 커다란 석불이 하나 있었다. 보수중인 석불좌상에서 바로 하산하면 볼 수 없고 오른쪽으로 우회해야 볼 수 있는 또다른 대형 석불 삼릉계곡 선각여래좌상이다. (선방골 삼릉계 삼릉계곡 등으로 현지 지명을 섞어 쓰니 다소 혼란스럽다.)

 

높이 10m정도의 바위에 역시 음각으로 새겨진 것처럼 보이나 자세히보면 얼굴부분은 양각(돋을새김)으로 조각하였고, 몸체 일부도 양각의 느낌을 일부 주었으되 전체적으로는 선으로 음각한 조금은 특이한 형식이다. 바위가 위, 아래로 나누어져 아쉬웠으며 지나는 길에서는 너무 가까워 치켜올려보아야 하거나 카메라 앵글에 잡기 어려웠다.

 

 

 

 

우회를 해도 내려가는 길은 서로 다시 합쳐지게 되는데 우회로를 따라가야만 볼수 있는 또 하나의 석불이 선각육존불이다. 병풍처럼 펼쳐진 2개의 큰 바위 위에 음각으로 선을 새겨 여섯 부처님을 그려서 선각육존불이다. 왼쪽 바위가 약간 앞으로 나온 형태인데 가운데 본존은 서고 좌우 보살은 꿇어 앉은 모습이며 이를 아미타삼존이라 하고 오른쪽 약간 안으로 들어간 바위에는 가운데 본존이 서고 좌우 보살이 서 있어 석가삼존이라고 한다. 암벽 위에는 이 불상을 보호하기 위한 법당을 세웠던 흔이 남아 있다. 전체적으로 산화된 붉은 색이 물들어 있는등 뚜렷이 식별되기는 어려운 조각들이다.

 

선각육존불을 지나 하산로가 다시 합쳐지고 조금 더 내려가니 이번에는 머리(佛頭)가 없는 석불이 있었다. 1964년 동국대학교 학생들에 의해 발견된 이 석불은 왼쪽 어깨에서 흘러내려 매듭진 가사끈등이 특징이다.

 

석조여래좌상의 바로 왼쪽 윗편에는 돌기둥처럼 생긴 작은바위에 왼손에 작은 병을 든 모습의 관음보살을 양각(돋을새김)으로 표현 하였는데 상선암에서 삼릉까지 내려오면서 마지막 순서로 만난 돌부처님이다.

 

이상 모두 8개소의 크고 작은 석불들을 만났는데 기록에는 모두 11개소의 절터와 15구의 불상이 산재해 있다고 한다. 아랫쪽에 삼릉이 있어 삼릉계곡이라 불리우는 이곳은 계곡이 깊고 여름에도 찬기운이 돌아 냉골(冷谷)이라고도 부르는데 남산권에서 가장 많은 문화유적들이 있고 금오봉 정상으로 향하기에 찾는 이가 가장 많은 코스라고 하니, 자세한 준비 지식없이 덤벼든 답사코스가 제대로 찾아온 결과가 된 것이어서 매우 만족스러웠다.

 

 

 

다만 아쉽기는 애초 자세한 등산코스 설명을 겸한 안내지도가 없어 애를 먹었으며, 실제 등산/하산길에 문화재 설명만을 써붙일게 아니라 다음 유적을 보려면 어디로 가라는 방향과 코스설명이 없는것이 처음 찾아오는 외지인들에게는 너무 힘들었다.

 

우여곡절 끝에 삼릉계곡 답사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평지로 내려오니 삼릉이 있다. 8대 아달라왕, 3대 신덕왕, 54대 경명왕의 릉이 한줄로 있어 삼릉(三陵)인데 3개의 陵이 그것도 한 줄로 조성되어 있고 제단은 가각의 능앞에 있지않고 맨 앞의 능에 3개가 나란히 세워져 있는 모습이 참으로 특이해 보였다. 경명왕은 신덕왕의 아들로 부자간에 앞뒤로 묻혔다고 하나 아달라왕은 왜 함께 모셔졌는지?.... 박씨 왕조의 윗분인지? 3개의 陵이 한곳에 모셔진것에 대한 배경설명이 없어 아쉬웠다.

 

 

 

대략 3~4시간쯤 소요된 짧지만 만족스러운 산행이었다. 남산권에 대한 자세한 안내지도 없이 다소 무모(?)하게 나선 길이 정확하게 최고의 답사코스로 맞아 떨어진건 행운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삼릉에서 산행을 시작하여 올라가고 있었는데 우리는 삼불사에서 시작하여 정상으로 올라가는 코스로 가다가 상선암에서 하산하여 삼릉으로 내려온것이니 산행을 마치고 현지지형 그림과 비교해보니 아래와 같았다.

 

삼불사 앞에 주차를 하고 배리석불(9)을 보면서 산행을 시작 1시간 남짓 올라가니 선방곡 마애여래입상(A)이 있었고, 상선암(17)과 바로 위에 있는 7m 높이의 삼릉계곡 마애석가여래좌상(18)을 본 후 하산을 시작, 이름없는 마애불(B)을 지나 보수중인 삼릉계 석불좌상(16)을 보았으며, 여기서 하산길을 버리고 우회로로 접어드니 삼릉계곡 선각여래좌상(15)이 있었고 그 아래편으로 삼릉계곡 선각육존불(14)을 볼 수 있었다. (우회로로 가지 않고 바로 하산하면 15, 14번을 볼 수 없다.)

 

그후 하산로는 다시 합쳐져서 머리가 없는 석조여래좌상(13)과 마애관음보살상(12)이 가까이 있어 둘러보고 내려와 삼릉(10)을 보고나니 어느새 도로까지 내려왔는데 전체적으로 약3~4시간이 걸렸다는 설명이 윗 그림이다. (참고로 19번은 정상 전망대... 11번은 경애왕릉이다.) 이런 코스를 상세한 등산로와 함께 답사경로와 문화재 위치/설명등을 병행하여 그려넣은 안내지도가 절실히 필요하였다.

 

아무튼 성공적인 남산 답사를 마친 우리는 용장골이나 다른 지역은 다음기회로 남겨둔 채 흐뭇하고 뿌듯한 마음으로 감동적인 답사결과에 대하여 논하면서 다리도 아프고 배도 고프니 새참을 먹자하고 가까이 있는 유명 칼국수집에 들렸다.

 

 

■ 경주 시내권

 

1박 2일의 경주여햇 첫 순서를 남산에 올라 매우 만족하게 내려온 우리는 경주시내로 향하였다.시내권은 경주박물관과 분황사, 황룡사, 계림, 첨성대, 대릉원등이 시내에 모여 있는 곳인데 그중에 국립경주박물관을 먼저 들리기로 하였으니 바로 에밀레종 때문이다.

 

ㅇ 에밀레 종

 

 

 

 

봉덕사 종, 또는 에밀레종이라 불리우지만 정식명칭은 성덕대왕(聖德大王) 신종(神鐘)이다. 립경주박물관 본관 앞에 따로이 세워진 이 신종(神鐘)은 예전에는 매일 주기적으로 타종을 하였지만 현재는 실제 종을 치지는 않고 녹음된 타종소리를 틀어준다고 한다.

 

장기보존을 위한 조치겠지만 못내 아쉬웠고, '치지 않는 종은 더이상 종이 아니다'라는 말처럼 이제 더이상 타종은 하지 않고 그저 박제된 동물처럼 종루 대들보에 매달려만 있다면 그게 무슨 종(鐘)이랴? 싶었다. 뿐만아니라 종에 대하여 나름대로 식견이 있는 사람들조차 종은 쳐야 하는 것이지 치지않고 보관만 하는 종은 실제로는 오래 보존하는데 전혀 보탬이 되지 않는다고 반박하기도 하니....  그 말에 귀가 솔깃해지는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신라 성덕대왕(재위 702~737년)의 명복을 빌기위해 세운 봉덕사(奉德寺)에 처음 봉안된 에밀레종은 경주를 휩쓴 대홍수때에 절집은 매몰되어 버려 지금으로서는 어디였는지를 알수도 없고.... 폐사지에 신종만이 뒹그는 것을 당시 경주부윤이 영묘사(靈妙寺)로 옮겨 달았다가 다시 경주 남문 밖 봉황대(鳳凰臺) 밑에 종각을 짓고 종을 매달아 성문을 열고 닫을 때에 이 종을 쳤다고 한다. 그후 1915년 옛 경주박물관 자리로 옮겨진 후, 새로이 경주박물관을 지어 1975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오게 된 것이다.

 

  성덕대왕 신종을 에밀레 종이라 부르게 된것은 타종의 여운이 내는 소리가 '에밀레'라고 하는 것 고, 그 뜻이  에미를 탓한다는 해석이니 이는 종을 만들 때 어린아이를 집어 넣어서 종을 칠때마그 어미를 부르는 소리라고 하는 전설에 기인한다. 전설을 현재에 와서 재삼 거론하거나 분석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보며 아무튼 그래서 더욱 신종의 신비함이 높아지는 듯하다.

 

  옛날이야기로 전해지는 전설보다 성덕대왕 신종은 자신의 몸체에 분명한 내력과 이야기를 새겨 놓았는데 동쪽에는 종을 만들게 된 기록을 적어 놓았고, 서쪽에는 네글자씩 50줄로 된 운문과 글을 짓고 쓴 사람, 종을 만든사람등이 새겨져 있다. 기록문을 보면 '성덕대왕 신종지명 (聖德大王 神鐘之銘)' 이라고 함으로써 이 종의 이름이 성덕대왕 신종이라는것을 확실하게 하였으며 신라 경덕왕이 선왕인 성덕왕의 명복을 기리기 위하여 구리 12만근으로 큰 종을 만들고자 하였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승하하고 그 아들인 혜공왕이 즉위 7년만에 완성하였다고 한다.

 

에밀레종을 주조하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나 이곳으로 옮기는 과정에서의 크고 작은 실화들은 여러가지 책들에 잘 나와있으므로 재삼 거론하지 않으려 하나 모처럼 찾아가 만난 에밀레종은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적 이야기처럼 신비스럽지도 않았고, 과학적이라거나 자랑스럽지도 않았으니 이는 경주박물관측의 무감각하고도 무책임한 관리실태에 따른 실망과 한심한 현실에 대한 분노가 앞서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아무나 마구잡이로 종을 타종할까 염려되어 나무 봉(棒)을 제거한듯 싶은데 그 무감각한 처사에 대하여는 실로 하품이 나오고 놀랍지 않을수가 없었으니 나무 봉은 떼어내 보이지 않고 그 봉을 매달았던 철제 고리줄은 갑자기 역할이 없어진채 늘어진 모습이 보기 싫어서인지 두 세번 접어올려 아주 불편하고도 흉한 모습으로 비비꼬여 매달려 있었다. 내 생각에는 나무봉을 온전하게 매달아 놓고 봉을 鐘의 몸체로 밀어내지 못하도록 보기좋게 끈으로 묶거나 고정시키는 방법도 있을터이고... 부득이하여 제거했다면 그 매달기 위한 철제 고리줄도 제거하는것이 마땅할듯 싶었다.

 

 

ㅇ 고선사지 3층 석탑

 

 

 

  경주 박물관에서 또 하나 벼르고 벼른것은 뒷마당에 세워진 고선사지 3층석탑이다. 고선사(高仙寺)는 신문왕때 원효대사가 머무르던 절이라고 하는데 그 절이 위치한 암곡동지역은 댐 건설로 수몰되었으며 그리하여 3층 석탑을 이곳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 왔다고 한다.

 

  그러나 경주 박물관 뒷마당에 세워진 이 3층석탑은 아무도 관심을 기울여주지 않은 중간마당는 불국사 다보탑과 석가탑의 모작에서는 연신 사진을 찍는 세태를 나무랐던 유홍준 교수의 글을 보고나서 나역시 고선사지 3층석탑에 관심을 갖게 되었던 것인데 그래서 에밀레종을 둘러보고 난 뒤 중간의 이런저런 것들에게는 곁눈도 주지 않은채 뒷마당으로 달려온 것이다.

 

   탑(塔)의 종류에는 석탑, 목탑, 전탑과 모전탑이 있는데, 천지에 화강암이 깔려있는 우리나라는 1,340여기의 탑이 조사 될 정도로 석탑이 많은 나라라고 하며 일본은 나무가 많아 목탑, 중국탑(벽돌탑)이 많은것도 모두 이러한 배경인바 익산 미륵사지의 구층석탑이 우리나라의 최석탑으로 보여지나 이는 돌로 지었을뿐 거의 목조건축을 모방한 것이라고 한다.

 

  이것을 발전시켜 석탑으로서의 양식, 기단부와 각층의 몸돌과 지붕 그리고 상륜부라는 구조의 보여준것은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인데 이때는 무왕의 시대로서 백제 문화의 전성기였지만  백제의 쇠락으로 그 맥은 통일신라로 넘어가면서 의성 탑리 오층석탑, 월성 나원리 오층석등 많은 오층석탑을 탄생시켰는데 그것이 이제 고선사지 삼층석탑과 감은사지 삼층석탑으로 변형, 발전되다가 불국사 석가탑에서 3층석탑에서 완벽한 형식의 완성을 이루었다고 한다. (유홍준 著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1권에서....)

 

  이것이 이곳 경주 박물관에 있는 고선사지 삼층석탑 앞에 내가 서게 된 연유이며, 정림사지 석탑은 부여에 있으니 다음에 가보기로 하고, 나머지 감은사지 삼층석탑과 불국사 석가탑내일 가볼 예정으로 유홍준 교수가 말하고 싶어했던 우리나라 돌탑의 족보(?)를 나름대로 깨아  봄으로써 석탑을 느껴보는 경지에 오르고자 애를 쓰고 있었다.

 

 

ㅇ 첨성대

 

 

 

 3층 석탑에 대한 깨달음(?)과 느껴봄(?)을 내일의 과제로 남기고 우리는 가까운 첨성대(瞻星臺)향하였다. 첨성대는 누구나 알다시피 별을 쳐다보고 관측하는 시설, 즉 동양최고의 천문대이다. 런데 막상 현장에서 마주 선 첨성대는 동양최고라는 수식어가 무색(?)하게 작고 볼품없다. 더구나  최근 느낌은 많이 주저 앉은듯.... 노쇠하고 쇠락해지는 모습이 보이는듯 하다.

 

  사실 그 기능과 구체적인 설명에 대해서도 아직까지 합의된 학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니 그 누구도 자신있게 천문대로서의 첨성대를 설명하거나 주장하기가 쉽지 않아보인다.  그러다보니 일반인들은 더더구나 천문대의 이모저모에 대하여 아는것이 별로 없는것도 사실이다.

 

역시 유홍준 교수의 책자를 보면 관련 학자들의 주장들을 인용해놓았는데, 옛날 사람들은 천원지방(天圓地方), 즉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라는 생각을 갖고 있어서 첨성대의 기단은 정사각형이고 몸체는 원형으로 되어 있으며 몸체는 모두 27단으로 되어 있는데, 맨위에 마감한 정자석(井字石)을 합치면 28. 기본 별자리 28수(宿)를 상징한다. 여기에 기단석을 합치면 29. 한달의 길이를 상징한다. 몸체 남쪽 중앙에는 네모난 창이 있는데 그 위로 12단, 아래로 12단이니 이는 1년 12달과 24절기를 상징하며, 전체 사용된 돌의 숫자 362개는 1년의 날수가 된다.

 

   기단석은 동서남북 4방위에 맞추고 맨 위 정자석은 그 중앙을 갈라 8방위에 맞추었으며 창문은 정남이다. 정남으로 향한 창은 춘분과 추분, 태양이 남중(南中)할때 광선이 첨성대 밑바닥까지 완전히 비치게 되어 있고, 하지와 동지에는 아랫 부분에서 완전히 광선이 사라지므로 춘하추동의 분(分点)과 지점(至点) 측정의 역할을 한다 고 씌여 있다.

 

  아무튼 첨성대가 생각보다는 작고 쇠락해보이지만 우리 조상들의 지혜와 천문과학이 깃든 역사적 산물이며 자랑스러운 유물임에는 틀림이 없고 전체적인 외형이 아담하고 이쁘장해보이는 우리네 여 인네 자태와도 비슷하다.

 

 

ㅇ 황룡사지

 

 

 

  낮에 남산을 올라 이 계곡 저 골짜기를 돌아본 후 시내로 들어와 경주 박물관을 돌아보고  첨성대까지 찾으니 날이 벌써 어둑어둑해지는데 우리는 욕심을 내어 한곳을 더 가보기로 했으니 바로 황사 절터가 그곳이다. 비록 몽고의 침략때 몽땅 타버려 실체는 볼 수 없는 아쉬움이 크지만 그 흔적과 자취만으로도 놀랍고 경이로운 것은 물론 9층목탑이나 대종(大鐘)이야기를 듣노라면 궁금증과 함께 꼭 돌아보고자 하는 욕심이 앞서서 특별히 관리하는 주체도 없고 출입시설도 되어 있지 않은 채 논바닥 한가운데 자리한 황룡사 절터를 찾아 들어갔다.

 

  논둑길로 들어가 약간의 평지에 차를 주차해놓고 잠겨진 공사장 출입문 같은 곳 옆의 개구멍을 해서 안으로 들어갔다. 이미 사방에는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고 을씨년 스러울 정도의 넓은 절터에는 스산한 기운이 감돌았다.

 

  신라의 서라벌 당시에도 이곳은 시내 한가운데였을터... 궁궐을 짓겠다고 공사를 하다가 龍이 나서 절을 지었다는 전설을 지닌 황룡사는 신라 진흥왕 14년 (553)에 왕명으로 공사를 시작하여 진흥왕 35년 (574)에 신라최대의 불상인 '장육존상(丈六尊像)'을 모셨다.   선덕여왕 14년 (645)에는 높이가 약 80m인 동양최대의 구층목탑이 백제인 아비지에 의하여 완공된다.  그러나 고려 고종 25년 (1238)에 몽고의 침입으로 모두 불타버리고 말았다.

 

  즉, 불상을 만드는데 21년이 걸린것이며 9층목탑은 92년후에 완공된것이니 지금의 시각으로 보아도 얼마나 큰 규모의 공사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에밀레종보다 훨씬 더 큰 황룡사 大鐘이 완성된 554년이라고하니 공사시작 200년만에 황룡사 완성의 마무리가 되어진 세기를 넘어가는 공사였음을 알 수 있다.

 

  황룡사내의 발굴 현장 초석(礎石)들만을 보아도 그 건물의 규모나 크기를 짐작할 수 있는바 벌판이라고 밖에 부를 길 없는 황룡사 절터에는 수십 수백의 주춧돌들이 열지어 늘어서 있어 그 위에 올라서 있었을 절집들을 미루어 짐작케 해준다.

 

  아쉽기는 에밀레종보다 더 컸었다는 황룡사 대종을 흔적조차 찾을수 없다는 것이었는데 몽고군이 자기네 나라로 가져가려 바닷가로 옮겨 배에 실으려다가 감포 근처에 빠뜨렸다고 하며 그래근처를 흐르는 냇물의 이름이 대종천(大鐘川)이라는 이야기... 이 부분은 내일 동해안권 답사 살펴보리라 다짐하면서 경주 답사 첫날을 마감하였다.

 

 

<출처> 2008. 5 / 인터넷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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