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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부산. 경남

고성, 낙남정맥과 한려수도를 끼고 터를 잡은 고을

by 혜강(惠江) 2008. 2. 11.

 

경남 고성

낙남정맥과 한려수도를 끼고 터를 잡은 고을

 

 “당신은 지금 공룡나라에 들어서고 있습니다”

 

 


르포라이터 민병준

 

 

 

 

 

   공룡, 그리고 충무공 이순신 장군. 이는 저 멀리 경상남도 남부 해안에 터를 잡은 고성(固城) 고을이 우리를 불러들이는 강력한 자석이다. 우선 고성은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공룡발 자국 화석지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으며, 임진왜란 당시 우리 민족을 누란의 위기에서 구해 낸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두 번씩이나 대승을 거뒀던 당항포를 거느리고 있는 고을이기 때 문이다.

 

  우리의 전통 산줄기로 살펴보면 고성 북쪽으로는 봉대산(409m)~백운산(391m)~대곡산(542.9m)~무량산(581.4m)~용암산(399.5m)~깃대봉(526.6m)으로 이어지는 낙남정맥 분수령이 지난다. 이중 대곡산에서 ‘통영지맥’이 남서류하며 고성읍 한가운데를 나지막하게 흐르다 불쑥 벽방산(650m)을 일으키는데, 여기서 한 갈래는 북으로 뻗어 거류산(571m)을 세운 뒤 당항의 장군산(263m)에서 세력을 다하고, 또 다른 갈래는 남으로 뻗으며 천개산(525m) 지나 통영의 천암산(258m)을 세운 뒤 한려수도 앞바다로 잦아든다.

 

   이 ‘통영지맥’으로 인해 바다로 돌출한 땅덩어리를 흔히 고성반도라 부르는데, 이 반도의 남쪽 끄트머리에 자리하고 있는 통영을 제외하곤 대부분 고성땅에 속한다. 이렇게 생긴 고성반도는 남부는 자란만과 고성만에, 동부는 당항만과 당동만에 면해 있는데, 앞바다의 수심이 비교적 깊은 편이라 크고 작은 항만이 잘 발달되어 있다. 

  정말로 예전엔 고성 가는 길이 쉽지 않았다. 조선시대에 흔히 ‘진주라 천릿길’이라 했는데, 이는 한양에서 진주까지의 거리가 그만큼 멀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고성은 진주보다도 남쪽에 있으니 한양에서 접근하려면 고성은 정말로 머나먼 오지였을 것이다. 이는 전국이 일일생활권에 들었다는 20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마찬가지였다. 남해고속도로를 이용한다 해도 그 이후 구불대는 2차선 국도로는 아무리 빨리 달려도 서울서 5시간이 훨씬 넘게 걸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사정은 고성을 관통하는 대전-통영간 고속도로가 2005년 12월에 완전 개통되면서 확 달라졌다. 이젠 오로지 고속도로만 편하게 달려도 고성의 품안으로 직접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이다.

 

 

 

▲ (왼쪽) 제법 운치가 있는 옥천사 담장. (오른쪽)지역에서 출토되는 자연석을 쌓아 독특한 경관을 보여주는 학동마을 골목길.

 

 


  대전-통영간 고속도로에서 고성의 첫 관문격인 연화산 나들목으로 나오면 길은 자연스레 옥천사(玉泉寺)로 이어진다. 고성 사람들이 고성의 진산인 거류산과 더불어 가장 아끼는 연화산 북쪽 기슭에 있는 이 절집은 676년(신라 문무왕 16)에 의상이 지리산 화엄사, 가야산 해인사, 태백산 부석사 등과 함께 세운 화엄 10대 사찰 중 하나. 절집 이름의 유래가 된 옥천(玉泉)은 대웅전 오른편 팔상전 옆에 있는데, 수각(水閣)을 지어 정성스레 보호하고 있다.

근래에는 조계종 종정과 총무원장을 지낸 청담(靑潭·1902-1971) 스님이 머리를 밀고 출가한 절집으로 일반에게 잘 알려져 있다. 자방루 앞마당 왼편에 청담의 사리탑과 탄허 스님이 직접 짓고 쓴 탑비가 있다. 스님의 사리탑은 이외에도 노년에 주석하시던 도선사와, 6·25전쟁 무렵에 10년 동안 수행하던 문수암에도 있다.

옥천사에 전하는 문화유산 중 1252년(고려 고종 39)에 제작된 임자명 반자(壬子銘 飯子·보물 제495호)가 가장 눈길을 끈다. 반자란 절에서 사용하는 일종의 타악기로서, 대중을 불러 모으거나 급한 일을 알리는 데 사용한 쇠북을 말한다. 금속으로 만들었기에 금고(金鼓)라고도 한다. 현재 보장각이라는 건물엔 이 반자를 비롯해 1701년에 주조된 대종, 1816년에 제작된 청동은입사 향로, 1866년에 강원 교재로 판각한 금강경 목판 등 120여 점의 문화유산이 보관되어 있다.

옥천사에 이처럼 많은 문화재가 있었던 까닭은 그만큼 재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진주와 접해있는 덕에 진주의 권문세가들이 시주를 많이 했고, 진주목과 경상우도 감영, 삼도수군 통제영, 고성현 등 관아의 도움도 적지 않게 받았다. 옥천사 홈페이지에 소개된 기록에 따르면 조선 후기엔 소작을 준 사찰답에서 무려 1년에 1천 석 이상을 거둬들였고, 사찰 소유의 임야를 지키는 산지기도 무려 5~6명이나 될 정도였다 한다. 이런 부를 바탕으로 1721년(숙종 27)에 대종(大鐘)을, 1764년(영조 40)에 자방루를, 1774년(영조50)에 대웅전 후불탱화를, 1808년(순조4)에 괘불을, 1864년(고종 1)에 대웅전을 각각 조성하였다.

또 1743년(영조19) 옥천사에 주둔하던 승군의 정원은 무려 340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당시 옥천사의 넓은 앞마당은 승군들의 연병장이었으며, 자방루(滋芳樓)는 승군을 지휘하거나 비가 올 때 승군을 교육시키던 장소로 쓰였다. 1800경부터 60여 년 동안 조정에 닥종이를 바쳐야 하는 부역에 시달리기도 했으나 대체적으로 옥천사는 오랫동안 전성기를 누렸다.

그러다 1950년 단행된 농지개혁 때 사찰 소유의 논밭이 단 한 평도 남기지 않고 모두 소작인들의 손에 넘어가면서 사세는 급격히 기울게 된다. 그러나 비록 그렇다 해도 옥천사의 권위는 손상을 입지 않았고, 오히려 불교정화운동의 선구자 청담대종사가 출가한 사찰로서 이 일대 불교 정신사의 중심축을 맡아 왔다. 그만큼 찬찬히 둘러볼 만한 자격이 있는 절집인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옥천사 주차장이 귀한 문화유산을 보관하고 있는 보장각 앞에 위치한 까닭에 대부분의 방문객들은 보장각 앞에 차를 세워 두고 자방루 앞마당을 거쳐 절집으로 들어선다. 따라서 일주문은 그렇다 쳐도 사천왕문 지나 맑은 계류를 건넌 뒤, 좌우로 편박나무 우거진 계단을 올라 조선 후기의 빼어난 건물인 자방루를 보고, 오른편의 해탈문을 통해 대웅전 앞마당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 중 중요한 앞부분이 생략되었다. 즉 주차장을 사천왕문 아래가 아니라 보장각 앞에 만듦으로 해서 사바에서 벗어나 화엄세계에 이르는 과정을 차분히 둘러볼 수 없다는 아쉬움이 있는 것이다.

 

 


▲ 운흥사는 보물로 지정된 괘불과 궤로 유명한 절집이지만, 무엇보다도 아담하게 조성한 장독대가 눈에 확 띈다.
 

 

한편, 옥천사 경우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고성은 불교가 상당히 흥한 지역에 속한다. 산마다 적지 않은 사찰과 암자가 자리하고 있는데, 이 중에서 옥천사와 더불어 둘러봐야할 절집으로는 문수암, 운흥사, 그리고 계승사를 꼽을 수 있다.

일반에게 많이 알려진 절집은 바로 삼국시대 화랑들 수련장으로도 사용되었다고 하는 무이산(548.5m) 기슭의 문수암(文殊庵)이다. 아마도 유명세로만 따지면 옥천사에 결코 뒤지지 않을 것인데, 고성 사람들뿐만 아니라 진주·마산 등 인근 주민들도 아주 즐겨 찾는다. 문수암에서 내려다보면 약사전의 동양 최대라는 금불상 너머로 호수 같은 다도해가 한눈에 들어온다는 것이 큰 흡인력인 듯. 다도해에 떠있는 크고 작은 섬들이 연출하는 자연의 향연도 아름다운 풍경화다.

그런데, 문수암은 가파른 자연 지형을 잘 살려지은 전각들이 인상적이긴 하지만 콘크리트로 지은 암자와 전각의 배치는 운치가 조금 떨어지는 편이다. 그럼에도 의상이 창건 당시 관음보살이 현현했다는 석벽, 청담선사의 사리탑, 그리고 6공 시절 설악산 백담사가 전두환 전 대통령의 유배지로 결정되기에 앞서 당시 그의 오른팔이던 고성 마암면 출신의 허문도씨가 답사했다는 절집이라는 소문과 맞물려 제법 유명해졌다.

영현면의 계승사(桂承寺)는 아직 거의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불법보다 고고학적으로 더 관심을 끄는 절집이다. 우선 승용차 한 대 겨우 지날 수 있을 정도로 좁은 산길로 들어가는 과정도 호젓해서 좋거니와 암반을 깎은 터에 제비집처럼 당우를 앉혔는데, 석벽의 백악기 퇴적층리(천연기념물 제475호)는 비전문가가 봐도 예사롭지 않다.

 

우선 요사채로 쓰이는 콘크리트 건물 앞마당의 평평한 암반엔 백악기 시대에 형성된 물결자국이 아주 선명하다. 또 대웅전 왼편의 평평한 바위에는 2~10mm 크기의 빗방울 자국이 수도 없이 찍혀있으며, 대웅전 오른편의 관음전 가는 길로 몇 발자국 오르면 맑은 석간수 흘러내리는 바위면에 거대한 용각류 공룡의 앞발자국과 뒤발자국이 모두 7개나 찍혀 있다. 상상이 가는가. 백악기 공룡들이 우글거리던 호숫가에 잔잔한 물살이 찰랑거리며 뻘흙에 물결을 만들고, 또 갑자기 쏟아진 소나기가 후두둑 스치며 그곳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던 1억 년 전 백악기 어느 날의 그 풍경이.

하지만 절집의 전체 풍광은 조금 실망스럽다. 우선 원래의 상당히 아담한 규모에서 벗어나 대규모 불사를 벌이면서 그 귀한 층리의 일부였음이 확실한 퇴적암을 마구 깎아 만든 계단이 그렇다. 지난 2006년 12월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지 않았다면 어쩌면 길손은 이토록 귀한 고고학적 화석을 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놀라움과 아쉬움이 교차하는 절집이 바로 계승사다.

하이면의 운흥사(雲興寺)는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승병을 이끌고 이곳에서 왜적과 싸웠다는 내력이 전하는 절집이다. 1731년(영조 7)에 지은 대웅전과 그 안에 보관하고 있는 운흥사 괘불탱과 궤는 경남 유형문화재로 있다가 지난 해 보물 제1317호로 지정될 정도로 빼어난 작품이지만, 사월초파일 등 큰 행사가 있을 때만 볼 수 있다는 아쉬움이 있다.

옥천사, 문수암, 계승사, 운흥사. 이렇게 고성에서 가장 특성 있는 4개의 절집을 한 번에 둘러보는 데는 동선 잡기가 쉽지가 않은 편이라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리지만, 어찌 당항포로 가는 발길을 늦출 수 있겠는가. 가는 도중, 한반도 남부 지역에서 북방 기마민족과 남방 농경문화권을 거쳐 일본까지 그 문화의 전래과정을 연구하는 데 아주 귀한 자료라고 하는 마암면 석마(石馬)의 천년 울음소리를 듣고, 약 200여 년 전에 조성한 장산 숲을 거닐며 영남 사대부의 풍치를 느끼면 이내 당항포다.

 
 

▲ 썰물이 되면 덕명리 상족암 해안 바위엔 공룡발자국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원 안은 항만의 아기공룡발자국 화석을 살펴보는 어린이.

 

고성은 지난 해 공룡엑스포를 개최하면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공룡발자국 화석지임을 세계만방에 알리기도 했다. 당시 공룡엑스포 주행사장이었던 당항포관광지는 해안의 공룡발자국을 비롯해 지구의 역사와 생명의 진화, 조류 및 파충류 등의 자료 1,700여 점을 전시한 자연사박물관, 세계에서 수집한 자연석 수백점을 전시한 수석전시관 등의 볼거리가 있다. 또 여러 놀이기구를 설치해 놓아 아이들과 함께 하면 시간이 짧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이곳은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을 앞세우고 두 차례에 걸쳐 왜군을 무찌른 호국의 현장 당항포가 아닌가.

 

당항만은 비록 썰물과 밀물이 있으나 파도가 바다답지 않게 너무나 잔잔해 마치 내륙의 자그마한 저수지를 보는 것만 같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는 파도가 적고 고요하여 소소강(沼所江)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맑은 공기를 깊게 들이쉬며 바닷가로 이어진 산책길을 천천히 걷다보면 왼쪽 언덕으로 전승기념탑이 보인다. 계단 입구에는 보초를 서고 있는 조선 수군 조형물이 있다. 20m 높이의 이 대형탑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조선 수군들의 호국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제작했다.

 

 

 


  ▲ 공룡 조형물 아래서 노는 아이들. 마치 영화 주라기공원에 들어온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전승기념탑 뒤쪽에 있는 당항포해전관은 이곳을 찾은 사람이라면 꼭 들러 봐야할 공간이다. 임진왜란 당시 당항포에서 이순신 장군 이하 수군들이 왜군을 무찔렀던 두 차례의 당항포해전의 전투 상황이 디오드라마로 실감나게 펼쳐진다. 또 해전관 주변에는 직접 들어가서 살펴볼 수 있는 실물크기(길이 22m, 폭 7.2m)의 거북선도 있다. 이어 초대형 투구로 조성한 충무공디오라마관에서는 충무공 이순신의 일대기도 살펴볼 수 있다. 그 뒤쪽에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영정을 모신 숭충사(崇忠祠)가 있는데, 사당에 참배하고 돌아보면 장군의 호령소리 울려 퍼지던 그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바로 이게 당항포1경이다. 자, 그럼 임진왜란 당시로 돌아가 보자.

당항포해전은 제1차 당항포해전과 제2차 당항포해전으로 나뉜다. 제1차 해전은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해인 1592년(선조 25)년 6월5일부터 6일까지 이틀 동안, 2차 해전은 2년 뒤인 1594년 3월4일 치러졌다.

제1차 당항포해전은 이순신 함대를 주축으로 한 조선 수군의 연합함대가 사천·당포해전에 이어 세 번째로 치른 해전. 이순신의 전라좌수영 전선 23척, 이억기의 전라우수영 전선 25척, 원균의 경상우수영 전선 3척 이렇게 모두 51척이 참가하였다. 6월2일 통영의 당포에서 왜선 21척을 격침시킨 연합함대는 당포에 정박해 전략 회의를 하던 중 거제도 주민들로부터 고성 당항포에 왜선이 피신해 있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연합함대는 6월5일 아침 안개가 걷히자마자 당항포로 진격하였다. 포구에는 왜선(대선 9척, 중선 4척, 소선 13척)이 모여 있었다.

조선 연합함대는 당항만 입구의 섬에 전선 4척을 숨겨두고, 거북선을 앞세워 공격을 가하였다. 조선 수군의 갑작스런 공격을 받은 일본 수군도 조총을 쏘아대며 대항했다. 그러나 조선 수군은 왜군의 육지 탈출 봉쇄와 주민 보호를 위해 왜군을 바다 한가운데로 유인한 뒤, 왜선을 포위하고 맹공을 가하였다. 왜선 대부분은 여기서 격침되었고, 도주하는 나머지 왜선들도 모두 추적해 불살랐다. 다만 도망친 패잔병들을 소탕하기 위해 작전상 한 척은 남겨 두었는데, 이 역시 이튿날 새벽에 조선 수군에 의해 섬멸되었다.

제2차 당항포해전은 수륙병진책이 무산된 왜군이 거제도 내륙을 오가며 살인·납치·약탈을 일삼던 1594년 3월4일과 5일 양일간 벌어졌다. 이는 아군 연합전선 124척이 참가한 대규모 해전으로 연합함대의 제6차 출전이자, 전투로는 12번째 해전이다. 이순신의 함대는 이 전투서 적선 31척을 격파하는 전공을 올리며 또 다시 압승을 거두었다. 이순신 함대의 위력을 잘 알고 있는 왜군들은 전의를 상실한 채 육지로 도주하였다.

그런데, 당항포의 동쪽 입구는 닭의 목처럼 좁고 안쪽에 널찍한 만이 형성되어 있으나 서쪽은 막혀있어 전술을 모르는 문외한이 봐도 작전상 아주 위험한 곳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당시 왜군 함대가 입구만 있고 퇴로가 전혀 없는 당항포로 간 까닭은 무엇일까. 이와 관련해 당항포 일대에는 기생 월이에 관한 설화가 전해온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591년 가을, 남해안 일대에서 정보 수집을 하던 일본 첩자를 알아본 고성 무기정의 기생 월이는 그를 술에 취하게 한 다음, 그의 지도에 현 고성 읍내의 수남리와 지소강이 서로 통해 당항만이 바다로 연결되는 것처럼 지도를 조작했다는 것이다. 즉 산줄기의 ‘통영지맥’을 잘라 고성반도를 섬으로 표현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월이’란 이름을 지닌 기생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아마 어쩌면 월이라는 기생은 사실이 아니라 나중에 백성들에 의해 지어진 이야기일 수도 있다. 이순신 장군이 23전 23승이라는 세계 해전사상 유례 없는 대승을 거둔 데는 이순신 장군 이하 참모들의 빼어난 전략전술과 용감무쌍하게 적진에 돌진했던 휘하 장졸들의 역할이 컸다. 그러나 사실 물길 사정을 잘 아는 어부들, 그리고 왜선의 동향을 파악해 결정적인 첩보를 제공한 민초들의 희생정신이 없었다면 어찌 가능했을까. 당항포관광지 한쪽에 있는 식당 월이주막에서 비록 막걸리에 고성 손두부 안주를 들지 않아도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이유다.

당항포 주변 해안엔 당시 전투와 관련된 지명이 수도 없이 많이 남아 있다. 이번 답사 후 관련 자료를 살펴보면서 길손도 마치 당시에 지명을 지었던 백성이 된 것처럼 흥분되었다. 한번 들어보자. 이곳 노인들은 당항포 일대를 아직도 속싯개라 하는데, 이는 왜군을 속여 승리했다는 데서 유래한 지명이다. 배둔리 남쪽 해안의 잡안개는 왜군들을 잡았다는 곳으로서 잡은개에서 바뀐 이름이고, 당항리 동쪽에 있는 핏골은 왜군의 피로 물들었다고 해서 지어진 것이다. 또 도망개는 왜군이 도망간 길목이란 뜻이다.

아직도 많다. 봉동리의 어선개는 아군의 함정이 어선으로 가장하여 숨어 있다가 왜선이 만(灣) 안으로 완전히 진입한 뒤 포위하여 왜선을 격침시킨 적전지요, 떼무덤은 떼죽음 당한 왜병들을 묻었다는 곳이요, 군진(軍鎭) 마을은 당항포로부터 상륙하는 왜병을 섬멸시킨 진지라 한다.

마암면 마을의 지명 유래는 좀더 자극적이다. 머리개는 해전에서 패하여 소소강을 따라 도주하던 왜병의 목이 무수히 바다에 떠밀려 마을 앞바다로 왔다고 하여 부르게 되었고, 삼락리 곤기 마을 동쪽에 있는 무덤개는 왜군의 사체가 떠밀려와 무덤을 이루었다고 붙여졌으며, 두락정(頭洛亭)은 왜병의 잘린 머리가 들물에 밀려 마을 앞바다로 떠왔다 하여 붙은 지명이다. 이외에도 너무 많아 모두 짚으려면 숨이 가쁠 지경이다. 물론 이 지명들 중에는 세월이 흐르면서 나중에 당항포해전과 관련해 그럴 듯하게 각색된 곳도 있겠지만, 당시 당항포해전의 승리가 주민들에게 얼마나 자랑스럽게 여겨졌는지 짐작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당항포를 나와 이런저런 유래를 살피며 돌아본 당항만은 참 아름다웠다. 해안도로는 군데군데 확포장공사 중이긴 했어도 드라이브에 방해될 정도는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물 맑고 경관 좋은 바다를 둘러보는 중간 중간에 나타나는 공룡발자국 화석들. 정말 괜찮았다.


▲ 소가야 때 조성한 것으로 알려진 고성읍내의 송학동 고분군. 고성 주민들이 산책길로 애용하는 곳이다.

 

 

이젠 고성 읍내를 돌아볼 차례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고성읍은 고성의 중심지다. 물산이 넉넉한 바다가 가깝고, 기거하기 좋은 펑퍼짐한 고성평야가 있었기 때문에 여기엔 선사시대부터 인류가 터를 잡고 살았다. 그래서 조개더미와 가야시대 성의 흔적, 고분군 등이 남아 있는데, 무엇보다 소가야국의 중심지였음을 증명하는 송학동 고분군(사적 제119호)을 걷는 재미가 아주 쏠쏠하다. 산책로를 따라 두어 바퀴 돌면 저절로 운동도 된다.

고분군 산책과 더불어 둘러볼 만한 곳은 바로 고성시장과 남포항이다. 매월 1, 6일마다 열리는 고성장은 어촌과 농촌의 특성을 모두 지니고 있는 고성의 특성을 한눈에 알 수 있는 곳. 시장 한쪽에 횟집단지가 조성되어 있는데, 바닷가 고을치고는 그리 규모가 큰 편은 아니다. 고성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은 남포항(南浦港)이다. 외지에 나갔던 고성 사람들이 명절 때 고향을 찾으면 제일 먼저 들르는 곳이기도 하다. 원래 제방공사의 토사운반시설인 철로와 제방이 견고하다는 뜻에서 붙여진 ‘철뚝’이라는 지명으로 불렸고, 지금도 고성 사람들은 남포라는 지명보다 철뚝이란 지명에 더 익숙하다.

고성탈박물관은 고성오광대(중요무형문화재 제7호)의 내력을 살펴볼 수 있는 공간. 고성의 민속놀이는 고성오광대와 고성농요를 비롯해 지신밟기·다리밟기·줄다리기 등이 있는데, 이중에서 전국적으로 유명한 것은 바로 고성오광대다. 주로 정월 대보름날 행해졌던 고성오광대는 1910년경에 남촌파(南村派) 서민들이 통영오광대를 보고 처음 시작하였고, 그 뒤에 창원오광대의 영향을 받으면서 오늘날과 같은 탈놀이로 성장한 것이라 한다. 현재는 통영오광대에 비해 더 고형(古型)에 가깝다고 한다.

그렇다면 오광대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조선 중기 초계 밤마리 장터(현 합천군 덕곡면 율지리)에서 대광대패들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오광대놀이는 점차 각지에 전해져 의령·진주·산청·창원·통영·고성·김해 등 경상우도에 분포되었고, 바닷길을 통해서는 수영·동래·부산진 등 경상좌도로 퍼져서 야류(野遊)라고 불렸다. 오광대는 놀이 내용도 오과장(五科場)으로 구성되어 있어 신라오기(新羅五伎)의 다섯 마당 놀이와도 관련이 있을 것으로 여겨지는데, 전문가들은 오광대라는 이름이 오행설(五行說)에서 유래된 오(五)에서 온 것이라는 데 손을 들어주고 있다.

문둥이춤·오광대춤·중춤·비비춤·제밀주춤의 5마당으로 고성 오광대놀이엔 문둥이·말뚝이·원양반·비비·비비양반·중·각시·마당쇠 등 모두 19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내용은 힘없는 민중의 삶을 반영하고 있는데, 지배계충인 양반과 파계승에 대한 풍자, 그리고 처와 첩의 문제 등 사회문제를 다루고 있다. 말뚝이의 양반에 대한 조롱이 매우 신랄하지만, 다른 곳에 비해 파계승에 대한 풍자는 약한 편이다. 이는 이 지역에 아직도 불교가 성하기 때문일 것이라는 게 전문가의 설명이다.

 

 

▲ 세계3대 공룡발자국 화석지로 꼽히는 고성 사족암. 공룡 조형물이 아주 잘 어울린다.

 

 이제 마지막으로 덕명리 상족암으로 공룡발자국 화석을 보러 갈 차례다. 사실 고성에서의 여정은 물때에 의해 많이 좌우된다. 즉 덕명리 해안에서 공룡발자국 화석을 감상할 수 있는 썰물 때에 따라 다른 방문지를 들르게 되는 시간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길손 역시 고성을 방문할 때면 항상 썰물 시간을 미리 알아보고 간다. 그래야 허탕을 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른 일정도 꼬이지 않기 때문이다.

 

파도 멀찌감치 물러앉은 아담한 포구로 내려서면 자그마한 고동들 즐비한 평평한 암반이 밟힌다. 바닷물이 고여 있는 암반의 작은 웅덩이 한 쌍이 일정한 간격으로 바다로 향해있다. 석화나 자잘한 홍합 따위가 다닥다닥 붙어있지만 뭔가 거대한 생명체가 걸어간 것 같은 흔적. 다름 아닌 오랜 옛날 한반도에 무리지어 살았던 공룡들의 발자국이다.

 

고성은 한국판 주라기공원이다. 1억 년 전의 한반도는 익룡, 초식공룡, 육식공룡 같은 온갖 공룡들이 뛰놀던 공룡들의 왕국이었다. 그러나 영화 주라기공원에 등장하는 공룡들이 아무리 놀랍다고 해도 우리나라에 살던 여러 공룡들에 비하면 말 그대로 공원 수준에 불과하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공룡 화석지만도 40여 곳이 넘는데, 특히 경상도를 중심으로 한 남해안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되고 있다. 남해안은 공룡이 살던 중생대 백악기엔 지금 같은 바다가 아닌 거대한 호수였고, 그 호수를 배회하던 공룡들의 발자국이 뻘흙에 찍히면서 생긴 화석인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발견되는 화석의 주인공들은 대체적으로 주라기보다 후기인 1억3천만에서 6천5백만 년 전의 중생대 백악기에 생존했던 공룡들이라 한다. 미국 콜로라도대의 마틴 로클리 교수 등 세계적으로 이름난 공룡석학들은 고성 일대가 유라시아를 통틀어 가장 많은 공룡발자국 화적이 있는 곳으로 꼽으면서 미국 콜로라도, 아르헨티나 서부 해안과 함께 세계 3대 공룡발자국 화적지로 인정하고 있다. 잠깐 인류의 공룡 발견 역사를 되살펴보자. 지금으로부터 2억3천만 년 전 중생대 트라이아스기 말엽에 탄생하여 주라기와 백악기를 거치는 동안 번성한 공룡의 화석이 처음 세상에 드러난 것은 1822년. 영국인 의사인 멘텔 부부가 이구아노돈의 이빨 화석을 발견하여 공룡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현재 우리나라는 세계 최고의 공룡 밀집 지대로서 ‘공룡의 낙원’으로 불리고, 국토 면적에 비해 발굴되는 빈도가 세계 최대라 할 정도로 공룡의 흔적이 많이 발견되고 있는데, 우리나라 공룡발자국 화석이 학계에 보고된 지는 30년이 겨우 넘는다. 즉 1973년 경북 의성 탑리에서 공룡의 골격 화석이 최초로 발견되었던 것. 이후 우리나라에서 보고되는 숫자는 가히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 상족암 해식동굴. 이 해식동굴을 밖에서 보면 밥상다리모양 같다 하여 상족암이라 불린다.

 

 

 그 정점이라 할 수 있는 고성이 세계 최대의 공룡 발자국 화석지임이 밝혀진 지는 25년밖에 안 된다. 1982년 주민의 제보를 접하고 해안을 찾은 경북대 양승영 교수팀에 의해 공룡발자국 화석임이 판명되었던 것이다. 현재 상족암 부둣가에서 실바위까지 6km에 걸친 해안에 1,900여 점이 산재해 있다. 고성군 전체에서 발견된 숫자까지 합치면 무려 4,300여 개나 되고, 크기와 모양도 매우 다양하여 많은 종류의 공룡들이 이곳에서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상족암엔 옥황상제를 위해 베를 짰다는 선녀 전설이 전하긴 하지만, 해안에서 대대로 살아온 주민들에게 상상력을 불어넣었을 공룡발자국 관련 전설이 궁금해 만나는 주민들에게도 물어보고 여러 자료도 뒤적거려봤으나 공룡발자국이란 사실이 알려지기 전까지만 해도 소가 똥 싸면서 지나간 자리라거나 단지 파도 때문이라거나 하는 이야기만 들었을 뿐 아쉽게도 좀더 정교하고 거창한(?) 전설을 들을 수는 없었다.

상족암 일대에 살던 공룡은 대체로 용각류(龍脚類), 조각류(鳥脚類), 수각류(獸脚類) 세 종류로 나뉜다. 용각류는 네다리 보행인 초식공룡으로 몸길이 약 25m, 몸무게 약 78톤이나 되는 브라키오사우루스 등이 있고, 조각류란 두 다리로 보행한 날개 달린 공룡을 말한다. 수각류는 티라노사우루스 같은 육식공룡이다. 또 얼마 전엔 길이 30cm, 너비 3cm로 완벽한 형태를 갖춘 익룡의 뼈화석이 상족암 앞바다 한 무인도에서 국내 최초로 발견되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이 뼈화석이 네 개의 익룡 손가락 가운데 날개로 진화한 네 번째 손가락의 첫마디라고 진단했다.

상족암은 서해의 진주라 불리는 변산반도의 채석강에 전혀 뒤지지 않는 미학을 지니고 있다. 층암단애로 이루어진 해안선의 아름다운 풍광도 상족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의 하나다. 해식동굴이 뚫린 상족암 바위틈새는 멀리서 보면 밥상다리 모양 같다 하여 상족암이라 불렀다. 마을 사람들은 발자국이 여럿 있다고 해서 쌍족암이라고 했고, 그냥 쌍발이라고도 했다.

 

 

▲ 고성의 바닷바람을 맞고 자란 시금치는 맛이 아주 좋아 대도시로 팔려나간다.

 

 

상족암 해식동굴 안으로 들어서면 바깥세상과는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십자가 형상으로 뚫린 굴은 어른 두세 사람이 나란히 걸어도 충분할 정도로 넓다. 안쪽의 교차지점은 어른 열 명이 둘러앉아도 될 만큼 널찍한데, 동굴 바닥 암반엔 전설의 선녀탕을 비롯해 큼직한 공룡발자국 화석도 여기저기 눈에 띈다. 그래서 오랜 세월 파도가 뚫어놓은 미로 같은 굴속을 거닐다보면 마치 저 어두운 구석 어디선가 무서운 티라노사우루스가 날카로운 눈을 꿈벅거리며 공격 기회를 노리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그런데, 길손 혼자만 이런 상상을 하는 것은 아닌가 보다. 굴 안쪽에서 아이의 걱정스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빠, 이 동굴 안에 정말로 공룡이 숨어 있으면 어떡해요?”
“글쎄…. 그럼 아빠가 이 주먹으로 확 때려잡아버릴까?”

 

길손은 사람들에게 무한한 상상력의 날개를 펴게 해주는 상족암이 이래서 좋다. 정말 덕명리 공룡발자국 화석지에 상족암이 없었다면 얼마나 허전했을까. 이런저런 상상을 하는 사이 시간이 많이 흘렀는지 어느새 밀물이 상족암 아랫도리를 찰랑찰랑 더듬고 있었다.

 


◆  고성 공룡발자국 화석지  하이면 덕명리의 고생물 화석 산출지(천연기념물 제411호)는 중생대 백악기 공룡발자국 화석산지로 양적으로나 다양성에 있어서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곳으로서 브라질, 캐나다과 함께 세계 3대 공룡발자국 화석지로 인정받고 있다. 다양한 퇴적구조를 보이는 이곳에서는 1억2천만 년 전 생물의 생활흔적이 많이 나오고 있어, 공룡의 생활상, 자연환경, 퇴적환경, 해륙분포, 새의 진화과정 등을 알 수 있는 학술적으로 귀중한 화석지다. 해안을 따라 약 41km에 걸쳐 1,900여 족 이상 되는 공룡발자국은 용각류, 조각류, 수각류 등으로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  상족암 군립공원
  덕명리 공룡발자국 화석지 근처의 상족암은 기묘한 바위와 괴상하게 생긴 돌, 바닷물에 깎여 생긴 해식동굴 등 해안 경치가 뛰어나다. 이곳은 바위가 밥상다리 모양을 하고 있다는 데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고, 쌍족(雙足) 또는 쌍발이라고도 한다. 해식동굴 안에는 태고 때 선녀들이 내려와 옥황상제에게 바칠 금의를 짜던 곳이라는 전설이 있는 베틀 모양의 바위가 있고, 암반에는 공룡발자국이 남아 있다.

  물이 들면 발자국 화석을 구경하기 어려우므로 가기 전에 물때를 확인해보는 게 좋다. 썰물이 되면 촛대바위에서 아담한 몽돌 해안을 지나 상족암까지 거닐면서 공룡발자국과 어우러진 바다 풍광을 여유 있게 즐길 수 있다. 고성군 홈페이지(

www.goseong.go.kr

)에 접속하면 상족암 인근의 공룡발자국 화석지는 물론 고성 전역의 화석지 물때를 알 수 있다. 하이면사무소(055-670-2491)에 문의해도 공룡발자국 관찰이 가능한 물때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  고성 공룡박물관 
  하이면 덕명리의 공룡박물관은 상족암 군립공원 위쪽 언덕에 2004년 설립한 공룡 전문 박물관이다. 이곳에는 공룡 전신골격 복제품, 익룡 전신골격 등 공룡진품 7점, 복제 37점, 일반화석 108점, 모형 공룡 17점 등 총 169점이 전시되어 있다.

  1층은 백악기공원, 디노랜드, 과거의 흔적, 뮤지엄숍으로 구성되어 있다. 백악기 공룡공원, 초식·육식동물의 삶, 공룡시대의 동반자들, 시대별 화석, 화석 발굴현장 등을 볼 수 있다. 2층은 공룡의 수도, 고성의 공룡 발자국을 볼 수 있다. 3층에는 발자국 화석지와 화석 등이 전시되어 있다. 야외에는 길이 34m, 너비 8.7m, 높이 24m의 브라키오사우루스를 형상화한 공룡탑이 서있다. 여기서 상족암으로 이어지는 탐방로를 따라 10분쯤 걸어가면 해안가의 상족암까지 갈 수 있다.

  관람 시간은 3~10월에는 09:00~18:00, 11~2월에는 09:00~17:00다. 매주 월요일과 추석·설날에는 문을 닫는다. 요금은 일반 3,000원, 어린이 1,500원. 주차료 승용차 기준 2,000원. 전화 055-832-9021,

www.goseong.go.kr/dino



◆ 상족암 유람선  유람선을 타면 공룡발자국 화석이 있는 상족암 일대의 정취를 만끽하면서 남해안 한려수도 호수 같은 고성만과 자란만의 수려한 자연경관도 해상에서 감상할 수 있다. 고성읍 남포항과 하이면 덕명항에서 출발한다. 요금 공룡22호, 공룡33호는 1시간 코스. 대인 12,000원, 소인 6,000원, 2시간 코스 대인 15,000원, 소인 7,500원. 청일호(고급 요트형) 제1~8코스(1시간30분 소요) 대인 50,000원, 소인 25,000원. 고성유람선 전화 1588-8678, 055-672-1775, 상족암유람선 전화 1588-8678, 055-832-0552.

◆ 당항포 국민관광지   회화면 당항리 해안에 있는 당항포는 1592년과 1594년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을 앞세우고 두 차례에 걸쳐 왜선 57척을 격침시킨 현장이다. 이 당항포해전을 기념하기 위하여 관광단지가 마련되어 있다. 관광단지 안에는 충무공 영정과 위패를 모신 송충사와 높이 20m의 전승기념탑, 현충탑, 기념관 등이 있다. 당항만을 따라 이어진 숲 주변에는 각종 놀이시설과 장승촌·산책로·동물원·삼림욕장·야영장·캠프파이어장 등의 시설도 갖추고 있다. 또한 단지 외곽에는 해수풀장과 모터보트장이 있어 수상스키나 수상오토바이·윈드서핑 등의 해양스포츠를 즐길 수 있고, 동물의   박제, 공룡알, 어패류의 화석 등을 전시하는 자연사박물관도 있다.

  관광지 입장료 일반 4,000원, 청소년 2,400원, 어린이 1,000원. 공룡엑스포주제관은 따로 입장료(일반 3,000원, 청소년 2,000원, 어린이 1,500원)를 내야한다. 주차료 승용차 1,500원. 전화 055-670-2800~2.

◆  고성 탈박물관   고성읍 율대리에 있는 탈박물관은 여러 종류의 탈을 전시하고 있는 전문박물관이다. 1988년 갈촌 탈박물관으로 시작하여 2005년 고성군립 박물관으로 재개관하였다. 전국 각지의 신성탈(얼굴에 착용하기 이전의 탈)과 예능탈(무형문화재 탈)을 비롯하여 그림으로 된 그림탈, 문자가 들어 있는 문자탈, 자연적으로 생겨난 자연탈 등을 전시해 놓았다. 전시관에는 갈촌 이도열 선생이 갈촌탈박물관을 경영하면서 수집, 기증한 한국 탈 100점과 고성군이 구입한 세계 탈 100점 등 총 450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 현재 한국에서 발굴된 가면으로는 가장 오래된 목심칠면도 함께 전시되어 있다. 관람시간은 10:00~17:00. 요금은 일반 2,000원, 청소년·어린이 1,000원. 매월 둘째 넷째 주 토요일에는 탈만들기 체험교실(1인당 4,000원)이 열린다. 전화 055-672-8829.

◆  연화산 도립공원  개천면에 있는 연화산(蓮花山·528m)은 산세가 연꽃과 닮았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원래는 이 산 동북쪽에 선유(仙遊), 옥녀(玉女), 탄금(彈琴)의 세 봉우리가 둘러있어 마치 선인이 거문고를 타고, 옥녀가 비파를 다루고 있는 형국이라 하여 비슬산(琵瑟山)으로 불렸으나 조선 인조 때 지금의 명칭으로 바뀌었다. 옥녀봉·선도봉·망선봉의 세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리 높지 않지만 울창한 숲과 깊은 계곡 등 자연 경관이 수려해 많은 등산객이 찾는다. 산 북쪽 기슭에는 옥천사를 비롯해 백련암(白蓮庵)·청련암(靑蓮庵)·연대암(蓮臺庵) 3개 암자가 있다.

◆  고성오광대
  오광대는 낙동강 서쪽의 남부지역에서 연희되는 탈춤을 가리키는 말로, 경남 합천군 덕곡면 율지리 초계 밤마리 마을 장터에서 놀던 광대패들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한다. 오광대란 다섯 광대, 또는 다섯 마당으로 이루어진 놀이라는 뜻에서 비롯된 이름이라고도 하고, 오행설(五行說)에서 유래된 오(五)에서 온 것이라고도 하는데,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오행설 의견이 유력하다. 전에는 정월 대보름을 중심으로 행해졌으나 현재는 봄, 가을에 오락적인 놀이로 공연되고 있다. 고성 일대에서 공연되고 있는 고성오광대(固城五廣大·중요무형문화재 제7호)는 1910년경에 남촌파(南村派) 서민들이 통영오광대를 보고 시작하였고, 그 뒤에 창원오광대의 영향을 받으면서 오늘날과 같은 탈놀이로 성장한 것이라 한다.

◆  옥천사   개천면 북평리 연화산 북쪽에 있는 옥천사는 670년(신라 문무왕 10)에 의상(義湘·625-702)이 창건하였다. 중국 당나라에 가서 화엄종의 시조 지엄(智儼)에게 화엄학을 배우고 돌아온 의상이 강론한 곳으로서 화엄 10대 사찰로 꼽힌다. 대웅전 뒤에 맑은 물이 나오는 샘이 있어 옥천사라고 했다고 한다. 이곳에는 임자명 반자(보물 제495호),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대웅전, 자방루, 향로, 반종들과 조형미가 빼어난 청담 스님의 사리탑이 있다. 부속 암자로는 청연암, 백연암, 연대암이 있다.  전화 055-672-0100,

www.okcheonsa.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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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천사 임자명 반자  반자란 절에서 사용하는 일종의 타악기로서 대중을 불러 모으거나, 급한 일을 알리는 데 사용한 도구다. 금속으로 만들었기에 금고(金鼓)라고도 한다. 옥천사의 임자명 반자(壬子銘 飯子·보물 제495호)는 1252년(고려 고종 39)에 제작된 동제(銅製)의 일반형 반자로서, 무늬가 뚜렷하고 손상이 없으며, 옆면의 글을 통해 만든 시기와 유래, 관계자의 성명을 알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자료다. 크기는 구경 42cm, 중량 60kg이다. 이 반자는 원래 지리산 안양사의 것이었는데, 언제부터인지 옥천사에서 보관하고 있다.

◆ 옥천사 자방루
  옥천사 자방루(慈芳樓)는 신도들에게 설법하거나 행사 때 쓰이는 기구 등을 보관하는 장소로 사용되던 누각이다. 앞면 7칸·옆면 3칸의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 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가 기둥 위에만 놓인 주심포계 건물이다. 사찰 누각으로서 대단히 큰 규모를 가진 자방루는 우아한 건물로 이 절의 품위를 한층 더 높이고 있다. 

◆ 옥천사 향로  옥천사 향로는 높이 23㎝, 입 지름 27.5㎝인 청동으로 만들어진 조선시대 향로다. 입 주위에는 넓은 테를 가진 전이 있으며, 안쪽으로 ‘의령수도사’라고 점선으로 새긴 글자가 있다. 향로 몸체의 둘레에는 4곳에 꽃 모양으로 창을 만들고, 그 안에 봉황을, 남은 공간에는 빈틈없이 덩굴무늬를 새겨 넣었다. 아랫부분의 받침대에는 문양이 없고, 그 형태가 몸체와 균형이 맞지 않으며, 1816년(조선 순조 16)에 보수하였다. 이 향로는 무늬를 먼저 새긴 다음 은으로 입히는 방법을 사용하여 문양을 만들었으며, 표충사 은입사 향로와 같은 수법을 보여주는 우수한 작품이다. 고려 후기에서 조선 전기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 옥천사 대종
  옥천사 대종은 조선시대 청동으로 제작한 종으로 높이 110㎝, 입 지름 82.5㎝다. 종을 매는 용뉴에는 두 마리의 용이 서로 등지고 앉아, 여의주를 물고 하늘로 오를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종의 위쪽 띠에는 2자씩으로 연결된 80여 자의 범자가 새겨 있으며, 아래쪽 띠에는 연꽃 덩굴무늬가 새겨 있다. 덩굴무늬 유곽 안에는 9개의 도드라진 유두가 있으며, 유곽과 유곽 사이에는 삼존불이 양각되어 있다. 아래쪽 띠 위편에는 ‘건륭 41년’으로 시작되는 글이 있어, 1701년(조선 숙종 27)에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종은 진주 민란 때에 파열된 것을 수리하였다.

◆ 운흥사  와룡산 중턱에 있는 운흥사(雲興寺)는 676년(통일신라 문무왕 16)에 의상대사가 처음 지었다고 전한다.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승병을 이끌고 이곳에서 왜적과 싸웠다고 한다. 대웅전은 이 때 불타 없어졌고, 1731년(영조 7)에 다시 지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운흥사 대웅전은 앞면 5칸, 옆면 3칸의 규모의 맞배지붕집이다. 지붕을 받치면서 장식하는 공포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배치된 다포식이다. 대웅전 내부에는 괘불(경남 유형문화재 제61호)과 조선 후기에 제작한 경판(경남 유형문화재 제184호) 등이 보관되어 있으며, 불단의 조각이 특히 화려하다.

◆  운흥사 괘불탱 및 궤
  운흥사 괘불탱 및 궤(보물 제1317호)는 서 있는 모습의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여러 존상을 화면 가득 그린 영산회 괘불탱과 그 괘불을 보관하는 궤다. 괘불탱은 1730년(조선 영조 6)에 승려화가 의겸 등에 의해 그려졌다. 신체비례가 적당한 인물의 형태와 이목구비의 표현, 조화롭고 밝은 색채의 사용, 세련된 필치의 화려하고 정교하고 다양한 문양, 주된 인물을 중앙에 크게 그린 다음 기타 인물을 뒤로 물러나게 배치하는 구도법 등은 의겸의 특징적인 표현수법으로서, 진주 청곡사 영산회 괘불탱(국보 제302호)과 비교해 보아도 손색이 없다.

  괘불을 보관하는 궤는 뚜껑 윗부분 일부가 결손된 것 외에는 보존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괘불탱 조성 1년 뒤인 1731년(조선 영조 7)에 만들어진 이 궤는 정교하고 다양한 형태의 금속장식도 당시의 금속공예 연구에 귀중한 예라 할 수 있다.

◆  고성 장산숲
  마암면 장산 마을에 있는 고성 장산(章山)숲은 약 600년 전 조선 태조 때 호은 허기 선생이 마을의 지형적 결함을 보완하기 위하여 조성한 숲이라고 전해진다. 처음에는 길이가 1km에 달했다고 하지만 지금은 길이 100m, 폭 60m 정도만이 남아있다. 숲에는 느티나무, 서어나무, 긴잎이팝나무, 소태나무, 검노린재나무, 배롱나무, 쥐똥나무 등 250여 그루가 울창하게 자라고 있다. 연못은 조선 성종 퇴계의 제자였던 허천수가 만들었다고 한다. 연못 중앙에는 조그만 섬이 있다.

◆ 고성 송학동 고분군  고성 송학동 고분군(사적 제119호)은 고성읍 무기산을 중심으로 뻗어나간 구릉 주변에 있는 7기의 가야 무덤이다. 이 지역에서 북쪽으로 300m 거리에 기원리 무덤들이 있고, 동쪽으로 300∼400m 거리에 송학동 조개더미가 있어, 삼국시대 소가야국의 자리를 나타내주고 있다. 만들어진 시기는 서기 400년을 중심으로 앞뒤 50년의 범위를 넘지 않을 것으로 추정된다. 송학동 무덤은 동외동 조개더미의 초기 철기시대를 뒤이은 후대 문화를 대표하는 가야 문화 유적으로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자료다.

◆ 고성 내산리 고분군
  고성 내산리 고분군(사적 제120호)은 고성군 내산면의 성산을 배경으로 해안을 바라보는 낮은 언덕과 평지에 모여 있는 가야 무덤이다. 이곳에는 100여 기의 무덤이 있었다고 전해지나 현재 60여 기만 남아있다. 봉토의 지름이 10m 안팎인 것이 40여 기, 15m 이상의 것이 20기 정도 있다. 내부시설은 구덩이식 돌널무덤(수혈식 석곽묘)으로 가야지역의 일반적 형식을 따르고 있다. 경질토기와 철기류가 출토되었고, 부근에서 회청색 경질토기편이 채집되어 대략 6세기경 유적지로 추측된다. 이곳은 고성만의 출입구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고분군을 축조한 세력은 고성읍에 실재하였던 고자국(古自國)과 소가야(小伽倻)의 관문을 지키는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 계승사 백악기 퇴적구조
  고성군 영현면 대법리 계승사 백악기 퇴적구조(천연기념물 제475호)는 중생대 백악기 시대에 형성된 연흔(漣痕·물결 자국), 우흔(雨痕·빗방울 자국), 공룡발자국 화석, 그리고 퇴적 층리(層理) 등이 경내 곳곳에 분포되어 있다. 연흔은 가장 큰 것은 가로 13.5m, 세로 7m에 이르며 보존 상태도 우수하다. 이밖에도 전형적인 형태의 빗방울 자국, 퇴적구조 층리와 용각류(4족 보행, 초식)·수각류(2족 보행, 육식)로 추정되는 공룡발자국 화석 등이 나타나고 있어 고환경을 해석할 수 있는 중요한 학술연구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 소을비포 성지   하일면 동화리의 소을비포 성지(所乙非浦 城址)는 소을비포에 적을 막기 위해 임시로 쌓은 성이다. 세종실록에 소을비포에 대한 기록이 처음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이전에 이미 성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낮은 야산에 해안 경사를 따라 둥근 형태로 성을 쌓았는데, 성벽은 자연석을 이용하여 쌓았다. 커다란 바위돌을 이용하여 담장 형태로 쌓았으며, 큰 돌을 쌓을 때 생기는 공간은 작은 돌로 채워 흔들리지 않게 고정하였다. 남쪽으로 사량도가 막고 있어 태풍의 피해가 전혀 없기 때문에 어선의 대피소로 활용되고 있다.

◆  마암면 석마 
  고성군 마암면 석마리의 석마(石馬)는 마을 입구의 당산나무 옆에 자리하고 있는 것으로, 화강암으로 깍아 만든 2구의 말(馬) 조각상이다. 마을에서는 ‘마신’, ‘마장군’이라 부르기도 한다. 길이는 각각 1.5m, 2.1m, 높이는 45㎝, 50㎝로, 암수 한 쌍인 듯 보이나 구별할 수는 없다. 상고시대에 만들었다고 전하는데,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다.

  마을에서는 매년 음력 정월 보름 새벽 1시에서 2시 사이에 동제를 지낸다. 밤에 돌말 앞에 콩 한 말을 바치고 다음날 다시 거둬들이는 형태로, 다른 동제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예다. 또한 말의 영혼에게 보내는 축문을 읽으며 마을의 평화를 기원하는 점도 특색이 있다. 말을 숭배하는 것은 유목민족에게 강하게 나타나는 전통으로, 우리나라에서는 동제의 일부로 더러 섬기지만, 이처럼 동제의 주신으로 섬기는 예는 매우 보기 드물다.

◆  봉동리 배씨 고가
  회화면 봉동리의 배씨 고가는 19세기 말엽에 건립된 초가다. 대략 안채는 1880년대, 아래채는 1920~30년대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안채는 앞면 2칸·옆면 1칸 크기로 옆면과 뒷면 벽채는 막돌을 쌓고 틈은 진흙으로 메웠다. 아래채는 앞면 3칸·옆면 1칸 크기로 앞쪽 반칸에 툇마루와 아궁이를 놓았다. 가운데 칸이 온돌방이고, 양쪽 칸은 헛간이다. 안채는 민가의 가장 원시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

◆  고성성지
  고성 성내리의 고성성지(固城城址)는 가야 말로왕의 왕궁터로 전해지고 있는 옛 성터다. 동국여지승람에는 둘레 3,524척, 높이 15척이며, 우물이 14개, 연못이 1곳 있다고 전하지만 거의 훼손되었고,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은 고성읍성과 왜성터의 일부다. 전체적인 구조나 규모를 알기 어렵지만, 주변에 있는 송학동고분군(사적 제119호)이나 고성 동외리 조개더미, 만년사 토성과 관련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 거류산
  고성 동쪽의 거류면에 솟은 거류산(570.5m)은 고성의 진산이다. 고성벌판과 당동만, 당항만으로 둘러싸인 이 산은 산세가 아름다워 고성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고성 전역과 한려해상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산정에는 2천여 년 전 소가야 때 신라의 침공을 막기 위해 쌓은 거류산성의 흔적이 남아 있다. 등산코스는 엄홍길전시관이 있는 월치 코스를 비롯해 거류면사무소쪽에서 오르는 당동 코스, 장의사 코스, 감동 코스가 있다. 모두 2~3시간 정도면 다녀올 수 있다.

◆  박진사 고가
  개천면 청광리의 박진사 고가는 밀양 박씨의 옛집으로 조선시대 사대부 가옥의 형태를 잘 갖추고 있는 전통한옥이다. 조선 후기에 지어져 일제강점기에 대규모로 고쳐 지은 이 가옥은 실용성과 전통성이 잘 조화되어 조선 후기 건축의 변천 연구에 귀중한 자료다. 안채와 사랑채 2동, 곡간채 2동, 대문간채로 구성되어 있으며 담장이 잘 보존되어 있다. 대문에는 효자정려 현판이 붙어 있다.

  앞면 5칸·옆면 2칸의 안채는 부엌, 방, 대청, 갓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안채를 중심으로 동쪽에 담장을 둘러 별당처럼 안사랑채를 배치하였고, 중문간채를 바깥사랑채로 이용하였다. 중문에서 안채가 직접 보이지 않도록 담장을 둘렀다. 집 주위로는 전체적으로 높은 담장을 두르고 있는데 기와조각을 섞어 모양을 내었다. 전통한옥 체험형 숙박시설로 민박이 가능하다. 숙박시설로는 안채와 사랑채 2동 등 14개의 크고 작은방을 갖췄다. 전화 055-674-1222

◆  엄홍길전시관
  고성은 히말라야 14좌를 오른 산악인 엄홍길의 고향이다. 고성군에서는 세계적인 산악인을 배출한 고장임을 알리고, 엄홍길씨의 도전정신을 기리고 청소년들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엄홍길전시관을 지었다. 엄홍길이 기증한 개인 소장품인 텐트, 카메라, 등산화 등 모두 50여 종의 등산장비를 전시할 예정이다. 엄홍길전시관은 ‘산사나이 엄홍길’, ‘신의 영역,히말라야’, ‘14좌 완등의 신화’, ‘함께하는 히말라야’ 등의 전시영역으로 구분돼 있으며 수장고 등 부대시설도 갖추고 있다. 또 전시관 부근에는 인공암벽과 공연장, 등산로 등도 만들어진다. 개장을 앞두고 현재 마무리 작업에 한창이다.

◆  고성시장
  고성읍내에 있는 고성시장은 경남에서 규모가 큰 5일장(1, 6일)에 속한다. 청정해역과 산지에서 생산되는 농수축산물, 생활 잡화 등 값싸고 우수한 품질의 먹거리가 많다. 20여 동의 주상복합형 건물 사이로 장이 형성되어 있어 한 바퀴 도는 데도 1시간 정도 걸린다. 어물전은 고성장에서 가장 유명하다. 생선만 취급하는 상인이 40명으로 조합이 구성되어 있다. 대부분 30~40년간 해왔으며 대를 이어서 하는 사람도 있다. 고성시장은 2005년과 2006년 전국 우수시장 박람회에서 2년 연속 우수시장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길에서 만난 별미

◆  도다리 쑥국
  우선 고성은 갯장어가 유명하다. 일본어로 ‘하모’라 불리는 이 고기는 고성 앞바다의 자란만에서 많이 잡히는데, 회·구이·매운탕·죽 등으로 요리해 먹는다. 쫄깃쫄깃 씹히는 육질의 맛도 아주 좋아 대부분 일본으로 수출된다. 그렇지만 갯장어는 아쉽게도 여름이 제철이다. 또 고성 대하도 있으나 이는 가을철에 많이 나온다. 그렇다면 요즘 같은 봄철엔 무엇이 있을까. 바로 ‘도다리 쑥국’이다.

  도다리는 넓적한 생김새가 광어와 비슷하지만, 두 눈이 모두 오른쪽에 붙어있는 바닷고기다. 미식가들이 흔히 ‘봄 도다리, 가을 전어’라고 할 정도로 봄철에 제맛을 낸다. 산란기가 지난 도다리는 봄이 되면 육질이 점차 단단해지기 때문에 씹는 맛이 어느 때보다 좋고 고소해서 국은 물론 회로도 아주 그만이다.

  고성과 인근의 통영을 비롯한 남해안 지방에선 봄철이 되면 이 도다리로 국을 끓이면서 여기에 봄 향기 가득한 쑥을 넣는다. 바닷바람이 불어대는 해안 언덕에서 자란 쑥은 아주 향기롭다. 야들야들한 도다리 살로 맛깔스러운 국물을 우려낸 봄 도다리 국에 봄내음 향긋한 바다 쑥을 넣으면 그야말로 환상의 조화를 이룬다. 고성의 해안가 주변의 횟집에서도 봄이 되면 도다리 쑥국을 내놓는다. 고성읍 수남리의 남포항 횟집촌에 광어생각(055-673-9799) 등 횟집이 여럿 있다. 보통 1인분에 10,000원 정도 한다.

일정별 길라잡이

  고성은 공룡발자국 화석이 발견된 상족암권, 이순신장군이 왜적을 무찌른 현장인 당항포권, 고성읍의 중심인 고성읍내권, 옥천사가 있는 연화산권역 이렇게 4개 권역으로 나눌 수 있다.

● 상족암권  적지 않은 사람들이 공룡발자국 화석을 볼 수 있는 이곳을 고성 관광의 전부로 여길 정도로 고성에서 가장 인기 있는 곳이다. 공룡박물관이 언덕 위에 위치하고 있다. 학동 옛돌담길, 소을비포 성지, 운흥사 등이 이 권역에 속한다.

● 당항포권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의 함대가 왜적을 두 번이나 무찌른 호국의 현장인 당항포관광지엔 당항포해전에 관계된 볼거리가 많다. 또 공룡엑스포가 열렸던 현장으로서 여러 테마별로 즐길 거리도 많다. 당항만 주변으로 드라이브를 즐기며 아름다운 해안 경관을 감상할 수도 있다. 내산리 고분군을 비롯해 여러 공룡발자국 화석지가 흩어져 있다. 당항만 입구의 동진교 부근에선 바다낚시도 즐길 수 있다.

● 연화산권  고성 북서쪽에 솟은 연화산 주변의 관광지로 천년고찰 옥천사가 있다. 입구의 공룡발자국 화석지를 비롯해 개천면 청광리의 박진사 고가, 마암면의 석마, 장산숲, 영현면의 계승사 등도 이 권역에 넣을 수 있다.

● 고성읍내권  고성의 중심지로서 고성오광대에 대해 살필 수 있는 고성탈박물관, 가야시대 무덤인 송학동 고분군이 대표적이다. 읍사무소 뒤편의 고성시장(1, 6일장)도 꼭 한번 들러봐야 할 곳으로 꼽힌다.

일정짜기

● 당일  수도권이라면 왕복 최소 9시간이 걸리므로 사실 당일 일정으로는 무리다. 그렇지만, 다른 곳 욕심 내지 않고 오로지 공룡발자국 화석지만 돌아본다면 불가능한 일정은 아니다. 또 조금 서두르면 당항포관광지도 둘러볼 수 있다.

● 1박2일  아주 넉넉하진 않아도 첫날 정오 무렵에만 도착한다면 고성의 대표적인 관광지를 몇 곳 둘러볼 수 있다. 우선 공룡발자국 화석이 있는 상족암 군립공원과 당항포 관광지는 꼭 들러야 한다. 이외에도 연화산 옥천사, 고성탈박물관, 계승사도 빼놓을 수 없다. 당항만 해안도로 드라이브도 해보는 게 좋다. 추천 일정은 다음과 같다. 연화산 나들목~옥천사~당항포관광지~(숙박)~당항만 드라이브~고성 탈박물관~상족암 군립공원~공룡박물관~귀가. 다만 상족암의 공룡발자국을 볼 수 있는 물때에 따라 일정을 조정해야 한다.

● 2박3일  이 정도면 그나마 여유롭게 고성을 둘러볼 수 있다. 공룡박물관의 여러 체험, 탈박물관의 탈만들기 체험, 당항포의 여유로운 산책, 당항만 드라이브나 낚시 등을 다양하게 곁들일 수 있다. 숙박은 상족암 주변, 당항포 입구에서 하는 게 무난하다.

교통

● 접근 드라이브코스
  대전-통영간 고속도로가 고성군 중앙을 관통하기 때문에 접근이 쉬운 편이다. 연화산·고          성·동고성 이렇게 3개의 나들목이 있으니 목적지에 따라 선택하면 된다.
  * 수도권  경부고속도로→대전-통영간 고속도로→고성 나들목→14번 국도→고성 <서울          서 4시간30분 소요>
  * 영남권  부산→남해고속도로→서마산 나들목→14번 국도→고성 <1시간 30분 소요>   * 대구→ 중부내륙고속도로→남해고속도로→대전-통영간 고속도로→고성 나들목→14        번 국도→ 고성<2시간 소요>
  숙식(지역번호 061)

● 상족암권  상족암 군립공원 입구에 돌고래횟집(834-5932), 쌍발횟집(834-5745), 공룡횟집(834-5646) 등이 있다. 입구 언덕의 용모텔(834-6224~5) 근처엔 1층은 식당, 2층은 레스토랑인 용가든(834-5778)도 있다. 민박을 하려면 용골민박(832-3489) 제전민박(834-6223) 해변민박(834-5482)을 이용한다. 하일면 동화리엔 노을민박(673-1577), 동해민박(673-1588), 숙이민박(834-5819), 쌍발민박(834-5745) 등이 있다. 상리면 동산리 문수암 가는 길엔 펜션 구름위의 산책(673-9113)이 있다.

● 당항포권  당항포 주변에 오아시스여관(672-3383), 리베모텔(673-3441) 등의 숙박시설이 많다. 횟집도 여럿 있다. 민박집은 제2주차장 근처에 있는 황토랑민박(672-9533), 히딩크민박(673-4965)을 이용한다. 관광지 안에 백반류를 차리는 월이주막이 있다.
동해 일주도로엔 공룡모텔(672-9758), 비너스모텔(672-9769), 성나루모텔(673-8838), 동해면 해맞이공원 맞은편에 씨사이드모텔(672-0102) 등이 있다. 동해면 외산리엔 목향펜션(011-582-9160), 선창민박(019-314-5275), 한마루민박(010-4748-85226) 등이 있다.

● 연화산권  영오면 오서리의 베니스모텔(674-4101), 개천면 북평리 에쿠스모텔(672-8580), 청광리의 박진사고가민박(674-1222) 등이 있다.

● 고성읍내권  고성 읍내 프린스호텔(673-7477)에는 인터넷이 설치되어 있다. 궁전모텔(674-2010), 그린모텔(674-6233), 신월리 해수탕 근처에 스위스해수모텔(673-2929) 등이 있다.

 

 

 

<출처> 2007. 4 / 월간산 45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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