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 세병관
삼도수군통제영의 중심 건물
- 눈 아래 통영의 강구만이 한 눈에 -
글·사진 남상학
통영은 통제영의 약칭으로, 곳곳에 통제영의 문화와 이충무공과 관련된 유적들이 많다. 통제영은 삼도(三道)수군통제사가 작전을 지휘하던 본영으로, 임란 당시 초대 통제사로 제수된 이 충무공의 한산 진영이 최초의 통제영이다. 임진왜란 이듬해인 선조 26년(1593년) 삼도수군통제사 직제를 새로 만들어 전라좌수사에게 겸임케 한 것이 통제사의 효시다.
정유재란으로 한산진영은 물론 전라좌수영마저 폐허가 되자 통제영은 전세(戰勢)에 따라 옮겨 다니는 등 한동안 제자리를 찾지 못했다. 선조 36년(1603년) 6대 이경준 통제사가 통제영을 통영항 일대로 옮기기로 하고 세병관과 백화당 등 일부 관아를 예비로 세우고, 이듬해 본영을 옮긴 뒤 세병관을 중심으로 수많은 관아들이 점차 자리를 잡았다. 1896년 폐영(廢營)될 때 까지 293년 동안 삼남을 호령한 조선 수군의 본영이었다.
망일루 옆으로 수항루(受降樓)가 보인다. 수항루는 임진왜란의 승첩을 기념하기 위해 숙종 3년(1677)에 세운 누각이나 일제 때 훼철되었다. 본래 이 건물은 한일은행 근처에 있었으나 이 일대는 번화가여서 부득이 통제영의 본관인 세병관 경내로 1987년 이전 복원하였다.
따라서 이순신과 관련된 역사적 현장을 살펴보면, 한산대첩에서 대승을 이룬 한산도 일원을 들 수 있으며, 임진왜란 및 통제영 산하 12공방 관련 자료, 이충무공과 관련된 자료를 접할 수 있는 향토역사관, 그 맞은편에 현존하는 조선시대 3도(경상·전라·충청도) 수군의 본영 세병관과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위훈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 세운 사당인 충렬사, 그리고 당포승첩의 승전고를 울린 유서 깊은 역사의 현장 당포성지 등 통영은 어디를 가나 이충무공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통영시 문화동에 있는 세병관은 조선시대 군사 목조건물로 국보 제305호로 지정되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충무공 이순신(1545∼1598) 장군의 전공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세병관은 수군통제사 이경준(李慶濬)이 한산도의 본영(통제영)을 두룡포(통영의 옛 이름)로 옮긴 이듬해인 선조 37년(1604)에 완공한 이후 약 290년 동안 3도(경상·전라·충청도) 수군을 총 지휘했던 수군통제영(지금의 작전사령부)의 중심건물이다. 조선 수군은 1895년 일본에 의해 강제로 해체됐고, 209대 홍남주 통제사를 마지막으로 통영 시대는 끝났다.
몇 차례의 보수를 거치긴 했지만, 오늘날의 세병관은 1646년 제35대 통제사인 김응해가 규모를 더 키워 지은 것이라 전한다. 일제시대에는 잠간 초등학교 교사로 쓰이기도 했으며, 1973년 보수와 주변을 정화하였다.
건물의 기단은 장대석을 바른 층쌓기를 하여 2줄로 쌓았다. 그 장대석 기단 위에 앞면 9칸, 옆면 6칸 규모의 웅장한 건물로,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건물 내부 바닥에는 우물마루를 깔았는데, 중앙 뒷면에 약 45㎝ 정도 높은 단을 설치하여 궐패(闕牌)를 모시는 공간을 마련하였다. 그 위에 홍살을 세웠고 후면 내진주열 중방 하부에 머름을 설치하여 분합문을 달고 중방 위는 판벽으로 마감하여 무인 그림을 그렸으며 천장에는 소란반자를 설치하였다.
현재는 사방이 개방된 구조이지만 원래는 평면의 기능에 따라 벽체가 있었다. 기둥 위에 짜여진 공포(栱包)는 익공계에 가까운 1·2제공으로 포작을 구성하고 있으며 첨차하부는 익공계 포작수법을 많이 따르고 있다. 각 주칸에는 화려한 화반이 놓여 있고 내부 천장은 모로단청 수법을 볼 수 있는 연등천장이다.
팔작지붕에 용마루, 합각지붕, 추녀마루의 형세가 좌우로 균형적이고 선이 아름답다. 합각 부분에는 석간주로 장엄되어 있고 합각 박공판 부분에 박혀 있는 사각형의 못이 장식적이다. 용마루 아래의 흰 양성(兩城)이 전체적으로 건물을 더욱 멋들어지게 한다. 4곳의 추녀 끝에는 귀면을 한 토수가 자리 잡고 있다. 처마는 겹처마를 하고 있으며 추녀는 활주를 세워 떠받치고 있다.
세병관의 공포는 기둥 위에만 배치되어 있어 이익공(二翼工) 형식과 비슷하다. 쇠서(牛舌) 형태는 다포 계통이다. 모두 화려한 단청이 장엄되었다. 특히 창방과 평방 사이에는 벽이 없으며 단지 창방 위에 화반(花盤)을 받쳐 놓았을 뿐이다. 화반의 단청은 내부와 외부가 각각 다르다. 외부의 화반 면(面)은 각종의 색과 문양으로 도색되었으나, 내부의 화반 면은 당초 문양으로 도색되었다.
내부 포벽은 내부 4면의 기둥과 기둥 사이 포벽에는 행적도(行蹟圖)나 전기화(傳記畵)와 같은 그림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각 기둥 사이에 그림들은 각각 3폭씩 갖추어져 있다. 화면 하나하나 내용을 가지고 있는 듯 하며, 모두 흰 배경을 가지고 있고 세심한 기법을 사용하였다.
세병관 중앙에는 그 웅장한 규모에 걸맞게 커다란 현판 ‘세병관(洗兵館)’이 중앙 창방에 걸려 있다. ‘세병관’이라 함은 "어찌 하면 장사를 얻어서 하늘에 있는 은하수를 끌어와 갑옷과 병기를 깨끗이 씻어서 다시는 전쟁에 쓰이지 않도록 할까"라는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의 시에서 '병기를 깨끗이 씻는다(挽河洗兵)'라는 뜻을 지닌 한자말인 '세병(洗兵)'을 따다가 그 이름을 붙인 것으로 우리 민족의 평화애호사상을 잘 드러내고 있다.「洗兵館」이라 크게 써서 걸어 놓은 현판은 제136대 통제사 서유대(徐有大)의 글씨라 전한다.
원래는 앞뒤에 많은 건물이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없어지고 이 건물만 유일하게 남아 있다17세기 초에 세운 목조단층 건물로는 여수 진남관에 버금가는 규모를 갖고 있으며 학술적·예술적 가치도 뛰어난 건물이다. 한때 통영초등학교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293호로 지정되었다가 2002년 10월 국보 제305호로 승격 지정되었다.
* 망일루(望日樓) - 광해군 3년(1611년) 제10대 우치적(禹致績) 통제사가 세운 통제영의 종루로서 화재로 다시 복원하였으나 훼파되어 2000년 10월 통영시에서 다시 복원하였다. 세병관으로 들어가는 첫번째 건물
* 지과문 - 제35대 김응해 통제사가 건립한 세병관의 출입문
* 세병관 경내, 수향루 뒤편 팔작지붕 비각 안에 두룡포기사비가 있는데 이 비석은 이경준 제6대 통제사가 이 고장에 삼도수군통제영을 설치한 치적을 새겨놓은 사적비다. 이 비는 인조 3년(1625) 구인후 제 19대 통제사가 세운 것이다.
* 세병관 담 옆으로 역대 통제사들의 송덕비군이 줄비하다
<끝>
'국내여행기 및 정보 > - 부산. 경남' 카테고리의 다른 글
통영 미륵도, 환상적인 일주도로와 달아공원에서의 조망 (0) | 2008.02.01 |
---|---|
통영 충렬사, 이충무공의 유업을 기리는 사당 (0) | 2008.01.30 |
경남 산청, 한방으로 후끈후끈 숯가마로 뜨끈뜨끈 (0) | 2008.01.26 |
해운대 달맞이고개, 신세대 취향의 낭만과 문화의 거리 (0) | 2007.11.24 |
동백섬, 바다와 어우러진 부산시민의 휴식처 (0) | 2007.11.23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