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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수상 및 후보시

<시> 오늘 나는(제8회 미당문학상 후보작) / 심보선

by 혜강(惠江) 2008. 9. 3.

        

        [제8회 미당문학상] 최종 후보작 지상중계 ⑤ [중앙일보] 

 

           

        

       

         오늘 나는  -심보선

 

 

         오늘 나는 흔들리는 깃발처럼 목적이 없다

         오늘 나는 이미 사라진 것들 뒤에 숨어 있다.

         태양이 오전의 다감함을 잃고

         노을의 적자색 위엄 속에서 눈을 부릅뜬다

         달이 저녁의 지위를 머리에 눌러쓰면 어느

         행인의 애절한 표정으로부터 밤이 곧 시작될 것이다

         내가 무관심했던  새들의 검은 주검  

         이마에 하나둘 그어지는 잿빛 선분들

         이웃의 늦은 망치질 소리

         그 밖의 이런저런 것들

         규칙과 감정 모두에 절박한 나

         지난 시절을 잊었고

         작년에 어떤 번민에 젖었는지 잊었다

         오늘 나는 달력 위에 미래라는 구멍을 낸다

         다음 주의 욕망

         다음달의 무(無)

         그리고 어떤 결정적인

         구토의 연도(年度)

         내 몫의 비극이 남아 있음을 안다

         누구에게나 증오할 자격이 있음을 안다

         오늘 나는 누군가의 애절한 얼굴을 노려보고 있었다

         오늘 나는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됐다. 

                                                    <2008 '창작과 비평' 봄호 발표>

포도같은 시어 … 씹다보면 달콤

  “이 시를 썼을 때 분위기가 생생하게 기억나요. 집에서 어머니는 드라마를 보고 계셨고요, 음···. 저는 옆에서 음악을 들으면서 시를 쓰고 있었어요. 말 그대로 오늘 나는, 그 하루의 느낌이죠.”

  특별할 게 없었던 하루. 이렇듯 사소한 일상은 닥쳐오면서 곧 잊혀진다. 사라진 시간들 뒤에 따라오는 오늘, 화자는 ‘지난 시절’과 ‘죽은 친구들’과 ‘작년의 번민’을 모두 잊었다. 대신 ‘달력 위에 미래라는 구멍’을 낸다. 그 미래의 모습은 아직 모르는 ‘욕망’이기도 하고 ‘무(無)’의 상태이기도 하다. 결국 중요한 것은 ‘오늘’이다.

  “지난 시간을 모두 기억한다고 내가 되는 건 아니에요. 오히려 망각함으로써 내가 되는 거죠.”

  모든 기억을 안고 살아가는 것은 얼마나 무거운 짐인가. 그러나 사람들은 기억의 곳간을 채우고 비우며 끊임없이 ‘자아’를 만들어가는 데 무심하다. 그들은 과거의 기억으로 너무나 쉽게 ‘나’를 정의 내린다. 그를 “꽤나 진지한 태도의 시인”으로 오해하고 “한국에서 온 좌파 급진주의자”로(‘엘리베이터 안에서의 도덕적이고 미적인 명상’) 생각해 버린다. 시인은 그런 시선이 “너무 불편하다”고 말한다. “타인이 보는 나 이외에 잉여의 부분, 규정되지 않은 부분이 있는데 실은 그게 정말 거대한 부분이거든요.” 그 거대한 부분을 감각적으로 생생히 드러내는 것이 바로 ‘시’가 된다.

  타인을 ‘어떤 사람’으로 쉽게 규정지으면서도 나는 규정 당하고 싶지 않은 욕망은 창과 방패처럼 끊임없이 부딪힌다. 결국 누구든 “불안과 권태를 숙명처럼 지고 사는 유한한 존재”일 뿐인데도. 이 비극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나. 시인의 답이 덤덤하다. 사랑이 불안한 실존을 극복하게 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사랑함으로써 살아가고 살아내잖아요.”

  ‘살아낸다’고 했다. 내가 아닌 타자를 끌어안고 욕망함으로써 살아낸다고. 시인에게 사랑은 흡사 종교와 같다. ‘전날 벗어놓은 바지를 바라보듯 생에 대하여 미련이 없’지만 고대종교처럼 찾아온 그녀와 사랑을 나누었기 때문에 그 생은 장대하고 거룩한, ‘아주 잠깐 빛나는 폐허’가 될 수 있다.(‘아주 잠깐 빛나는 폐허’) 사랑하는 여자의 얼굴 위에서 연꽃처럼 피었던 남자의 손은 이별하는 순간 평범해진다. ‘마치 환속한 중의 이마가 빛을 잃어가듯이.’(‘평범해지는 손’)

  사랑을 이야기하지만 시어는 무뚝뚝하다. 이를 두고 “태생적으로 건조하다. 그런데 굉장히 흡입력이 강하다. 상당히 폭발적인 가능성이 있는 시인”이라고 문태준 예심위원은 평했다.

  시의 마무리가 재미있다. 초등학생의 일기처럼 ‘오늘 나는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됐다’고 고백한다. ‘사랑한다는 것과 완전히 무너진다는 것과 같은 말이었을 때’가 청춘이라 속삭였던 시인에게는 오늘이 늘 청춘이다.(‘청춘’) 완전히 무너지고 싶은 이 누가 있을까. 그런데 이상하다. 건포도 같이 마르고 건조한 언어들을 천천히 씹다 보면, 달짝지근함이 온몸에 퍼지면서 그 말이 탐난다.

글=임주리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출처> 2008. 8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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