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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충청남도

충남 서산에서 만나는 불교 향기와 천주교 순교의 터 (서산 마애삼존불상, 개심사, 해미읍성)

by 혜강(惠江) 2006. 8. 6.

 

충남 서산

 

서산에서 만나는 불교 향기와 천주교 순교의 터

 -  서산 마애삼존불상, 개심사, 해미읍성 -

 

 

·사진 남상학

 

 

 

 

  충남 서산 지방은 서해안 고속도로 개통 이후 나들이행 차들이 줄을 잇고 있다. 태안반도를 끼고 곳곳에 해수욕장이 들어서 있고, 바닷바람을 가르며 안면도까지 이어지는 드라이브 길이 삶의 멋을 한층 높여주고, 맛따라 서해안으로 달려가는 인파가 점점 늘어나고 있는 형편이다. 장마가 오기 전에 하루 여행 코스로 잡고 서해안 고속도로 서산 IC를 나와 647번 도로를 따라 운산에서 해미까지 마애삼존불상과 개심사, 그리고 해미읍성을 둘러 보았다.



백제의 미소 '마애 삼존불상'(국보 84호)

 

 충남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마애삼존불은 보원사지 입구 좌측 가야산 산록의 고란사 왼쪽에 있는 큰 바위 동남 면에 조각되어 있다. 서산 마애삼존불상은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마애불 중 가장 뛰어난 백제 후기(6세기 중엽)의 작품으로, 얼굴 가득히 자애로운 미소를 짓고 있어 「백제의 미소」라고 불리며, 당시 백제인의 온화하면서도 낭만적인 기질을 엿볼 수 있다. 더욱 빛이 비치는 방향에 따라 웃는 모습이 각기 달라져 빛과의 조화에 의하여 진가를 보이도록 한 백제인의 슬기가 놀랍다.

 

 중앙에 본존인 석가여래입상, 좌측에 제화갈라보살상, 우측에 미륵보살 반가상이 조각되어 있으며, 석가여래입상은 높이가 2.8m에 이르는 여래입상은 목이 짧아 삼도가 없으며 연꽃이 새겨진 좌대위에 서 있다. 머리 위의 두광은 원안에 단판 연꽃이 새겨져 있고, 그 바깥에는 불꽃 무늬가 양각된 보주형 관배이며 소발의 머리를 하고 있다.  특히 반원형의 눈썹, 은행모양으로 뜬 눈, 얇고 넓은 코, 반쯤 열린 입 등 전체 윤곽이 둥글고 풍만해 백제인의 특유의 자비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어깨에 걸친 옷자락은 양팔에 걸쳐 평행 호선으로 길게 주름져 있어 입체감을 느끼게 하며 생동감을 주고 있다. 석가여래입상은 조각 솜씨도 유명하지만 진가는 웃음에 있다. 활짝 웃고 있는 유쾌한 얼굴은 독특하고 참신한 개성미를 보여주고 있으며, 한국인 가운데 젊고 쾌활한 장자풍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다.

 왼쪽의 제화갈라보살상은 흔치 않은 보살로 석가에게 성불하리라는 수기를 준 과거불인 연등불의 보살일 대 이름이며, 웃음 역시 일품이다. 머리에 높은 삼삼관을 쓰고 그 좌우에 장식을 드리웠다. 얼굴모양이 본존에 비해 긴 편이며 미소를 띠고 있는데, 실눈에 원반형의 입을 약간 벌리고 있다. 

 목에는 짧은 목걸이를 걸었고, 두 손은 가슴 앞에서 오른손을 위로 한 채 보주를 잡고 있다. 상체는 벗은 상태이고 발밑에는 이중의 복련을 양각한 좌대가 있으며 머리 뒤에는 보주형의 광배가 있는데 원안에 연꽃 장식만 있을 뿐 다른 무늬는 없다.

 오른쪽의 미륵반가상은 통례에서 벗어난 배치로서 팔 부분이 크게 파손됐으나 원형 파악은 가능하다. 벗은 상반신에는 목에 간단한 목걸이가 있을 뿐이다. 머리에는 높은 관을 썼고 여래나 보살에 비해 목이 긴 편이다. 왼발을 늘어 드리고 오른발은 왼쪽 무릎 위에 얹었으며, 왼 손으로 발목을 잡고 있다. 광배는 우협시 보살과 같은 형태이다. 

  연화대 위에 서 있는 당당한 체구의 여래상은 머리 뒤의 보주 미간의 백호공, 초생달 같은 눈썹, 우뚝 솟은 코에 미소 짓는 그 입술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친근감과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발밑에는 연꽃대좌가 있다.  두 어깨에 걸친 옷자락은 양팔에 걸쳐 평행호성으로 주름져 있어 입체감을 느끼게 하며 생동감을 주고 있다. 

 이 마애삼존불은 6세기 중엽 백제 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되며, 백제 불상 가운데 가장 우수한 것으로 꼽히고 있다. 특히 마애삼존불은 양식상의 이례적인 작품으로 중국 남북조 말기인 제주양식을 강하게 느낄 수 있으며 서해안에 가까운 지리적 조건은 마애불의 전래과정을 살피는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주변은 산세가 험할 뿐만 아니라 각종 수목이 우거지고 습도가 높은 토양이며 대부분 암석으로 이루어져 바위틈에서 붙어 자생하는 고란초를 볼 수 있다. 고란초는 고사리과에 속하는 식물로 절벽바위 틈에 나는 상록 양치식물이며 자갈색의 선형인편에 싸인 뿌리가 옆으로 뻗는다.  또한 마애삼존불을 보호하기 위해 보호각을 설치했는데 이것을 고란각이라고 부른다. 근처에는 용현계곡과 보원사 옛 절터가 있다.    입구에 있는 용현식당(041-663-4090)은 어죽, 민물매운탕 등으로 유명한 식당이다.

 

 

 

 

부드러운 곡선으로 친숙한 개심사

 

 개심사는 전형적인 산지 가람으로 백제 의자왕 14년(653)에 혜감스님이 창건했다고 한다. 본래 이름은 개원사였으며, 고려 충정왕 때 처웅대사가 중건하면서 개심사로 불리기 시작했다. 

 현재의 절집은 1941년 해체 수리할 때 발견된 묵서명으로 보아 조선 성종 때(1484년) 새롭게 중창된 것이다. 이점에서 개심사는 우리나라 사찰에서 보기 드물게 임진왜란의 전화를 입지 않았던 가람으로 건축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대웅보전과 심검당, 무량수전, 설선전이 팔을 두르고 에워싸듯이 배치되어 있으며, 그 절 마당에는 5층 석탑이 자리 잡고 있다.    보물 143호로 지정된 대웅보전은 단정한 품위가 돋보이는 단층 맞배지붕의 건축으로, 정면 3간, 측면 3간이며, 구조는 주심포 계통과 다포식 건축 수법이 혼재되어 있어 주심포에서 다포식으로 변화하던 시기의 기준점이 되기도 한다. 

 개심사의 또 다른 건축적 특징은 입구에서 대웅전까지의 동선체계가 다른 절들처럼 직선적이 아니라는 점이다. 부드러운 곡선으로 돌아서 진입하게 되어 있어 한결 친숙한 느낌을 연출하고 있다. 안양루 옆의 해탈문을 통하여 절마당을 들어서면 대웅전과 심검당, 요사체가 서로 어깨를 기댄 채 아늑하게 감싸 안고 있다. 거기에 맘껏 휘어진 나무의 자연스러움을 그대로 살려낸 요사체의 기둥과 문지방나루는 눈길을 사로잡는다. 

 

 등을 구부린 사람처럼 힘겹게 받치고 있는 범종루의 기둥도 마찬가지다. 자연의 흐름을 한 치도 거스르지 않고, 거기에 멋을 부리고 지혜를 얻고자 했던 선인들의 마음을 잘 간직하고 있다. 절 아래에는 경지(鏡池)라는 연못이 있다. 

 

 올망졸망 붙어 있는 절집을 구경하고 개심사의 진면목을 느끼기 위해서는 명부전을 지나 산신각까지 올라야 한다. 이곳에 오르면 개심사의 자태가 한 눈에 들어오고 멀리 서해바다까지 흘러가는 산자락을 바라볼 수 있다. 

 이곳에서 내려다보면 개심사는 이름난 스님네의 명리를 내세우지도 않고 화려한 수사의 법문도 강요하지 않는다. 마음처럼 머물렀다 흘러가는 계절과 솔바람소리가 있을 뿐이다. 바로 이 점이 개심사를 가장 아름다운 절로 만들어 내는지도 모른다. 그 분위기만으로도 이미 감불(感佛)의 경지인 곳, 그곳이 개심사이다.  특히 개심사 가는 길은 봄철 목장길 따라 피는 벚꽃이 장관을 이루어 관광객이 넘친다.

 

 

 

천주교의 순교성지 해미읍성

 

  서산시 해미읍 읍내리의 해미읍성은 조선 성종 22년 (1491년)에 축조된 면적 19만 8천㎡의 돌로 쌓은 성이다.  둘레 약 2㎞, 높이 4m에 동문, 서문, 남문 등의 세 문루(門婁)가 있는 해미읍성은 보기 드문 평지의 석성으로서 조선 초기 성채의 특징을 보여준다. 조선 성종 22년, 1491년에 완성한 석성이다. 둘레는 약 1.8km, 높이 5m, 총 면적 6만여 평의 거대한 성이다.

  최초 축성은 1417년(태종17년)에 시작하여 1421년(세종 3년)에 완료하여 230년 간 종 2품의 병마절도사가 주둔하였다. 1578년(선조11년)에는 이순신 장군이 군관으로 이 성에서 10개월 간 근무한 바 있다.    그 후 1651년(효종 2년)에 병머절도사영이 청주로 옮겨가고 이 자리에 해미현 관아가 옮겨와서 해미읍성이 되고, 문무를 겸한 겸영장이 배치되며 호서좌영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그 후 1914년 일제 강점기, 군현제가 폐지되고 해미현이 서산군에 통합되면서 해미읍성의 역할이 끝났다.

 

 해미읍성의 시설로는 동헌, 객사, 책방, 내아, 진남문, 규양문, 지성문, 암문이 있다. 이 성은 조선 시대에 해안 지방에 출몰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혀온 왜구를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하여 당시 덕산에 있던 병마절도사영을 옮겨 쌓은 것이다. 따라서 이 성의 기능은 충청도의 군사권은 물론 내란 방지 등 사회질서까지 담당하는 격이 높은 성이었다.

 

 특히 이곳은 조선말 천주교도들의 순교 성지로도 유명하다.  천주교 박해 당시 관아가 있던 이곳에 충청도 각 지역에서 수많은 신자들이 잡혀와 고문 받고 죽음을 당했으며, 특히 1866년 박해 때에는 1천여 명이 이곳에서 처형됐다고 한다.

 

 조선조 말 서산 당진 지방은 천주교 신자가 많았으며 1866년의 병인양요와 1868년의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덕산 소재 남연군묘를 파헤친 사건 이후 천주교도들이 개입된 사건임을 알고 탄압이 극심하였다. 이 때 해미진영의 겸영장은 내포지방 12개 군현의 군사권을 쥐고 있었음으로 해당 지역의 교도들을 모두 잡아 들여 이곳 해미읍성에서 처형하였는데, 그 수가 무려 1,000명이었다고 한다.

 

 처형 방법은 회화나무에 철사 줄로 매달고 고문하였는데 견디지 못하고 죽은 사람, 서문 밖 돌다리 위에 자리개질을 처서 죽게 하는 방법, 많은 인원을 한 줄로 엮어서 여숫골에 끌고 가 진둠벙에 생매장하는 방법 등이었다. 성내 광장에는 대원군 집정 당시 체포된 천주교도들이 갇혀 있던 감옥터와 옥사 터 옆에 나뭇가지에 매달려 모진 고문을 당했던 노거수 회화나무가 철사 줄이 감긴 채 크고 있다.  

 바로 성문 밖 도로변에는 회화나무에 매달려 고문을 받으면서도 굴하지 않은 신도들을 돌 위에 태질해 살해했던 서문 밖 돌다리는 하천 복개로 본래 있던 자리에서 지금의 도로변으로 옮겨놓고 보호 시설을 해 놓고 ‘자릿개 돌’로 이름 지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을 처형하면서도 재판 기록을 남기지 않아 신분이나 인원 파악이 안 된다. 이처럼 해미읍성은 많은 신도들이 죽음으로 신앙을 지킨 장소여서 1965년부터 성지 조성 운동이 시작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해미읍성은 우리나라 최대의 순교성지로서 매년 수 만 명의 성지 순례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이 때 내포지방 12개 군현의 신도들을 모두 체포하여 이곳에서 처형했는데 처형된 사람이 1천여 명이었다고 한다. 박해 때 충청도의 각 고을에서 잡혀온 천주교도들을 읍성 내 감옥에 수감하였다가 고문을 가했다는 6백여 년 된 회화나무가 옛 옥사(獄舍) 터가 있던 곳에 상처의 흔적을 남긴 채 홀로 서 있다.

 

 

 

읍성 밖의 유적들 - 생매장지의 자리갯돌, 진둠벙    


 또, 서문 밖의 돌다리에서 자리개질(짚으로 만든 굵은 줄로 곡식단을 동여 타작하는 일)을 쳐서 처형하였는데, 이 돌은 하천 바로 옆에 옮겨 보존하고 있다.  많은 천주교도들을 한꺼번에 처형하기 힘들어지자 해미천에 큰 구덩이를 파고 모두 생매장하였다 한다. 

  이와 같이 죽음으로 신앙을 지킨 장소 해미천 옆에 천주교에서는 박해 당시 생매장 당한 무명 순교자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1965년부터 성지화 운동을 시작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성지를 조성하여 1975년에 높이 16m의 순교탑을 세우고, 노천성당을 개설하였으며, 2003년에는 무명 순교자 성지성전을 신축하여 순례자들이 미사를 볼 수 있도록 하였다. 

 순교탑 앞을 여숫골이라 부르는데, 이는 앞서 예수 마리아를 부르며 기도하는 소리를 ‘여수소리’로 알아들은 주민들이 이를 ‘여숫골’이라고 불려 전해지는 곳이다. 순교기념탑과 생매장터, 자리갯돌과 진둠벙 등 사형도구들이 잘 보존되어 있다. 어디를 가나 천주교는 성지를 규모 있게, 깔끔하게 조성해 놓은 것을 볼 수 있지만 이곳 또한 예외가 아니다. 개신교는 이런 점을 천주교로부터 배워야 할 것이라 생각된다.  

 

  이곳이 천주교 박해 유적지 특히 생매장 순교지로 알려 지면서 해마다 수만 명의 천주교를 비롯한 기독교인들이 찾아오고 있는 명소가 되었다. 유골 발굴 당시 현장에서 수거한 치아들을 정리하여 전시해 놓은 것을 보니 가슴에 아픔이 저며 왔다. 어둠의 시절 미개한 무리들의 행동이 얼마나 많은 생명을 앗아갔는지, 우리 민족 모두가 역사 앞에서 참회의 눈물을 흘려야 할 것이라 생각했다. 

 

  이런 생각을 하니, 맹목적인 개인 숭배로 기독교를 부정하는 북쪽의 정치집단이 또 이런한 우를 저지르지 않도록 하는 일이 또 하나 우리의 기도 제목이 되어야 할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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