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회 미당문학상] 최종 후보작 지상중계 ⑥ [중앙일보]
검은 젖 -이영광
죽음을 들여다보지 않으면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햇빛이 기름띠처럼 떠다니는 나의 성지(聖地)
젖가슴만한 무덤들 사이에
나는 수혈받은 사람처럼 누워 쉰다
삶은 힘차고 힘겨우며,
헛디뎌 뛰어들고 싶으리만치 어질어질하다
이곳은 교요도 숨죽일만큼 고요하다
햇빛은 여기저기서 기둥을 만들었다가는 흩어진다
죽음을 들여다보지 않으면 아무것이나 다 되고 만다
나는 죽음의 희긋희긋한 젖무덤에 얼굴을 묻고
숨 멈추고 검은 젖을 깊이 빤다.
죽음을 통찰한 거친 ‘시어 펀치’
예심 도중 재미있는 말이 나왔다. 이영광은 “사진과 시가 거의 일치하는 시인”이라는 것이다. 힘깨나 쓸 것 같은 체구에 한때 덥수룩하니 턱수염까지 길렀었다. 그만큼 “거칠고 힘이 있는 목소리”(문혜원 예심위원)를 낸다.
‘인간 以上의 체급으로 제 몸뚱이를 불린 아귀들이/주름잡는 짐승 우리에서 하여간, 조또/살아야 하니까’(‘무소속’ 중)
‘그 새끼가 또 나오다니?/이게 게임이냐 종교 집회냐? 부자가 어떻게 빈민을 구해 주나?/이 요란한 판타지에는 너무도 빤한 그, 리얼리티가 없다’(‘2007-카불, 세렝게티, 청량리’ 중)
땅을 사랑했다는 장관 후보자의 변명은 ‘엉겁결에 하필이면 사랑 속으로 위장 전입한 사랑’(‘이상한 사랑’ 중)이란다. 서울시장 시절 ‘서울시 봉헌’ 소동에 빗대 대통령을 ‘제 神에게 제 나라를 부동산으로 바치려는 자’(‘현기증’ 중)로 표현했다. 시어로 만나기엔 좀 거칠다 싶으면서도 통쾌한 맛이 있다.
“언어 자체의 빛깔이 나빠지는 건 괴로운 일이죠. 하지만 그땐 거칠고 강경한 어휘를 써서 말하고 싶었습니다.”
사실 그의 전공은 사회비판이 아니었다. 문태준 예심위원의 표현대로 “죽음을 흠향하는 시인”이었다. 대표작인 ‘검은 젖’을 비롯해 최근작도 절반 이상은 죽음을 품고 있다. 그러나 그 죽음의 성질이 조금씩 변해왔다.
“죽음에 압도당한, 도무지 벗어나지 못하는 상태로 오랫동안 그 문제를 다뤄왔는데 ‘검은 젖’이나 ‘고사목 지대’같은 시에선 조금 숨통이 트였어요.”
‘나는 죽음의 희끗희끗한 젖무덤에 얼굴을 묻고/숨 멈추고, 검은 젖을 깊이 빤다’(‘검은 젖’ 중)
‘고사목들의 희고 검은 자태가 대세를 이룬 가운데/슬하엔 키 작은 산 나무들 젖먹이처럼 맺혔으니,//(…)판도는 변해도 생사는/상봉중에서도 쉼 없이 상봉 중인 것/여기까지가 삶인 것’(‘고사목 지대’ 중)
‘검은 젖’은 죽음의 색이지만 생명을 이어준다. ‘고사목 지대’에선 죽음까지도 삶의 영역으로 포괄된다. 시인은 한때 ‘무대 위에서 잠깐 어른거리는 것은/幕 뒤의 오래고 넓고 깊은 어둠에 잠기기 위한 것.’(‘호두나무 아래의 관찰’ 중)이라고도 노래했다. 삶이란 ‘아무것도 아닌’ 것, 오히려 죽음이 본질이란 생각에 오래도록 사로잡혔던 게다. 그러나 암투병 중인 후배 시인이 치료를 받고 호전되는 모습을 보며 생각이 바뀌었다.
‘면도로 민 머리에 예쁜 수건을 쓴 마른 몸이 생각났다/젖과 자궁을 들어내고 젊은 죽음 냄새를 풍기는 몸들이 생각났다’(‘詩人들’ 중)
“삶이란 건 뭔가 더 깊이 생각해야 하는 문제 아닐까,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다’라는 쪽으로 전환 중이랄까요.”
시인은 무덤 밖으로 걸어나왔다.
“당장은 삐뚤빼뚤한 게 많이 보였습니다. 생계든 공동체의 안위든, 시간이 지나면 개인의 삶에도 구체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되잖아요.”
세상이 조금은 달랐으면 하는 바람이 그에게 거친 시를 써내게 했다. 그건 “시도, 저도 살아야겠다”는 선언이었다.
글=이경희 기자, 사진=김태성 기자
<출처> 2008. 8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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