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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강원도

삼척 죽서루, 문인 학자들의 자취 가득한 관동 8경의 하나

by 혜강(惠江) 2008. 8. 9.

 

 

삼척 죽서루

문인 학자들의 자취 가득한 관동 8경의 하나

 

오마이뉴스 기자 이상기

 

 

 

  죽서루는 오십천 북쪽 절벽 위에 세워진 정자로 북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므로 죽서루에 대한 접근은 북쪽에서 가능하다. 죽서루를 보려면 주차장으로 쓰이는 바깥마당에서 안내소로 보이는 평삼문을 지나 안마당으로 들어가야 한다. 죽서루는 안마당의 절벽 쪽 단 위에 2층 누각으로 세워져 있다. 그러나 1층은 바위와 땅을 이용해 기단 형태로 만들어졌고, 2층에는 누마루가 놓여 시인묵객들이 풍류를 즐길 수 있게 했다. 1층은 암반과 지형을 그대로 이용하다 보니 기둥이 13개이며, 2층은 20개이다.

 

 

미수 허목의 <죽서루기>에 숨겨진 이야기

 

 

 

  나는 1층의 기둥을 돌아 2층 누각으로 올라간다. 2층 누각은 남쪽으로 들어가도록 되어 있다. 그것은 남쪽으로 바위가 있어 바로 2층 마루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마루에 들어가기 전 건물을 보니 남쪽 면이 세 칸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가운데 칸 위로 죽서루라는 힘찬 글씨가 보인다. 누가 썼는지 알 수 없다고 하는데 대 죽(竹)자에서 대나무가 솟아오르는 느낌이 든다.


    이곳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천정 서까래에 수많은 시제들과 현판 그리고 중건기가 걸려 있다. 시제는 고려 후기 대문장가인 이승휴부터 조선 정조 임금의 어제시까지 17점쯤 되고, 현판은 미수 허목과 이성조의 글씨 등 5점이나 된다. 중건기는 미수 허목의 죽서루기로부터 1991년 삼척시장 김광용이 쓴 것까지 6점이나 된다.

 

 

 

 

   죽서루의 역사를 기록한 글 중에서는 미수 허목의 <죽서루기>가 단연 압권이다. 그것은 미수 선생이 정치가이자 문장가이며 또 서예가이기 때문이다. 조선 중후기의 명재상이었던 미수 허목(1595-1682)은 헌종 3년(1662) 이곳 삼척부사로 있으면서 죽서루기(竹西樓記)를 썼다. 그 내용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된다.

 

  첫째 관동지방에 8경이 있으며 그 중 죽서루가 으뜸이라는 것이다. 둘째 죽서루의 경치가 아름다운 것은 큰 시내와 깎아지른 절벽, 울창한 숲과 사람 사는 마을이 있기 때문이다.

 

  "누각 밑에 와서는 겹겹이 쌓인 바위 벼랑이 천 길이나 되고 흰 여울이 그 밑을 감돌아 맑은 소를 이루었는데, 해가 서쪽으로 기울 녘이면 넘실거리는 푸른 물결이 바위 벼랑에 부딪쳐 부서진다."

 

 



  셋째 죽서루의 역사를 정확히 알기는 어려우나 조선 태조 3년(1403) 부사 김효종이 폐허 위에 누를 세웠고 세종 7년(1425) 부사 조관이 단청을 해 올렸다. 그런데 삼척시에서 나온 자료를 보니 미수 허목이 김효손(金孝孫)을 김효종(金孝宗)으로 잘못 기록했다는 것이다. 김효손이 태종 2년(1402) 정월에 삼척부사로 부임해서 태종 4년(1404) 2월에 떠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죽서루는 누각 아래 동쪽에 죽장사라는 절이 있어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누구의 글씨가 가장 좋은가?

 

 

 

  미수 허목은 지방관으로 삼척에 와서 가장 많은 흔적을 남긴 사람이다. 그는 1660년(현종 1) 9월 노론과의 권력투쟁에서 밀려 삼척부사로 내려간다. 이듬 해 1월 향약을 제정하고 리(里) 단위의 협의체인 이사(里社)를 만들었다. 그리고 두타산(頭陀山)과 동해를 유람한 후 동해송(東海頌)을 지었다. 1662년(현종 3)에는 삼척의 모든 것을 담은 척주지(陟州誌)를 완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해 가을 미수 허목은 파직되어 고향인 연천으로 돌아간다.

 

  허목은 삼척부사로 있으면서 앞에 언급한 현판 중 하나인 '제일계정(第一溪亭)'을 썼고 <죽서루기>를 찬했다. 그런데 '시냇가에 있는 첫째가는 정자'라는 뜻을 가진 이 제일계정이라는 글씨가 정말 좋다. 여러 군데서 미수의 글씨를 봤지만 이처럼 호쾌하면서도 유려한 글씨체를 본 적이 없다. 누가 이걸 60대 중반 노인의 글씨로 보겠는가! 문장이면 문장, 글씨면 글씨, 정치면 정치, 못하는 게 없는 양반이 미수 허목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곳에는 미수 허목의 편액 외에도 네 개의 편액이 더 있다. 숙종 36년(1710) 삼척부사였던 이성조(李聖肇)가 쓴 '죽서루'와 '관동제일루'라는 편액이다. 이 역시 행서체로 아주 잘 쓴 글씨이다. 이들 두 현판에 공통으로 보이는 루(樓)자를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있고, 이성조가 쓴 제(第)자와 허목이 쓴 제(第)자를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있다. 그런데 같은 사람이 쓴 루(樓)자는 꽤나 다른데 다른 사람이 쓴 제(第)자는 상당히 비슷함을 알 수 있다. 이게 바로 글씨의 묘미라고나 할까?

 

  그리고 필자를 알 수 없는 '죽서루' 현판이 남쪽 입구에 있는데 아주 단정하다. 이 정도는 한자 공부를 조금만 한 사람이라면 읽을 수 있다. 또 하나의 편액은 동쪽 한 가운데 있는 이성조의 '죽서루' 편액 옆 칸 안쪽에 있는데 글씨체가 상당히 특이하다. 해선유희지소(海仙遊戱之所)라고 적힌 이 편액은 헌종 3년(1837) 삼척부사였던 이규헌(李奎憲)이 쓴 것이다. 해선유희지소라면 바다의 신선이 노닐던 장소라는 뜻이다. 바다의 신선이 와서 놀 정도로 죽서루의 경치가 좋다는 얘기가 되겠다. 이 글씨체에 대해서는 좀 더 전문적인 식견이 필요할 것 같아 전문가에게 물어보아야겠다. 그러나 두터움과 얇음의 조화라는 측면에서 다른 작품에 비해 격이 조금은 떨어지는 것 같다.       

 

 

송강 정철이 노래한 죽서루

 

 

  죽서루를 나와 우리 일행은 용문바위를 살펴본다. 죽서루 남동쪽에 있는 바위로 용문이라고 음각한 글씨와 성혈흔적이 남아있다. 성혈이란 풍요와 다산을 상징하는 선사시대의 유산으로 고인돌 등에서 자주 볼 수 있다. 용문바위에는 문에 해당하는 구멍이 있는데 이것은 오십천의 용이 승천하면서 이 바위를 뚫고 지나가 생겨났다고 한다.

 

  죽서루 서북쪽으로는 1991년 2월에 세운 '송강 정철 가사의 터'라는 표지석이 서 있다. 우리나라 가사문학의 대가인 송강 정철이 그의 <관동별곡>에서 죽서루를 노래했기 때문에 이곳에 표지석이 서게 되었다. 8각형으로 된 비석에는 송강 정철의 생애와 문학에 관한 내용이 새겨져 있다고 하는데 비로 인해 제대로 살펴볼 수가 없었다.  관동별곡은 선조 13년(1580) 송강 정철이 강원도 관찰사가 되어 관동지방을 여행하며 쓴 가사이다.

 

  "진쥬관 셔루 오십쳔 나린 믈이/ 태백산 그림재랄 동해로 다마 가니/ 찰하리 한강의 목멱의 다히고져/ 왕뎡이 유한하고 풍경이 못 슬?니/ 유회도 하도 할샤 객수도 둘 듸 업다."

 

  자연풍경 묘사, 왕과 서울에 대한 그리움, 객지에서의 감회 등이 잘 나타나 있다. 이 글을 요즘 식으로 풀어쓰면 다음과 같다.
    "진주관(삼척) 죽서루 오십천 흘러내린 물이 태백산 그림자를 동해로 담아가니, 차라리 그 물줄기를 한강변 남산에 닿게 하고 싶구나. 왕명에 따른 여정은 유한하고 풍경은 볼수록 싫증나지 않으니, 그윽한 감회가 많기도 하고 나그네의 시름은 둘 데가 없구나."

 

 

*  오십천의 다리위에서 바라본 죽서루의 모습  *

 

 

<출처> 2008년 08월 02일 / 오마이뉴스(글 : 이상기 기자 / 사진 : 걷다보면 님의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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