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국내여행기 및 정보/- 경북. 울산

신라 천년의 고도(古都), 경주(2)

by 혜강(惠江) 2008. 11. 12.

신라 천년의 고도(古都), 경주②

불국사권과 동해권

 

 

월간조선 통신원 김신묵의 해피투어

 

 

 

■ 불국사권 돌아보기

 

경주여행 첫날에 남산과 경주시내 박물관, 첨성대, 황룡사 절터를 둘러본 우리는 다음날 아침 일토함산에 올라 일출을 보려고 가까운 토함산 자연휴양림에서 하룻밤 머무르며 시간 맞춰 새벽에 올랐다. 일출을 맞이하고 나서 내쳐 석굴암을 돌아보고 난후 내려와 아침식사를 하기로 했다.

 

 

ㅇ 토함산 일출과 석굴암

 

4월 중/하순이면 대략 해뜨는 시간이 5시 40분 내외, 충분히 일찍 서둘러 산에 올랐는데 이맘때쯤이면 어느 주차장이나 절집이나 입장료를 받지 않고 (지키는 사람도 없다) 드나들기 마련인데 토함산 주차장에는 어림없이 이미 관리인이 차고 앉아 주차비를 받고 있었는데 그 근면성실(?)함에 매우 놀라웠다. 차량을 주차하고 약간은 춥기도 한 날씨지만 제법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는데 사방이 조금씩 밝아오더니 드디어 둥근 해가 불쑥 솟아오르는게 보여 모두가 감탄을 하고 저마다의 소원을 빌거나 사진촬영에 열심인 모습들이었다. 외국인도 몇명이 보이는걸 보니 토함산 일출은 제법 알려진 하다.

 

 

<토함산 일출>

 

 

 

 

일출을 마치고 나니 6시쯤인지라 다시 숙소로 내려갔다 올라오기도 거북하니 내쳐 석굴암을 돌아보기로 하였다. 그런데 석굴암 일주문겸은 알루미늄 재질의 접철식 경계시설로 굳게 닫혀 있었고 그 옆의 경비실에 있는 두 사람은 아무런 설명이 없고 또 아무런 안내표식도 없어서 다른 절집 새벽예불도 들어간 경험도 있고 해서 그중 약간 열린 틈새로 들어섰더니 갑자기 '아저씨~ 이리 나와여~'라고 크게 고함을 지른다. 나쁜짓 틀킨 사람처럼 뻘쭘하게 밖으로 나와 들어가면 안되냐고 했더니 매표소로 가서 써붙인 걸 읽어보라고 한다.

 

매표소는 굳게 닫힌채 창구에 걸린 표지판에는 입장시간 06:30~18:00 시라고 씌여져 있어 누구하고 말 할 상대도 없고 썰렁한 날씨에 동동거리고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주위를 둘러보아도 볼거라고는 주차장 한쪽에 서있는 십자각형태의 종각뿐..... 30분 시간이 제법 길게 느껴 졌다. 왜 6시 30분인가 물으니.... 안쪽에서 영업준비를 하려면 그 시간이 되어야 한다나?? ㅊ암나~

 

이윽고 6시 20분이 넘어서자 잿빛 옷을 입은 여자 둘이 절집 쪽에서 나오더니 매표소 문을 연다. 장권이 4000원씩이니 우리식구 20명이면 8만원.... 작은 돈이 아니니 그걸 놓치지 않겠다는 것인 듯하다. 우리들 외에도 몇몇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기다리거나 아예 돌아서 내려가버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ㅇ 불국사

 

 

 

 

토함산 석굴암을 영 찝찝한 기분으로 내려온 우리는 숙소로 돌아와 아침식사를 하고 불국사로 향하였다. 부처님 오신날을 앞두고 이런저런 행사가 복잡하였지만 그래도 불국사는 석굴암보다는 친절하고 친근했다.

 

정문을 들어서면 어쩐지 우리의 토속정원과는 거리가 멀어보이는 정원을 지나고 호수 위의 다리를 건너 비로소 천왕문을 지나게 되는데 좌우 생략하고 바로 청운교 백운교로 향하였다. 불국사의 상징처럼 떠오르는 청운교 백운교는 사람마다 책마다 그 위치가 다르게 되어 있으니 아래 17단이 청운교, 위의 16단이 백운교라고 현장 설명판에는 기재되어 있으나 유홍준 교수는 아래가 백운교라고 하니 우리로서는 알 수가 없다.

 

 

 

 

아무튼 불국사 설명에 의하면 불국사 예배공간은 왼쪽에 극락전, 오른쪽에 대웅전이 있는데 왼쪽로는 연화교와 칠보교가, 오른쪽으로는 청운교와 백운교가 다리 아래의 속세와 다리 위의 부처의 계를 이어주는 상징적인 의미라고 한다. 다만 현재는 그곳으로 직접 올라갈수는 없어 그저 바라만 아야하고 특이나 청운교 백운교 아래에는 원래 구품연지(九品蓮池)라 불리우는 타원형 연못이 있는데 이를 복원하지 않고 흙으로 메워 마당을 만든것이 못내 아쉽다고 하겠다.

 

불국사 대웅전 앞마당에는 잘 알다시피 다보탑과 석가탑이 서 있다. 쌍탑 1금당의 전형적인 모습이고 하는데 그동안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보탑의 멋지고 화려한 아름다움에는 심취했을지언정 그 왼쪽에 묵묵히 서있는 석가탑에 대해서는 별반 관심을 보이지 않는듯 했다.

 

오른쪽 다보탑은 10원짜리 동전에도 새길만큼 워낙 유명한 탑이니 특별히 첨언할 말이 없지만 다만 4마리 석사자중 잘생긴 3마리는 일제시대때 도난 당하고 일부가 훼손되어 못생긴 사자 1마리만이 남져 있어 못생긴 나무가 숲을 지킨다는 말이 생각나는것이 참으로 아이러니하였다.

 

감은사지 삼층석탑으로 이어져 내려온 석탑의 족보(?)가 마침내 불국사 다보탑에서 완성되었다고 하니 다보탑 앞에 선 내 가슴은 쿵쾅거리기까지 하였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과연 말없이 멋진 석탑이다. 삼층 탑의 지붕선은 직선으로 흐트러짐 없이 뻗으나 끝에 이르러서는 살짝 들린듯이 보이게끔 아래는 직선을 유지하되 윗쪽으로는 처마선처럼 올린 맛이 참 멋있고 듬직하다. 그러고보니 국립경주박물관 본관이나 성덕대왕 신종이 매달린 루의 지붕 실루엣도 이 석가탑 처마 느낌을 적용한듯 하다.

 

유홍준 교수는 그의 저서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3편에서 불국사 건축의 오묘한 디테일을 보여주여섯가지 중에서 두번째로 이 석가탑의 탑 날개 직선의 묘를 예로 들었다. 그 첫번째 아름다움으로는 대웅전에 오르는 돌계단 옆구리의 소맷돌을 조각한 무늬가 마치 저고리 소매끝처럼 예쁘다고 하였는데 과연 간결하면서도 예쁜 모습으로 공그른 조각 솜씨가 일품이었다.

 

 

 

불국사는 대웅전과 극락전을 함께 본전(本展)으로 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대웅전에서만 머물며 구경뿐 극락전에 들리게 되면 별로 볼것이 없다는 식으로 스쳐지나가거나 최근에 앞마당에 세워 놓은 청동 복돼지에만 관심을 기울인다. 그러나 극락전에는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볼거리가 있으니 현판 뒷쪽에 감추어진 금돼지 조각이 그것으로 2007년 봄에 발견 되었다는 50cm 크기의 나무조각인데 이것이 알려진 뒤로 많은 사람들이 이 황금돼지에게 복을 빌러 오다보니 아예 극락전 마당에 청동으로 황금돼지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이 현판뒤에 숨어서 천년을 지낸 돼지에게는 2가지 설화가 전해져 오는데 불국사를 창건한 김대성토함산에 자주 사냥을 다녔지만 다시는 살생을 하지 않기로 맹세하기 위해 몰래 처마밑에 돼지형상을 만들어 숨겼다는 것과 또 하나는 이 사찰을 중수하던 장난끼 많은 스님이 내림마루나 추녀마루 밑에 용이나 봉황을 만들어 넣는 대신 현판 뒤 처마 밑에 몰래 이 돼지상을 만들어 숨겼다는 설화가 해지며, 어느 향토 사학자는 돼지 형상이 서유기에 나오는 저팔계를 형상화한 것으로, 사찰 내 잡신을 물리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주장도 있으니 그저 단순한 재미로 이해하면 좋을듯 하다. 그밖에도 경주 최씨의 시조인 '최치원'이 금돼지의 자손이라는 전설까지 합쳐지면 경주와 황금돼지는 무관한것 같지는 않다.

 

또한 극락전 앞에는 대웅전 앞의 청운교 백운교처럼 연화교 칠보교가 있는데 연화교 돌계단에는 연꽃무늬가 계단을 따라 이어지도록 조각되어 있는데 평상시 통행하는 다리도 아닐뿐더러 미리 그런 지식을 갖고 있지 않다면 못본 체 돌아서야 할 것이다.

 

그밖에도 극락전 밖으로 나와보면 경사진 비탈길에 극락전을 짓기 위하여 석축을 길게 쌓고 평탄작업을 하였는데 장대석을 가로 세로 걸친후 그 사이사이에 못난 자연석들을 채워넣은 축대의 아름다움이 한 눈에도 참 멋지고 아름답다. 유홍준 교수는 이극락전 축대와 연화교의 연꽃무늬 새김을 세번째와 네번째 아름다움으로 추천 하였다.

 

그밖에도 대웅전 뒷편에 높게 올라앉은 관음전에 올라 야트막한 담장 너머 저 아래로 대웅전과 회랑의 기와지붕 사이로 함께 보이는 다보탑이 또한 아름답다고 하여 그자리에 가보았더니 역시 멋진 풍광이었다.

 

어찌 불국사를 돌아봄에 대웅전, 극락전 밖에 없을까마는 1박 2일이라는 일정의 제한에 따라 정도 돌아보고 만 아쉬움을 뒤로 한채 우리는 감은사절터와 문무대왕릉이 있는 동해권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주차장이 일출을 보러 올라오는 사람들에 대비하여 깜깜한 새벽에도 매표원을 배치하였듯이 석굴암도 해뜨는 시간을 고려하여 더 일찍 매표를 시작하던지, 그 이전에 오는 사람들은 무료로 입장하게 하던지 해야 할 텐데 아무 기준이나 배려없이 단지 매표소 영업개시 시간만이 준수사항인것을 볼 때에 참으로 한심한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겨울철에는 그시간에도 아직 해가 안떠서 문제가 없지만 벌써 4월만 지나도 6시 전에 해가 뜨는데 그사람들이 일출을 보고나서 어디에 가 있으란 말인지???

 

관광객들의 동선(動線)을 고려한다던지 해맞이와 석굴암 관람을 연계하는 관광 편의제공은 안중에 없고 오로지 입장료 수익에만 전념하는 행태가 참으로 한심스러웠으며 일출을 보고나서 개방시간까지 할 일 없이 어슬렁거리게 되어버린 관광객이나 답사객들을 마치 무슨 부랑객이나 불법 범죄자로 취급하는 결례에 대하여는 참으로 할 말이 없었다.

 

이런 문제점들은 누가 시정조치를 해야하는지? 이렇게 해서 언제나 관광대국이 되려는지?.... 여행은 적자상태이고, 국내여행은 상대적으로 열세하여 문제라는 지적에 이런 사항들을 개선하려의지는 있기나 한건지? 석굴암은 누가 주지이고 이런 매표개시와 출입의 통제는 누가 책임을 지고 는 것인지 참으로 한심스러웠다. 6시 30분이 되어서야 표를 끊고 안으로 들어서는 심정은 이미 비틀어져 있었다.

 

그래도 일단 안으로 들어서니 석굴암까지 가는 도로는 생각보다 깔끔하게 잘 관리되어 이른아침에 산보하는 마음을 상쾌하게 해주어서 그나마 울분을 삭힐 수가 있었다. 마당이 나타나고 약수물도 보이는데 눈을 들어 위로 올려보니 거기에 석굴암은 보이지 않고 사당인듯한 절집 건물이 하나 보이고 그 뒤로 봉분처럼 둥근 지형이 보이는데 아마도 저것이 석굴암이리라...

 

 

 

 

 

학자들 주장에 의하면 석굴암(石窟庵)이라고 하면 잘못 부르는것이라고 한다. 즉, 암자가 아닌 석굴 사원이며 특히 자연석굴이 아니라 인공석굴이므로 石佛寺의 石窟이라고 해야 맞는 표현이라는 것이다. 원래는 앞부분에 보이는 목조건물 없이 바로 석굴암의 입구가 노출되어 있었으나 일제시대의 무분별한 도굴과 파괴를 거쳐 지난 시절에 이를 보수한다는것이 덜렁 앞쪽에 건물을 지어버렸다는 것이다.

 

지금도 누수나 결로현상을 어쩌지 못하고 에어컨을 설치하여 습기제거를 하고 있다고 하는데 이 역시도 아랫쪽 암반 밑에 있는 샘물의 원리를 이해 못하고 배수시켜 버린 결과라고 하니 옛사람들의 지혜를 오히려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듯 하다.

 

그밖에도 석굴암이 원래는 전실부분이 굽어져 있었으나 이를 곧게 편것이라거나 토함산 해발 565m 높이의 석불의 방향이 정동쪽이 아닌 동동남 30° 인것은 흔히 알고 있는것처럼 동해바다 감포의 문무왕의 수중릉인 대왕암을 보고 있는것이 아니라 동짓날 해뜨는 방향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등의 과학적 사실들이 참으로 흥미로웠다.

 

그러나 정작 석굴암에 들어서게 되면 일본인 토목기사가 정리한 측량경험에 따른 제반 수치들의 의미라던지, 천정 덮개돌이 깨져 3조각이 났다던지, 본존불과 내부의 모든 조각상이 40개였으나 2개는 일제시대때 도난 당하고 현재는 38개라는 사실들을 일부라도 직접 만나보고 가능하면 만져보고도 싶었으나 앞을 가로막는 유리벽에서 더이상 들어가지 못하고 바라만 보아야 했다.

 

어찌보면 종을 보호하려고 치지 못하게 한 성덕대왕 신종이나 관람객들로부터 차단시켜 유리벽안에 가두어 놓은 석굴암이나.... 이해가 안가기는 마찬가지 였으며 그러한 조치들이 문화재들을 진정으로 보호하는 것은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유리벽에는 '사진촬영금지'가 붙어 있고 뒷쪽에 책상 하나 놓고 앉은 보살이 계속 감시하고 나무라기 때문에 교도소 죄수 면회하고 나오듯이 아쉽게 밖으로 나와서도 입맛이 씁슬하기만 하다. 지금 대부분의 전시시설이나 박물관을 찾아가도 '후래쉬를 사용금지'시키고 있지 사진 촬영 자체를 막는 곳은 거의 없다. 불빛을 반사시켜 유적을 보존하는데 어려움을 준다는것이지 노-후래쉬 촬영이야 무슨 문제가 있다는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다보니 카메라를 휴대한 대부분의 관람객들이 몰래 카메라로 촬영하고 있었으며 그 보살님과언쟁이 끊임없이 이어져 국보급 문화재를 아낄줄 모르는 무식한(?) 사람들로 매도 되고 있었다.

 

쓴소리 단소리

 

석굴암이 지닌 명성과 값어치에 걸맞는 관리가 필요할듯 합니다. 특히 일출을 보러 올라왔다가 석굴암까지 돌아보려는 사람들이 꽤 많은데에도 영업시간(?)을 고집하면서 6시 30분 이전에는 매표도 안하고 출입문 개방도 안하는 갑갑하고 답답한 행태는 개선해야 할 듯 하구여.... 실내 사촬영 금지나 유리벽 내부로의 접근금지도 다시 한번 진하게 재검토 해야할듯 합니다. 그 흔한 문화해설사나 자원봉사자의 안내도 없이...기와불사만 열심인 듯한 모습도 바뀌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필요시 답사를 원하는 진지한 단체에 한하여는 (미리 신청을 받아서) 석굴 안로도 들어가게 해주고 사진도 찍고 만져도 보게 하며... 전문 해설사가 설명을 해주는것도 필요할듯 하구여....

 

 

■ 동해권 돌아보기

 

ㅇ 골굴사

 

 

 

주마간산(走馬看山)격으로 경주일원을 대충 돌아 본 우리는 감포 방향으로 가기 위해서 불국사에서 바로 갈 수도 있었지만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감포가도를 맛보기 위하여 일부러 보문단지가서 4번국도를 타고 추령터널을 지나 장항리로 향하였는데 길 옆에 골굴사라는 특이한 절이 있어 잠시 들려보기로 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골굴사(骨窟寺)는 약 1500년전 인도에서 건너온 光有스님 일행들이 자국의 사원 양식을 본따서 창건한 전형적인 석굴사원으로 불국사보다 약 200년 먼저 창건되었다는 것이며, 한 골굴사는 그 옛날 화랑들이 수련하고 스님들 사이에서만 비밀리에 전수되어 왔다는 선무도총본산으로 불교무술의 선무도대학이 설립되어 있다. 석굴암과 불국사의 만만치 않은 입장료적잖이 놀란 우리는 입장료가 없는 골굴사가 또한 마음에 들었다.....ㅎㅎ

 

마애석불이 모셔진 커다란 바위는 특별히 석회암 바위인듯 여기저기 바위 구멍이 많았으며 십여 개의 커다랗게 파인 곳 마다 지장굴, 산신굴, 약사굴, 라한굴, 칠성단 등오밀조밀 모셔져 있었는데 어찌보면 너무 많은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한두 가지집중해서 정제되고 절제된 준비가 더 좋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아직도 여기저기 구멍이 파여지고 여유공간이 있어 보이면 이런저런 설치를 하는 걸 보고 조금은 아쉬웠다. (過猶不及)

 

 

ㅇ 감은사지 삼층석탑

 

 

 

골굴사를 나와 감포로 가는길 오른쪽 하천이 바로 황룡사를 불태우고 大鐘을 몽고로 가져가려고 바닷길쪽으로 옮기다가 물에 빠뜨렸다는...그 대종천(大鐘川)이다. 혹시 어디선가 종소리가 들리지 않나 귀 기울여본다. ㅎㅎ

 

그 대종천 옆 도로 왼쪽으로 감은사 절터가 있었다. 도로변에서 약간 올라선 지형은 평평해 보였는데 2개의 탑중에서 왼쪽 탑은 전면 수리 보수공사중이었고 오른쪽 탑은 손님들을 맞아 우뚝 선채로 그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절터에 서서보니 역시 전형적인 쌍탑 1금당의 형태이며 금당 자리는 바닥 초석들이 그대로 남아 있어 멀리 바라다보이는 대왕암에서 용으로 변한 문무대왕이 쉽게 드나들 수 있도록 바닥에 통로개념으로 구멍을 낸 곳은 어디인지 살펴보게 된다.

 

<왼쪽 탑... 공사중이다>
금당앞에 마주 선 2개의 삼층석탑은 높이가 13.4m로 장대한 느낌이다. 경주에 있는 삼층석탑 중 가장 큰 규모이며 1탑중심의 사찰 배치가 삼국통일 직후 쌍탑으로 변해가는 최초의 가람 배치라고 한다. 앞서 설명한 대로 백제 정림사지 오층석탑으로부터 신라로 넘어온 석탑의 족보가 바로 이 감은사지 삼층석탑과 경주박물관 뒷뜰에 있는 고선사지 삼층 석탑을 거쳐 불국사 석가탑에 이르러 완성된다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다시 한번 찬찬히 돌아보니 과연 웅장하고 장중하면서도 어딘가 자신감과 힘이 넘치는 모습인지라 상륜부의 녹슨 찰주(擦柱)조차 흉하게 보이질 않는다. 옛날에는 바닷 물이 이곳까지 들어왔을듯 싶으니 감은사는 해변가 사찰로 저 멋진 쌍탑을 거느린채 눈을 들어 대왕암을 바라보는 그야말로 그림같은 풍광이었을것으로 생각된다.

 

 

■ 에필로그

 

한달을 둘러보아도 부족하다는 경주. 그 옛날 수학여행때 밟아보고는 삼십년 넘게 찾아오지 못했던 세월속에서도 석굴암, 불국사, 첨성대 등등은 마치 상식처럼 머릿속에 맴돌고 있어 어쩐지 익숙한 이름들이었다. 그러나 철들어 찾아간 경주, 신라 천년의 古都... 경주(慶州)는 솔직히 그다지 만족스럽는 못하였다. 특히나 석굴암에서의 유쾌하지 못한 기억들은 또다시 경주를 찾아올 때까지 오래오래 남아 있을듯 하고, 경주박물관의 무신경한 에밀레종 관리실태는 담당자가 누구인지 궁금할 정도이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데 국보급 문화유산의 현주소가 조금은 안스러웠다. 다만 등산을 겸하여 올랐던 남산의 삼릉골에서 만난 기쁨과 환희가 이런저런 불편한 심기들을 씻어주었으며,다음에 다시 방문한다면 용장리나 남산의 다른 곳을 좀 더 세세히 살펴보고 싶다.

 

 

 

<출처> 2008. 5 / 인터넷 조선일보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