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기장읍 대변항
멸치회로 소문난 대변항 풍경과 황학대
글·사진 남상학
시랑대 해동용궁사를 둘러보고 해안을 따라 차는 북으로 달린다. 곧바로 닿은 곳은 기장 대변항. 동해 어느 바닷가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지만 활처럼 둥글게 휜 자그마한 포구는 어느 곳보다 아늑하게 느껴진다.
기장읍 남쪽 해변의 대변항은 부산과 경주 감포 사이에서 가장 큰 순수 어항으로 기장미역과 멸치가 유명하다. 부산항에 이어 일찍이 개항한 항으로 연근해 어업의 전진 기지로서의 역할은 물론 회, 수산물이 항상 풍부하여 많은 관광객이 찾아오고 특히 타지에서 보기 힘든 멸치회 등 싱싱한 회맛은 가히 일품으로 널리 명성을 떨치고 있다.
동해안에서 가장 큰 멸치어장답게 대변항에는 봄멸치(2월∼6월)와 가을멸치(9월∼12월)가 잡히는 시기가 되면 각지에서 생멸치나 멸치젓을 사러오는 사람들로 붐비고, 대변항을 감싸듯 늘어서 있는 좌판마다 kg단위로 멸치젓을 통이 쌓여 있는 것도 대변항만의 독특한 풍경이다.
봄에는 수십 척의 멸치 배들이 포구에 정박하는데, 배에서 선창으로 그물을 당기면서 그물에 붙은 멸치를 터는 광경은 이 어항에서 볼 수 있는 진풍경이다. 멸치 풍어가 들면 그릇을 든 아낙네들이 주변에 모여들어 주워 담아도 그냥 두는데, 이렇게 줍는 멸치가 웬만한 그릇에 가득 차기도 한다. 그래서 매년 4월이면 대변항 일원에서 멸치축제가 열리는데 풍어제, 멸치아지매 선발대회, 멸치맛 자랑대회, 무료시식회, 해녀한마당 등 다채로운 행사가 펼쳐진다.
우리가 기장항에 도착했을 때는 비교적 한가하여 그 이유를 물었더니 한 차례 출항하여 멸치를 잡아온 후 본격적인 출어기는 설 명절이 지나야 된다고 했다. 그러나 어판장에는 기장의 특산물인 멸치젓, 건어물, 싱싱한 멸치 횟감을 파는 아낙들이 난전을 펼치며 오가는 사람들의 발길을 부여 잡는다. 봄철 대변항의 멸치 축제가 아니더라도, 널브러진 특산물에서도 멸치 고장임을 엿보게 한다.
대변의 멸치회는 뼈를 발라내고 비늘을 벗긴 것을 미나리 등의 야채와 섞어 초장에 알맞게 버무린 것인데, 그 맛과 풍취가 전국적으로 이름이 나 있다. 어떤 때는 오징어가 많이 잡혀 커다란 전등을 수백 개씩 매단 오징어배가 포구에 가득하다.
기장 대변에는 동해안의 청정해역에서 갓 잡아 올린 싱싱한 멸치로 젓갈을 담그는 멸치젓 공장이 4∼5군데가 있다. 이곳 지하발효탱크에서 천일염에 절여 큰 돌맹이로 눌러놓은 멸치젓이 구수한 향을 내며 삭는다. 이렇게 1년간 숙성시켜 정수기로 찌꺼기와 불순물을 걸러내면 기장특산물인 멸치젓이 탄생한다. 멸치젓은 생멸치와 소금을 8:2의 비율로 섞어 발표시키는데 멸치 육질을 모두 걸러낸 것이 액젓이고, 멸치 육질이든 빨갛고 구수한 향이 나는 것이 좋은 젓갈이다.
대변항에는 붉은 색의 등대 외에 부산해양수산청이 1억 원을 들여 만든 등대가 있다. 이름 하여 ‘지하여장군’ 등대. 대변 외항 방파제 서측 끝에 자리한 ‘지하여장군’ 등대는 높이 12m에 지름 2m 규모다. 노란 치마에 저고리를 입은 형상을 하고 있다. 머리 부위엔 빨간색 비녀도 꽂혔다.
무엇보다 대변항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은 죽성리 월전마을까지 잇는 3.5㎞의 해안 길. 해안 길 초입, 난전을 지나고 등대 방파제를 꺾어 돌아서 동쪽 방파제를 마주하는 바닷가 앞에서 영화 “친구” 촬영지 팻말을 만나게 된다. 워낙 인기를 끌었던 영화여서 특별나지 않은 바닷가에 눈길이 고정된다.
▲두호마을과 황학대
2차선 해안 길은 기암괴석이 어우러진 넘실거리는 파도 길을 연출하고 있다. 하냥 맑은 햇살 덕분에라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잠시 바다로 내려가면 겨울 바다에 한껏 취하는 사람, 낚싯대를 드리운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그렇게 해안 길은 월전마을에서 잠시 숨을 멈춘다. 이곳은 고산 윤선도가 7년간 유배생활을 하며 시 6편을 남긴 두호마을과 인접해 있다.
고산은 일생동안 총 20년의 유배생활과 19년의 은거 생활을 거친 파란만장한 일생을 살았다. 성균관 유생 시절에는 집권세력의 죄상을 고하는 상소문을 광해군에게 올렸다가 바로 경원(慶源), 영덕(盈德), 삼수(三水), 광양(光陽) 등지로 여러 차례에 걸쳐 귀양살이를 하였다. 또 경원에서 1년을 보낸 고산은 1618년 겨울에 기장군 죽성리로 유배되어 이곳에서 그의 초기 작품인 견회요(遣懷謠), 우휴요(雨後謠)등 시조 6수를 남겼다고 전해진다.
추셩(楸城) 진호루(鎭胡樓) 밧긔 우러녜난 뎌 시내야,
므슴 호리라 듀야(晝夜)의 흐르난다.
님 향(向)한 내 뜻을 조차 그칠 뉘랄 모로난다.
- ‘견회요’ 5수 중 하나
고산은 이 작품에서 자기의 옳은 뜻을 굽히려 하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이후 좌천과 파직을 거듭하다가 말년에는 보길도의 부용동에 은거하면서 주옥같은 시조를 남겼다. 그러나 고산이 부산의 기장군 죽성리에서 유배생활을 했다는 것을 아는 이는 드물다. 고산이 무려 7년간이나 유배생활을 한 죽성리에는 무슨 흔적이 있었을까?
죽성리 왜성에서 바다 쪽으로 가면 마을 중간쯤에 30여 그루의 해송이 자생하고 있는 자그마한 언덕배기를 만날 수 있다. 이곳이 바로 ‘황학대’라는 곳이다. 고산은 이곳을 이태백, 도연명 등 많은 시객들이 찾아 놀던 양자강 하류의 황학루에 비교하였고, 자신의 시름을 달래는 장소로 삼았다고 한다.
그가 황학대에서 바라본 바다엔 나래 펼친 학의 형태로 섬들이 엎드려 있는데, 고산이 황학대에 서서 석양 무렵 노을이 깔린 바다를 보았을 때, 섬들은 금방이라도 금빛 나래를 펼치고 날아오르는 학이 되었을 것 같다. 고산은 이곳에서 갈매기와 파도소리, 바다 위에 그럼처럼 떠있는 섬들을 바라보며 긴 유배생활의 아픔을 달랬던 것이다.
그는 가끔 마을 뒷산의 봉대산에 올라 약초를 캐어 죽성 사람들을 보살피기도 했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고산을 서울에서 온 의원님이라고 부르며 경애하였다는 것이다. 주변 황학대는 기암괴석과 노송이 어울려 절경을 자랑한다. 윤선도가 유배생활을 할 때 죽성리 백사장 건너에 있는 송도를 황학대라 이름 짓고 매일 이 곳을 찾아 한을 삭였다고 한다. 이곳에서부터 일광, 월내, 대송, 진하로 이어지는 해안도로는 드라이브 길로서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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