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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충청남도

묵향(墨香) 그윽한 추사고택(秋史古宅)과 백송

by 혜강(惠江) 2007. 4. 9.

 예산 추사고택과 백송

 

묵향(墨香) 그윽한 추사고택(秋史古宅)

 

 

·사진 남상학

 

 

 

 

  만해와 김좌진, 윤봉길을 비롯해 무수한 애국지사를 배출한 충절의 고장 예산은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기도 하다. 신례원에서 당진으로 가다보면 사과향기 가득한 들판 한쪽에 추사고택(충남 유형문화재 43호) 이정표가 있다. 이정표를 따라가면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 위치하고 있는 추사 김정희 선생의 주택을 만난다. 


 
 추사 김정희는 조선후기의 학자 · 서화가 · 금석학자로 이름을 날린 분이다. 1786년 6월 3일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서 영조의 부마이신 월성위(月城尉) 김한신(1720-1758)의 증손이며, 병조참판인 김로경의 아들로 태어나 백부 김로영에게 입양되었다. 호는 추사(秋史) 또는 완당(阮堂). 


 
  선생의 벼슬은 병조판서와 성균관 대사성에 이르렀으며 당시의 당쟁에 휩쓸려 제주도와 함경도 북청에서 10여년간 유배생활을 보내고 말년에 생부 노경(魯敬)의 묘소가 있는 경기도 과천에서 71세를 일기로 1856년 10월 10일 작고하였다. 

 

 

 



 
  선생은 단순한 예술가에 그치지 않고 시대사조의 구문화 체제로부터 신지식의 기수로서 새로운 학문과 사상을 받아들여 노쇠한 조선왕조의 구문화 체제를 탈피하여 신문화 전개를 가능케 한 실학자인 동시에 선각자이기도 하다.

   선생은 북학파의 거벽으로 청조의 고증학풍을 도입하여 학문으로는 경학(經學), 불교학, 금석학(金石學), 문자학, 사학(史學), 지리학, 천문학에 이르기까지 박통하여 북한산 기슭의 비석이 신라진흥왕의 순수비임을 고증하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원당집(院堂集), 금석과안록(金石過眼錄), 실사구시설(實事求是說), 원당척독 (院堂尺牘), 담연제집(潭연濟集) 등이 있다. 이와같이 광범위하고 철저한 학문과 천부의 재질을 바탕 으로 한 추사의 예술은 시, 서, 화, 전각(篆刻) 등에도 뛰어났으며 서도(書道)는 추사체라는 독자일문을 열어 서예사상 지고(至高)의 경지를 이룩하였다. 작품으로는 「묵란도(墨蘭圖), 묵죽도(墨竹圖)」와 국보로 지정된 「세한도(歲寒圖)」등이 있다. 

   명당에 터 잡은 집들은 햇볕을 고스란히 받는다고 하는데 추사고택도 그렇다. 고택 앞으로는 예당평야가 펼쳐 있고 뒤로는 얕은 동산이 있다. 추사고택은 김정희의 증조부인 월성위 김한신에 의해 1750년경 건립되었다. 김한신은 영조의 딸이자 사도세자의 누이동생인 화순옹주와 결혼하여 영조임금의 사위가 되었다. 지방의 토호로서 중앙에서 오랫동안 벼슬을 한 사대부들의 세거로 내려왔던 까닭에 충청도 서해안 지방에선 흔치 않은 완벽한 'ㅁ'자 집을 하고 있다. 

 

 



  김정희가 이곳에 살기 시작한 것은 그의 할아버지 때부터다. 당시만 해도 53칸에 이르는 대부호였다고 한다. 때문에 추사고택은 단순히 자란 집뿐이 아니라 추사 집안의 묘역 역할까지 한다. 현존하는 건물 외에도 중문이 곁들인 행랑과 바깥문채와 곳간이 대지의 전면과 남측 마당으로 이어져 있었다고 한다. 후손이 이어지지 않아 심하게 퇴락되었던 것을 수년 전에 복원하여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추사고택은 현재 80.5평으로 솟을 대문의 문간채, ㄱ자형의 사랑채, ㅁ자형의 안채와 추사 선생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 사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사랑채가 있고 그 너머로 안채, 그리고 안채 뒤쪽에 사당이 있다.

  
   이 집의 좌향은 동향이지만 사랑채는 남향을 하고 있다. 대문을 들어서서 보게 되는 이 집의 특징인 사랑채와 안채가 겹쳐 보이는 모습은 사실 안채와 사랑채 사이의 행랑채 등이 복원되지 않은 결과이며, 사진 상으로는 멋진 모습을 연출하지만 사실 현장에 답사해서 느끼는 집의 전체 분위기에는 긴장감이 없다. 사랑채 마당도 지나치게 풀어 헤쳐져 있고, 사랑채와 안채의 동선도 영 자연스럽질 못하다. ㄱ자형의 사랑채는 남쪽엔 한 칸, 동쪽에 두 칸의 온돌방과 나머지는 대청과 마루로 되어 있다. 

 

 



   사랑채에는 김정희의 대표적인 작품인 세한도(국보 제180호) 복사본이 걸려있다. '날이 차가워진 다음에야 소나무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는 논어의 한 구절을 뜻하는 세한도(歲寒圖)는 59세 때인 1844년 제주도 유배 당시 지위와 권력을 잃어버린 스승을 찾아온 역관 이상적의 인품을 소나무와 잣나무에 비유하여 그려준 것이다. 빳빳한 털로 만든 그림붓으로 형태의 요점만을 간추린 듯 그려내어 한 치의 더함도 덜함도 없는 선비의 정신이 그대로 드러나 있고, 추사체로 쓴 발문이 그림의 격을 높여준다.

 

   세한도는 이상적의 제자였던 김병선이 소장하다 일제의 강점기에 경성대학 교수이며 추사 김정희의 연구자였던 일본인 학자 후지즈카가 인수해 도쿄로 건너갔다. 당시 호남갑부였고 고서화 수집가였던 손재형은 매입에 실패한 뒤 매일 찾아가 끈질기게 괴롭힌 끝에 다시 찾아왔다.

 

 



 
   그리고 기둥에는 주련이 있다. 기둥이나 벽 따위에 장식으로 써서 붙이는 글귀를 주련(柱聯)이라고 한다. 주련은 2개의 글귀가 모아져 하나가 되고, 추사고택 42개의 기둥에 추사가 쓴 글씨들을 붙여 놓은 주련 21개가 걸려있는데 그 중에서 안채 정면의 기둥에 걸려 있는 주련 글씨가 너무나 유명하다.

  
세상에서 제일가는 반찬은 오이와 새앙과 나물이며 
   세상에서 제일가는 모임은 부부와 아들 딸 손자들의 모임이라


   대팽두부과강채(大烹豆腐瓜薑菜) 
  고희부처아녀손(高會夫妻兒女孫)


   시대의 급류에 휩쓸려 유배살이로 점철된 생을 살았지만 청나라 스승인 옹방강이나 완원에게 경술문장이 바다건너 동쪽에서 제일이라고 찬사를 받았을 만큼 부러울 것이 없는 영화를 누렸던 추사가 71세의 늙은이가 되어 깨우친 평범하면서도 아름다운 진리가 글 속에 담겨 있다. 

 
  사랑채 앞에는 추사가 직접 글씨를 써서 새겨 놓은 '석년'이라는 빗돌이 있는데 그림자 길이로 시간을 알아보는 해시계의 한 종류다. 또한 고택에는 집 기둥마다 추사가 쓴 글씨들을 붙여 놓고 해석까지 달아 놓았다. 

 

 


 
'ㄱ'자의 사랑채를 돌아가면 안채 중문이 나오고 충청도 서해안에선 보기 힘든 'ㅁ'자의 안채로 들어선다. 특이한 점은 안채에 그 흔한 나무 한 그루조차 조경된 것이 없다는 것. 이유인 즉, 이곳은 영조의 차녀인 화순옹주가 시집와서 기거하였기 때문에 ‘ㅁ’자 모양의 안에 나무(木)가 있으면 '곤할 곤(困)'자가 되어 좋지 않다 하여 풀 한포기조차도 자라지 않도록 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안채에는 난방용 부엌만 있고 밥하는 부엌은 따로 있다. 이 또한 왕실사람에 대한 예의였다고 전해진다. 안채에는 6칸 대청과 2간통의 안방, 건넌방이 있다.

 

  사랑채와 안채의 뒷마당도 사당까지 트여 있는데, 넓지 않은 폭으로 이어지는 사랑채와 안채 너머의 뒷마당은 매우 깊은 공간감을 보여주며 그 끝에 있는 사당은 이 집의 중심임을 나타낸다. 하지만 이도 역시 사랑채와 안채 사이의 담장이 복원되지 않은 결과의 연출이다. 실제 담장이 있을 때의 공간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무척 궁금하다.

 

  추사고택에서 조금만 걸어 나오면 추사 무덤이 있다. 이름에 걸맞지 않게 작고 낮은 봉분이 오히려 인상적이다. 또 증조부인 김한신과 부인인 화순옹주(和順翁主)의 합장묘 그리고 화순옹주 열녀문(烈女門) 즉, 홍문이 있다. 

 

 

 

   또한 추사고택에 가면 반드시 추사가 직접 심었다는 백송(白松)을 봐야 한다. 백송은 추시고택에서 서북쪽으로 600미터쯤 올라가면 천연기념물 제106호인 백송을 볼 수 있는데 백송은 중국북부 지방이 원산지로 우리나라에 몇 그루 없는 희귀한 수종이다. 예산의 백송은 추사선생이 25세 때 청나라 연경에서 돌아올 때 백송의 종자를 붓대 속에 넣어가지고 와서 고조부 김흥경의 묘 입구에 심은 것이다.

   수령이 약 200년이 되고 높이는 약 10m인 백송은 지상 50cm쯤에서 세 줄기로 갈라져 자랐지만 두 줄기는 부러져 없어지고 동쪽의 줄기만 남아있다. 1980년도에 줄기의 피해 부분을 외과 수술하여 치유하였고, 그 후부터는 철저하게 보호, 관리하고 있다. 전국에 5개 밖에 없다는 백송 천연기념물 중 영조가 하사해 서울 추사의 본집에서 자라고 있는 백송과 함께 추사 가문의 상징이 되었다.

 

 



[찾아 가는 길] 

 

 

 

 

 

1. 서해안고속도로 - 송악나들목 - 32번 도로 - 삽교/합덕방향 합덕 - 합덕 - 계촌리 삼거리(우회전)  - 추사고택
2. 경부고속도로 - 천안이나 평택 - 온양 - 예산쪽의 신례원 삼거리 - 32번 도로 - 계촌리 삼거리(좌회전) - 추사 고택
3. 현지교통

 1) 남부터미널에서 예산행 직행버스 이용, 신례원에서 하차
 2) 신례원에서 추사고택 방면 시내버스 하루 10회(신례원에서 5.5km), 10-15분소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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