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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인천. 경기

남양주, 광릉 숲에서 왕릉길 지나 다산유적지까지

by 혜강(惠江) 2008. 2. 12.

경기 남양주


광릉 숲에서 왕릉길 지나 다산유적지까지

한북정맥 비껴두고 한강을 품에 안은 고을

 

민병준의 향토기행

 

 

▲ 눈앞으로 펼쳐진 조망이 일품인 광릉. 풍수 전문가들은 광릉이 여인의 두 젖가슴의 정혈인 유두혈 명당이라 한다

 

  망우리 고개를 넘어 남양주 광릉으로 가는 길. 봉선사가 먼저 손짓한다. 봉선사 들머리는 광릉숲이 지척인 덕에 들어가는 길목의 전나무숲이 장관이다. 코끝에 걸리는 내음도 벌써 다르다. 이렇듯 광릉숲은 한겨울에도 푸른 느낌이 있어서 너무 좋다.

   한북정맥에서 각각 분기한 운악산(234m)과 수리봉(536m) 줄기에 포근하게 안겨있는 봉선사(奉先寺)는 세조의 능인 광릉을 지키던 절집. 그리고 광릉의 능림으로 보호받던 숲이 바로 지금의 광릉수목원이 된다. 따라서 남양주 북쪽의 봉선사, 광릉, 광릉수목원 이 세 가지는 어느 게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두루 살펴보아야 삼박자가 골고루 맞는다.

   한글로 ‘운길산 봉선사’라 쓰인 큼직한 일주문을 지나면 오른쪽으로 부도밭이 눈길을 끈다. 이 절집과 인연이 닿았던 큰 스님들의 흔적이다. 여기서 아주 크고 정성이 가득 담겨져 있는 부도의 주인은 운허 용하(耘虛 龍夏·1892-1980) 스님이다. 한국 근현대의 고승인 운허 스님은 일제 강점기 당시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독립운동가요, 대장경의 한글 번역을 주도한 큰스님. 젊은 시절 일본 경찰의 추적을 피해 강원도 회양군 봉일사에 은신했다가 1921년 금강산 유점사에서 경송을 은사로 득도하면서 승려가 된 분이다.

   스님은 1936년 이곳 봉선사에 강원을 설립하였고, 1946년에는 광동중학교를 세우고 교장으로 취임하기도 했다. 또한 1957년부터 불경 번역에 힘을 기울여 1961년 ‘불교사전’을 편찬했는데, 1980년 봉선사에서 나이 89세, 법랍 59세로 입적하였으니 장수를 누린 셈이다.



 
운허는 뛰어난 강백이었다. 불학(佛學)을 전문으로 닦는 강원에서 경전을 가르치는 스님을 강사라고 하고, 그 중에서도 학식과 덕망이 높은 스님을 강백(講伯)이라고 한다. 이는 선종에서 깨달음을 이룬 스님이 선맥을 잇는 것처럼 스승으로부터 전강(傳講)을 이뤄 강맥(講脈)을 이은 경전의 대가들이다. 현재는 운허 스님의 뒤를 이어 한글대장경을 완간한 월운 스님이 조실로 있는 까닭에 봉선사는 교종의 대본산으로 불린다.

   그 비석거리 한쪽에 서있는 춘원 이광수 기념비. 소설가, 언론인, 민족운동가, 계몽사상가란 이력에 친일지식인이란 오명까지 가지고 있는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1892-1950). 왜 그를 기념하는 비석이 이곳에 있는 걸까. 춘원은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 패하기 전 4년 동안 남양주의 사릉 근처에서 머문 적이 있으니 춘원과 남양주는 인연이 깊은 편이라 할 수 있다. 그 때 한 해 겨울을 봉선사에서 지내게 됐는데, 이는 당시 주지였던 운허 스님이 속세의 인연으로는 춘원의 팔촌 동생이었기 때문이다.

   춘원은 광복 후 봉선사로 돌아와 차와 경전의 향기가 가득한 다경향실(茶經香室)에 머물면서 친일의 과거를 회개하며 보냈다. 1949년 반민법(反民法)에 의하여 구속되었지만 병보석으로 바로 풀려났고, 다시 봉선사로 돌아와 틈틈이 글을 쓰며 생활하던 춘원은 이듬해 한국전쟁 때 인민군에 의해 북으로 끌려갔다. 그동안 춘원의 생사는 불확실했으나 최근 1950년 만포(滿浦)에서 병사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렇듯 봉선사는 대문호 춘원의 굴절 많은 삶의 마지막 뒷모습을 지켜보던 인연을 맺은 절집인 것이다.
여기서 조금 더 오르면 독경 소리에 파묻힌 법당이다. 봉선사는 대웅전의 현판을 한문이 아닌 한글로 ‘큰법당’이라고 쓴 것이 이채롭다. 이는 1979년 복원하면서 운허 스님이 대웅전을 세우면서 써서 단 것이다.

   원래 봉선사 자리엔 969년(고려 광종 20)에 법인국사가 창건한 운악사라는 절집이 있었다. 여러 차례 난리를 겪으며 폐허된 것을 1469년(조선 예종 1) 세조의 부인인 정희왕후 윤씨가 세조의 능인 광릉을 수호하려는 목적으로 다시 일으켜 세웠다. 봉선사란 절집 이름도 ‘선왕의 능을 받들어 모신다(奉護先王之陵)’라는 뜻이다.

   조선 왕실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한때 한양 이북에서는 대웅전이 가장 컸다는 봉선사. 그러나 이 지역은 한양의 외곽으로서 경기도의 다른 지역과 강원도를 잇는 도로의 주요 길목이라 절집도 매번 수난을 당해야만 했다. 임진왜란 때는 왜군이 머물다가 퇴각하면서 전부 불태워 버렸고, 병자호란 때도 무사히 넘기지 못했다. 한국전쟁 때는 중공군이 진주하자 미군기의 집중 포화를 받아 초토화되었는데, 무려 소실과 중건을 모두 7차례 반복했다고 한다.

   하지만 부처님의 법력 덕인지 아니면 세조의 보살핌 때문인지 무게가 2만5천 근이라는 봉선사 대종(보물 제397호)은 절집이 철저히 유린당하는 수난 속에도 온전히 남아있다. 이 종은 신라나 고려시대의 범종양식을 따르지 않고 조선시대 범종양식의 선례가 되는 작품으로 주목된다고 한다. 무엇보다 생생한 문양이 돋보인다. 

 

  한편, 봉선사는 물맛이 좋기로 소문난 절집이기도 하다. 봉선사와 광릉 부근은 고질이던 피부병을 고치려는 일념으로 나라 안의 물 좋다는 데는 거의 다 돌아다닌 세조가 서운하지 않을 정도로 좋은 물맛을 자랑하기도 했다. 더구나 인근에 세조가 묻히자 주변을 능림으로 지정해놓아 숲은 더욱 울창했으니 물맛도 한층 좋아졌으리라. 길손이 듣기로는 광릉 일대의 샘물 중에서도 춘원도 즐겨 찾던 봉선사 큰법당 뒤쪽 언덕 너머의 옹달샘이 최고라 하는데, 아직 길손도 이 물맛은 보지 못했다.

   대신 법당 앞의 감로수로 목젖을 축이고 봉선사를 벗어나면 전나무 사이로 난 길은 광릉(光陵)으로 이어진다. 누구라도 눈을 휘둥그레 뜨게 될 전나무 가로수. 그 사잇길로 차가 다니지만 않는다면 아마도 내소사의 전나무 가로수길이나 오대산 월정사의 전나무숲에도 뒤지지 않는 아늑함을 자랑하리라.

   이 전나무들은 대부분 수령이 100년 안팎으로서 광릉이 조성될 당시 능으로 가는 우마차 길을 알리기 위해 오대산에서 가져와 심은 나무들의 2~3대 후손이라 한다. 그런데 아쉽게도 광릉숲 관통로변 고목 75%가 차량 매연으로 이미 말라죽거나 그럴 가능성이 있는 등 심각한 피해가 계속되고 있다고 한다.

   능역으로 가려면 매표소를 지나 아름드리 전나무 빼곡한 길을 300~400m 정도 올라야 한다. 능까지 오르는 길은 어디에도 비할 데 없이 아늑한 산책로. 옛 왕들의 무덤을 찾아가면서 건강하고 짙은 숲속으로 들어설 수 있는 행복을 누릴 수 있으나, 태조가 묻힌 동구릉도 광릉 정도 품격을 지니진 못했다. 가만 짚어보아도 광릉은 남한의 왕릉 중에서는 가장 보전이 잘된 숲을 거느리고 있는 것같다.

   광릉에 다다르면 Y자로 갈라진 중간에 정자각(丁字閣)이 있고 양쪽 언덕에 각각 자리 잡은 능이 보인다. 왼쪽이 조카인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세조(재위 1455-1468)의 능이고, 오른쪽이 조선시대 최초로 수렴청정을 한 정희왕후(1418-1483) 윤씨의 능이다. 

   광릉은 주변 숲도 좋지만 능에서 바라보는 산줄기도 권력에 눈이 어두워 수많은 목숨을 거둬들였던 세조조차 편안히 달랠 만큼 안온하다. 풍수 전문가들은 광릉이 여인의 두 젖가슴 정혈에 왕과 왕비가 묻혀 있는 유두혈(乳頭穴)이라는 명당이라 한다. 유두혈이란 대지를 어머니로 보고 그 어머니의 젖이 나오는 꼭지에 해당하는 자리라는 것이다.

 

 

▲현판을 한문이 아닌 한글로 ‘큰법당’이라고 쓴 봉선사 대웅전. 한국 근현대의 고승인 운허 스님의 글씨다

 

▲ 진접읍 부평리에 있는 봉선사. 정희왕후 윤씨가 세조 무덤인 광릉을 지키기 위하여 세운 절집이다

 

   광릉숲에서 노닐며 겨울 숲을 즐기다가 퇴계원으로 돌아나와 46번 국도를 탄다. 태릉, 동구릉을 거쳐 이어지는 흔히 경춘국도라 불리는 46번 국도. 길손은 이 중에서도 남양주시에 속하는 구간을 특별히 ‘왕릉길’이라 부르고 싶다. 남양주의 왕릉을 둘러보면 조선 왕릉의 능제를 거의 파악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할 정도로 다양하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경기(京畿)’라는 이름은 나라의 왕궁을 지키는 ‘왕도의 바깥 땅’을 의미한다. 왕도의 바깥 땅을 특별히 대우하여 왕도를 지키게 하였던 것은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경. 경주를 에워싼 여러 고을엔 성과 별궁 같이 왕궁을 지키는 데 필요한 시설이 있었다. 그러나 경기라는 이름이 역사에 처음 등장한 것은 고려 때인 1018년(현종 9)으로 개성 주변의 열두 고을을 묶어 경기라 칭한 게 처음이다.     

 

  그러다 조선 왕조가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자 이젠 한양 주변 고을들이 경기도가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경기도 곳곳에 흩어져 있는 조선의 왕릉 중 남양주에는 세조의 광릉, 단종비가 묻힌 사릉, 광해군묘, 대원군묘, 조선의 마지막을 장식한 고종·순종의 홍유릉 등이 있어 역사의 한 장을 장식했던 인물들을 두루 만날 수 있다. 

  

광릉의 능제는 이전 왕릉과는 약간 다르다. 왕의 유언에 따라서 무덤방은 돌방을 만드는 대신석회다짐으로 막았다. 이는 ‘내 죽으면 속히 썩어야 하니 석실과 석곽을 사용하지 말라’는 유명을 따랐기 때문이라 하는데, 세조는 조선 최초로 회곽을 쓴 왕으로 기록된다. 뼈가 빨리 썩어 땅의 생기를 받아야 후손에게 발복된다는 풍수 때문이라고 한다.

 

  또 무덤 둘레에 병풍석을 세우지 못하게 하였다. 돌방과 병석을 없앰으로써 백성의 고통을 줄이라는 뜻이었다는데, 이로 인해 국가에서 쓰는 돈도 크게 줄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무덤 주위에는 난간석을 세우고 그 밖으로 문인석·무인석·상석·망주석·호석·양석을 세웠다. 난간석의 기둥에는 십이지신상을 새겼는데, 이는 병풍석을 세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는 광릉밖에 없으며, 글자로 난간석에 표시하거나 나중에는 24방위까지 새겨 넣게 된다.

 

  무덤배치에 있어서도 최초의 동원이강(同原異岡)의 형식이다. 이전까지는 왕과 왕비의  무덤을 나란히 두고자 할 때는 고려 현릉·정릉 식의 쌍릉이나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의 무덤인 영릉의 형식으로 왕과 왕비를 함께 묻는 방법을 취하였으나, 광릉은 두 언덕을 한 정자각으로 묶는 새로운 배치로 후세의 무덤제도에 영향을 끼쳤다. 세종의 영릉이 조선 전기 왕릉제도를 총정리한 것이라 한다면, 광릉은 조선 전기 왕릉제도의 일대 변화를 이룬 조선 왕릉제도 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진단이다.

 

 

진건면 사능리에 있는 사릉(思陵·사적 제209호)은 조선 6대 단종의 부인인 정순왕후(1440-1521)의 무덤이다. 1457년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되자 부인으로 강봉되었고, 단종이 죽임을 당하자 왕실을 떠나야만 했던 비운의 왕비다. 그녀는 초막집에서 시녀 셋과 함께 살며 시녀들이 동냥해오는 것으로 끼니를 이었다고 한다. 이 소문을 들은 세조가 근처에 영빈전이라는 집과 식량을 내렸으나 정순왕후는 이를 거부하고 평생 흰 옷만 입으며 고기와 생선은 먹지 않았다고 한다.     

 

  정순왕후는 82세의 장수를 누리면서 세조의 아들들인 예종과 덕종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그 증손인 연산군이 실정 끝에 폐위되는 현실을 멀리서나마 지켜보았다. 윤씨는 자식이 없었으므로 단종의 누이인 경혜공주가 무덤을 만들었고, 1698년(숙종 24)에 단종이 왕으로 복위되면서 정순왕후라 봉하고 무덤을 사릉이라 했다. 아직 완전 개방되지는 않아 그리 알려져 있지 않으나 솔숲에 휩싸인 소박하고 안온한 분위기는 여느 왕릉에 못지않다.

 

진건면 송릉리에 있는 광해군묘(光海君墓·사적 제363호)는 조선 15대 광해군(재위 1608-1623)과 문성군 부인 유씨의 무덤. 봉분이 두 개인 쌍분인데, 왕릉답지 않게 참으로 소하다. 이는 광해군 의 내력 때문임을 짐작할 수 있다. 임진왜란이 나자 선조는 후궁 공빈 김씨의 둘째 아들인 광해군으로 세자를 삼았 다. 말년에 선조의 계비 인목왕후(仁穆王后)가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생산했으나 결국 선조는 승하 직전 당시 적자 영창대군이 2살밖에 안 되어 할 수 없이 왕위를 1608년 광해군에게 물려주게 된다. 직계가 아닌 방계승통이었 다.

 

임진왜란 이후 전후 복구사업에 전념했던 광해군은 창덕궁 등 궁궐을 중수하고 대동법도 실시했으며, 특히 명나라의 파병요구도 적절히 응하는 척하는 등 북방외교 정책은 당시의 국제정세를 실리적으로 이용했다. 그러나 안으로는 친형이었던 임해군과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유배 후 살해하고,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시키는 등의 실정으로 반정(反正)의 싹을 키우고 만다. 특히 영창대군을 교동에서 살해할 때는 방안에 가두고 불을 때어 질식해 죽게 함으로써 민심이반이 극에 달하게 된다.

 

  1623년 능양군(綾陽君)을 포함한 반정군(反正軍)이 드디어 광해군을 폐위하고 인목대비로부터 능양군을 왕위에 오르게 함으로써 인조반정은 성공을 거두게 된다. 광해군은 강화를 거쳐 제주까지 유배지가 옮겨졌지만, 그곳에서 67세의 천수를 누렸고, 부인 유씨도 역시 강화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목숨을 다했다.

 

 

▲ 주변이 너무 협소해 이곳이 과연 왕릉일까 싶은 생각이 드는 광해군묘

 

 

이번엔 대원군묘다. 조선시대에 왕위를 계승할 적자나 형제가 없어 종친 중에서 왕위를 이어받을 때 신왕의 생부를 대원군(大院君)이라 했는데, 조선시대에는 모두 4명의 대원군(선조의 아버지 덕흥대원군, 인조의 아버지 정원대원군, 철종의 아버지 전계대원군,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있었다. 이 중 조선 대원군제도의 시초가 되었던 덕흥대원군묘는 별내면 덕릉 마을에 있고, 그 마지막을 누렸던 흥선대원군 묘는 화도읍 창현리에 있다.

 

흔히 대원군의 대명사처럼 쓰이는 흥선대원군(1820-1898) 이하응. 그는 철종이 후계자 없이 죽은 후 당시 실권을 쥐고 있던 조대비와 힘을 합하여 자신의 둘째 아들인 명복(고종)을 왕위에 올리고 대원군이 되어 직접 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안으로 세도정치 근절, 서원철폐, 세제개혁, 법전정비 등을 통해 왕권을 강화했으며, 밖으로는 외세에 대적할 실력을 키워 조선을 중흥할 과감한 혁신정책을 추진하였다. 특히 강력한 쇄국정책을 통해 통상요청을 거부하고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때는 그들의 침략을 힘으로 저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무리하게 경복궁을 중건하여 백성들의 생활고가 가중되고, 쇄국정책을 고집하여 근대문명 수용이 늦어졌으며, 집권 후반기에는 명성황후를 중심으로 한 반대파와 대립하게 되어 정치에서 실권을 하고 말았다. 흥선대원군은 죽어서도 그다지 순탄치가 않았다. 1898년 고양군 공덕리에 부인 여흥 민씨와 묻혔다가 1908년 파주군 운천면 대덕동으로 이장되었다. 그러고는 다시 1966년 현 위치인 화도읍 창현리로 천장되는 우여곡절을 겪는다. 묘에서는 남양주 시내를 내려다보는 전망이 좋은 편인데, 풍수 전문가들에게는 그리 좋은 점수를 받지 못하는 것 같다.

 

 

금곡동에 있는 홍유릉(洪裕陵)은 기울어 가는 조선의 마지막을 지켜봐야만 했던 고종과 순종을 모신 능역이다. 홍릉(洪陵)에는 26대 고종과 부인인 명성황후 민씨가 잠들어 있다. 고종은 재위기간 중에 외세의 침략에 대처하지 못하고, 내부에서의 정치적 변화로 인해 임오군란, 갑신정변, 을미사변 등을 겪었다.

 

명성왕후는 을미사변 때 일본인에 의해 살해당한 비운의 왕비다. 명성황후는 원래 1897년 청량리 홍릉에 묻혔다가 1919년 고종이 세상을 뜨자 지금의 자리로 옮겨왔다. 유릉(裕陵)은 조선의 마지막 임금인 27대 순종황제와 부인인 순명효황후 민씨, 계비 순정효황후 윤씨의 동릉삼실(同陵三室)의 능이다.

 홍유릉 산책길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조선의 여느 왕릉과 많이 다른 능제다. 1897년(광무 원년)에 대한제국으로 선포됨에 따라 명나라 태조의 효릉(孝陵)을 본떠 황제릉(皇帝陵)으로 조성했기 때문이다. 고종을 황제로 칭하게 됨으로 제릉으로서의 위엄을 갖추기 위해서 석물의 규모나 종류가 달라졌으며, 임금의 침실, 제사지내는 방의 위치가 달라졌다. 2개의 무덤을 하나로 묶기 위해 외곽으로 담장을 설치하였으며, 양릉 중간에 돌로 만든 연못을 두었다. 또 12면의 병풍석을 세우고, 면석에 꽃무늬를 새겼으며, 난간 밖으로 둘레돌과 양석을 세우지 않았다. 무덤 아래에는 정자각 대신에 앞면 5칸·옆면 4칸의 침방이 있는 집, 즉 침전을 세웠으며, 앞 양쪽으로 문·무인석을 세웠고, 이어 홍살문까지 기린·코끼리·해태·사자·낙타·말의 순서로 석수(石獸)를 배치했다. 하지만 비록 황제라 했으나 국력이 시들어 가는 시기였던 탓에 일인들의 간섭이 심해 능역의 전체 규모와 분위기는 처음 의도를 살리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왕릉에 대한 인용이 조금 길었다. 무거운 머리를 식히기엔 드라이브가 최고다. 수동계곡을 지나 오른쪽에 축령산(880m)을 올려다보며 간다. 여름이라면 아무리 일정이 빠듯해도 수동계곡에서 탁족을 즐겼고, 봄가을이라면 반드시 축령산을 올랐을 것이다. 특히 길손은 봄날에 야생화를 보고 싶으면 축령산으로 달려간다. 경기도 남양주와 가평 사이에 솟은 축령산은 수도권에서 다양한 개체의 봄식물이 가장 많이 자라는 ‘수도권 식물의 보고’이기 때문이다. 산세도 완만하고 야생화가 많은 계곡을 휴양림으로 관리하고 있어 비교적 보존도 잘 되어 있어 야생화 관찰 대상지로 아주 적합하다.

 

 

▲ 조선의 마지막 임금인 고종과 순종을 모신 홍유릉.

 

 

축령산 휴양림 입구에서 멀지 않은 몽골문화촌은 한겨울에도 초원을 달리는 말발굽 소리 들릴 듯한 몽골문화촌이다. 북한강으로 합류하는 남양주 수동계곡을 거슬러 오르는 길. 호젓한 냇가를 굽이도는 이 지방도는 징기스칸로(路)라는 이름이 붙었다. 남양주시가 몽골(Mongolia)의 울란바토르시와 자매결연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지난해 조성한 몽골 문화촌으로 향한 길이기 때문이다. 

  뺨을 간지르는 이 봄바람이 몽골의 끝없는 초원에 불던 그 바람이라 상상하며 몽골 전통 문양으로 장식한 몽골문화촌 대문을 들어서면 제일 먼저 반기는 건 우람한 장승. 칭기즈칸의 후예들이 바람을 가르던 몽골 초원에서 지킴이 역할을 하던 중 특별히 선택되어 건너온 문화사절이다. 얼핏 보면 우리나라 목장승과 흡사하다. 하지만, 우리나라 장승이 해학의 미가 넘쳐 친근감이 든다면, 이 몽골 장승은 마치 우리 무덤의 무인상처럼 표정이 딱딱하고 사실적이다. 

  장승들 너머로는 양가죽으로 지은 유목민 전통 가옥인 게르(Ger)들이 보인다. 게르는 몽골 문화의 근간인 유목문화의 상징. 게르에 바퀴를 달아 말이 끌고 그대로 이동할 수 있는 마차형 게르는 주로 전쟁 때 장수들이 이용했다. 주거용 게르엔 몽골인들의 생활상을 고스란히 재현해 놓아 유목민들의 단촐한 집안 살림을 엿볼 수 있다.


   몽골의 전통 음악이 잔잔히 흐르는 전시장 게르 내부엔 유목민의 말장신구·의류·생활용품·악기 등 몽골 유목민의 이해를 돕는 민속품, 그리고 몽골의 무속신앙을 살펴볼 수 있는 샤먼의 복장 등도 걸려 있다. 모두 몽골 현지서 들여온 것들이다. 찬찬히 뜯어보면 한때 세계를 지배했던 몽골의 숨결을 느낄 수 있음은 물론 우리 문화와의 유사점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 남양주 축령산 기슭에 자리 잡은 몽골문화촌, 한때 세계를 정복했던 몽골의 전통 문화에 대해 자세히 살펴볼 수 있는 공간이다

 

 

축령산을 뒤로하고 북한강으로 빠져나와 강물 따라 흘러가며 씨네밸리(Cine Valley)에서 영화의 세계에 푹 빠졌다 나오면 운길산(610m)이 두 팔 벌려 반긴다. 운길산 수종사(水鍾寺)는 두물머리 풍광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절집. 때는 조선시대인 1458년(세조 4). 악성 피부병으로 고생하던 세조는 금강산에서 요양하고 뱃길로 돌아오는 길에 두물머리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다.

 

▲ 수종사 은행나무 너머로 내려다본 한강 풍경


 

한밤중에 이상한 종소리를 들은 세조. 다음날 근처 백성을 불러 종소리의 출처를 묻자 그는 “근처에 종소리가 날 만한 곳은 없고 운길산 속에 오래된 절터가 한 곳 있을 뿐”이라고 대답하였다. 그 출처를 찾아보게 하였는데, 뜻밖에도 강 건너 운길산 바위굴 속의 물방울이 떨어지며 나는 소리였다. 굴속엔 18나한상도 모셔져 있었다. 물맛 또한 최고였다. 세조는 8도의 이름난 석공들을 모아 경사 급한 벼랑에 축대를 쌓아 절을 짓고 왕실의 원찰로 삼았다.


조선 초기의 문장가 서거정이 ‘해동 제일의 전망’이라고 했다는 수종사 오르는 길은 사륜구동 지프도 숨을 할딱거리는 가파른 외길. 겨울 숲 너머에 자리 잡은 수종사 경내에 들어서면 대웅전이 나 팔각5층석탑보다 발 아래 펼쳐지는 한강 풍광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나라의 큰 젖줄인 남한강과 북한강이 몸을 섞는 양수리 너머로 청계산(658m), 유명산(864m), 용문산(1,157m)으로 이어지는 ‘한중지맥’의 산줄기가 굳세다.

 

수종사는 물맛이 알려져 내로라하는 차인(茶人)들의 발길이 잦았다. 이곳서 시오리쯤 떨어진 능내리 마현 마을에 살던 다산 정약용(丁若鏞·1762-1836)이 말년에 지은 시의 ‘수종산(운길산)은 그 옛날 나의 정원으로 삼아 / 생각만 나면 훌쩍 절문 앞에 당도했지’하는 구절에서 보듯 다산도 이곳을 자주 찾았다. 또 조선 후기 차의 대가인 초의선사도 한양에 올 때면 강진의 초당에서 다담(茶談)을 나누던 다산을 수종사에서 만나 우정을 이어갔다.

 

 

그리하여 능내리 마현 마을의 다산 유적지는 남양주 여정의 끝이요, 시작이다. 능내(陵內里)라는 지명은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 한확(韓確)의 묘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 그렇게 불린 것이고, 마현은 광주분원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있는 마을로서 말을 타고 넘어가는 일이 많았던 고개가 있어서라 한다. 현재 마현 마을 여유당 주변으론 다산유적지로 꾸며져 있다. 200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은 다산 영정이 나그  네를 반기는 다산기념관엔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 등 다산의 실학사상이 담긴 저서와 다산이 직접 그린 서화가 전시되어 있다.

 

수원 화성을 축조할 때 사용하였던 거중기 모형에선 당시의 건축기술 수준을 살필 수 있다. 또 다산이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할 때 머물던 다산초당 등도 모형으로  꾸며놓아 다산의 강진 18년 유배생활도 더듬어볼 수 있는 것이다.

 

▲ 다산의 묘소에서 내려다본 여유당. 다산은 10여 년의 벼슬살이와 18년의 귀양살이를 제외하고는 50년 가까운 세월을 이곳에서 살았다.

 

다산은 1762년(영조 38) 음력 6월16일 한강의 두물머리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강촌인  마현 마을에서 태어났다. 당시의 행정 구역은 광주군 초부방 마현리. 지금은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다. 당시는 수로가 중요할 때라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  이어지는 마현은 제법 큰 마을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다산의 집터는 마을 번 잡함에서 살짝 비껴나 있는 언덕의 한적함이 돋보이는 마을이었던 듯싶다. 

다산의 기록에 자주 나타나는 마을 이름은 ‘소내(苕川)’고, 다음은 ‘열상(洌上)’이다. 한강의 상류이자 마재 앞을 흐르는 강을 소내라고 불렀기에 다산은 자신의 고향 마을을 소내라고 부르고 그것으로 호를 쓰기도 했다. 한편, 고려 때는 한강을 큰 물줄기가 맑고 밝게 뻗어내리는 긴 강이란 뜻으로 ‘열수(洌水)’라고 불렀으니, 열상이란 한강의 상류라는 의미다. 자신의 호를 열초(洌樵)라고도 했는데, 이는 ‘한강가에서 나무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마현의 옛 풍광은 어땠을까. 다음에 소개하는 시는 다산이  18세(1779) 때인 어느 봄날, 화순의 부친 임소에서 소내로 돌아와 지은 것이다.


               

서둘러서 고향 마을 도착해보니

문 앞에는 봄 강물이 흐르는구나

기쁜 듯 약초밭둑에 서고 보니

예전처럼 고깃배가 보이는구나

꽃이 만발한 숲 사이 초당은 고요하고

 소나무 가지 드리운 들길이 그윽하네

남쪽 천리 밖에서 노닐었지만

어디 간들 이 좋은 언덕 얻을 거냐’

 

  - 다산의 ‘환소천거’ 

 

이 시구를 보면 다산은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소내 마을을 가슴 깊이 사랑했음을 알 수 있다. 다산은 75년의 일생 중 10여 년의 벼슬살이, 18년의 귀양살이를 제외하고는 50년 가까운 세월을 이곳에 머물렀다.

   다산 전문가들은 그러나 현재 마현이 세월의 흐름으로 다산의 기록에 나타난 것과는 많이 다르다 한다. ‘집 뒤의 자(子)의 방향 언덕’(屋後負子之原)에 묻도록 했다던 묘소 앞에서 바라보는 소내는 당시의 한가로운 강촌이 아닌 것이다. 팔당댐으로 물이 불어 호수를 이루고 있고, 중앙에 있던 큰댁, 동쪽. 서쪽에 있었다던 집들은 그 집터조차 흔적이 없다. 콘크리트 건물 모두 지우고, 강변의 복잡한 식당을 지우고, 강물도 한참 내려가 두물머리 풍광 드리워져 있다면 그 얼마나 아름다울까.

 

▲ 운길산 수종사에서 내려다본 한강 두물머리 풍경. 조선 초기 문장가 서거정은 이 풍광을 해동 제일의 조망이라 찬탄했다.

 

 

 여유당(與猶堂)은 다산의 당호다. 당호(堂號)란 자신이 거처하는 방이나 집에 특정한 뜻을 담아 이름을 붙인 것으로서 동시에 아호(雅號)이기도 하다. 다산의 당호이자 서재이던 여유당은 소내의 거실로서 다산학의 보금자리였다. ‘더불다’는 뜻의 여(與)와 ‘오히려’라는 뜻으로 많이 쓰이는 유(猶)를 당호로 삼은 까닭은 무엇일까. 이는 다산의 회고록이라 할 수 있는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이나 여유당기(與猶堂記)에 자세히 나와 있다.

   여유(與猶)란 말은 노자 도덕경의 ‘여혜약동섭천 유혜약외사린’(與兮若冬涉川 猶兮若畏四隣)에서 따온 것으로서 ‘겨울의 냇물을 건너듯 사방이 두려운 듯, 참으로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뜻에서 지었다는 것이다. 여(與)는 의심이 많은 동물, 유(猶)는 겁이 많은 원숭이를 가리키기도 한다. 조선 후기에 역사의 서광이던 실학을 집대성한 대학자가 될 수 있었던 데에는 이렇듯 끝없이 자신을 경계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산 묘소에 참배하고 내려와 밤나무 숲을 지나 한적한 호숫가로 나간다. 수면이 겨울바람에 몸을 뒤척인다. 이 호숫길은 수많은 어려움을 이겨내고 위대한 학문적 성과를 이뤄낸 다산을 만나로 온 이들에게 자연이 덤으로 선사하는 선물이다. 하지만 이 호수 속에는 다산이 배를 타고 고기 잡아 술잔을 들고 시를 읊던 아름다운 강변이 잠겨 있으리라. 다산이 사랑해마지 않았던 그 옛 풍광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참 안타깝다.

   이 원고를 이즈음에서 끝내고 잡지사에 보내려 이메일을 열어보니 다산연구소 이사장으로 계신 박석무 선생이 회원들에게 보내는 정기 칼럼이 도착해 있었다. 부족한 길손은 ‘늙은 낚시꾼이 되고 싶다던 소원’이란 박석무 선생의 칼럼 중 다산의 글귀 일부를 옮겨 적는 것으로 남양주 기행문의 마지막으로 삼고자 한다.

    “나는 작은 돈으로 배 하나를 사서 배 안에 고기그물 네댓 개와 낚싯대 한두 개를 갖추어놓고, 또 술과 잔과 소반 같은 여러 가지 식생활에 필요한 도구를 준비하며, 방 한 간을 만들어 온돌을 놓고 싶다. 그리고 두 아들에게 집을 지키게 하고, 늙은 아내와 어린 아이와 심부름하는 아이 하나를 이끌고 물에 떠다니면서 살아가는 배로 수종산과 소수(苕水) 사이를 왕래하면서 오늘은 어떤 곳에서 고기를 잡고, 내일은 어떤 곳에서 낚시질하며, 그 다음날은 또 어떤 곳의 여울에서 고기를 잡는다. 바람을 맞으면서 물 위에서 잠을 자고 마치 물결에 떠다니는 오리들처럼 둥실둥실 떠다니다가 때때로 짤막한 시가(詩歌)를 지어 스스로 팔자가 사나워 불우하게 된 정회(情懷)를 읊고자 한다. 이것이 나의 소원이다.” 
   -다산의 ‘소상연파조수지가기(苕上煙波釣之家記)’ 중에서

 

경기도 중앙에 자리 잡은 남양주시는 북쪽으로 포천군·의정부시, 동쪽으로 가평군, 북한강을 경계로 양평군, 남쪽으로 한강을 경계로 광주시·하남시, 서쪽으로 구리시·서울시와 접한다. 

한북정맥의 남단에 위치하며 동·서·북쪽은 남서방향으로 산줄기가 뻗어 있고, 남쪽은 넓은 평야가 전개되어 있다. 서부에는 불암산(佛巖山·507m)·수락산(水落山·638m) 등의 줄기가 남쪽으로 뻗어 망우리고개를 지나고, 북부에는 소리봉(534m)·주금산(鑄錦山·814m)·상산(霜山·825m)·축령산(祝靈山·879m), 남부에는 예봉산(禮峰山·683m)·운길산(雲吉山·610m)·문안산(文案山·536m), 중앙에는 천마산(天摩山·812m)·백봉(白峰, 590m) 등이 솟아 있다.

   동쪽으로 북한강이 남으로 흐르다가 조안면 능내리에서 남한강과 합류하여 한강을 이룬 뒤 와부읍과 지금동의 남단을 지나 서해로 흘러든다. 또한 왕숙천(王宿川)이 남류하여 한강에 흘러들고, 수동천(水洞川)과 마석우천(磨石隅川)이 동류하여 북한강과 합류한다. 한강과 왕숙천이 만나는 지점을 중심으로 평지가 넓게 발달되어 있다. 내륙에 있기 때문에 기온의 교차가 크고, 한강 상류의 다우지역에 속해 있어 강수량이 비교적 많다. 

   삼한시대에는 마한(馬韓)에 속했고, 백제 온조왕 때 백제의 세력권이었으나 475년(고구려 장수왕 63) 한강 남안 유역이 고구려의 영토가 된 뒤 매성군(買省郡, 昌化郡)에 속하였다. 551년(백제 성왕 29) 이후 내소군(來蘇郡)이 되었다. 지금의 광장진 북안에 위치한 아차산성(阿且山城)은 전략적 요충지로서 삼국 쟁패의 관건이 되었다. 

   고려 태조 때는 견주(見州)로 되었다가 995년(성종 14) 광릉(廣陵)으로 불렸다. 1018년(현종 9) 양주의 관할이었으나 곧 포주(抱州, 포천)로 이속되었고, 1308년(충렬왕 34) 한양부(漢陽府)로 개칭되었다. 1394년(태조 3) 서울을 한양부로 옮겨서 주치(州治)를 아차산 남쪽의 대동리(大洞里)로 옮기고 지양주사(知楊州事)를 두었다가 곧 승격하여 부(府)가 되었다. 1397년 부치(府治)를 옛 견주 지역으로 옮기고 양주라 하였다. 1980년 양주군에서 분리되었다. 1995년 시군 통합에 따라 미금시와 합하면서 남양주시로 통합되었다. 현재 행정구역은 호평·평내·금곡·양정·지금·도농동의 6개동과 와부·진접·화도·진건·오남읍의 5개읍 및 퇴계원·수동·별내·조안면의 4개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산이 많아 총 임야면적이 342.27㎢로 전체면적의 73.5%를 차지하며, 논은 43.77㎢, 밭은 41.62㎢. 주산물은 쌀·보리·콩류와 배추·무·상추 등의 채소류다. 대소비지인 서울을 끼고 있어 원예농업과 낙농업이 활발하다. 밤·대추·도토리 등 유실수가 많다. 이밖에 양계·양돈 등의 축산업이 기업형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수종사

 조안면 운길산에 있는 수종사(水鐘寺)는 1458년(세조 4) 세조가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금강산을 다녀오다가 종소리처럼 들리는 물방울 소리를 듣고 지었다고 전해지는 절집이다. 조선 후기에 고종이 중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수종사부도 내 유물(보물 제259호)은 수종사의 석조 부도를 고쳐 세울 때 발견된 유물들로,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청자항아리·금동구층소탑·은제도금육각감이 발견되었고, 금동구층소탑과 은제도금육각감은 청자항아리 안에 들어 있었다. 청자항아리는 높이 31.2cm, 아가리 지름 26cm로 세로로 골이 파진 것처럼 몸 전체가 장식되었고, 뚜껑은 아름다운 꽃 덩굴무늬가 전체적으로 새겨져 있다. 

 청자항아리 안에 구층소탑과 함께 들어 있었던 은제도금육각감은 높이 17.3cm로, 이중의 연꽃무늬가 있는 기단에 연꽃무늬와 칠보무늬를, 면마다 번갈아 뚫어 조각한 6각의 몸체 위에 6각의 지붕을 얹은 형태다. 금동구층소탑은 높이가 12.9cm인 작은 탑으로, 정사각형으로 된 평상 모양의 기단 위에 있다.

봉선사

진접읍 부평리에 있는 봉선사(奉先寺)는 969년 법인국사(法印國師) 탄문(坦文)이 창건하여 운악사라 하였다. 그 후 1469년(예종 1) 정희왕후(貞熙王后) 윤씨가 광릉(光陵)의 세조를 추모하여 89칸으로 중창하고 봉선사라고 하였다. 1551년(명종 6)에는 교종(敎宗)의 수사찰(首寺刹)로 지정되어 여기서 승과시(僧科試)를 치르기도 하고, 전국 승려와 신도에 대한 교학(敎學) 진흥의 중추적 기관 역할을 하였다.

   전쟁 때마다 건물이 소실되었고, 6·25전쟁 때도 대부분 불에 탔다. 1956년에 범종각을, 1961~1963년에 운하당(雲霞堂)을 세우고, 1969년에는 법당을 중건하였다. 종각에 보존되어 있는 동종(銅鐘)은 조선 전기의 것으로 보물 제397호로 지정되어 있다.

봉선사 대종(奉先寺 大鐘·보물 제397호)은 드물게 남은 조선 전기의 동종으로 1469년(예종 1) 왕실의 명령에 따라 만들었다. 높이 238cm, 입지름 168cm, 두께 23cm로 꼭대기에는 용통이 없고 두 마리 용이 서로 등지고 종의 고리 구실을 하는 전형적인 조선 종의 모습이다. 종의 어깨에는 이중의 가로줄을 돌려 몸통 부분과 구분 짓고 있으며, 종 가운데는 굵고 가는 3중의 가로줄을 그어 몸통 부분을 상·하로 나누고 있다. 

 


줄 윗부분에는 사각형의 유곽과 보살을 교대로 배치하였고, 아랫부분에는 강희맹이 짓고 정난종이 글씨를 쓴 장문이 새겨져 있다.  종의 입구 위쪽으로 넓은 띠가 있는데, 그 안에는 당시에 유행하던 파도치는 모양이 사실적으로 잘 표현되었다. 고려시대에 비해 종 입구가 넓어진 형태나 몸통에 있는 가로 띠와 조각수법 등은 조선시대 나타난 새로운 양상으로서 그 특징들이 잘 나타난 중요한 큰 종이다.

 

석씨원류응화사적 책판

별내면 화접리 불교중앙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는 석씨 원류응화사적 책판(釋氏源流應化事蹟 冊板·보물 제591호)은 1631년(인조 9) 정두경이 명나라 사신으로 갔다가 가져온 책을 바탕으로 1673년(현종 14) 승려 자습이 불암사 목판본으로 발간한 책판이다. 이 책은 석가모니의 일대기와 석가모니 이후 서역 및 중국에서 불법이 전파된 사실을 400항에 걸쳐 기술한 것으로, 각 항의 4자 1구로 제목을 붙이고, 먼저 사적을 그림으로 그리고, 그 다음 면에 그 내용을 서술하였다.  글자의 새김은 매우 정교하고 그 기법이 우수하다. 현재 중국서 목록에도 나와 있지 않는 것으로 보아 없어져 전해지지 않는 글로 보인다.

 

광릉 

진접읍 부평리에 있는 광릉(光陵·사적 제197호)은 조선 7대 세조(재위 1455-1468)와 부인 정희왕후 윤씨(1418-1483)의 무덤이다. 왕의 유언에 따라서 무덤방은 돌방을 만드는 대신 석회다짐으로 막았고, 무덤 둘레에 병풍석을 세우지 못하게 하였다. 돌방과 병석을 없앰으로서 백성의 고통과 국가에서 쓰는 돈을 크게 줄일 수 있게 되었다. 

무덤 주위에는 난간석을 세우고 그 밖으로 문인석·무인석·상석·망주석·호석·양석을 세웠다. 난간석의 기둥에는 십이지신상을 새겼는데 이는 병풍석을 세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는 광릉밖에 없으며, 글자로 난간석에 표시하거나 나중에는 24방위까지 새겨 넣게 된다. 무덤배치에 있어서도 최초의 동원이강의 형식이다. 즉 광릉은 두 언덕을 한 정자각으로 묶는 새로운 배치로 후세의 무덤제도에 영향을 끼쳤다.

홍유릉

   금곡동에 있는 홍유릉(洪裕陵·사적 제207호)은 홍릉(洪陵)과 유릉(裕陵)을 말한다. 홍릉은 조선 26대 고종(高宗·1192-1259)과 부인인 명성황후(明成皇后·1851-1895)의 무덤이다. 홍릉은 지금까지의 무덤 제도와 다르게 광무 원년(1897)에 대한제국으로 선포됨에 명나라 태조 효릉의 무덤 제도를 본뜨게 되었다. 12면의 병풍석을 세우고 면석에 꽃무늬를 새겼다. 난간 밖으로는 둘레돌과 양석을 세우지 않았다. 무덤 아래에는 정자각 대신에 앞면 5칸·옆면 4칸의 침방이 있는 집 즉, 침전을 세웠으며 문·무인석과 기린·코끼리·사자·낙타 등의 수석을 놓았다. 문·무인석은 크고 전통적인 기법으로 조각되었다.

   유릉은 순종과 동비 순명효왕후, 동계비 순정효황후의 무덤이다. 조선왕조 무덤 중 한 봉우리에 3개 방을 만든 동봉삼실릉은 유릉뿐이다. 12면의 면석에 꽃무늬를 새긴 병풍석과 12칸의 난간석을 세웠다. 무덤 아래에는 침전이 정자각을 대신하였으며, 그 아래 문·무인석, 기린, 코끼리, 사자상 등을 배치하였다.

사릉

진건면 사능리에 있는 사릉(思陵·사적 제209호)은 조선 6대 단종의 부인인 정순왕후(1440-1521)의 무덤이다.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긴 뒤 죽임을 당하자 왕후는 왕실을 떠나 작은 집을 지어 살며 평생 흰 옷만 입고 고기와 생선은 먹지 않았다고 한다. 왕후가 자식이 없었으므로 단종의 누이인 경혜공주가 무덤을 만들었고, 1698년(숙종 24)에 단종이 왕으로 복위되면서 정순왕후라 봉하고 무덤을 사릉이라 했다.

무덤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하지 않았고, 무덤 앞에 상석과 양석, 둘레돌이 있으며 그 밖으로 3면을 낮은 담으로 쌓았다. 단종의 무덤이 장릉으로 봉해졌을 때에도 병풍석과 난간석을 세우지 않고, 동물 모양의 돌만 세웠는데, 이는 왕릉으로 봉해진 것에 대한 예에 따른 것이다. 사각지붕 모양의 명등석은 장릉과 같은 것으로 숙종대의 양식이 잘 나타나 있다.

 

광해군묘

진건면 송릉리의 광해군묘(光海君墓·사적 제363호)는 조선 15대 광해군(재위 1608-1623)과 문성군 부인 유씨의 무덤이다. 봉분이 두 개인 쌍분이며, 무덤 주변에는 석물들이 있다. 광해군은 선조의 후궁 공빈 김씨의 아들로 형인 임해군 대신 1608년 왕위에 올랐다. 즉위 후 형인 임해군과 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경희궁에 가두었다. 인조반정 후 강화와 제주도에 유배되었고, 1641년(인조 19)에 사망했다. 처음엔 제주도에 묻혔다가 1643년(인조21) 이곳으로 옮겨졌다.

   광해군은 재위 15년 동안 임진왜란 이후 혼란스러워진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해 서적 편찬과 대동법 실시, 국방력 강화 등에 힘을 기울이기도 했다. 부인 유씨는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가 되었고, 인조반정으로 폐위되어 강화로 함께 유배를 갔다가 1623년 사망했다. 양주에 무덤을 모시고, 광해군이 죽은 후 같은 곳으로 옮겨졌다.

 

광릉 크낙새 서식지

   광릉 크낙새 서식지(천연기념물 제11호)는 경기도 포천군 소홀면, 내촌면, 남양주시 진접읍, 별내면, 자둔면의 5개면에 걸쳐 있다. 크낙새는 딱다구리과의 일종으로서 지구상에서 한반도 중부지역에만 생존하고 있으며, 현재는 멸종위기에 처해있다. 암수 구분 없이 몸길이는 46cm 정도이며, 수컷은 머리 꼭대기에 진홍색 깃털을 가지고 있다. 북한에서는 클락새라고 부르며, 광릉에서는 콜락새라고도 부른다.

 

양주 양지리 향나무

오남읍 양지리의 향나무(천연기념물 제232호)는 수령이 500살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12.2m, 가슴높이 둘레 3.65m다. 나무의 모습은 원줄기가 2m 정도 올라가서 7개로 갈라져 사방으로 퍼졌다. 이 향나무는 거창 신씨의 선조를 모신 묘소 옆에 심은 나무가 자란 것이라 하며, 신씨의 내력에 관한 비석이 있다.

향나무는 우리나라 중부 이남을 비롯해 울릉도와 일본 등에 분포하고 있으며, 상나무·노송나무로도 불린다. 강한 향기를 지니고 있어 제사 때 향을 피우는 재료와 정원수·공원수로 많이 심는다.

 

 

다산 정약용 유적지

 조안면 능내리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실학의 대가였던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 선생의 고향이다. 이곳에는 선생의 생가와 묘소, 다산문화관, 다산기념관 등이 있다. 다산기념관엔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 등 다산의 실학사상이 담긴 저서와 다산이 직접 그린 서화가 전시되어 있다. 이외에도 강진 유배지의 다산초당 모형, 성을 축조할 때 무거운 물건을 들어 올리는 거중기 모형 등이 전시되어 있다.

   그 옆에는 다산을 현대적 시각으로 재조명해보는 다산문화관이 있다. 또한 다산이 오랜 동안 생활한 생가인 여유당도 복원되어 있다. 여유당은 1925년 을축대홍수 때 유실되어 방치되어 있다가 1986년 복원되었다. 여유당 뒤쪽 언덕에는 정약용 선생과 부인 풍산 홍씨가 합장되어 있는 묘소가 있다. 묘 앞에는 묘비·상석·향로석, 망주석 1쌍이 있다. 후에 묘 뒤로 담을 둘렀으며, 묘비도 1기 추가하였다.

 

축령산 자연휴양림

   경기도 남양주와 가평 사이에 솟은 축령산(880m) 서쪽에 자리 잡은 휴양시설이다. 계곡 곳곳에 삼림욕장, 피크닉장, 식탁, 의자 등 편의시설이 잘 갖춰져 있다. 제1주차장~잔디광장~절고개~축령산 정상~남이봉~수리바위~제1주차장 코스가 3~4시간 소요 / 사용 문의 전화 031-592-0681

 

몽골문화촌

   축령산 자연휴양림 입구 근처엔 징기스칸 후예들의 체취를 맡을 수 있는 이색지대인 몽골문화촌이 있다. 총 10,483㎡(3,170평) 부지에 몽골문화전시관 1동, 게르(Ger) 9동, 몽골 민속예술 공연장 1동과 부대시설인 매표소, 휴게소, 관광상품 판매소 등이 건설돼 있다. 몽골문화 전시장으로 쓰이는 가장 큰 게르 내부엔 유목민의 말장신구·의류·생활용품·악기 등 몽골 유목민의 이해를 돕는 민속품, 몽골의 무속신앙을 살펴볼 수 있는 샤먼의 복장 등이 전시되어 있다. 공연은 몽골전통노래와 춤, 악기연주, 기예, 허미노래 등이며, 매주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1일 2회(11:30, 14:30), 각각 1시간씩 공연하고, 토요일과 일요일(공휴일 포함)에는 1일 3회(11:30, 14:30, 16:30) 공연한다. 관람 문의 전화 031-590-2793.

 

서울종합촬영소

 한국 최대의 영화 촬영지인 서울종합촬영소는 영화에 관한 모든 걸 살펴볼 수 있는 곳. ‘공동경비구역 JSA’와 ‘신장개업’, 그리고 조선시대 천재화가 장승업의 예술혼을 다룬 영화 ‘취화선’ 오픈세트가 있다. 관람시설로는 영화문화관, 영상원리체험관, 영상체험관, 의상·소품실 등이 있다. 관람 문의 전화 031-5790-605

 

 

미음나루

미음나루는 남양주시 수석동의 미음 마을에 있는 나루터로 남양주시와 하남시 미사리를 건너던 한강나루다. 지금은 모터보트와 수상스키를 즐기는 사람들로 붐빈다. 인근 야산에 축조된 수석리 토성과 함께 삼국시대에는 한강변을 지키는 전략적 요충지의 일환으로 중요시 되었던 곳으로 여겨진다. 주변에는 카페와 음식점, 레저시설 등이 자리 잡고 있다.

 

 

 


<출처> 월간산 447호 / 2007.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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