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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인천. 경기

염하강변에 우뚝 선 강화 연미정(燕尾亭)

by 혜강(惠江) 2008. 6. 14.

강화도 연미정

역사의  파고(波高) 높은 염하강변에 우뚝 선 정자

- 정묘호란시 청나라 사신과 강화조약을 맺은 장소 -

 

 

·사진 남상학

 

 

 

출처 : 강화 문화광광 홈피 - 보수가 끝난 최근 사진



   산과 들에는 푸르름이 짙어가고 있다. 신록의 아름다움이 지나고 녹음이 짙어지고 있다. 도심에서 보지 못하는 아름다운 풍광을 보고 싶은 마음에 차를 몰았다. 김포 대명포구에서 지금 한철인 병어와 밴댕이로 점심을 하고 초지대교를 건넜다.

  어디로 방향을 잡든지 강화도는 항상 내게 즐거움을 준다. 섬에서 자란 내게는 썰물이 되어 드러난 갯벌도 좋거니와 만조 때 해안 가까이 찰랑거리는 물결도 좋다. 또 해안 곳곳에 축성한 진과 돈대가 있어 그곳에 올라 멀리 바다를 조망하는 것도 괜찮다. 그 동안 강화를 드나들던 초기에는 강화대교나 초지대교를 건너서 남쪽으로 전등사나 마니산 혹은 동막 해변을 가거나 서쪽으로는 외포리를 거쳐 석모도를 즐겨 찾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내가 강화를 즐겨 찾는 이유는 다른 데 있다. 강화도는 한반도 역사의 축소판이라는 생각 때문에서였다. 한반도 최고(最古)의 문명이 시작되었을 뿐만 아니라 대륙의 사상이 들어오는 관문의 역할을 하였으며, 한반도의 중심자리에 위치하면서 외적과 맞서 싸운 역사의 현장이었기 때문이다.

 

 



  알려진 대로 강화도의 역사는 민족의 시원인 단군시대부터 시작된다. 강화도에 있는 마니산은 단군이 직접 하늘에 천제를 봉행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우리 민족이 위험에 처할 시기마다 최후의 보루 역할을 하였다. 고려 말 대몽항쟁의 구심점 역할을 하였으며 삼별초 항쟁의 애국신화가 시작된 곳이다. 또한 불심의 힘으로 세계 최강 몽고를 물리치려고 팔만대장경을 만들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임진왜란 때에는 왜란 방어의 전초기지였으며 근세 병인양요, 신미양요 때에도 외세 방어의 마지막 보루였다. 

  강화도는 섬의 외곽이 5군데의 진(鎭)과 7군데의 보(堡), 그리고 54군데의 돈대(墩臺)로 싸여 있다. 섬의 외곽 해안선을 따라 돌출된 곳에는 어김없이 위에서 말한 세 가지의 방어시설 중 하나가 만들어져 있고 그 규모에 따라 가장 작은 것이 돈대, 다음이 보, 그리고 가장 큰 규모가 진이다. 널리 알려진 진으로는 초지진, 보로는 광성보, 돈대로는 갑곶돈대, 분오리돈대와 같은 것들이 있다. 그리 큰 땅덩이도 아닌데 세상 그 어디에 이런 섬이 또 있을까?

 

 


  어디 그뿐인가. 강화도는 한국현대사의 비극에 아직도 그대로 노출되어 있지 않은가. 강화 북단은 1950년 치열했던 한국전쟁의 부산물이 남겨 놓은 철책선이 지금도 섬의 북방을 두르고 있다. 동쪽으로 월곶리 해안으로부터 서쪽 인진나루까지 해안선을 따라 남방한계선이기 때문이다. 남북간 화해 국면이 돌 때에도 여전히 긴장이 서려 있다. 팽팽한 긴장은 섬 북단 군사시설 보호구역의 해안 철책길에서 최고조에 달한다. 

   70년대 초 나는 강화 북단 마을 양사면 철산리에 들어가 본 적이 있다. 군대를 제대 후 처음 직장인 모 고등학교에서 같이 근무했던 대학 선배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그 선배의 장지(葬地)가 바로 철산리였다. 그의 선산이었던 철산리는 강화 북단 민통선 이북이어서 장의차도 검문을 받아야 했다. 그 날 난 친구의 시신을 하관하고 돌아나올 때까지 빤히 내다보이는 황해도 개풍군으로부터 들려오는 확성기 소리를 싫어도 들어야 했다. 고문이 따로 없었다.

   강화도  최북단 마을 철산리에서 북쪽 개풍군까지는 지척이다. 가까운 곳은 물폭이 불과 1.7km이다. 몇 년 전 빈 페트병 다섯 개를 묶고 헤엄쳐 넘어온 용감무쌍한 ‘귀순 동포’도 있었을 정도다. 물길을 잘 만났기에 무사했지, 잘못 탔다면 강화도를 코앞에 두고 백령도쯤 떠내려갔을 것이다. 확성기 소리의 출력이 어찌나 강하던지 고막이 멍멍했던 기억이 남아 있다. 

   과거의 기억을 더듬으며 오늘은 초지대교를 건너 강화도 동쪽 해안도로를 따라 연미정(燕尾亭)을 찾아보고 싶었다. 연미정은 강화팔경 중 하나로, 그 동안 민통선 지역으로 55년이나 넘게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되다가 얼마 전에서야 시민들에게 완전 개방되었기 때문이다.  

  네비게이션 ‘위치찾기’에서 ‘명칭찾기’를 눌러 보아도 강화 연미정은 찾을 길이 없다. 할 수 없이 ‘주소찾기’에서 ‘강화군 강화읍 월곶리’를 치고 나서야 달릴 수 있었다. 초지진, 덕진진, 광성보, 강화역사관 앞을 지나 고려인삼센터 앞을 거쳐 차는 북으로 계속 진행했다.  달리는 오른쪽 도로변으로는 철조망이 몇 겹으로 쳐져 있고, 그 너머로 흐르는 염하는 마침 밀물이어서 강화도가 겪은 역사의 소용돌이만큼이나 물살이 거칠게 흘러내렸다. 

 

 

 


  연미정은 북한 땅이 마주 바라보이는 한강 하류 작은 언덕(강화군 강화읍 월곶리) 마포나루로 가는 길목에 자리 잡고 있다. 따라서 연미정 일대는 밀물을 타고 한강으로 올라가는 배들이 머물던 장소로 사용되었다. 

  이렇다 할 표지판이 없어 길가 밭에서 일을 하는 할머니에게 물었더니 손으로 언덕을 가리킨다. 돌로 쌓은 성벽 아래쪽에 안내판을 보고서야 이곳이 연미정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성벽은 최근에 들어와서 정비된 듯 했고, 성벽에 연결된 홍예문을 들어서자 오래된 느티나무 곁에 정자 하나가 기품 있게 서 있다. 

 

 

 


  이곳은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하여 한 줄기는 서해로, 또 한 줄기는 강화해협(염하강)으로 흘러 그 모양이 마치 제비꼬리 같다고도 하고, 또 어떤 이는 돈대 모양이 마치 제비꼬리 같다고 하여 그 이름을 ‘연미(燕尾)’라 하였다 한다. 
연미정은 높은 석주 위에 세운 팔작집으로 영조 20년(1744) 중건, 고종 28년(1891) 중수 등 수차에 걸쳐 보수하였다.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의 정자 주변에는 수백 년 된 커다란 정자나무가 운치를 더해주고 있다. 연미정 위에 오르니 동쪽으로 김포시 월곶면이, 북쪽으로 황해도 개풍군이 가까이 건너다보인다. 연미정은 저녁에 뜨는 달의 모습이 특히 아름답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연미정 달맞이가 '강화 팔경'의 하나가 되었다. 

    언제 처음 지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고려 고종이 강화로 천도한 후 1244년에 시랑(侍郞) 이종주(李宗胄)에게 명하여 구재 생도(九齋生徒)를 이곳에 모아놓고 여름 공부인 하과(夏課)를 시켜 55명을 가려 뽑았다고 한다.   이후 조선 중종 5년 (1510) 삼포왜란 때 방어사가 되어 왜적을 무찌르고, 중종7년 (1512) 순변사가 되어 반란을 진압한 공로로  장무공 황형(黃衡 1459-1520)에게  연미정 경내에 전답과 산지를 하사하였다고 한다.


  연미정은 조선시대에는 조선사신을 영접하던 곳으로 국정을 논의하고 협약을 체결하던 역사적인 사적지이다. 실제로 조선 인조 5년(1627) 정묘호란시 이곳에서 청국의 부장(副將)인 유해(劉海)와 강화조약(講和條約)을 맺은 장소로 알려져 있다. 인천시는 지정문화재 제24호로 관리하고 있다.  

 

 

 


  정자 옆에 수령 500년 된 느티나무 두 그루가 운치를 더 한다. 느티나무 가지가 성벽과 어울려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다. 정자는 학자들이 학문을 논하고 후학을 가르치는 용도로 쓰였을 법한데 성벽은 적군을 감시하며 쳐들어오는 적군을 격퇴시키는 용도로 축성된 것이 분명하다. 실제로 연미정 바로 왼쪽에 월곶(月串)돈대가 있다. 

  지금도 연미정 성벽 바로 아래로는 강을 에워싼 철조망이 겹겹으로 쳐져 있고, 해안 초소가 지척지간이어서 낮은 소리로도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전방에 보이는 곳이 어디냐?”고 물었더니 “오른쪽으로는 우리 측 김포군 월골면 문수산 자락이고, 정면으로는 북한의 개풍군이며, 물 위에 떠 있는 섬이 유도(留島)”라고 했다. 대답을 끝내면서 병사는  “사진 찍으시면 안 됩니다.”라고 덧붙였다. 

   이 말에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지는 느낌이었다. 때때로 서로 난감하고 답답한 일을 만나면 그쯤에서 냉큼 접는 게 상책이지만, 그렇다고 낙심천만하여 천근만근 무거운 걸음으로 돌아설 필요도 없다.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의미 있는 곳을 찾아가 때로는 들추어내고, 울고 싶을 때는 드러내어 같이 울고, 문제가 있을 땐 어떻게든 그것을 풀어나가려는 사람에겐 세상 어디든 길은 또 있기 마련이니….

 

 



  10년이 넘었지만, 저기 보이는 섬이 한 때 세인의 주목을 받았던 섬 유도(留島)라고?  그 유도(留島)는 지금도 세인의 범접을 허락하지 않는 비무장지대(DMZ) 수면위에 민간인 출입이 통제된 고도(孤島)로 남아 있구나. 저어새의 산란지로도 유명한 한강의 끝섬인 유도는 그 전체 둘레가 2.25㎞(면적 0.3㎢)에 지나지 않는다. 밋밋한 볼록의 산 정수리(높이 29m)에서 남녘은 경기도 김포시 월곶면 보구곶리 해안과 불과 750m밖에 안 떨어져 있다. 반대편 북녘은 2.75㎞의 거리를 두고 황해북도 개풍군 임한면 조문리다.

   이 섬이 세인의 관심 대상으로 들어온 것은 1996년 8월이었다. 경기북부의 대홍수 직후, 유도를 앞에 두고 경계근무를 서고 있던 해병대 초병의 망원경 안으로 소 두 마리가 들어왔다. 냉큼 갈 수도, 분단의 아픔 앞에 그냥 지켜만 볼 수밖에 없었던 해병대는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그러던 며칠 뒤, 두 마리의 소가 한 마리로 줄었다. 원인을 파악할 겨를도 없이 조용히 사라진 것이었다.

 

 

한강의 끝섬 유도

 


   당시 ‘유도의 소’는 두 쪽으로 갈라진 한반도의 현실을 반영하는 상징으로 떠올랐고, 해는 속절없이 그렇게 바뀌었다. 유도의 소는 굶주림과 추위에 하루가 다르게 앙상한 뼈를 드러냈다. 이대로 두다가는 먼저 사라진 소의 신세에서 벗어나지 못할 판이었다.

  이대로 지켜만 볼 수 없었던 군(軍)과 김포시는 긴급 대책마련에 나섰고, 그해 1월17일.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소 구출작전’이 벌어졌다. 해병대 청룡부대 병사 9명이 3대의 고무보트에 나눠 타고 유도에 상륙했고, 구출된  ‘평화의 소’라 명명했던 것이다.

  유도까지 내려온 한강의 물길은 비로소 바다와 만난다. 그래서 한 줄기는 서해로, 또 한 줄기는 염하(강화해협)로 흐른다. 염하는 강화도의 동쪽 김포반도와의 사이를 흐르는 바다를 말하는데 혹은 '염하강' '강화해협'이라고 부른다. 이는 바다의 폭이 좁은 이유도 있지만, 한강과 임진강에서 흘러온 민물이 이곳에서 서해 바다와 합쳐지는 것을 염두(鹽河)에 둔 표현이다. 육지 김포와 강화도 사이를 마치 강물처럼 흐르는 바다이기에 예부터 염하라 하였다. 바다이되 강을 닮았으니 참으로 맞춤한 이름이다.


  중국 사람들은 민물의 이름을 크기에 따라 천(川), 강(江), 하(河)로 나누어 불렀다. 중국의 황하를 보고 놀란 사람들이 종종 우리나라엔 하(河)가 없다 하지만, 분명 이곳 염하는 우리 선인들의 인문학 수준을 보여주는 절묘한 강이면서 바다이다. 

   눈 이래 가까이 흐르는 염하는 밀물이 되어 거친 물살을 일으키며 흘러가고 있었다. 삼국시대, 고구려·백제·신라 세 나라가 이 땅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국운을 걸고 차지하고자 한 곳이 한강이었고, 강화도는 임진강, 한강, 예성강이 만나는 바로 이 지점에 위치한다.
 

 

  이러한 입지적 조건 때문에 고려 시대에 강화도는 이 나라의 운명과 자주성을 지켜주었고, 조선시대의 강화도는 국난 극복의 현장이요, 이 나라의 보장지처(保障之處)이자 근대화의 진원지이기도 했다. 이 역시 모두 강화도가 김포반도와 염하를 사이에 두고, 한강 입구에 위치하고 있는데서 비롯된 표현들이다.

   염하강 뱃길은 전쟁 전 북한 신의주까지 오가던 뱃길이었지만 지금은 일부 어선만 다닐 수 있고 그나마 저녁 8시 이후에는 그 어선마저도 통제된다. 서해 관문의 역할을 하면서도 분단의 사슬로 50년 넘게 꽁꽁 묶여 있던 염하강 뱃길이 분단의 아픔을 넘어 희망의 뱃길로 다시 열릴 날은 언제일까?   

  연미정 언덕으로 오르는 언덕받이 채마밭에서 밭일을 하던 할머니가 허리를 펴고 잘 가라고 손짓한다. 무욕(無慾)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살아가는 민통선 사람들의 모습이 순수하게 보였다. 강화도는 전통과 미래, 분단과 통일, 민과 군, 육지와 섬이 공존한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 찾아가는길 *

  강화대교를 건너자마자 우회전해서 고려인삼센타를 끼고 철조망이 쳐져 있는 염하강쪽 해안도로로 좌회전하여 염하강을 끼고 북쪽으로 약 4Km 정도 달리면 된다. 아니면 강화대교 지나 강화경찰서 골목에서 강화중학교 방향으로 우회전하여 농로를 따라 약 10분간 들어가면 연미정에 닿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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