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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수상 및 후보시

<시> 그림자들(제8회 미당문학상 후보작) / 이원

by 혜강(惠江) 2008. 9. 3.

            

             [제8회 미당문학상] 최종 후보작 지상중계 ⑦ [중앙일보] 

 


 

            그림자들 - 이원

 

           바닥은 벽은 죽음의 뒷모습일 텐데 그림자들은 등이 얼마나 아플까를 짐작이나

         할 수 있겠니

            

           무용수들이 허공으로 껑충껑충 뛰어오를 때 홀로 남겨지는 고독으로 오그라드

         는 그림자들의 힘줄을 짐작이나 할 수 있겠니

 

           한 사내가 또는 한 아이가 난간에서 몸을 던질 때 미처 뛰어오르지 못한 그림자

         의 심정을 짐작이나 할 수 있겠

 

           몸은 허공 너머로 사라졌는데 아직 지상에 남은 그림자는 그 순간 무슨 생각을

         할 지 짐작이나 할 수 있겠니

 

                                                                 ('문학의 문학' 2008년 여름호 발표)  

      

 

현실 뒤편까지 보는‘짐작의 힘’

 

  시인의 가슴에 묻어 지워지지 않는 장면들은 함초롬히 시가 된다. 어두운 그림자라 할지라도.

  ‘오른쪽 유방이 제 그림자를 왼쪽 유방의 자리에 가만 가만 드리워준다 왼쪽 유방이 머물던 자리가 불빛을 둥글게 담는다 빛과 어둠으로 빚은 달항아리가 여자의 몸에서 탄생한다‘(‘여자는 몸의 물기를 닦는다’ 중)

  목욕탕에서다. 아마도 큰 수술이 스쳤을 여자의 몸을 보았다. 오른쪽 유방이 드리운 그림자 덕에 왼쪽 유방이 사라진 자리는 외롭지 않았다. 그림자는 자연스레 여자의 몸이 되었다. 몸과 그림자가 섞이는 순간, 경계는 희미하다.

  “슬픔이나 고통, 결핍···. 이런 것들에서 벗어나고만 싶었어요. 슬픔과 기쁨의 경계, 세상의 경계가 확실하다고 믿었거든요.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 경계가 희미해지기 시작했어요. 옛날 같았다면 없는 쪽이 결핍되고 슬픈 것이라고 썼겠지만, 지금은 슬픔 자체를 자연스레 받아들여요.”

  그래서 이원은 경계를 긋는 대신 그 선을 넘나든다. 대상을 바라보다가 어느새 그 대상이 되어버리기를 서슴지 않는다. “그림자 입장에서는 몸이 부차적일 수도 있잖아요.” 그 마음을 담은 시가 대표작 ‘그림자들’이다. 무용수들이 허공으로 껑충껑충 뛰어오를 때 홀로 남겨지는 그림자, 아이가 난간에서 몸을 던질 때 미처 같이 뛰어오르지 못하고 남겨진 그림자의 심정은 어떨까. 몸은 위로, 아래로 향하는데 그림자는 늘 그렇듯 바닥에 있다.

  “바닥이나 대지는 죽음을 품고 있죠. 바닥은 아마도 죽음의 뒷모습일 텐데, 죽음하고 닿으면 아플 것 같더라고요. 사람이 난간에서 몸을 던져 자살을 하는 걸 떠올려보면 몸은 사라지지만 그림자는 남잖아요. 우두커니. 그 때 심정이 어떨까 짐작해 본거죠.”

  짐작은 곧 배려다. 친구나 부모의 마음도 헤아리기 힘든데 그림자의 마음을 어떻게 짐작하랴. 그래서 놀랍다. 시인의 ‘짐작’은 명쾌하게 보이는 현실을 넘어 뒤에 있는 것, 보이지 않는 것까지 헤아린다. “몸은 다 잘린 후에도 미처 사라지지 않는 것을 보고 있다. 몸 뒤에 숨겨진 어떤 더 본질적인 것을 추구한다.”(최현식 예심위원)

  ‘짐작’의 힘은 어디서 나올까. “추파춥스를 엄청 먹어요.” 비밀을 털어놓는다. “막대 사탕만이 주는 느낌이 있잖아요. 그 천진함, 말이에요.” 이런 시인의 얼굴에선 화난 표정이 떠오르지 않는다. 아니나 다를까. 서울예술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지만 수업 중에 한 번도 화낸 일이 없다고 한다. 화를 참는 게 아니라 화가 나지 않는단다. “아이들 입장에선 그럴 수도 있겠구나 싶거든요.”

  인터뷰를 빙자한 수다를 떨다 불현듯 기차역에 서 있는 이원이 그려졌다. 등 뒤로는 따사로운 햇살이 비치고 있고 시인의 그림자가 철로 위에 곱게 누워있다. 기차가 생각 없이 들이닥치며 그림자를 밟으면 이원은 아마도 소리를 지를 테다. 기차가 선다. 그 고함 덕에 살아난 그림자가 기차의 창문에 비친다. 그러면 시인은 예의 그 천진한 미소를 지을 테다.

  이원은 분명히 그럴 것이다.

글=임주리 기자, 사진=조문규 기자

 

<출처> 2008. 8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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