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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最古) 목조건물’ 안동의 봉정사 극락전

by 혜강(惠江) 2008. 2. 20.

 

안동 봉정사

‘최고(最古) 목조건물’  안동의 봉정사 극락전

 

안동 = 글·사진 문화일보 박경일기자

 

 

 

▲ 누각이자 중문 역할을 하는 봉정사 만세루 아래를 지나 고개를 숙이고 계단을 올랐다가 문득 시선을 들면 만나는 풍경. 순간, 머리 위쪽의 시야가 확 트이는 상승감을 느끼면서 푸른 하늘과 고색창연한 대웅전이 눈앞으로 다가오는 경험은 독특하다. 한눈에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대웅전은 지난 2000년 중수과정에서 고려시대 후불벽화가 발견돼, 봉정사가 품고 있는 한국 최고의 목조건축물인 극락전에 버금가는 나이를 가진 것으로 확인됐다.

 

 

  세 개의 페트병에 담긴 시너와 일회용 노래방 라이터 한 개. 숭례문을 화마(火魔)가 씹다 뱉어버린 듯 처참한 몰골로 바꾸어 놓는 데는 이것으로 충분했습니다. 참 허망하게도 말입니다. 너무 일상에 가까이 있어서일까요. 평소 별 생각 없이 지나치던 숭례문을 잃고 보니, 이렇듯 안타깝습니다. 그것이 제자리에 우뚝 섰을 때는 눈길 몇 번 주지 않았음에도 말입니다. 생전에 부모님을 데면데면하게 대하다가, 돌아가신 뒤에야 애통해하는 심정이 꼭 이럴까요. 그렇다면 어디 그것이 숭례문뿐이겠습니까.

  문화재 관리 전반의 문제점이 제기되고, 복원은 어떻게 해야하네, 성금을 거두네 마네…. 이렇게 몇날을 보내다가 문득 이 땅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 남아있다는 곳, 봉정사를 떠올렸습니다. 오래되어 잘 묵은 세월의 향내를 맡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경북 안동시 서후면 천등산 자락의 봉정사를 찾아간 길이었습니다.

  대개 오래된 절집 건물의 묵은 세월은 보수기록을 담은 중수기나 묵서(기둥 따위에 적어넣은 글)로 가늠하곤 합니다. 봉정사의 극락전이 현존하는 가장 오랜 목조건축물으로 알려진 것은 1972년의 일입니다. 보수를 위해 뜯은 종도리 밑에서 1368년에 중수했다는 묵서를 발견한 것이지요. 이로써 봉정사 극락전은 1376년 중창기록을 가진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에 앞서 가장 오랜 목조건축물로 이름을 올리게 됐답니다.

  절집은 새로 짓고 100∼150년이 지난 뒤에 수리를 하는 것이 보통이니, 봉정사 극락전은 지금으로부터 800년의 세월을 헤아리는 셈입니다. 800년전쯤 누군가 치목(治木)을 넣었고, 이후 정성을 다해 고쳐 짓고는 먹을 갈아 붓으로 쓴 기록이, 햇살 한 자락에 환하게 열리는 문이 돼서 건물의 기원을 드러냈던 것입니다.

 

 



  하지만 봉정사 극락전은 한눈에도 초라해보였습니다. 기둥을 붉은색으로, 벽채를 노란색으로 단장해서 도무지 옛 기품이 살아나지 않습니다. 게다가 최근에서야 미국산 리기다소나무와 알래스카산 가문비나무로 고쳐 세운 기둥을, 우리 소나무로 바꿔 넣었다는군요. 숭례문을 화마에 내준 것에 비할 수는 없겠지만, 극락전 앞에서 안쓰러운 마음이야 어쩔 수 없었습니다.

  사실 봉정사에서 극락전보다 더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대웅전의 기품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누각이자 중문 역할을 하는 만세루 아래의 둥근 문을 들어서 만나는 대웅전은 한눈에도 감탄스러워 보였습니다. 처마와 기둥 사이에 이리저리 짜 넣은 공포의 아름다움도 오래 발길을 붙잡았습니다.


  봉정사에서 돌계단을 올라 언덕 위에 지어진 암자인 영산암도 좀처럼 발길을 돌리지 못하게 하는 참 이상한 곳이었습니다. 비뚤어지고 질서가 왜곡된 듯 보이면서도 층층이 나눠진 마당과 교묘한 배치가 발길을 붙잡았습니다.

  화재로 붕괴된 숭례문 일대에 아픔을 함께 하려는 사람들이 모이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그렇다면 봄이 오는 길목에서 안동으로의 여행은 어떻습니까. 제주나 경주가 그렇듯 안동도 단 한 번의 여정으로 ‘다 보았다’고 말할 수 없는 곳입니다. 그렇다면 봉정사가 있는 서쪽부터 차근차근히 돌아보면 어떨까요. 봉정사와 제비원 석불, 그리고 하회마을을 돌아 병산서원까지…. ‘오랜 것들의 소중함’을 느끼는 데는 이만 한 여정도 없지 싶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문화유산을 지켜내는 것은 화재경보기나 사설경비업체가 아닌, 우리 모두의 관심과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미국산 리기다소나무와 알래스카산 가문비나무가, 고려시대에 지어진 최고(最古)의 목조건물을 받치고 섰던 모습을 떠올리면서 드는 생각이었습니다.

 

 

 

봉정사 극락전이 '最古 목조건축물' 아시나요?

부석사 무량수전보다 8년 앞서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과 안동 봉정사 극락전, 어느 것이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일까. 사실 부석사 무량수전이나 봉정사 극락전이 언제 창건됐는지는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다. 두 건물 모두 정확한 나이를 모른다는 것이다. 단지 두 건축물의 해체 보수과정에서 발견된 묵서명으로 건립연대를 추정할 뿐이다.

  과거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은 영주 부석사의 무량수전이었다. 1916년 무량수전의 해체, 수리 때 발견된 묵서명에 ‘1376년(고려 우왕 2년)에 중창되었다’고 적힌 글이 그 근거다. 대략 절집의 중창이나 중수는 창건한 지 100~150년이 지난 뒤에 하기 마련.

  따라서 무량수전의 지어진 시기는 적어도 13세기초까지 올려 추정됐다. 그러나 1972년 봉정사 극락전을 해체, 수리하는 과정에서 지붕 서까래를 건 도리에서 ‘1368년에 중수했다’는 기록이 발견됐다.

  무량수전의 중수시기보다 8년이 앞섰다는 것이다. 이로써 봉정사 극락전이 최고(最古)의 목조건축물로 학계의 인정을 받게 됐다.

 

 

목조건축의 백미 안동

 

 

봉정사 요사체 뒤쪽 사립문을 나서 암자 영선암으로 오르는 돌계단 길. 이 계단을 올라 영선암 안으로 들어서면 공간의 절묘한 배치에 감탄을 터뜨리게 된다.

 

 

  봉정사의 한 스님은 전화 수화기 저쪽에서 “절집으로 ‘걸어들어오는 사람’에게만 특별히 주는 ‘선물’이 있다”고 했다. 그리곤 “걸어서 그 선물을 받으면서 오시라”고 했다. 과연 그랬다. 매표소 너머 고요한 소나무숲을 지나면서 바람소리와 새소리가 줄곧 선물처럼 따라왔다. 이윽고 만나는 고색창연한 일주문. 일주문 곁에는 작은 폭포를 거느린 운치있는 정자 명옥대가 있다. 원래 이름은 ‘낙수대’였다는데, 봉정사에 머물며 학문을 닦던 퇴계 이황 선생이 이곳에서 듣는 물소리가 ‘옥을 굴리듯 아름답다’ 해서 명옥대(鳴玉臺)로 고쳐 불렀단다. 겨울이라 수량이 줄어든 데다, 얼음이 버썩버썩 얼어있어 아쉽게도 퇴계선생이 경탄했다던 물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일주문을 지나면 참나무숲이다. 잎을 떨군 참나무 숲의 형상이 잉크로 그려낸 펜화와도 같다. 참나무 숲길에 들어 겨울 찬공기를 깊이 빨아들이고, 몇걸음 걸어 고개를 들면 곧 만세루다. 위에서 보자면 사방으로 툭 터진 누각이면서, 아래서 보면 중문 역할을 하는 만세루. 둥글게 궁글려진 문을 가진 만세루로 아래로 어둑어둑한 공간으로 들어섰다. 돌계단을 몇걸음 올라섰을 때 고개를 들면 겨울햇살 가득한 마당과 고색창연한 대웅전이 눈앞으로 확 다가선다. 이것이 바로 봉정사의 건축이 의도해놓은 ‘상승감’이다.

 이렇게 이어지는 길은 스님의 말대로 ‘선물’과도 같다. 하지만 봉정사로 드는 길은 길게 잡아 걷는다 해도 10분이면 끝이 난다. 아쉽다. 그나마 차를 타고 휙 지나치면 보고 느낄 수 없는 것들이다. 사실 이 겨울의 끝자락에 호젓한 산사로 찾아드는 것은 조바심을 내려놓고 여유를 갖고자 할진대, 이 길을 그저 차로 지나친다면 그건 산사를 가는 뜻을 미처 모르는 탓이 아닐까. 800년이란 시간을 건너온 극락전을 만나러 가는 길에 무엇이 그리 급해 서두는 것일까.

 신라 문무왕 12년에 의상의 제자 능인이 종이로 접어날린 봉황이 머문 자리에 산문을 열어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곳. 지금이야 한낱 의성 고운사의 말사지만, 봉정사가 가진 문화재는 만만치 않다. 국보 하나(극락전)에 보물이 셋(대웅전, 화엄강당, 고금당)이다. 그것도 부도나 탑이 아닌, 모두 목조건축물이다. 거슬러 따지고 보자면, 봉정사는 조선초기에 팔만대장경을 보유하고, 500여결(3만여㎡)의 논밭을 지녔으며 전체 건물이 75칸이나 되었던 대찰 중의 대찰이었다.

 극락전은 대웅전의 서쪽에 자리잡고 있었다. 규모가 크지도 날렵하지도 않은 이 전각이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다. 삼면을 벽채로 둘러친 극락전의 문 안쪽은 온통 어둠이다. 불상 앞의 작은 촛불만이 파르르 떨고 있다. 온기 하나 없는 마루바닥에 발끝이 시릴 법도 하건만 불상앞에 선 스님의 독경소리는 끝이 없다.

 극락전의 자태는 부석사 무량수전의 기품에 비할 바가 못되지만 소박한 풍모에 긴 세월이 깃들어있을 터. 하지만 근래 보수과정에서 붉게 새로 칠해진 기둥이며 가볍게 느껴지는 노란색 벽채가 아쉽기 짝이 없다. 게다가 최근에 금강송으로 바꿔넣긴 했지만, 한때 미국산 리기다 소나무와 알래스카산 가문비나무로 짠 민흘림기둥이 버티고 섰었다.

 그런 연유 때문만은 아니겠으나, 봉정사에서는 극락전보다는 오히려 대웅전의 위용에 더 눈길이 간다. 수백년의 비바람에 깊이 팬 기둥 나뭇결은 쓰다듬는 것만으로도 ‘세월의 깊이’를 느끼게 해준다. 그저 길손일 뿐인 여행자에게 절대 시간이 무슨 의미가 있으랴. 봉정사의 극락전이나, 부석사의 무량수전, 수덕사의 대웅전, 혹은 불타버린 숭례문 앞에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절대시간의 양이 아닌, ‘저절로 다가가는 마음’이 아닐까.

 봉정사에서 불법을 본다면, 절집에 딸린 암자 영선암에서는 옛집의 빼어난 아름다움을 만날 수 있다. 요사체 뒤편 김장독이 묻혀있는 소담스러운 공간을 지나, 사립문을 나서 느티나무 고목 사이로 난 돌계단을 오르면 바로 영선암(사진)이다. 건축학자들이 건물과 조경의 절묘한 배치에 경탄을 금치 못한다는 곳이다.

 영선암의 문이 되는 우화루의 누마루 아래로 들어서면 ‘ㄷ자 형’의 공간이 나온다. 마당을 가운데 두고 사방이 건물로 막혀있는 이런 공간은 자칫 답답한 느낌이 들기 쉽다. 더구나 건물들도 초라한 데다 슬쩍슬쩍 비틀어 앉아 있어서 통일성도 없고 비례도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이 공간 안에 들면 시선은 편안하고 또 느긋해진다. 아마도 높이에 따라 공간을 아랫마당과 중간마당, 윗마당으로 분할해놓은 때문이지 싶다.

 우화각 누마루에 올라 난간에 기대서 내려다보니, 신기한 것이 영선암을 들어선 이들의 동선이 한결같다는 것이다. 열에 아홉은 먼저 대각선 쪽의 삼성각의 윗마당에 올랐다가 정면의 응진전으로, 그리고 중간마당으로 내려서 승방의 툇마루로 이동한다. 아마도 공간의 분할이 시선과 발길을 순서대로 이끄는 듯하다.

 안동 땅에서 이렇듯 정교하게 공간을 구획해내는 건축물을 꼽자면 병산서원을 들 수 있겠다. 영선암이 높이와 시선에 따라 ‘내부공간’을 분할해낸다면, 병산서원은 구획과 정돈을 통해 아름다운 자연을 마당 안으로 고스란히 끌어들인다. 병산서원을 찾은 이들은 저마다 만대루에 올라 낙동강을 바라보며 정취에 젖지만, 사실 더 아름다운 것은 안쪽의 서원 툇마루에서 만대루와 낙동강을 함께 내다보는 풍경이다. 만대루의 지붕과 기둥들로 분할된 낙동강의 풍경이 마치 7폭의 병풍을 펼친 듯 눈앞으로 밀려드는 느낌은, 직접 목격하지 않고서는 설명할 길이 없다. 여기다가 이른 봄 병산서원 마당의 두 그루 아름드리 매화나무에 꽃이 틔울 때 그 감동은 더하다. 매서운 추위에도 이제 막 매화나무에 단단한 꽃눈이 매달리기 시작했다.

 

 

 

 

 

  병산서원 인근의 안동의 하회마을은 밀려드는 관광객들과 원색의 민박과 식당 간판, 그리고 조악한 토산품 등으로 옛맛을 잃어가고 있다는 비난을 받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사람들로 북적이지 않고, 장사치의 좌판이 거두어진 이즈음의 하회는 연중 가장 고즈넉하다. 늦은 겨울날 흙담길을 따라 조용하게 산책을 하면서 옛맛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다. 같은 값이라면 겨울 저물녘 하회를 휘돌아나가는 낙동강이 노을에 물들고, 빗긴 햇살이 한옥의 담벽을 노랗게 비출 때를 겨누어 가는 게 그 중 낫다.

 사실 안동이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로 일컬어지기 시작한 것은 퇴계와 그가 배출한 인재들에 의해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자리잡은 성리학적 유교문화가 위세를 떨치던 조선중기 이후다. 안동에서 남아있는 고려시대의 자취를 들춰보자면 고려개국공신을 모신 안동시내 한복판의 태사묘며 봉정사의 극락전과 대웅전, 그리고 몇개의 불탑 정도다. 그중 안동 사람들과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이 바로 ‘제비원석불’(사진)이다. 제비원석불은 오랜 세월을 안동사람들의 삶과 함께 해왔다.

 5번 국도 길가에 자연거석을 몸체로 삼아 정교하게 깎아낸 불상의 머리가 올려있는 이 석불의 공식명칭은 ‘이천동 석불’이다. 하지만 안동사람들에게 이 석불은 ‘제비원석불’이다. 그렇다면 ‘제비’란 이름은 어떻게 붙었을까, 성스러운 불상에 날아다니는 ‘제비’란 이름을 붙일 리 만무하다고 보면, ‘제비’란 이름은 아마도 미륵불의 본질인 ‘자비’가 변해서 된 말이 아닐까.

 제비원석불은 56억7000만년이 지난 뒤 천계에서 이땅에 와서 현실의 인간을 구원한다는 미륵의 뜻을 자연거석에 머리를 올린 불상의 모습으로 상징화하고 있다. 중생에게 다가가는 부처. 그래서 이 석불은 깊은 산중에서 수행자를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사는 곳에 가까이 다가서 있다. 지금도 이 석불은 안동과 영주를 잇는 5번 국도의 내왕이 빈번한 길가에 우뚝 서있다. 그 길의 제비원석불을 찾아간 날, 법복을 입은 한 신도가 마음을 다해 합장배례로 간절한 기원을 올리고 있었다.

  봉정사로, 병산서원으로, 하회마을에서 다시 제비원석불로…. 이렇게 안동에서 고려의 자취를 ?杵?서쪽을 도는 여정은 하루해가 짧다. 국가·도지정 문화재만 281개로 경주(309개)에 버금갈 정도인 안동은 경주와 마찬가지로 한번에 돌아보기에는 버겁다. 그렇다면 고려의 자취가 남아있는 안동의 서쪽, 도산서원이며 퇴계종택이 있는 동북쪽, 임하호를 끼고 수애당과 지례예술촌이 들어선 동남쪽으로 쪼개서 나누어 돌아보는 것은 어떨까. 그렇다면 안동 서쪽을 도는 여정은 고즈넉하고 한가로운 지금이 가장 좋을 때다.

 

 

 

 

봉정사 가는 길

 

영동·중앙고속道 → 서안동 나들목 이용

 

 

■ 봉정사 가는 길 = 수도권에서 가자면 영동고속도로를 타고가다 만종분기점에서 중앙고속도로로 갈아타고 서안동 나들목에서 나와야 한다. 34번 국도를 타고 안동시내로 향하다 송야교 부근에서 924번 지방도로 갈아타고 서후면사무소를 지나 봉정사 삼거리에서 이정표를 보고 좌회전해 들어가면 된다. 봉정사에서 나와 저전에서 5번 국도로 갈아타고 안동시내로 가다보면 길가에 선 제비원석불을 볼 수 있다. 석불 주변은 주차장과 편의시설 공사가 한창이다. 하회마을과 병산서원 쪽으로 가려면 서안동나들목에서 916번 지방도를 따라 풍천면사무소 쪽으로 나와야 한다. 지방도에 이정표가 잘 돼있어 쉽게 찾아갈 수 있다.

 

 

병산서원 민박집서 헛제삿밥 한그릇

 

 

헛제삿밥

 

 

묵을 곳 · 먹을 것

 

 

■ 어디서 묵고 무엇을 맛볼까 = 안동의 서쪽을 목적지로 삼았다면 하회마을에 즐비한 민박집도 좋지만, 그보다 병산서원 부근의 민박집이 더 조용하고 고즈넉하다. 전통 고가의 맛을 느끼려면 하회마을에서, 병산서원의 정취를 만끽하자면 서원근처 병산서원 부근의 민박집에 묵는 것이 더 낫다. 병산서원 근처에는 강변민박( 054-853-2566 )이나 식당과 민박을 겸한 하회식당( 054-85...), 병산민속식당( 05...) 등이 있다. 


안동에서는 한때 서울까지 붐이 불기도 했던 ‘안동찜닭’의 본토 맛을 느껴보자. 시외버스터미널 부근의 목성교의 구시장 안에 중앙통닭( 054-855-7272 ) 등 닭찜집들이 몰려있다. 달착지근한 간장으로 조려낸 찜닭과 쫄깃한 당면 맛이 일품이다. 1만8000~2만원(3~4인분). 제사에 오르는 음식을 내오는 헛제삿밥은 안동댐 월영교 부근의 ‘까치구멍집’( 054-821-1056 )이 가장 유명하다.

 

 

<출처> 2008-02-20 / 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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