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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강원도

철원, 철(鐵)의 삼각지의 대명사 -제2땅굴과 평화전망대

by 혜강(惠江) 2008. 6. 3.

 

철원, 철(鐵)의 삼각지의 대명사

 제2땅굴과 철원 평화전망대 



글·사진= 남상학

 

 

 

제2땅굴 입구


  고석정에서 철의삼각전적관을 둘러보고 점심식사를 마친 뒤 전적지 견학에 참가했다. 한탄강관광사업소에서 주관하는 안보견학은 견학 당일 한탄강 관광사업소 1층 접수처에서 신청서를 작성하여 접수시키면 된다.

  이곳 철원 지역은 ‘철의 삼각지’의 대명사처럼 이해될 만큼 그 상징적 의미가 크다. 철의 삼각지란 6.25동란 당시 중부전선의 중심부로서 그 지리적 중요성이 매우 큰 철원, 평강, 김화를 잇는 삼각축선을 말하는데, 당시 피아간의 전황으로 볼 때 이 지역의 확보 없이는 중부전선을 장악하기 어려웠으므로 6.25동란의 전 기간을 통하여 피아간 쟁탈전이 무섭게 전개되었던 곳이다.

  특히 철의 삼각지 일대는 아군이 공격하기에는 불리하고 적군이 방어하기에는 최적의 지형적 특성을 지니고 있어 천연적으로 어려운 여건을 갖추고 있었다. 철의 삼각지란 말이 생겨난 것은 6.25 당시 미8군의 사령관이던 제임스 A. 펜프리트(JAMES A. FANFLEET)대장이 "적이 전 전선의 생명선으로 사수하려는 아이언 트라이앵글(Iron Triangle:철의 삼각지)을 무너뜨려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이때부터 이런 호칭이 붙게 되었다.

 

 


  1시에 인솔 차량에 따라 고석정(전적관)을 출발하여 통제소를 거쳐 제2땅굴 - 철원평화전망대 - 월정리역 - 통제소까지의 견학에 돌입했다. 그 외에 노동당사. 백마고지전투전적비는 개별 견학하도록 되어 있다. 6.25동란 전 기간을 통하여 피아간의 쟁탈전이 전개되었던 그 현장, 지금도 팽팽한 긴장감을 느끼게 하는 곳. 이곳을 찾아가는 여정은 남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안보관광 참가’라는 입장스티카 차창 앞에 부착하고 학생들이 탄 버스 뒤를 따라 승용차는 고석정 주차장을 출발했다. 민가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들판은 모내기를 끝내고 곳곳에 마무리 손질을 하는 농부들만 간간이 보였다. 철원오대미로 질 좋은 쌀을 생산하는 이곳 들판은 철새도래지로도 유명한 곳이다. 드넓게 펼쳐진 논들을 바라보며 생각에 젖는 동안 차는 몇 개의 초소를 지나 북쪽으로 경사진 길을 오른다.그리 멀지 않은 산등성이에 철책선이 보인다. 늘 들어왔던 남방한계선이 눈앞에 나타나는 순간 ‘최전방에 왔구나’하는 생각이 들면서 곧 제2땅굴 주차장에 도착했다.

 

 

제2땅굴

 


  제2땅굴은 6사단이 책임지고 있는 GOP 바로 아래 있다. 제2땅굴의 입구는 제2땅굴전시관 옆길로 50m쯤 오르면 있다. 입구 옆에는 제2땅굴을 파다 순직한 8명의 아군 희생자를 추모하는 위령탑이 서있다. 당시 진행된 땅굴탐색 작전에서 북한군이 설치한 지뢰와 부비트랩에 의해 고귀한 8명의 장병이 희생되어 이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위령탑 앞에서 순직한 이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며 잠시 묵념을 한 뒤 머리 보호용 모자를 쓰고 땅굴로 들어섰다.

  제2땅굴은 서울 동북방 100k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금년으로 발견 33주년을 맞은 제2땅굴의 발굴은 지난 1973년 11월 20일 당시 6사단 장병이 경계 작전 수행 중 지하로부터 미상의 폭음을 감지하면서 시작되었다.

 

  계속 청음활동(聽音活動)을 강화하면서 당시 농업진흥공사가 지하수 개발로 도입한 시추장비를 투입하여 총 45개의 시추공을 뚫었고, 이중 7개가 적의 남침용 땅굴에 정확히 관통되어 현대건설과 우리 군의 끈질긴 굴착작업 끝에 1975년 3월 19일 북한의 기습남침용 땅굴의 전모가 드러났다. 초병의 철통같은 경계가 빛을 발했다는 점에 그 의의가 크다.

  땅굴 발견 당시 북한은 외부적으로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는 등 남북화해 분위기를 조성해 남한을 안심시키는 한편, 내부적으로는 무력 적화통일 여건을 조성하기 위한 땅굴을 굴설하는 이중적인 자세를 취해 전 국민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입으로는 평화를 부르짖으면서 한편으론 남침 야욕을 드러낸 북한의이중전략을 볼 수 있는 현장이다.

 

  제2땅굴은 지하 약 150m 지점에 견고한 화강암층을 뚫고, 총 연장길이 3.5km, 군사분계선 남쪽 1.1km까지 굴절한 높이 2m의 아치형 땅굴로써, 시간당 16,000여명의 무장병력과 야포 등의 중장비 침투가 가능하다니 놀랍기만 하다.  현재 발견된 4개의 땅굴 중에 규모가 가장 크다. 당시 이 땅굴이 발견되지 않았더라면 전략적 요충지인 철원평야 사수는 물론, 수도 서울의 방어마저도 결코 장담할 수 없었을 만큼 치명적인 타격이 됐을 거라는 것이 군사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높이 2m의 아치형 땅굴이지만 이동 중에 허리를 굽혀야만 하는 곳이 많다. 입구에서부터 얼마간은 우리 쪽에서 땅굴을 발견하기 위하여 지하로 파내려간 것으로 경사가 심하다. 경사가 끝나는 데서부터는 완만한 평지로 모두 암반을 뚫은 것이며, 땅굴을 파 들어가면서 암반에 다이나마이트를 설치한 잔유공 위치가 모두 북쪽에서 남쪽으로 향하고 있어 이는 북쪽에서 팠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는 충분한 근거가 된다.  500m를 그렇게 들어서니 허리와 고개가 아파올 정도다. 땅굴을 만져 보면 이 단단한 바위를 어떻게 뚫었을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게 된다. 관람 시간은 30분가량.

 
  북한은 또 산의 표피에서 수직 지하로 80m~150m인 굴을 파면서 발견의 위험성을 없애기 위해서 물의 흐름을 북쪽으로 돌렸다. 북쪽 산이 높고 남쪽이 낮으므로 순리대로 파 들어오면 땅굴에서 나오는 물이 남쪽으로 흐르게 되어 얼마간의 구간마다 높이를 조절하여 경사가 남쪽에서 북쪽으로 되도록 시공하는 등 용의주도함을 보였다.
그러나 이 얼마나 무모한 짓인가. 엄청난 시간, 엄청난 노동력, 엄청난 경비를 투입한 야심찬 공사(?)가 땅굴이 발견됨으로써 하루아침에 안보관광상품으로 전락하다니! 우리에게는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현재, 제2땅굴은 6사단과 철원군청의 관리 아래 하루 평균 500여명 이상이 찾는 안보 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전 국민의 경각심을 고취시키는 안보 관광의 핵심 구실을 담당하고 있다.

 

 

 

 

철원평화전망대에 오르다.


  제2땅굴 견학을 마치고 난 후 다음의 코스는 철원평화전망대. 철원평화전망대는 중부전선 비무장지대(DMZ:Demiliterized Zone)와 북한지역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로 2007년 착공 3년 만에 개관했다.


  철원군은 기존의 철의삼각전망대가 나무들이 우거지면서 제 기능을 잃게 되자 철원군 동송읍 중강리 588 일대에 궁예도성 터 등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위치에 평화전망대를 새로 지은 것이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내려서니 ‘철원평화전망대 모노레일카’라는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관광객들이 주차장에서 쉽게 전망대로 오를 수 있도록 설치한 편의시설이다. 모노레일을 이용하여 평화전망대에 도착했다.


  80여 명이 동시에 탑승할 수 있는 모노레일은 길이가 280여m밖에 되지 않는다. 최고의 시설을 갖추려고 한 의도는 짐작이 가지만 불과 5분도 걸리지 않는 그리 높지 않은 언덕에 모노레일까지 설치한 것은 이곳을 경비하는 군인들을 생각하면 좀 미안한 생각이 든다. 모노레일을 타고 올라가는 왼쪽에는 토교저수지가 바닷물처럼 아름답고, 청둥오리 떼가 무리지어 노닐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전망대 1층 전시실에는 민족의 아픔 6·25영상물, 상처의 땅 철원 전적물(철원 접경지역을 묘사한 지형단면도, 철모, 총 등)과 제2땅굴과 군 막사, 검문소를 재현한 전시물과 북한 바로알기 코너, DMZ사진 등이 갖춰져 있다.
또, 2층에는 전방 북한지역의 모형도와 300석 규모의 관람석이 있고 야외전망대가 설치되어 망원경으로 전방지역을 관찰할 수 있는 관망대를 갖추고 있다.

  전망대에 올라가 보니 시계(視界)가 그리 밝지는 않았지만 확 트인 철원평야가 눈앞에 펼쳐지고 평야 중간으로 군사분계선이 뚜렷했다. 그리고 비무장지대 내에는 철원에서 내금강에 이르는 경원선의 흔적과 후고구려 궁예의 태봉국 왕궁 터인 풍천원이 평야 중앙에 위치하고 있었다.


  군사분계선 뒤로 펼쳐진 비무장지대는 고요하다기보다는 적막감이 흐른다. 그리고 멀리 12시 방향에서 오른쪽으로는 서방산과 오성산이, 왼쪽으로는 전투가 극심했다는 낙타고지, 피의 500능선, 백마고지가 보이고 그 뒤로 고암산이 어렴풋하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 한국을 남북으로 갈라놓은 151마일(248km) 비무장지대 DMZ. 말은 비무장지대이지만 감시초소와 날카로운 철조망, 지뢰, 전차 장애물, 중화기들이 빈틈없이 들어서 있는 세계에서 가장 중무장 되어 있는 곳이다. 1953년 7월 한국전쟁 휴전이 된 후로 55년간 DMZ 양측에는 200만 군대가 밀집하여 언제라도 전쟁이 다시 시작될 수 있는 일촉즉발 상태에 놓여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DMZ는 세계적인 분쟁 대치지역이라는 명목으로 매년 수십만 명의 관광객들이 찾는 곳이 되었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가. 언젠가 서부전선에 갔을 때 DMZ를 이용한 특색 있는 관광 상품으로 파주시가 2000년부터 DMZ 내 철조망을 교체하면서 나온 녹슨 철조망을 이용하여 안보관광 상품을 액자로 만들어 판매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DMZ 철조망은 남과 북을 가로막았던 비무장지대의 철조망을 상품화한 것으로 한반도 지도를 배경으로 20cm 길이의 실물 철조망을 휴전선 위치에 가로질러 놓아 분단의 아픔을 나타낸 것이다.

  반만년 역사 중 가장 비참했던 동족상잔의 비극인 한국전쟁의 철조망 조각에 서려있는 가고 싶은 고향, 꿈속에서도 보고 싶은 내 가족을 지척에 두고도 이 철조망이 가로막혀 1천만 이산가족이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고 생각하니 한편으론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다. 액자에는 이렇게 써 있었다.

   "한국전쟁이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휴전되고,
   155마일 철조망이 쳐진지도 어느새 반세기가 지났습니다.
   전쟁과 대립, 분단의 상징인 이 녹슬은 철조망이 온 세계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걷혀질 그날을 기원합니다."

  분단의 벽을 허물고 사랑과 평화로 함께 살 수 있는 충만한 화해의 세계를 갈망한 박봉우(朴鳳宇)의 시 <나비와 철조망> 을 읊조려 본다. ‘나비’와 ‘철조망’은 대조의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나비'는 상처받은 우리 민족을 의미하고, ‘철조망'은 분단의 상황을 나타낸 것이다.

   지금 저기 보이는 시푸런 강과 또 산을 넘어야 진종일을 별일없이 보낸 것이 된다. 서녘 하늘은 장미 빛 무늬로 타는 큰 눈의 창을 열어...... 지친 날개를 바라보며 서로 가슴 타 는 그러한 거리에 숨이 흐르고.

   모진 바람이 분다. 그런 속에서 피비린내 나게 싸우는 나비 한 마리의 생채기. 첫 고향 의 꽃밭에 마지막까지 의지하려는 강렬한 바라움의 향기였다.

   앞으로도 저 강을 건너 산을 넘으려면 몇 <마일>은 더 날아야 한다. 이미 날개는 피에 젖을 대로 젖고 시린 바람이 자꾸 불어간다 목이 빠삭 말라버리고 숨결이 가쁜 여기는 아직도 싸늘한 적지.

   벽, 벽...... 처음으로 나비는 벽이 무엇인가를 알며 피로 적신 날개를 가지고도 날아야만 했다. 바람은 다시 분다 얼마쯤 날으면 我方(아방)의 따시하고 슬픈 철조망 속에 안길, 이런 마즈막 <꽃밭>을 그리며 숨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어슬픈 표시의 벽. 旗(기)여......

   - 박봉우(朴鳳宇)의 ‘나비와 철조망’ 전문

 

 고통과 한탄의 비장한 어조로 분단의 혹독한 아픔, 분단된 민족의 안타까운 운명을 노래하면서 괴로운 비행(飛行)을 하는 나비는 언젠가 찾아올 ‘꽃밭’(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그리고 있다.

 

 

 

 언제쯤 이 땅에 철조망이 걷히고 평화를 이야기 할 때가 올 것인가. 비무장지대에 노니는 사슴들처럼, 계절 따라 찾아드는 들판의 철새처럼 푸른 꿈을 안고 진정한 평화를 구가하는 날이 올 것인가 헤아려 본다.

  후삼국의 역사를 간직하고, 6·25전쟁 당시 최대의 격전지로 오늘의 분단 현실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 아울러 광활한 철원평야와 주위의 자연 환경을 만끽할 수 있는 아름다운 곳. 따라서 철원 평화전망대는 앞으로 새로운 관광지로, 남북통일을 위한 평화의 성지로 모든 국민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될 것이라 확신해 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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