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 원주
섬강과 치악이 빚어낸 강원도 으뜸 고을
글, 사진= 민병준
▲ 부론면 법천사지에 있는 지광국사 현묘탑비. 원주 지방에서 불교가 아주 성했음을 증명하는 고려시대의 걸작품이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길손에게 강원도 원주(原州)는 어릴 적 들은 ‘까치 보은 설화’로 맨 처음 다가왔다. 영서지방의 큰 산인 치악산(雉嶽山·1,288m)도 그때 가슴 한쪽에 자리 잡았다. 벼르고 벼르다 1980년대 후반에 밤기차를 타고 치악산을 처음 찾았을 때, 시내에서 가까운 구룡사가 아니라 굳이 접근하기 불편한 상원사를 거쳐 치악산의 품에 안겼던 것도 이 설화가 그만큼 머릿속에 크게 자리했기 때문이리라.
그 후 원주는 아주 다양한 때깔로 안겨왔다. 물 맑은 섬강과 간현유원지, 강원도란 지명이 유래한 고을, 은둔한 선비의 고을, 강원도의 관문, 고 박경리 선생이 터를 잡고 대하소설 ‘토지’를 마무리하신 고을, 옻공예와 한지의 고을, 그리고 남한강변의 폐사지 고을…. 길손에게 두서없이 다가온 원주의 수식어들이다.
원주가 강원도의 관문이라면, 원주의 관문은 문막이다. 서울에서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달리다 여주를 벗어나 섬강을 건너면 이내 문막의 널찍한 벌판과 함께 그 너머로 성채처럼 우뚝 버티고 서있는 치악산이 반긴다. 대한민국 대부분의 사람이 만나는 원주의 첫 모습이다.
원래 이번 원주 여정은 치악산 종주부터 차근차근 할 참이었다. 정갈하고 맑은 기운이 흐르는 남쪽의 상원골에서 상원사를 거쳐 주능선을 걸은 뒤, 하루 이틀 원주 일대를 둘러보며 여러 폐사지도 답사하고 간현에서 섬강의 물소리 듣다가 잠드는 그런 밤을 기대했다. 오락가락하는 비와 부정확한 일기예보 때문에 일정이 많이 어그러져 순서대로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지만, 만약 산을 좋아하는 누군가 길손에게 원주를 사랑하게 되는 여행 방법을 묻는다면, 아마도 똑같은 코스를 추천할 것이다.
동틀 무렵, 구룡사(龜龍寺)로 간다. 새벽에도 문화재관람료를 받는 전통(?)이 10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한 구룡사는 현재 원주에서 가장 큰 절집이다. 의상대사가 깊은 소에 있던 9마리의 용을 내쫓고 세웠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구룡사(九龍寺)엔 도선국사, 무학대사, 사명대사 등 여러 고승들이 수도하면서 명성을 드날렸다. 조선 중기에 절이 쇠락해지자, 절 입구에 있는 거북바위의 혈을 다시 이으면서 ‘거북 구(龜)’ 자를 쓴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구룡사는 창건 이후 지금까지 여러 번 불에 탔는데, 최근엔 지난 2003년 대웅전이 화재로 전소되었다가 1년만에 원형 복원되었다.
- ▲ 치악산 구룡폭포 주변의 가을 단풍. 치악산의 원래 이름은 단풍이 곱다는 뜻의 적악산(赤嶽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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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새벽 구룡사를 찾은 이유는 최근 계속되는 불사로 어수선한 절집에서 풍경 소리를 들으려는 게 아니다. 바로 숲길 때문이다. 매표소를 지나자마자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황장금표(黃腸禁標)가 보인다. 황장금표는 나무 안쪽의 색깔이 누렇고 단단한 질 좋은 소나무인 금강송, 즉 황장목을 베지 말라는 경고를 새긴 바윗돌이다.
현재까지 전국에서 발견된 황장목 보호림은 모두 60여 개에 이른다. 이중 치악산 보호림은 관리하는 데 여러 모로 장점이 많았을 것이다. 우선 섬강과 남한강으로 이어지는 물길이 있어 운송이 편리하였고, 한양까지의 거리도 가까운 편이었다. 또 강원감영이 멀지 않아 관리하는 데도 아주 유리했다. 그래서 치악산 숲은 최근까지도 잘 보호되고 있었던 것이다.
쭉쭉 뻗은 붉은 소나무와 아름드리 참나무, 그리고 이런저런 나무들이 자연스레 어우러진 숲길은 구룡사 일주문 역할을 하고 있는 원통문에 이르러 절정을 이룬다. 이 부근에 이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지막이 탄성을 지르거나 흐뭇한 미소를 짓게 된다. 이 날 만난 어떤 이는 매표소 입구에서 “구룡사에서 볼 게 뭐가 있다고 문화재관람료를 받는지 모르겠다”고 큰 목소리로 불만을 토로했으나, 숲길을 걸으면서는 내내 편안한 표정이었다. 구룡사에 수많은 전각이 남아있다 해도 가장 큰 보물은 아마도 이 숲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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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원사 들머리인 성남마을은 주변 풍광이 매우 평화롭다. 그래서인지 울타리 안에 갇힌 황소조차 편안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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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룡사 사천왕문을 지나면 이번엔 구룡폭포 물소리가 발길을 붙잡는다. 규모는 작지만, 건강한 숲과 어우러진 정경은 잔잔하게 가슴에 다가오는 폭포다. 특히 치악산은 단풍이 좋아 예전엔 적악산(赤嶽山)으로도 불렸듯이 가을날 이곳 단풍은 황홀하다.
이렇듯 치악산은 숲이 자랑인데, 치악산 남쪽에도 구룡사 진입로에 뒤지지 않는 정갈한 숲이 있다. 바로 신림면 성남리의 성황림(천연기념물 제93호)이다. ‘신이 사는 숲’인 신림(神林)이란 지명도 이 숲에서 비롯되었다. 작은 개울을 끼고 펼쳐진 숲은 초록의 기운이 뚝뚝 떨어진다. 행락객들의 무분별한 출입 때문에 지금은 철망을 두르고 자물쇠로 잠가놓았으나, 인간의 발길이 뜸해진 후 그야말로 신이 머무는 듯한 기운이 더욱 느껴지는 숲으로 탈바꿈했다.
숲은 대낮인데도 어둑어둑할 정도로 짙다. 소나무, 졸참나무, 층층나무, 피나무, 가래나무, 쪽동백나무…, 그리고 숲속의 아담한 당집 옆엔 아버지나무인 전나무, 어머니나무인 엄나무가 당집을 호위하듯 서있다. 성남 마을 역시 숲의 소중함을 아는 이들이 가꿔서 그런지 전체적으로 정갈하고 맑은 기운이 철철 넘쳐 사랑스러웠다.
‘섬강은 어드메오, 치악이 여기로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송강 정철(1536-1593)의 관동별곡 초반에 나오는 이 구절을 기억하고 있으리라. 정철이 간결하게 짚었듯이 치악산과 섬강, 이 둘은 원주의 자연을 특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다.
- ▲ 치악산 남쪽 신림면 성남리의 성황림 입구. 길 오른쪽으로 성황림의 짙은 숲이 펼쳐져 있다.
여기서 관동별곡과 원주의 관련 부분을 짚어보자. 송강 정철은 1580년(선조 13) 강원도 관찰사로 발령을 받고 원주로 왔다. 지금으로 치면 도지사인 관찰사가 머물던 강원감영이 원주에 있었기 때문이다. 정철은 원주로 부임해 관내인 소양강(춘천), 동주 북관정(철원), 회양 등을 둘러본 뒤, 시찰을 겸해 금강산과 관동팔경 유람을 나서게 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1395년(태조 4) 영동지방과 영서지방을 합하여 처음으로 강원도라 하고 원주에 감영을 두었다. 이렇듯 강원감영이 설치된 이후 원주는 관동 제1의 정치·경제·문화·교통의 중심지가 되었다. 알다시피 강원도라는 이름은 영동지방의 대표 고을인 강릉과 영서지방의 대표 고을인 원주의 첫 글자를 하나씩 따온 것이다.
- ▲ 웬만한 축구장보다 널찍한 거돈사지. 보물로 지정된 거돈사 원공국사 승묘탑비와 삼층석탑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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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원주에 강원감영을 두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예나 지금이나 가장 중요한 것은 지리적 이유, 즉 편리한 교통이었을 것이다. 지리적 위치를 짚어보면, 우선 원주는 한양에서 강릉으로 이어지는 관동대로(제3로)의 한중간에 자리하고 있다. 즉 원주는 ‘한양-망우리-평구-양근-지평-원주-안흥-방림-진부-횡계-대관령-강릉-삼척-울진-평해’로 이어지는 관동대로에서 가장 큰 고을이었던 것이다.
또한 원주는 서부에 섬강, 남부에 남한강을 끼고 있어 뱃길을 이용한 수로 교통도 편리했다. 무엇보다 조선에서 가장 큰 길로서 한양-새재-동래로 이어지는 영남대로(제4로)가 원주 남부로 지나갔기 때문에, 관동대로와 영남대로의 혜택을 받은 사통팔달의 고을이었다. 이런 전성기는 조선시대 내내 이어졌다.
그러다 조선 말기인 1895년(고종 32) 을미개혁으로 전국을 23부제로 바꾸면서 강원감영을 폐하고, 강원도를 춘천관찰부와 강릉관찰부로 나누면서 이 고을은 원주군으로 강등되었다. 이듬해인 1896년 전국을 13도제로 바꾸면서 다시 강원도라 불렀으나 이때 도청을 춘천에 그대로 두면서 원주는 강원도의 중심지에서 한 발짝 물러나게 된다.
▲ 1.소초면 교항리 42번 국도변에 있는 석조불두. 도로 확포장공사 때 몸체였던 바윗돌이 매몰되자 이곳으로 옮겨놓은 것이다.2 원주의 대표적 절집이었던 법천사지.법천사는 화엄종과 더불어 고려시대 양대 종단이었던 법상종 사찰로 번성했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 폐사되었다.3.남한강과 섬강이 만나는 지점에 있던 흥원창. 고려와 조선시대에 지방에서 거둔 세곡을 이곳에서 저장했다가 이듬해 봄에 경창으로 운송하였다.
그러나 1942년 개통된 중앙선 철도가 원주 중심을 지나면서 원주는 다시 강원도 최대 도시로 떠올랐다. 6·25전쟁 후 원주는 군사요충지 역할을 했고, 지금은 영동고속도로와 중앙고속도로가 원주 중심부를 열십자로 지나면서 강원도에서 가장 큰 도시로서의 명성을 유지하게 되었다.
강원도는 산이 많아 마을들은 읍·면 소재지를 중심으로 작은 단위의 생활권을 형성한다. 이들 읍·면의 중심권은 다시 주변 고속국도·국도·지방도와 철도 등을 통해 시·군 중심지와 결합해 춘천·원주·강릉의 3개 지방 도시권으로 합쳐진다. 춘천권은 영서의 북쪽 지방으로서 철원·화천·양구·인제·홍천이 속하고, 원주권은 영서의 남쪽 지방으로서 횡성·평창·영월이 포함되고, 영동 지방의 강릉권엔 속초·고성·양양·정선·삼척·동해가 포함된다.
춘천, 원주, 강릉. 강원도의 대표적인 이 세 고을 중에 원주의 인구가 가장 많고 증가율도 높다. 최근 통계를 보면, 강원도의 총인구는 1,505,420명인데, 인구가 가장 많은 곳은 교통이 편리하고 수도권과 가까운 원주(294,155명)요, 그 다음은 도청 소재지가 있는 춘천(256,239명), 영동 지방의 대표 고을 강릉(222,016명) 순이다. 인구로만 보면 원주는 도청소재지인 춘천을 넘어서는 강원도 최대의 도시인 것이다.
원주의 초입인 문막에서도 느꼈듯이, 원주는 강원도임에도 산 높고 골 깊은 산악지대가 아니라 너른 평야를 끼고 있는 분지다. 강과 평야, 야산을 모두 끼고 있으니 공장 용지나 건축 용지를 확보하는 데 비용이 훨씬 적게 드는 것은 당연한 일. 게다가 교통이 편리해 충북 충주·제천, 경기도 이천·여주 등에서 원주로 출퇴근하는 사람들도 많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원주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원주는 서쪽으로 한양과는 250리가 된다. 동쪽은 대관령과 두메산골이 가깝고, 서쪽은 지평현(양평)과 경계를 이루었다. 산골짜기 중간엔 들이 섞여 있어 명랑하고 수려하여 험하거나 막힌 데가 없다. 이 고을은 경기도와 영남 사이에 끼여, 동해로 수송하는 생선·소금·삼, 관곽이나 궁전을 짓는 데 쓰이는 재목 따위가 모여들어 도회지를 이룬 곳이다. 또한 이곳은 두메산골과 가까워 난리가 나면 피하기 쉽고, 또 한양과 가까워 태평한 시절엔 벼슬길에 나갈 수 있기 때문에 서울의 사대부들이 여기에 살기를 좋아한다.’
- ▲ 지정면 안창리의 흥법사지라고 전하는 밭 가운데에 서 있는 삼층석탑.
원주 사람들이 수천 년간 빚어온 다양한 문화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찬란한 불교문화다. 원주 시내를 포함해 남한강과 섬강 주변, 그리고 치악산 기슭 등엔 무려 100개가 넘는 절터가 흩어져 있다. 교통량 많은 육로·수로와 널찍한 농토가 경제적인 기반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원주는 이렇듯 길 때문에 성한 고을이지만, 길 때문에 겪은 고난도 만만치 않았다. 삼한시대 이후 삼국을 거쳐 후삼국에 이르기까지 모두 원주를 노리는 통에 이곳은 군사적으로도 아주 중요한 고을이 되었다. 그래서 원주엔 영원산성·해미산성·금대산성·왕건성·견훤성 등 많은 산성이 있는 것이다.
특히 임진왜란 당시엔 영남대로를 따라 진격한 왜군의 진격로에 있었던 탓에 폐사된 사찰이 많았다. 나말여초에 창건되어 오랫동안 원주와 영서 지방의 정신을 이끌어왔던 대찰과 수찰들이 이때 대부분 불에 타버리는 운명에 처한 것이다. 수많은 폐사지 중에서 눈에 띄는 곳은 바로 섬강이 남한강으로 흘러드는 부근의 법천사지와 거돈사지, 섬강 기슭의 흥법사지다.
탑이나 탑비 같은 석물들만 덩그마니 남아 있는 널따란 이들 절터는 당시의 영광을 잘 드러내고 있다. 또 이곳에 남아 빈터를 지켜온 석물들은 모두 그 조각수법이나 문장·글씨 등이 매우 빼어나 대부분 국보나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그래서 이곳은 문화유산 답사객들이 결코 빼놓지 않는 곳이기도 하다.
원주의 전통 문화에서 또 돋보이는 것은 나전칠기와 종이다. 원주시 자료를 뒤적여보면 원주옻은 조선 초기부터 제법 이름을 날렸음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엔 원주옻의 우수성을 알아챈 조선총독부에서 옻나무 증식계획을 추진하면서 지금의 판부면 일대에 옻나무 시험재배지를 조성하기도 했다.
▲ 1.원주시 일산동에 있는 강원감영. 원주는 조선시대 강원도의 26개 부·목·군·현을 관할하던 지방행정의 중심지였다.2.원주의 옻나무 재배단지. 원주는 흥업면 등지에서 대량으로 옻나무를 재배하고 있다.3.옻진액을 채취한 흔적. 보통 6월 중순부터 11월 하순까지의 약 160일간 옻진액을 채취한다.
원주옻은 1960년대에 원주칠정제연구소가 운영되면서 인간문화재 나전칠기장 고 김봉룡 선생 등 칠공예 보유자들이 원주 지방으로 이주해오면서 번성기를 맞게 된다. 이후 1987년 옻칠정제공장인 원도공예가 설립, 1999년 원주옻 영농조합법인 설립, 2001년 옻칠기공예관 개관 등 원주는 옻을 특화시키기 위해 많이 애쓰고 있다.
현재 국내의 옻나무 산지는 강원도 원주를 비롯해 이웃의 횡성·영월·평창 등이 유명하며, 지리산 일대의 남원·함양, 충청도 청양·옥천, 그리고 북한 평북 태천의 옻나무도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옻나무 품질은 세계에서 우리나라가 제일이고, 그중에서도 원주 옻나무가 으뜸이라 한다. 원주에서 생산되는 옻은 주요성분인 옻산(Urushiol)의 함량이 72.5%로 여느 지역의 옻에 비해 많이 함유되어 있어 효소의 활성이 대단히 좋다는 것이다. 또 원주옻은 옻도막이 건조되는 시간이 짧고, 경도도 강하기로 오래 전부터 정평이 나있다.
강원도는 품질 좋은 원주옻을 세계적인 특산물로 육성하기 위해 1992년 5개년 계획을 세워 588,000그루를 무상 공급했다. 그 이후에도 매년 무상 공급해 1992년부터 16년간 원주 농가에 공급된 전체 묘목은 129만 그루에 이르는 엄청난 숫자다.
▲ 원주천과 삼산천이 섬강에 합류하는 지점에 있는 간현유원지. 강물이 맑아 오래 전부터 원주의 대표 관광지로 이름을 떨쳐왔다.
그런데 이번에 원주 지역을 돌아다니다 보니 옻나무 재배단지가 생각보다 많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길손이 가끔 맛보는 옻닭 때문이었다. 옻의 진액을 채취하려면 묘목이 10년 가까이 자라야하지만, 돈이 궁한 농민들은 5년 정도 재배한 후 식재료용으로 베어 내다팔아 버리는 것이다. 옻닭, 옻오리 등을 요리하는 데 쓰이는 옻나무가 최근 웰빙 열풍을 타고 큰 인기를 끌면서 그 수입은 제법 짭짤했다. 농민들은 이렇게 옻나무를 내다판 다음, 다시 옻나무 묘목을 무상 공급받은 뒤 5년 정도 키워 식재료용으로 내다팔고 하는 일을 반복하고 있었다.
실제로 이번에 길손이 옻나무 재배단지를 찾자 이 길손을 옻나무 사러온 업자로 생각했는지, 경계하는 듯하면서도 은근이 흥정하려는 분위기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원주시에선 “옻나무 공급이 농가소득에 도움을 줬을지는 몰라도 진액 채취를 위한 옻나무를 특화시켰다고 보긴 어렵다”는 평가를 내리며 대책을 찾고 있다. 사정이 이런 판에 어느 단체에선가는 ‘옻을 테마로 한 식당가’를 제안했다가 눈총을 받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차라리 이참에 이를 양성화하여 식재료용과 진액 채취용을 따로 구분해 지원해야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물어물어 겨우 찾아간 흥업면 대안리 옻나무 재배단지. 괜히 가려운 듯 팔을 긁적거리며 옻나무밭으로 들어서니 옻나무 줄기엔 최근 진액을 채취한 듯 검은 칼자국이 역력했다. 옻나무 진액은 보통 8~12년생이 가장 효과가 좋다고 한다. 채취한 진액은 칠통에 모은 뒤 저장용 큰 통에 다시 1년 동안 모으는데, 이때 진액이 공기와 접촉하면 굳어지므로 이를 막기 위해 장지와 같은 질긴 종이로 덮어 공기 접촉을 막으면서 보관한다. 그러나 세계적으로도 옻진액의 생산량은 절대 부족한 게 현실이다. 그래서 세계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는 원주의 생옻은 한 관(3.75kg)에 무려 140여만 원을 호가한다.
▲ 1.붉은 도료를 혼합하는 작업. 투명한 옻에 석채가루를 섞으면 이렇게 붉은 색을 띠게 된다.2.이형만 장인이 나전칠기함에 붉은 칠을 하고 있다.3.자개를 자르는 줄음질 공정. 이형만 장인은 줄음질 분야의 대가로 꼽힌다.4.장인의 손. 줄음질할 때 생기는 새하얀 자개가루와 평생을 같이 했다.
원주옻의 품질이 뛰어나듯이, 원주는 옻칠 관련 기능 보유자들이 가장 많은 고을이기도 하다. 무형문화재 제10호 나전칠기장 이형만 선생을 비롯해 현재 원주에 거주하는 칠공예가는 도무형문화재 제12호 칠기장 김상수 선생, 제13호 나전칠기장 박귀래 선생, 제17호 생칠장인 이돈호 선생, 김영복·설영돌·오삼록 공예가, 그리고 문하생들과 관련업종 종사자들까지 치면 적지 않은 숫자다.
이렇듯 20세기 후반 이후 칠공예의 본고장으로 자리 잡은 원주. 그 한가운데엔 이형만 장인이 우뚝 서있다. 길손은 운이 좋게도 몇 해 전 장인의 작업실을 방문해 나전칠기 작업과정을 살펴본 적이 있다. 치악산이 정겹게 굽어보는 단계동에 공방을 두고 있는 이형만 장인은 우리나라에 두 명뿐인 나전칠기장 기능보유자 중 한 명이다.
고려시대에 가장 눈부시게 발전하였던 나전칠기는 자개라고 부르는 얇은 조개껍질을 옻칠한 표면 위에 무늬를 따라 박아 넣어 장식한 기물을 말한다. 자개는 통영이나 제주 앞바다에서 나온 게 최고의 품질이거니와 제품의 생명을 결정하는 옻은 강원도 원주땅에서 거둔 것을 으뜸으로 친다.
우리 조상들은 일찍이 기물의 표면에 옻칠을 하고 조개껍질을 다듬어 붙이면 옻의 검은 색과 조개의 밝은 색이 조화를 이뤄 우아한 빛을 발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 때문에 말안장, 장롱, 궤, 탁자, 상, 연적 등으로 제작되어온 우리나라 나전칠기의 역사는 멀리 삼국시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청자로 대표되는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는 귀족적인 조형기법의 등장으로 그 화려하고 섬세한 틀이 잡혔고, 조선시대엔 거칠고 소박한 민중적 조형기법으로 민속공예로 정착되었다.
나전칠기의 뼈대를 형성하는 백골의 옻칠을 파낸 후 자개를 집어넣는 나전(螺鈿)엔 자개를 무늬에 맞게 실톱으로 오려 붙이는 ‘줄음질법’과 칼로 끊어서 붙이는 ‘끊음질법’이 있다. 어떤 기술이든 전체적으로 하나의 나전칠기가 제작되는 데는 무려 마흔다섯 차례 이상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거기에 홍송, 물푸레나무, 오리나무 등 백골로 쓰이는 나무만도 찌고 건조하는 데 2~3년은 보통이니, 아무리 작은 제품이라고 해도 지금 주문한다면 최소 몇 년은 기다려야 두 눈으로 감상할 수 있는 것이다.
▲ (좌)원주 단구동에 공방을 두고 있는 무형문화재 제10호 나전칠기장 이형만 선생. (우)장인의 작품 세계를 보여주는 작품.
이형만 장인은 줄음질 분야의 대가로 꼽힌다. 전통적인 당초문(唐草紋)으로 즐겨 제작하는 그의 대표작 대부분은 이 줄음질법으로 제작한 것이다. 반면 나전칠기 분야에서 또 다른 큰 별인 통영의 송방웅 장인은 끊음질 분야에서 으뜸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요즘엔 줄음질법이 주류로 잡아가고 있는 추세지만, 나전칠기 제작에서 줄음질과 끊음질 기술은 단절된 사이가 아닌 상호보완관계라 한다.
이형만 장인이 고향인 통영을 떠나 원주로 옮겨오게 된 건 나전칠기의 대가인 일사(一砂) 김봉룡(1903-1994·1대 나전칠기장 기능보유자) 선생을 따라서다. 스승은 자신이 부소장으로 있던 경남기술원 양성소가 통영시로 이관된 후인 통영서 개인공방을 열었다가 1968년 무렵 세계적인 옻의 생산지인 원주땅으로 공방을 옮겼다. 나전칠기 제작을 평생의 업으로 삼기로 결심한 그도 1970년 스승을 좇아 치악산 향기 정겨운 원주로 들어와 자리 잡게 되었다. 당시 나전칠기는 해방 후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나전칠기에 관한 한 이 시대 최고의 권위자 중 한 명인 이형만 장인의 작품들은 개인이 구해서 가는 경우는 드물고, 대부분 국가 단체에서 사들이거나 전통공예 홍보 교육에 활용하는 데 쓰이고 있다. 몇 년 전 교황 바오로2세는 그가 선물한 나전칠기함을 받아들고 동방의 작은 나라에서 빚은 작품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다고 한다.
삼도수군 통제영이 있던 조선시대 통영의 나전칠기는 진상품으로도 그 진가를 인정받을 만큼 전국의 칠기제품 가운데 으뜸의 자리를 지켰다. 물론 지금도 내로라하는 전문가들조차 통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1960년대 후반 이후 일사 김봉룡에서 우사 이형만으로 계보를 잇고 있는 원주의 나전칠기도 이젠 어느덧 통영에 뒤지지 않는 듬직한 무게를 지니게 되었다.
그런데, 이번에 옻나무를 찾다 만난 토박이 노인들은 한지 이야기도 빼놓지 않고 들려줬다. “옻도 옻이지만, 옛날부터 원주는 한지도 유명했지. 우리 어릴 때만 해도 원주엔 한지 만드는 공장이 많았어. 질도 좋아 전국에서 다 알아줬지.”
- ▲ 흥업면의 대안리 느티나무. 수령 350년 정도로 추정되는 이 나무는 오랜 세월 동안 주민들과 함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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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의 토박이 노인들은 아직도 원주 한지의 명성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원주엔 1970년까지만 해도 귀래면·부론면·판부면과 단구동 일대에 한지공장이 여럿 있었다. 지금이야 공장도 거의 흩어졌지만 광복 때까지만 해도 원주 한지는 전국에서 다 알아줬다는 것이다. 오염되지 않은 수질은 강하고 질긴 원주 한지를 만들어 냈다. 이런 까닭에 예로부터 원주 한지가 유명했던 것이다.
이런 품질 덕에 1985년엔 당시 문화공보부 추천으로 프랑스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직지심경과 왕오천축국전의 영인용 닥종이를 원주 한지로 납품하기도 했다. 지금은 생활공예품, 팬시용품, 한지벽지, 인테리어 등에 활용되는 원주 한지는 전체 제작과정이 장인들의 손에 의해 전통방식으로 제작된다. 특히 260여 종의 색한지가 큰 자랑거리.
이렇듯 우수한 원주 한지를 널리 알리기 위해 1999년 처음으로 개최한 원주한지문화제는 어느덧 원주를 대표하는 축제로 우뚝 서있다. 이 축제는 매년 9월 중순에 열리는데, 올해엔 9월24일부터 28일까지 닷새 동안 진행된다고 하니 세계로 뻗어나가는 원주 한지의 명성을 직접 확인해보자.
한지의 재료는 바로 닥나무. 원주 역시 고려시대부터 닥나무 산지로도 이름을 날렸다. 원주는 사질 양토가 풍부하고 햇빛이 많아 닥나무가 잘 자라는 환경이기 때문. 원주 북쪽 섬강가에 있는 호저면(好楮面)은 지명 자체가 닥나무와 관련이 있다. 호저면은 일제강점기에 행정조직 개편 때 호매곡면(好梅谷面)과 저전동면(楮田洞面)이 합쳐진 것인데, 저전동이란 바로 닥나무밭을 뜻하는 지명이다.
- ▲ (좌)조선 후기에 고구마를 들여온 조엄의 묘소 입구엔 고구마밭이 조성되어 있다.(우)호저면 한터마을의 닥나무밭. 이곳 닥나무는 품질이 좋아 일제강점기엔 연간 50만 근의 피닥을 생산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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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터 마을의 닥나무는 섬유질도 풍부하고 품질이 좋아 일제강점기엔 이곳에서 생산되는 연간 50만 근의 피닥(닥나무 섬유질 마른 것)을 모두 수거해갔다고 한다. 1970년대 초반까지도 전국에서 상인들이 몰려들었고, 인근 주민들도 닥나무를 키워 생계를 유지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현재 원주에서 닥나무 재배지를 찾기란 매우 어렵다. 한터 마을을 중심으로 2만여 평의 면적에 야생군락의 형태로 우리 고유의 삼지닥나무가 번식하고 있으며, 또 2006년 이 마을에 닥나무, 닥풀 재배단지를 조성했으나 필요한 전체 물량의 2% 정도밖에 안 되는 수준이다. 이 때문에 한지를 생산하는 공장들은 경북 예천·안동 등지에서 닥나무를 구입해 오는 실정이라고 한다.
이즈음이면 원주 이야기는 얼추 짚은 듯하니, 이제 원주에 사연을 남긴 문인들을 알아보자. 조선 초기 운곡 원천석(1330-?)은 이성계가 고려를 무너뜨리자 ‘흥망이 유수하니 만월대도 추초로다’라는 노래를 부르곤 고향인 원주로 돌아와 치악산에서 운둔했다. 이방원이 왕위에 오른 뒤 어릴 적 스승이었던 인연으로 원천석을 불렀으나 그는 나가지 않았다.
이에 이방원이 직접 치악산까지 찾아갔으나 그는 끝내 이방원을 만나지 않고 피했다고 한다. 원천석의 묘는 치악산 서쪽의 황골 부근에 모셔져 있다. 또 섬강의 간현유원지 가는 길목에선 일본에서 고구마를 들여온 조엄(1719-1777)도 만날 수 있다. 그의 묘 입구엔 우리나라 토양에 맞는 여러 종의 고구마 품종이 자라고 있어 참배객의 눈길을 끈다.
- ▲ (좌)단구동에 있는 박경리 선생의 옛집. 저 멀리 치악산 줄기가 보인다.(우)박경리 선생이 토지를 완간한 날(8월15일)을 기리기 위해 매년 8월14일이면‘소설 토지의 날’ 기념행사가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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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의 문인 중엔 반체제 저항시인이자 생명사상가로 활동하고 있는 김지하 시인이 목포에서 이사 와 원주중학교를 졸업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원주를 빛낸 분은 박경리(朴景利·1927-2008) 선생이다. 선생이 여기 계시는 것만으로도 원주는 돋보였다. 섬강은 맑았고, 치악은 높았다. 선생의 문학적 성과는 세계 문학사에도 길이 빛날 것이지만, 여기서는 원주와의 인연을 중심으로 짚어보자.
‘토지’로 널리 알려진 박경리 선생은, 1980년 김지하 시인의 부인이자 딸인 김영주씨가 시댁인 원주에서 어린 자식을 데리고 남편의 옥바라지에 고생하자 이를 도와주기 위해 원주로 내려오게 된다. 이때 자리를 잡은 곳이 바로 동쪽으로 치악산이 바라보이는 단구동 언덕이었다.
이곳에 집과 텃밭을 마련한 선생은 10년이 넘는 세월을 ‘토지’ 4부와 5부 집필에 몰두했다. 결국 1994년 8월15일 이곳에서 토지 전 5부 16권을 탈고하는 26년에 걸친 집필 대장정을 마무리하게 된다. 그러다 이태 뒤 이곳이 재개발대상지에 포함되자 시내를 벗어나 흥업면 매지리의 양지 바른 산기슭에 토지문화관을 건립해 옮겨가게 되는데, 원주시가 1999년에 이곳을 인수해 박경리문학공원을 조성했다.
치악산 하늘금이 통째로 올려다보이는 단구동 저택의 조망은 좋다. 지금은 주변에 아파트와 교회 등의 건물이 들어서는 바람에 예전보다 상하긴 했지만 그래도 시내에서 이 정도면 치악산 조망엔 나무람이 없는 수준이다. 지난 5월5일 박경리 선생이 세상을 떠나기 전 현대문학 4월호에 발표한 마지막 시는 이곳 단구동 시절을 노래하고 있다.
- ▲ (좌)박경리 선생의 옛집에 조성한 박경리 문학공원엔 전시실도 갖춰져 있다. (우)박경리 선생 옛집 대문. 창작을 위해 고민하던 선생의 발자국 소리가 들릴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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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 그루가 / 어느 날 일시에 죽어 자빠진 그 집 십오 년을 살았다 // 빈 창고같이 휑뎅그렁한 큰 집에 / 뜰은 넓어서 / 배추 심고 고추 심고 상추 심고 파 심고 / 고양이들과 함께 살았다 / 정붙이고 살았다 / 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국새가 울었고 / 연못의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 이른 봄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중략)…그 세월 옛날의 그 집 그랬지 그랬었지 / 대문 밖에서는 늘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 모진 세월은 가고 아아 편안하다 //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박경리 선생의 시 ‘옛날의 그 집’ 중에서박경리 선생의 문학적 성과는 두말이 필요 없거니와 선생의 체취는 통영에서, 하동에서, 그리고 이곳 원주에서 느끼게 된다. 선생께서 작품에 몰두하시다 거닐던 그 뜰엔 따가운지 뜨거운지 모를 늦여름 햇살이 쏟아진다. ‘홍이동산’이라 이름 지은 집 옆의 언덕에 올라 동쪽을 바라보니 치악이 싱긋 미소를 보낸다. ‘원주를 떠나기 전에 저 치악을 올라야할까? 아니면 섬강에서 낚싯대 드리우고 잠시 세월을 낚아볼까?’ 머뭇거리는 사이, 치악은 말없이 또 빙긋 웃기만 한다.
치악산
원주 동쪽에 솟은 치악산(1,288m)은 꿩의 보은 설화로 잘 알려진 전설의 무대다. 원래는 불타는 듯한 가을 단풍이 아름다워 적악산(赤嶽山)이라 불렸는데, 이 전설로 인해 꿩 치(雉) 자를 쓴 치악산(雉嶽山)으로 바뀌었다.
치악산의 산행기점은 구룡사·황골·행구동·금대리·신림 등 여러 곳이 있다. 이중에서 산행시간만 5~6시간 정도 걸리는 구룡사~세렴폭포~사다리병창~비로봉~계곡길~구룡사 코스(10.9km)가 가장 인기 있다. 구룡사~세렴폭포 탐승코스는 왕복 2시간 정도 걸린다.
이외에도 정상인 비로봉을 경유하는 황골~입석사~비로봉~세렴폭포~구룡사 코스(10.7km)는 5시간, 행구동~국향사~향로봉~세렴폭포~구룡사(14.2km) 코스는 7시간, 금대리~영원사~남대봉~비로봉~세렴폭포~구룡사(22.6km) 종주 코스는 12시간, 성남리~상원사~남대봉~비로봉~세렴폭포~구룡사 종주 코스(23.8km)는 13시간 걸린다. 구룡사 문화재관람료 어른 2,000원. 주차비는 승용차 4,000원(성수기 5,000원). 치악산 국립공원 관리사무소 전화 033-732-5231
구룡사
치악산 비로봉 북쪽에 있는 구룡사(龜龍寺)는 668년(문무왕 8) 의상대사가 창건했다. 창건 당시의 이름은 구룡사(九龍寺)인데, 이름에 얽힌 9마리 용에 관한 전설이 전해진다. 조선 중기에 거북바위 설화와 관련해 현재의 명칭으로 바뀌었다. 창건 이후 도선·자초·휴정 등이 거쳐 가면서 영서지방 수찰 구실을 하기도 했다. 현존 당우는 대웅전·보광루·삼성각·심검당·설선당 등이 있다. 절 입구에 있는 황장금표(黃腸禁標)는 조선시대 이 일대에서 금강송 무단벌목을 금한다는 내용의 역사적 자료다. 전화 033-732-4800
국형사
치악산 서쪽에 있는 국형사(國亨寺)는 신라 경순왕 때 무학대사가 고문암(古文庵)으로 창건했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이곳에 동악신(東岳神)을 봉안하고 동악단을 쌓았으며, 해마다 원주·횡성·영월·평창·정선 고을의 원들이 모여 제향을 올렸으므로 국향사라 했다. 일설엔 조선시대 정종의 둘째 딸의 병이 이 절에서 백일기도를 한 뒤 완쾌되자 정종이 기뻐해 절을 크게 확장하고 절 이름도 국향사로 고쳤다고 한다. 1680년 폐사됐다가 1907년 중수했다. 전화 033-747-1815
상원사
치악산 남대봉(1,182m) 정상 부근에 있는 상원사(上院寺)는 신라 때 창건한 절집이다. 문무왕 때 의상이 창건했다는 설과 신라 말 경순왕의 왕사였던 무착이 창건했다는 설이 있다. 조선시대엔 여러 왕들이 국태민안을 위한 기도처로 삼았다. 6·25전쟁 때 모두 불타버린 것을 1968년에 중건했다. 1988년 대웅전을 다시 짓고, 범종각과 일주문을 신축했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동서에 신라 석탑 양식을 따른 상원사지 석탑 및 광배(강원유형문화재 제25호)가 있다. 이 사찰과 관련해 은혜 갚은 꿩의 전설이 전해온다. 전화 033-746-1608
원주 법천사지
부론면 법천리에 있는 법천사지(사적 제466호)는 신라 말에 세워져 고려시대에 대대적으로 중창된 법천사(法泉寺)가 있던 곳이다. 법천사는 화엄종과 더불어 고려시대 양대 종단이던 법상종의 고승 정현이 주지로 있어 법상종 사찰로 번성했으며, 국사(國師)였던 지광국사 해린이 법천사로 은퇴하면서 크게 융성했으나 임진왜란 때 전소됐다. 우리나라 묘탑 가운데 최대의 걸작으로 평가되는 지광국사현묘탑(국보 제101호)과 탑비(국보 제59호)가 문종에 의해 세워졌다. 현재 법천사지엔 탑비를 비롯해 지광국사현묘탑지, 부도전지, 당간지주 등이 남아 있다. 탑은 일제강점기에 경복궁으로 옮겨졌다.
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비
부론면 법천리 법천사지에 세워져 있는 지광국사 현묘탑비(국보 제59호)는 고려시대 지광국사(智光國師·984-1070)가 이 절에서 입적하자 1085년(고려 선종2) 그 공적을 추모하기 위해 사리탑인 현묘탑과 함께 세운 탑비다. 높이 4.55m. 비 앞면 가장자리에 덩굴무늬를 새기고, 양 옆면에 정교한 조각을 한 치밀함이 돋보여 형태와 조각이 잘 어울리는 고려시대의 걸작품이라 할 수 있다. 비문엔 지광국사가 불교에 입문해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행장과 공적을 추모하는 글이 새겨져 있다.
거돈사지
부론면 정산리 현계산(賢溪山) 기슭의 작은 골짜기를 끼고 펼쳐진 거돈사지(居頓寺址·사적 제168호)는 신라 후기인 9세기경에 창건된 거돈사(居頓寺)가 있던 곳이다. 고려 초기에 확장·보수되어 조선 전기까지 유지됐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됐다. 절터에서는 중문터, 탑, 금당터, 강당터, 승방터, 회랑 등이 확인됐다. 거돈사는 신라 말 고려 초의 절터로서 보기 드문 일탑식 가람으로 주목할 만한 곳이다.
거돈사 원공국사 승묘탑비
부론면 정산리 거돈사지에서 동쪽으로 약 110m 떨어진 곳에 세워져 있는 거돈사 원공국사 승묘탑비(보물 제78호)는 고려시대의 유명한 스님인 원공국사(圓空國師·930-1018)의 행적을 기록한 탑비로 1025년(현종 16)에 세운 것이다. 머릿돌엔 구름 속을 요동치는 용이 불꽃에 쌓인 여의주를 다투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는데, 매우 사실적이고 화려하다. 고려 초 조각예술의 높은 솜씨를 보여주고 있다. 글은 당시 해동공자로 불리던 대학자 최충이 짓고, 글씨는 김거웅이 구양순 서법을 이어받아 해서체로 썼다. 고려시대의 여러 비에 새긴 글 중에서도 매우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거돈사지 삼층석탑
부론면 정산리 거돈사 금당터 앞에 세워져 있는 거돈사지 삼층석탑(보물 제750호)은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형식이다. 탑의 조성연대는 2단을 이루는 기단구조와 기둥 모양의 새김, 5단의 지붕돌받침 등의 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인 9세기에 제작된 3층 정형탑 양식을 따르고 있다. 높이 5.3m.
진공대사탑비 귀부·이수
지정면 안창리 흥법사터에 남아 있는 진공대사탑비 귀부 및 이수(보물 제463호)는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활약한 승려인 진공대사(869-940)를 기리기 위해 세운 고려시대의 탑비다. 비문이 새겨진 몸돌은 깨어진 채 경복궁으로 옮겨놓아 이곳엔 비의 받침돌과 머릿돌만 남아 있다. 비를 이고 있던 돌거북은 거북이라기보다 용에 가까운 머리를 하고 있으며, 입엔 여의주를 물고 네 발로 바닥을 힘차게 딛고 있다. 웅장한 기운이 넘치면서도 섬세하게 조각되어 당시의 높은 예술 수준이 엿보인다.
흥법사지 삼층석탑
지정면 안창리 흥법사터라고 전하는 밭 가운데에 서 있는 흥법사지 삼층석탑(보물 제464호)은 2층 기단에 기와집 모습을 본뜬 듯한 탑신을 3층으로 쌓아올린 고려시대의 탑이다. 아래층 기단의 각 면엔 안상(眼象)이 3개씩 새겨져 있는데, 꽃 모양처럼 솟아올라 있어 고려시대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지붕돌의 처마는 수평을 이루다가 양쪽 가에서 살짝 위로 들려있어 역시 고려시대 석탑임을 잘 드러낸다. 원래 흥법사지엔 이외에도 전흥법사 염거화상탑(국보 제104호)·흥법사 진공대사탑부석관(보물 제365호) 등이 있었는데, 일제에 의해 반출됐다가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원주 강원감영지
원주시 일산동에 있는 원주 강원감영지(江原監營址·사적 제439호)는 조선시대 강원도의 26개 부·목·군·현을 관할하던 강원도 지방행정의 중심지다. 1395년(태조 4)에 설치되어 1895년(고종 32) 8도제가 폐지되고 23부제를 실시하면서 감영이 폐지될 때까지 500년 동안 강원도의 정청(政廳) 업무를 수행했다.
이곳엔 선화당·포정루·청운당 등 당시 건물이 원래 위치에 잘 남아 있고, 중삼문·내삼문·공방고터·책방고·보도·담장·행각 등이 있던 흔적과 같은 관련 유구가 비교적 잘 남아 있다. 또한 강원감영 이전의 원주목 관아의 건물터 등이 그 아래층에 비교적 잘 남아 있어 우리나라 관아 건물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는 유적이다. 6·25전쟁 때 큰 피해를 입어 현재는 관찰사 집무처였던 선화당과 정문인 포정루 등만 남아있다.
원주 영원산성
판부면 금대리 치악산 남쪽에 있는 원주 영원산성(領願山城·사적 제447호)은 신라시대 돌로 쌓은 성이다. 축조연대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신라 말 북원의 양길과 궁예와 관련된 성곽으로 전한다. 고려시대인 1291년(충렬왕 17)엔 원충갑이 원나라의 침략군을 무찌른 곳이며, 조선시대엔 임진왜란 때 목사 김제갑의 지휘 아래 원주 일대의 주민들이 끝까지 항전하다가 함락되어 수많은 장졸들이 목숨을 잃은 비극의 현장이기도 하다.
원성 성남리 성황림
신림면에 있는 원성 성남리 성황림(城隍林·천연기념물 제93호)은 성남리 주민들이 치악산 성황신을 마을의 수호신으로 믿어 매년 4월8일과 9월9일에 마을의 평화를 기원하며 제사를 지내는 숲이다. 온대 지방을 대표할 만한 활엽수림으로서 학술적 가치가 높고, 우리 조상들의 과거 종교관을 알 수 있는 민속자료다. 성황림엔 각시괴불나무, 음나무, 졸참나무, 층층나무, 피나무, 가래나무, 쪽동백나무, 들메나무, 박쥐나무, 산초, 보리수, 광대싸리, 복분자딸기, 찔레, 노박덩굴, 으름덩굴 등 중부 온대지역을 대표하는 수종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원주 반계리 은행나무
원주 반계리 은행나무(천연기념물 제167호)는 수령 800∼1,000년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나무의 크기는 높이가 32m, 가슴높이 둘레가 16.27m이다. 이 나무 안에 흰 뱀이 살고 있어서 아무도 손을 대지 못하는 신성한 나무로 여겼으며, 가을에 단풍이 한꺼번에 들면 풍년이 든다고 믿었다.
원성 대안리 느티나무
흥업면의 대안리 마을로 들어가는 길옆에서 자라고 있는 원성 대안리 느티나무(천연기념물 제279호)는 수령 350년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24m, 둘레 8.1m이다. 지상에서 6m 정도 올라간 부위에서 잘라낸 한 가지의 밑부분이 썩어 들어가서 큰 구멍이 생겼다. 이 느티나무는 오랜 세월 동안 조상들의 쉼터가 되어 보살펴져 온 나무로서 문화적·생물학적으로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박경리 문학공원
단구동에 있는 토지문학공원은 박경리(朴景利·1926-2008.5.5) 선생이 살던 집 주변을 공원화한 것이다. 1995년 선생의 옛집이 택지개발지구에 포함돼 헐릴 위기에 놓였으나 한국토지공사가 공원 부지로 결정한 것에서 비롯됐다. 이곳엔 ‘토지’의 무대가 됐던 평사리의 모습을 축소해 놓았고, 생전에 글을 쓰던 집과 마당의 고추밭까지 그대로 남아 있다. 관람·주차 무료. 전화 033-762-6843
토지문화관
흥업면 매지리에 있는 토지문화관은 대하소설 ‘토지’의 작가 박경리 선생이 설립한 (재)토지문화재단에서 학술·문화행사 및 연구·창작·집필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1999년 개관했다. 건물면적 2,658㎡의 지상 4층 규모로, 대회의실·세미나실·집필실·도서실·야외무대·사무실·식당 등이 있다. 토지문화관 바로 옆엔 박경리 선생이 1998년부터 2008년 5월 타계할 때까지 거주했던 2층집이 있다. 전화 033-762-1382 , 766-5564
원주 시립박물관
원주시 봉산동에 있는 원주시립박물관은 원주 지방의 민속자료와 역사유물을 수집·보관·연구하고 전시하기 위해 설립한 공간이다. 이곳엔 구석기·신석기·청동기시대의 석기·토기와 삼국시대 초기의 고분출토품, 원주의 여러 폐사지에서 수집된 와·전·불상 등 불교문화재, 그리고 조상들의 삶의 모습을 알 수 있는 의식주와 생업 관련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역사유물전시실 4실, 전시홀, 수장고, 전통한옥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개장시간 09:00∼17:00(동절기 18:00). 입장료 일반(20~65세) 700원. 매주 월요일, 매년 1월1일, 설날, 추석 휴관.
치악민속박물관
원주시 행구동에 있는 치악민속박물관은 김용식 선생이 20여 년간 수집해온 도자기, 서화, 민화, 고서, 민속류 등을 바탕으로 해 개관한 전문 박물관이다. 현재 도자기 400점, 목기 100점, 민화 70점, 고서 500권, 기타 3,000점 등 모두 4,000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 전시는 물론 자료수집, 출판, 연구와 다양한 문화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해 청소년과 성인들이 참여할 수 있는 공간이다. 관람료 어른 1,500원, 학생·어린이 700원. 개장시간 10:00∼19:00, 월요일 휴관. 전화 033-747-6956
고판화박물관
신림면 황둔리에 있는 고판화박물관은 한국, 중국, 일본, 티베트, 몽골, 인도, 네팔 등 전 세계의 옛 목판화를 전시하는 전문 박물관이다. 고판화 원판 1,800여 점, 고판화 작품 300여 점, 목판으로 인쇄된 서책 200여 점, 관련 자료 200여 점 등 모두 2,500여 점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 규모는 작지만 판화 소장품은 국내 최고로서 국내 소장 판화류 절반이 이곳에 있다. 또 목판화를 직접 새기는 상설판화체험관도 있다. 관람료(어른 3,000원, 어린이 2,000)에 기본 판화 찍기 체험비가 포함되어있다. 관람시간 10:00~19:00(동절기 17:00). 매주 월요일 휴관. 전화 033-761-7885
원주 옻칠기·한지공예관
치악산 구룡사 가는 길목인 소초면 학곡리에 자리한 원주 옻칠기·한지공예관은 품질의 우수성을 인정받는 원주 옻칠기와 한지 제품을 살펴볼 수 있는 공간이다. 중요무형문화제 제10호 나전장 이형만의 봉황당초문 서류함, 석류문 쟁반 등의 나전칠기는 섬세하고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또 양유전의 칠화군학문 사층정, 건칠호도 소박한 칠기의 맛을 풍기는 제품이다. 이밖에 옻칠기 유물과 반닫이, 등, 골무함, 반짇고리, 컵받침 등 한지로 만든 공예품 등 20여 점이 전시됐다. 판매장에서는 다기세트, 제기용품, 반상기 등 각종 칠기 제품과 색한지를 비롯한 한지와 공예품 등을 시중보다 30% 정도 싼 값에 판매하고 있다. 입장료는 없다.
치악산 자연휴양림
원주 남쪽의 판부면 금대리의 치악산 자연휴양림은 1995년 벼락바위봉(939m) 찰방막골 주변에 조성한 휴양공간이다. 휴양림 주변엔 칠성바위·거북바위·벼락바위 등이 있고, 산책로를 따라 오르면 치악산의 남대봉, 비로봉 등이 한눈에 들어온다. 통나무집과 자연관찰원, 어린이놀이터, 물놀이터, 피크닉장, 삼림욕장, 체력단련장, 캠프파이어장, 야외교실, 정자, 대광장, 잔디광장 등이 있다. 시설 사용료는 통나무집 성수기·주말·휴일 5~7평(4인 기준) 40,000원/비수기·평일 20,000원, 8평(4인 기준) 80,000원/40,000원. 황토방 10평(6인 기준) 100,000원/50,000원, 숲속의집 20평(10인 기준) 15만원/80,000원. 야영장 3,000원/2,000원. 입장료 성인 2,000원, 청소년 1,500원, 어린이 1,000원. 전화 033-762-8288
간현유원지
원주천과 삼산천이 섬강에 합류하는 지점에 있는 간현유원지는 백사장이 펼쳐져 있고, 수심이 얕은 맑은 강물 때문에 오래 전부터 원주의 대표 관광지로 이름을 떨쳐왔다. 협곡의 동쪽 절벽 위로 중앙선 철도가 통과한다. 간현유원지에서 북서쪽으로 약 1km 떨어진 곳에 20m의 시원한 물줄기가 쏟아지는 두몽폭포가 있다. 또 소금산은 삼산천의 수려한 경관을 따라 약 3.5km(소요시간 2시간) 산행코스가 있다. 소금산교를 건너 기암절벽으로 둘러싸인 개미둥지골에 들어서면 암벽등반장소인 간현암이 나온다. 1993년 원주클라이밍협회에서 개척한 이후 주말이면 전국에서 클라이머들이 찾아온다. 유원지 안에 식당, 민박촌, 청소년수련관, 다목적체육시설 등이 있다. 입장료 어른 1,600원, 중·고생 1,200원, 초등생 800원. 주차료 승용차 당일 2,000원, 1박 4,000원. 야영료(1박) 소형 2,000원, 대형 5,000원. 간현유원지 관리사무소 033-737-4765, 관리소 033-741-2546.
판대유원지
간현관광지의 상류지역인 지정면 판대리에 있는 판대유원지는 삼산을 흐르는 강물과 주변 백사장, 기암과 수려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여름엔 백사장에서 야영하며 물놀이를 즐길 수 있다. 또 강 건너 바위벽엔 판대인공빙장이 자리하고 있어 겨울이면 빙벽등반을 즐기려는 클라이머들이 찾아든다.
금대계곡
치악산 국립공원의 남서쪽 자락에 위치한 금대계곡은 1급수의 깨끗하고 맑은 계곡이 자랑이다. 야영장 옆 계곡은 수심이 깊지 않아 여름철 물놀이 장소로도 좋다. 금대오토캠프장엔 50여 동의 텐트를 칠 수 있는 사이트가 조성되어 있다. 정리가 잘 되어 있는 야영장엔 취사장과 화장실 등이 갖춰져 있으며 전기시설을 이용할 수 있다. 야영장 주변으로는 야생화를 만날 수 있는 자연관찰로가 조성되어 있다. 캠프장 이용료는 소형·중형 승용차 주차료 1일 9,000원(성수기 11,000원). 치악산 국립공원 금대분소 전화 033-763-5232
섬안이 유원지
주천강 상류인 신림면 송계리 섬안이강은 치악산 서쪽 자락의 계류들이 모여 이루어진 하천이다. 강원도 깊은 산골에 강물이 휘감아 돌고 돌아 마치 섬 안과 같다고 해 섬안이강이란 이름을 얻었다. 이 강은 비교적 오염이 덜 됐고, 야영할 만한 공간도 곳곳에 있어 한여름이면 가족 단위 피서객들이 많이 찾는다. 섬안이강의 여러 지류 중 엄둔계곡의 운치가 가장 빼어나다.
길에서 만난 별미
메밀묵밥
흥업면 소재지에 있는 흥업묵집(033-762-4210)은 전통 방식으로 묵을 쑤는 메밀묵집이라 진짜 메밀묵을 맛볼 수 있는 곳이다. 메밀묵밥을 시키면 많지는 않지만 메밀전병도 약간 딸려 나온다. 김치와 파 등이 들어간 메밀전도 맛이 좋다. 주문하면 국물을 따뜻하게 하는지 시원하게 하는지 물어보는데, 기호에 맞게 대답하면 된다. 여름엔 시원하게 먹는 게 좋다. 단층 가정집을 개조해 꾸민 식당은 허름하지만 분위기는 정갈하다. 가격도 큰 부담이 없는 편이다.
추어탕
원주 시내의 원주고등학교 정문 앞에 있는 원주복추어탕(033-762-7989, 763-7987)은 전국적으로 명성을 날리고 있는 원주의 대표 추어탕집이다. 추어탕 하나로만 35년 이상 맛을 내온 이 식당이 별미집으로 자리 잡으면서 원주 시내에 나름대로 맛을 뽐내는 추어탕집이 여럿 생겨났다. 탕을 인원수에 맞게 뚝배기에 내주는데, 미꾸라지를 갈아서 끓인 것과 통째로 끓인 통마리 두 가지를 모두 차린다. 주문할 때 원하는 스타일을 말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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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2008. 9 / 월간산 46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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