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화성
유적·철따라 피는 꽃·단풍, 단순한 듯하면서 천차만별
손재식의 사진여행
- ▲ 보물 제402호로 지정된 화성의 남문 팔달문의 야경.
잠시라도 휴대폰을 떼어 놓거나 컴퓨터가 없으면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런 속에서 보름 이상 걸리는 히말라야 트레킹을 감행하는 것은 하나의 위안이 아닐 수 없다. 떠날 땐 혹시나 하는 염려가 있지만 돌아와서 보면 세상은 그다지 변하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삶의 유한함과 존재에 대한 저항감이 일탈을 부추겼어도 방랑의 시간 동안 무겁고 힘든 세상이 가벼워졌을 뿐이다. 그 동안 다리는 고장났고 얼굴은 초췌해졌다. 움푹 들어간 눈을 보며 떠남에 대한 손익을 저울질하는 사이 봄은 시시각각 달라지고 있다.
-
-
-
-
-
어떤 현장에서 천천히 흐르는 시간의 느낌이 있다면 그것은 착각이거나 환상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래도 아주 조금씩 변해가는 사물을 보면 말할 수 없는 안도감이 생긴다. 빠른 속도에 반하는 세상의 물건들은 대체로 그런 느낌을 담고 있다. 수원 화성 역시 그렇다. 밀폐된 공간에 가두어 놓을 수 없는, 흘러가는 시간의 추억과 향수가 그곳에 쌓여 있다.
조선의 실학자 반계 유형원은 국가 운영과 개혁에 대한 견해를 담은 반계수록에서 전쟁이 나면 산성으로 도망치기보다 평상시 거주하는 읍성에서 방어를 해야 한다며 바람직한 성의 형태를 제안한 바 있다. 유성룡도 임진란 체험서인 징비록을 통해 성곽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치성과 옹성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모두들 무너진 방어체제에 반성을 하고 있던 차였다.
▲ 독특한 외관의 서북각루. 보물 제403호인 화서문과 잘 어울리는 구조물이다.
이러한 실사구시적인 생각을 집대성하고, 수원 화성의 설계지침으로 삼은 사람은 다름 아닌 다산 정약용이었다. 실학자 정약용은 옹성, 포루, 현안, 누조 등 성에 필요한 공격과 방어시설을 수원 화성에 반영시키며 1792년 정월(정조 18년), 2년 8개월만에 공사를 완성시켰다. 거중기(擧重機) 등의 기계를 활용하며 용재(用材)를 규격화했고, 돌과 벽돌을 혼용한 과감한 방법과 화포를 주무기로 하는 방어구조는 다른 성곽에서 볼 수 없는 새로운 것이었다.
수원 화성의 완성은 대단한 업적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화성 축조의 진정한 의의는 화성성역의궤라는 640여 장의 보고서를 만들어 금속활자로 인쇄하여 보존한 데 있다. 이 보고서에 의해서 6.25 때 소실된 성곽을 고스란히 복원시킬 수 있었다.
선조들 지혜·미적 감성 살아 움직여
수원 화성이 완성된 해는 조선 정조 20년(1796년)이다. 성의 축조 동기는 부친이었던 사도세자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효성의 발로라 하지만, 이것으로 모든 게 설명되지는 않는다. 정치, 경제, 그리고 군사적 목적이 신도읍 수원 화성에 반영되어 있을 터이다. 정조는 화성을 완성시킨 뒤 한성, 평양, 개성 등지의 거상들을 수원으로 이주시키려 했었다. 이들을 상주시키기 위해 특정 상품의 독점권을 주는 방안을 동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조는 새 정책을 펴지도 못한 채 49세(정조 24년)에 병사하고 말았다.
역사책을 들추어야 알 수 있는 내용이라 하더라도 이러한 사실은 화성을 따라 걷는 일이 단순한 동작에 그치지 않게 하는 점이다. 성이란 군사적 방어시설이지만 선조들의 지혜와 미적 감성이 그곳에 살아 움직이고 있다.
▲ 수원사람들의 휴식공간이 된 수원 화성. 1997년 12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수원 화성은 전체 둘레가 5.7km에 이른다. 정약용 식으로 말하면 둘레는 3,600보, 높이는 2장5척이다. 천천히 걸어 3시간이면 둘러볼 수 있어 꽃 피는 봄날 나들이로 더 없이 어울리는 거리다. 수원 화성엔 원형을 이루는 동서남북 네 방향엔 각각의 성문이 있다. 서울을 바라보고 있는 북쪽에 장안문, 남쪽엔 팔달문, 동쪽엔 창룡문, 서쪽엔 화서문이 있다. 네 문을 기점으로 어느 곳에서 걷기를 시작해도 길 잃을 염려는 없다. 그러나 굳이 순서를 정한다면 정문격인 장안문에서 출발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장안문에 올라 사방을 살펴본 후 동쪽으로 방향을 잡아 화성 탐구의 첫 발을 떼면 우선 눈앞에 북동적대와 북동치가 있다. ‘치’는 제 몸을 숨기고 밖을 잘 엿보는 꿩을 뜻한다. 전방과 좌우에서 침입하는 적을 방어하기 위한 치와 적대의 역할이 바로 그러하다. 성곽은 북동치에서 동남쪽으로 향하게 되지만 불과 10분도 못되어 수려한 구조물과 마주하게 된다. 저절로 걸음이 멈추게 되는 이곳은 화홍문, 방화수류정, 용연 등 심상치 않은 이름을 지니고 있다. 북쪽의 수문 역할을 하는 화홍문도 아름답지만 화성의 유일한 정자 방화수류정의 정취도 은은하다.
▲ 봄꽃이 피거나 담쟁이덩굴이 성벽을 휘감아 오를 때 수원 화성이 더욱 보기 좋다.
광교적설(광교산에 눈 쌓인 모습), 팔달청람(안개에 감싸인 신비로운 팔달산), 남제장류(제방에 늘어선 버드나무), 북지상련(북쪽 연못의 희고 붉은 연꽃), 서호낙조(서호에 드리운 여기산 낙조), 화산두견(진달래 흐드러지게 핀 화산), 화홍관창(화홍문에 흘러내리는 비단결 폭포수), 용지대월(용지에서 월출을 기다리는 경치) 등 아름다운 화성의 옛 모습을 말하는 수원팔경에서도 화홍문과 용연은 빼놓을 수 없다. 방화수류정에 올라 용연을 바라보노라면 화성이 군사적 목적이 아닌 휴식과 연회를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져들게 한다. 성내의 방어시설에 동일한 이름을 부여하지 않은 사실도 창의적이다.
건축물서 뿜어내는 곡선과 환경 어울려
사방을 조망하면서 장병들을 지휘하는 장대, 망루와 같은 역할을 하는 공심돈, 누각의 건물을 세워 주변을 감시하는 각루, 화포를 감추고 적을 공격하는 다섯 포루, 성을 파수하며 연기로 신호를 보내는 봉돈 등이 각각 특징적인 이름을 갖고 있다. 이러한 구조물과 별도로 왕이 행차할 때 임시로 거처하는 행궁은 성의 중앙에 자리 잡고 있다.
이 가운데서 화성의 가장 독특한 구조물은 공심돈을 꼽을 수 있다. 날개 달린 독수리와도 같고 고매한 이미지가 느껴지는 공심돈은 내벽과 외벽을 방형으로 쌓아 올려 누정을 세우고, 벽에 총구를 내어 내·외벽을 돌면서 적을 사격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창룡문과 화서문의 옹성은 공심돈과 상호보완적 역할을 하고 있다.
▲ 동장대에서 동북공심돈에 이르는 편한 성곽길.
말 한 필이 다닐 만한 크기의 동암문과 군사들을 훈련시키던 동장대를 지나면 남수문과 팔달문이 앞에 나타난다. 이 주변은 시장을 이루고 있으며, 길은 다시 팔달산으로 이어진다, 오름길은 100여m에 불과하다. 그래도 정상부위에 있는 서장대에 오르면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힌다.
수원 화성은 아름다운 건축물로 여러 형태의 곡선과 환경이 어울려 흥미로운 피사체가 되고 있다. 전체가 원형을 이루고 있으며, 시간에 따라 분위기가 바뀌기 때문에 매번 다른 느낌을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수원 화성은 근본적으로 단순하다. 선조들의 지혜를 느낄 수 있긴 해도 영화처럼 박진감 넘치는 장면이 있을 리 없다. 그냥 성벽에 기대어 서서 마음이 편해지면 그것으로 더 바랄 것이 없어야 한다.
▲ 화성의 유일한 연못 용연. 달이 용연에 떠오를 때의 정경을 가리켜 용지대월이라 한다.
화성을 따라 걸어갈 마음은 그냥 일어나지 않는다. 삶이 팍팍해지거나 고향의 언덕이 생각난다면 그곳으로 달려가도 좋으리라. 변화하는 원형의 꽃, 화성의 성곽 위로 느릿느릿 흘러가는 시간을 보고 싶다면 지금 길을 나서야 한다.
ㅣ수원 화성 가는 길(서울에서 승용차 기준)ㅣ
서울에서 과천, 의왕을 거치는 1번 국도를 타고 가다가 수원공설운동장을 지나 수원 화성에 이른다. 경부고속도로를 이용할 경우 신갈 분기점이나 기흥 인터체인지로 빠져나온다. 신갈에서는 동수원 톨게이트를 통하여 43번 국도를 거쳐 화성의 창룡문에 이르며, 기흥에서는 42번 국도를 이용하여 팔달문에 갈 수 있다. 수원은 수도권 지역이기 때문에 전철을 이용하는 것도 수월한 방법이 될 수 있다. 수원역 또는 화서역에서 내린 후 시내버스를 타고 장안문이나 팔달문에서 내리면 된다.
수원 화성 촬영가이드
수원 화성은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에 기록될 만큼 보존가치가 높은 유적이다. 화성은 문화재를 뛰어넘어 한국적 아름다움이 곳곳에 스며있다. 전체 길이 5.7km에 이르는 성곽으로 철따라 피어나는 꽃과 단풍이 어우러질 때 아름다운 모습을 보인다.
수원 화성을 촬영한다는 것은 그때그때 달라지는 상황을 담는 것이다. 맑은 날과 좋은 계절을 선택하는 것이 좋지만 진달래 개나리 피어나는 4월과 5월이 특히 아름답다. 화성을 찍는 데 필요한 렌즈는 광각에서 망원렌즈까지 다양하게 쓰인다. 화성의 구조는 원형으로 이루어져 있어 특별한 기점이 없지만 대체로 장안문이나 팔달문에서 출발하여 원점으로 돌아오면 편하다.
<출처> 2008.05 / 월간산 [463호]
'국내여행기 및 정보 > - 인천. 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경기도 포천 뷰식물원, 양귀비 꽃에 취하다 (0) | 2008.05.29 |
---|---|
대명포구, 밴댕이·병어 먹고 와인빛 석양도 맛보고 (0) | 2008.05.23 |
한국 최대의 인공호수, 일산 호수공원 (0) | 2008.05.16 |
포천 산정호수, 시간이 멈춘 초록색 나라 (0) | 2008.05.15 |
양평 간이역, 추억도 잠시 멈춰서는 곳(두물머리, 용문사) (0) | 2008.04.07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