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고령-대가야박물관
경북 고령, 1500년 전 대가야로의 시간여행
- 문화유적(대가야역사관, 왕릉전시관)과 지산동 고분답사 -
글·사진 남상학
가야연맹은 대가야(고령)·금관가야(김해)·아라가야(함안)·소가야(고성)·고령가야(함창)·성산가야(성주) 등 6가야로 이뤄졌다. 대가야는 후기 가야연맹을 주도한 강력한 세력이었다. 562년 신라에 흡수될 때까지 500년 동안 존속했다. 현재의 고령 땅이 그 중심지였다. 대가야박물관과 지산동 고분군(200여기) 등에서 대가야 유물·유적을 확인할 수 있다. 사적 제79호.
고령은 고대부족국가 6가야 중 대가야(大伽耶)가 융성했던 곳. 그러나 가야는 불행히도 고대국가로 발돋움하는 단계에서 멸망했다. 그래서 가야사를 세권의 책으로 펴낸 김태식 교수는 '미완의 문명 700년 가야사'(푸른역사)라 했다. 게다가 가야는 자기의 역사를 기록한 문헌을 후세에 남기지 않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가야에 관한 지식들은 모두 '삼국사기''삼국유사'에서 삼국에 딸린 조연으로 기록된 것이거나 중국에서 이민족의 풍속지로 쓴 '위지(魏志)''동이전(東夷傳)'에 나오는 것, 그리고 의문투성이인 '일본서기'의 단편적인 기사뿐이다. 그래서 가야의 이야기들은 대부분 타국과의 관계사 속에서만 논의될 뿐 가야 그 자체의 역사와 문화로 말해지는 것이 없다. 가야는 미지의 왕국인 것이다.
그러나 가야는 사자(死者)를 위한 죽음의 유물로 말하고 있다. 왕릉의 능선을 비롯한 가야의 고분과 고분에서 출토된 무수한 부장품들은 만만치 않던 가야의 문명을 내보이고 있다. 고령지역에서만 모두 세 개의 금동관이 출토됐고, 수많은 금귀고리. 금팔찌. 금반지 등이 발굴됐다. 철의 왕국답게 철제 갑옷. 마구(馬具). 농기구들이 원상의 모습으로 부장되기도 했다.
유물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32호분에서 출토된 금동관으로 공교롭게도 일본의 후꾸이현 니혼마쯔야마 고분에서 출토된 금동관이 32호분 금동관과 같은 계보를 가진 것으로 보여 당시 대가야와 일본과의 관계를 연구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그러나 가야의 저력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가야 토기들이다. 가야 토기는 신라 토기와는 완연히 다른 독자적인 미감을 갖고 있다. 목 긴 항아리. 굽다리접시. 그릇받침. 잔, 그리고 각종 상형토기들은 어떤 면에서 가야가 신라보다 기법적으로 우수하고 조형적으로 세련됐다는 생각도 들게 한다. 출토된 유물과 문헌을 보면 이 고분들은 대체로 5세기에서 6세기에 걸쳐 조성된 것이라고 한다.
대가야박물관(대가야역사관과 왕릉전시관) 둘러보기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듯이, 고령에 온 이상 고분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하여 대가야박물관부터 들러보자. 1993년 1월에 착공하여 2000년 9월에 개관한 대가야박물관은 가야문화에 대한 설명과 출토 유물들을 전시한 대가야역사관과 44호분을 본떠 만든 왕릉전시관과 우륵박물관으로 나뉜다. 대가야 왕릉이 모여 있는 주산(主山) 기슭에 자리잡은 대가야박물관은 대가야와 고령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종합적으로 전시한 대가야전문박물관이다.
대가야역사관은 대가야 박물관의 메인 건물이며, 부대건물 중 가장 크다. 내부에는 상설전시관과 기획전시관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상설전시관은 대가야 및 고령 지역의 역사를 한눈에 알 수 있도록 구석기시대부터 근대에 이르는 역사, 문화에 대한 설명과 유품을 전시해 놓았고, 기획전시실은 연간 1~2회 정도 특정 주제를 설정하여 기획전을 개최한다. 그 외에 어린이 체험학습실이 있어 대가야토기 퍼즐, 탁본 및 인쇄, 민속품 체험 등을 통해 여러가지 전통문화를 체험할 수 있도록 구성하였다.
대가야왕릉전시관은 국내에서 최초로 확인된 대규모 순장무덤인 지산동고분군 제 44호분의 내부를 원래의 모습대로 재현했으므로 44호분의 봉분을 본 따 외부를 돔 형식으로 둥글게 만들었다. 따라서 관람객들은 실물크기로 만든 모형 속에 직접 들어가, 무덤의 구조와 축조방식, 주인공과 순장자들의 매장모습, 껴묻거리의 종류와 성격 등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다.
내부는 주실(主室) 외에 모두 32개의 소형 순장무덤이 딸려 있다. 그리고 그 내부는 발굴 당시의 돌방구조를 그대로 재현하여, 주인공이 묻힌 으뜸돌방과 그에 딸린 창고 성격의 껴묻거리용 딸린돌방 두 기를 중심으로 하여, 부채살 모양으로 32기의 순장 돌덧널을 배치한 내부구조를 그대로 복원해 각 무덤 구덩이에는 발굴보고서를 토대로 하여 출토 유물과 남아 있는 인골 등을 복제하여 만들어 넣어두었다.
여기서 수습된 22개 인골을 분석한 결과 순장자는 40대 남자부터 10대 소녀까지 다양하다고 한다. 이것은 피장자의 권세가 얼마나 컸던가를 말해주는 것이지만, 한편으론 가야가 왜 일찍 멸망했는가를 시사하는 대목이 되기도 한다.
무려 32명의 생사람을 죽여 순장한 이 잔인한 무덤은 죽음과 실존의 문제를 높은 종교적 차원에서 풀어갈 정신문화가 없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고대국가에서 종교란 신앙의 한 형태이자 동시에 국가 통치의 이데올로기 역할을 했던 것인데 가야는 이렇게 샤먼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또 그 둘레의 관람로 벽체에는 대가야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게 하는 사인물을 전시하고, 관련 영상물을 편안히 앉아 관람할 수 있게 해 놓았다. 또 영상물에는 대가야의 역사와 지산동 44호분의 성격과 그 역사적의의 등에 대한 내용을 담아 이해를 돕게 했다.
벽을 따라 마련한 진열장은 지산동고분군 출토 유물 130여 점을 비롯하여, 대가야의 다른 고분들에서 나온 토기와, 무구, 말갖춤류, 관, 기타 장신구 등의 유물들을 전시함으로써, 세련된 대가야문화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해 두었다.
뿐만 아니라 입구에는 컴퓨터를 설치해 대가야의 역사와 순장, 44호 고분의 구조, 출토유물 등 관련정보를 검색해 볼 수 있게 했다. 한마디로 말해 왕릉전시관은 대가야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순장 풍습 등에 관해 보고, 느끼고, 체험할 수 있게 만든 새로운 개념의 박물관이자 종합 전시관이라 할 수 있다.
주산 산책로 따라 지산동(池山洞) 고분군 탐방
왕릉 전시관을 둘러보고도 채 가시지 않은 궁금증을 가지고 고분이 흩어져 있는 현장으로 발길을 옮겨본다. 실제 지산동 고분군은 대가야왕릉전시관 바로 옆 산길을 따라 10분쯤 올라가면 산등성이부터 산꼭대기까지 펼쳐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고령읍내 뒤쪽에 높이 310m의 주산(主山)이 솟아 있다. 대가야왕릉전시관에서 출발, 아름드리 솔숲을 지나 주산에 오르면 고령읍내와 낙동강 지류인 대가천 줄기가 한눈에 들어오고, 200여기의 대가야 왕족과 귀족 고분군을 만난다.
고분산책로는 완만하게 뻗어있어 주산 정상까지 힘들이지 않고 타박타박 오를 수 있다. 고령이 삼국시대에 대가야가 위치했던 지역이므로 이들 무덤들은 그 입지나 규모 면에서 볼 때 대가야 최고지배자들의 무덤으로 판단하기에 그리 어렵지 않다.
산 위(주산성)에 경주에서나 볼 수 있는 커다란 왕릉 같은 묘지가 수십 개씩 펼쳐져 있다. 이것은 마치 이집트 왕가의 계곡에서 보는 왕릉 무덤 집합지와 비슷하다. 이 지산동 고분군에서 발견하는 것은 바로 대가야 문화다. 이 고분군은 바로 대가야 문화의 한 부분이었던 순장풍습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적자료들인 것이다.
일없이 고분의 일련번호를 점호하듯 헤아리며 오르다가 순장묘 44호분에 다다르면 높이 6m, 지름 27m가 넘는 그 규모의 거대함에 다시 한 번 놀라게 된다. 44호분은 국내 최초로 발견된 순장무덤이다. 주석실과 부석실에서 금동관·금귀고리 등이 발견됐고, 32개의 순장관이 확인됐다고 한다.
주목할 만한 고분으로 44, 45호를 들 수 있는데 이 고분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내부 구조는 묘역 중앙에 주석실과 부장석실 2기의 대형 돌방을 만들고 주위에 소형의 돌덧널기를 배치한 다음 타원형 둘레돌로 둘러싼 다곽분이다, 순장자는 모두 36명 이상이고 부장품 대부분은 도굴되었다. 무덤의 자세한 모습은 대가야왕릉전시관에 모형으로 만들어져 있어 눈으로 보면 무덤의 구조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비탈길 한단을 더 오르면 지산동 고분군 중 가장 큰 47호분이 나오고 연이어 48호.49호.50호.51호 4개의 거대한 고분이 어깨선을 이어가며 산상으로 오를 듯한 기세로 뻗어 있다. 처음 아랫자락을 오를 때만 해도 겹쳐진 두개의 봉긋한 고분을 보면서 대지의 젖가슴 같다며 귀여운 감성을 발하던 사람도 48호에서 51호까지 장대하게 펼쳐지는 '왕릉의 능선' 앞에서는 가벼운 감상을 누그러뜨리고 망연한 표정으로 바뀐다.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고분군 산책로는 동쪽 낙동강 줄기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만날 수 있어 한결 상쾌하다. 중턱 쯤 나무 그늘 아래 놓인 벤치는 고령 읍내를 한눈에 굽어 볼 수 있는 전망 포인트 구실도 한다. 맨 위쪽 무덤 앞에서 남쪽 능선을 바라보면 부드럽게 솟은 봉분들의 행렬이 색다른 풍경화를 펼쳐 보인다. 박물관에서 주산 정상까지 30여분이면 오를 수 있다.
정상에 서면 왕릉의 능선 오른쪽으로는 고령 읍내가 한눈에 다가오고 왼쪽으로는 야로면의 산세가 겹겹이 펼쳐지니 그 산과 들, 그리고 고분이 어우러지는 모습이란 어떤 조경이 이처럼 장대할 것이며 어떤 환경미술이 이렇게 감동적이랴 싶어진다. 왕릉의 능선에 서면 가야는 정녕 위대해 보인다.
강변길 따라 바위그림(암각화) 탐방
마을길로 들어서면 마을 들머리나 끝 바위벽에서 수천 년 풍상을 버텨온 선사시대인들의 삶의 흔적을 만난다. 대부분 고령읍에서 가까운 곳에 있어 한나절이면 서너 곳을 둘러볼 수 있다.
암각화란 바위에 새긴 그림을 이른다. 단단한 물체를 이용해 쪼아 내거나 갈아내고, 선을 그어 만든 그림으로 주로 신석기시대부터 청동기시대에 걸쳐 만들어졌다. 우리나라에선 한반도 동남지역 내륙 강변이나 해안에서 많이 발견된다. 고령엔 양전동암각화(보물 제605호·고령읍 장기리 알터마을)와 쌍림면의 안화리 암각화가 있고, 쌍림면 산당리·하거리, 운수면 화암리 등에선 널찍한 바위에 무수히 파인 크고 작은 구멍들을 찾아볼 수 있다.
양전동 암각화는 알터마을 산 밑 무너져가는 바위절벽 끝자락에 새긴 그림과 무늬들이다. 가로 6m, 세로 3m 가량의 바위벽에 20여개의 사람 얼굴 형상과 네 개의 동심원이 비교적 선명하게 남아 있다.
사각형 위와 옆으로 머리카락·수염을 표현한 듯한 선들이 그어져 있고, 사각형 안엔 구획선과 작은 구멍들이 파여 있다. 동심원은 동그라미 안에 작은 동그라미를 그리고 가운데 점을 찍었다. 태양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학자들은 이곳이 청동기시대(BC 3~1세기)에 풍요·다산 기원 의식을 행하던 장소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바위 위쪽에선 공룡발자국처럼 보이는, 움푹 꺼진 큼직한 자국들의 행렬도 관찰된다.
대가야의 유적을 둘러보느라 지친 발을 끌고 점심을 먹으러 갔다. 인터넷에서 고른 집이 고령읍 지산리에 있는 현지인 추천 맛집 미주식당( 054-955-6235 )이다. 갈치조림, 갈치탕, 매콤한 낙지갈비찜 등이 있으나 청국장 쌈밥을 먹으라고 권한다. 청국장을 것들인 쌈밥은 시골맛 그대로였다. 포만감을 안고 우륵박물관으로 향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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