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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충청남도

현충사, 이충무공의 애국 충절의 산실(産室)

by 혜강(惠江) 2006. 12. 17.

 

아산 현충사 

 

이 충무공의 애국 충절의 산실(産室)

 

 

·사진 남상학

 

 

 

현충사 본전 현판글씨(박정희 대통령의 글씨)

 

 

   온양온천에서 4km 떨어진 아산시 염치읍 방화산 기슭에 위치한 현충사(顯忠祠)는 임진왜란 당시 외침으로부터 나라를 구한 성웅(聖雄) 충무공 이순신(忠武公 李舜臣) 장군의 영정을 모시고 그 분의 애국충정 (愛國忠情)을 기리는 곳이다. 1967년 3월 18일 사적 제155호로 지정되었다. 

  아산 백암리는 이충무공이 소년시절에서 무과에 급제할 때까지 살았던 곳이고 고택은 대대로 종손이 살아오다가 1969년 현충사 성역화사업 당시에 경내의 존엄성을 고려하여 이주하였다. 종가의 앞뜰에 위치한 우물 충무정(忠武井), 활터 등 생전의 자취들이 여기저기 잘 보존되어 있다.

 

  이충무공은 전 생애를 통하여 일관된 애국심과 충성심,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정의감, 지극한 효심을 고루 갖춘 인격자이었으며, 특히 전략에 뛰어난 용장으로서 임진왜란 중 싸움마다 승리했던 위대한 장군이었다. 이런 공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1704년 아산지방 유생들이 숙종 임금께 사당 건립을 상소한 바, 공이 1598년 노량해전에서 순국한지 108년이 지난 조선조 숙종 32년(1706)에 사당을 세웠고, 1707년에는 숙종 임금이 친히 현충사라 이름 지었다. 그 자리는 지금의 현충사 옆에 위치한 충무교육원 자리로 현재는 유허비만 남아있다.

  현충사는 이후 공을 추모하는 향불이 끊이지 않았으나 1868년(고종5년)에는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서원을 겸하고 있던 현충사도 함께 철폐되었으며, 1905년 11월 을사보호조약이 맺어지자 이에 분노한 유림들이 1906년 2월 현충사 유허비를 건립하였다.

 

  그 후 일제의 탄압으로 충무공 묘소가 일본인의 손에 넘어갈 지경에 처하자 이 소식에 접한 우리 민족 지사들이 이충무공유족보존회를 조직하고 충무공 선양을 통해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고자 온 국민의 성금을 모아 1932년 6월 5일 현충사를 중건하였다.

  이어 1966년 4월 17일 고(故) 박정희 대통령의 성역화 지시에 따라 1967년 5월 24일 본래의 사당(구본전) 위편에 총건평 63.1평의 순한국식 사당으로 새로 지었고, 구본전은 배전(拜殿)으로 사용하다가 유물관 옆으로 이전하였으며, 고택 등의 건조물을 중건하는 한편, 종합적인 조경공사를 실시하여 오늘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어록비(語錄碑)

 

  넓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나오면 먼저 어록비가 반긴다. 충무공 어록비에는 `필사즉생 필생즉사'(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면 반드시 살고, 살기를 도모하면 반드시 죽는다)라는 이순신 장군의 말씀이 새겨져 있다. 이 글을 대하니 전쟁터에서 승전을 다짐하는 장군의 위엄 있는 모습이 삼삼하게 떠오른다.  우람한 신정문(新正門)을 들어서니 원형의 넓은 잔디밭이 잘 조성되어 있고, 잔디밭 중앙에는 반송 세 그루가 아담하게 우리를 반긴다. 그 뒤로 정문인 충무문이 보인다.

 

 

 

충무문(정문)

 

  충무문 앞에서면 자못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충무문을 중심으로 동서 양쪽에 매표소, 휴게소가 있고 협문이 있어 그 규모가 매우 커서 위압감을 느끼게 한다.  그런가 하면 충무문 앞에는 임진왜란 당시 사용했다는 세 문의 포(砲)가 전시되어 있고, 현충사 종합안내도 옆에는 타루비(墮淚碑)가 서 있다.

 


 

부하군인들이 세운 타루비

 타루비는 조선 중기 맹장인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유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막하 군인들이 세운 것으로 장군이 세상을 떠난 지 6년 후인 선조36년((1603년) 세운 것이다. 이 석비는 높이 0.97m, 폭 0.58m의 규모의 타루비에는 타루에 대한 유래와 건립에 대한 내용이 써 있다. 

 

   영하의 수졸들이 통제사 이순신을 위하여 
   짤막한 비를 세우니 이름하여 타루라.
   중국 양양 사람들은 양로를 생각하면서 그 비를 바라다보면 
   반드시 눈물을 흘린다는 고사에서 인용한 것이니라 1003년 가을에 세우다.

 

   營下水卒爲統制使 李公舜臣立短喝名曰墮淚 蓋取襄陽人
   (영하수취위통제사 이공순신입단갈명왈타루 개취양양인) 
   思羊祜而望其碑則 淚必墮者也 萬曆三十一年秋立」   
   (사양호이망기비즉 루필타자야 만역삽십일년추립) 


  타루비는 전남 여수시 고소동에 세워진 것으로 통제이공수군대첩비와 함께 보물 제571호로 일괄 지정되어 있었으나, 여수 주민들이 분리하여 보물로 지정할 것을 정부에 건의하여 1998년 11월 27일 보물 제1288호로 지정된 것으로 여기 세운 것은 복제본이다. 그 옆에는 현충사 유허비가 있다.

 


현충사 본전 


  현충사의 정문격인 충무문(忠武門)을 들어서면 잘 정돈된 현충사 경내는 자못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앞으로 뻗은 길을 곧장 올라가서 홍살문을 지나 충의문(내삼문)을 거쳐 이순신의 영정(影幀)을 모셔놓은 본전(顯忠祠本殿)으로 간다.

 

  홍살문을 지나 본전으로 올라가는 길은 잘 자란 노송들이 양 옆으로 고개를 숙인 듯 휘어져 있다. 본전은 총 62평으로 한국식 청기와 철근 콘크리트 건물로, 충무공 이순신(忠武公 李舜臣) 장군의 영정을 모시고 그 분의 애국충정 (愛國忠情)을 기리는 곳이다. 

 

  최초의 영정은 1932년 일제치하에서 청정 이상범 화백이 그려 현충사에 모셨으나 퇴색되어 위엄이 덜하였으므로, 기념사업회에서는 한때 이당 김은호 화백이 그린 영정을 모시기도 하였다.

 

  현재 현충사의 영정은 서애 유성룡의 징비록에 나타난 고증(“순신의 사람됨엔 대담한 기운이 있어 일신을 잊고 나라를 위해 갔으니 본래부터 수양해 온 까닭이라 하겠다")에 따라 1953년 월전 장우성 회백이 그린 것으로 1973년 10월 30일 선현 영정심의위원회에서 표준 영정으로 지정한 것이다. 규격은 세로 193Cm, 가로 113Cm.

 

 

 

이순신의 옛집(고택)

 

   본전을 나와 왼쪽으로 내려오면 이순신 장군이 유년기·소년기·청년기를 보낸 옛집(고택)이 있다. 한국식 목조건물로 된 이 옛집(고택)은 공의 후손들이 대대로 지켜왔으며, 일제 때  온갖 수난을 겪으면서도 잘 보존되었고, 그 후 수차례 원형대로 중수 또는 개수되었다 한다. 옛집 앞에는 정(井)자 형의 우물로 충무공께서 직접 사용하시던 우물 충무정(忠武井)이 있는데 지금도 맑고 깨끗한 물이 솟아나온다. 옛집 뒤에는 이충무공의 위패를 모신 가묘가 있어 매년 음력 11월 19일에는 제사를 드린다.

 

  또 옛집 옆에는 은행나무 두 그루가 나란히 서있다. 이곳은 충무공이 활을 쏘던 자리라고 전해지고 있으며 활터를 둘러싼 방화산의 능선은 충무공께서 말을 타시던 곳으로 치마장(馳馬場)이라 불린다.  과녁판은 활터에서 남방으로 145m떨어진 곳에 있으며 충무공이 연습하던 당시에는 200m의 거리였다고 한다.  

 

 충무공은 임금님이 북쪽에 계시기 때문에 항상 남쪽을 향해 활쏘기 연습을 하였다고 한다. 은행나무 두 그루는  500여 년생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현재 충청남도 보호수(保護樹)로 지정되어 있다. 이곳에 서면 어린 시절 충무공이 활을 쏘며 무예를 연습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셋째 아들 이면의 묘소


   이곳에서 동북쪽으로 150여m 거리에는 셋째 아들 이면의 묘소가 있다. 소나무 숲이 우거진 가파른 계단 위 양지 바른 쪽에 자리잡고 있다. 충무공이 극진히 사랑했던 셋째아들 이면은 어려서부터 인물이 출중하고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하였다.

 

 

 명량해전 이후 아산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있을 때 왜적들이 마을에 쳐들어와 분탕질을 하자 나아가 외적을 무찌르다 약관 21세로 장렬히 전사하였다. 후에 1796년(정조 20년) 조정에서 이조참의(吏曺參議)를 증직하였다.

 

그러나 정작 이충무공의 묘는 이곳으로부터 아산온천 방향으로 약 9㎞ 떨어진 음봉 삼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1598년 11월 19일(양력12월16일)노량해전에서 전사한 공의 유해는 최후의 진지였던 고금도(古今島)에 일단 모셔졌다가 이듬해인 1599년 운구되어 2월 11일 아산시 음봉면 금성산에 장사되었으며 전사 16년 뒤인 1614년 어라산 덕수이씨 선산에 이장되었다.

   1959년 5월 22일 사적 제112호 이충무공묘소로 지정되었으며 충무공 종손의 동의를 얻어 1973년 7월 19일부터 현충사관리소에서 묘역을 관리하고 있다. 묘는 부인 상주방씨와의 합장묘로써 봉분 앞에는 석조문관석, 무관석, 동물상, 동자석, 상석, 묘비가 있고 봉분은 병풍석으로 둘러져 있어 조선시대 고관묘의 전형적 모습을 갖추고 있다. 현재 이충무공 종손의 동의를 얻어 현충사관리소가 관리하고 있다.

 

 

 

 

현충사 유물관

 

 

 

   현충사 유물관은 이순신 장군과 관련된 각종 유물 및 자료 전시관이다. 1962년 4월 27일 충청남도에서 한식 목조로 현재 충의문 안쪽 좌측에 건립하고 충무공의 난중일기 등 유물을 최초로 일반 참배객들에게 공개하였다.

 

  1967년 12월 31일 난중일기 등이 도난당하자 충청남도 교육위원회에서 현재의 위치에 지하 20평, 지상 20평의 한식 콘크리트 맛배집 유물관을 확장 신축하였다.

 

  그러나 1968년 9월 9일에 성역화사업 재조정으로 이 유물관이 습기 처리가 되지 못하여 철거하였으며 이후 철근 콘트리트 석조전 슬라브건물을 현대건설에서 신축 기부하였는데 1974년 4월에는 전통조경에 알맞도록 한식 청기와 건물로 개조하고 외부 단청을 하여 지금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총 150평의 유물관에는 유물·유적의 사진, 거북선 모형 및 국보 76호인 난중일기(亂中日記) 및 서간첩(書簡帖), 임진장초(壬辰狀草), 장검(長劍, 보물326호), 도배(桃盃), 옥로(玉鷺), 요대(腰帶) (보물326호) - 무과급제교지(武科及第敎旨), 사부유서(賜符諭書), 증시교지(贈諡敎旨), 각종 무기 등 많은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유물관에서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충무공의 우국충정을 담은 시와 난중일기였다. 

 

 

<우국충정을 담은 글들>

 

 

   한산(閑山)셤 달 밝은 밤의 수루(戍樓)에 혼자 안자
    큰 칼 옆에 차고 기픈 시름 하는 적의 
    어듸셔 일성호가(一聲胡歌)는 남의 애를 긋나니.

 

선조 28년(1595년) 임진왜란 당시 쓰여진 이 작품은 충무공 이순신이 나라에 대한 걱정(우국의 정)을 읊은 시조이다.

 

 

 

   水國秋光暮(수국추광모)  바닷가에 가을이 깊어가는 데, 

   驚寒雁陳高(경한안진고)  추위에 놀란 기러기는 진중을 높이 날아가네

   憂心轉輾夜(우심전전야)  나라걱정 고민속에 잠 못 이루는 밤

   殘月照弓刀(잔월조궁도)  새벽에 기우는 달빛은 활과 칼을 싸늘하게 비춰 주네.

 

   5언절구인 이 시는 만추 충무공이 새벽을 배경으로 하여 싸움 중에 한산도에서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여 잠못 이루는 심정(우국충정)을 그린 작품이다. 이 작품은 유물관 입구에 걸려있다. 

 

 

 

<승전의 주역 최초의 철갑선인 거북선>

  이충무공이 창안하여 1592년에 건조한 거북선은 세계 최초의 철갑선이다. 거북선 건조에 있어서는 군관 나대용이 도편수(목수의 우두머리)로서 공이 컸다고 한다. 최대로 130명 내지 150까지 승선할 수 있었던 거북선은 내부가 2층으로 되어 있어 아래에선 노를 젓고 점을 실었으며, 위에서는 총포를 쏠 수 있게 하였다.

  거북선 위 지붕에는 기어오르는 적을 방지하기 위해 못이 박혀 있고, 좌우에는 16개의 노와 2개의 돛이 있어 기동력(약 11노트)을 발휘할 수 있다. 앞뒤 2개의 출입문과 지붕에 4개의 비상문이 있고, 앞의 용머리에서는 연막을 터뜨려 적을 혼란시켰다.

 

  이순신 장군의 임진일기에 보면 거북선이 여수 앞바다에 진수한 것은 1592년 3월 27일이며 거북선에 지자포며 현자포를 장치하여 실전으로 완성된 것은 왜적이 침입하기 전날인 4월12일이었다.

 

  거북선은 기록상으로 충무공의 2차 출동시(사천, 당포, 당황포 해전)처음으로 실전 투입되어 왜적을 무찌르는데 큰 공을 세웠다. 거북선을 처음 띄웠을 당시에는 일명 소경배(장님선)라고 했다. 

 

 현충사 유물관에 전시된 거북선 모형은 1795년(정조19)에 간행된 이충무공전서 중에 실려 있는 통제영 거북선과 전라좌수영 거북선의 치수와 모양을 본 따고 당시 거북선의 특징을 살려 제작한 것이다. 실물크기의 6분의 1로 축소한 것으로 1969년 동아일보사에서 기증하였다.

 

 

 

<이충무공이 진중에서 쓴 난중일기(亂中日記)>

 

  그 중에서도 난중일기는 충무공(1545~1598)께서 임진왜란 때 7년 동안 싸움터에서 직접 쓴  진중일기로서 공의 성품이나 국정에 대한 솔직한 심정, 군사에 대한 비밀 계책, 친지 부하나 내외 요인들과 내왕한 내용, 부하들에 대한 상벌 등이 상세히 묘사되어 있어 임진란 당시 정치. 군사에 관한 전체사를 연구함에 있어서도 중요한 사료가 된다.

   난중일기는 연도별로 7권으로 나위며 임진란이 일어난 다음 달에서 시작되어 중간이 약간 끊어진 데가 있으나 공이 순국한 전달까지의 기록으로 다음과 같이 보존되어 오고 있다.


  * 임진일기(壬辰日記) : 선조 25년(1592) 5월1일 ~ 동와 26년 3월까지 27매 
  * 계사일기(癸巳日記) : 선조 26년(1593) 5월1일 ~ 9월15일 까지 30매
  * 갑오일기(甲午日記) : 선조 27년(1594) 1월1일 ~ 7월28일 까지 52매

  * 병신일기(丙申日記) : 선조 29년(1596) 1월1일 ~ 10월11일까지 41매

  * 정유일기(丁酉 日記) : 선조 30년(1597) 4월1일 ~ 10월8일 까지 27매

  * 정유일기(丁酉 日記) : 선조 30년(1597) 8월4일 ~ 동와 31년(1598) 1월4일까지20매 
  * 무술일기(戊戌 日記) : 선조31년(1598)9월15일 ~ 10월 7일 까지 8매

 

 

▲난중일기

 

 

  이름은 본시 적혀 있지 않던 것을 정조대왕 때 이충무공전서를 편찬하면서 편의상 난중일기라고 한데서 지어진 것이다. 이 난중일기는 서간첩. 임진장초와 함께 1962년 12월20일 국보 제76호로 지정되었다.

 

 

▲이순신에게 내린 교지
▲장검과 요대


 
구본전(舊本殿)

  지금의 유물관 옆에는 구본전(舊本殿)이 있다. 현재의 본전이 지어지기 전까지 본전으로 사용된 건물이다. 이 건물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자취를 감춘 뒤, 일제의 탄압으로 종손의 가산이 기울어 파산지경에 이르렀다.

 

  이 사실이 1931년 5월 동아일보에서 보도되자 뜻있는 인사들이 이충무공유적보존회를 조직하고 동아일보사와 협력하여 전 국민의 성금을 모금하여 1932년 6월 5일 현충사 낙성식과 청전(靑田)이상범(李象範)화백이 그린 영정봉안식을 동시에 거행하였으며 아울러 현충사 사적비를 세우게 된 것이다.

 

 그러던 중 1967년 성역화사업으로 새로이 본전이 신축되자 한동안 배전(拜殿)으로 사용하다가 1968년 9월에 유물관 옆 지금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구본전 기둥에 쓴 주련(柱聯)은 위당 정인보가 쓴 것이다.

 

▲구본전의 현판글씨는 숙종의 글씨
▲구본전 주련에 대한 설명

 


정려(旌閭)

 

  이 외에도 본전을 올라가는 우측 연못 쪽으로 임금이 하사한 편액을 걸어둔 정려(旌閭)가 있다. 정려는 충신이나 효자, 열녀에게 임금이 편액을 하사하여 그들이 살던 마을 입구에 걸어두는 건물로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사표(師表)로 삼아 그 정신을 고취하고 본받도록 세우는 것이다. 

 

  현충사 정려에는 정조대왕이 하사한 이충무공과 공의조카 이완, 사대손 이홍무, 오대손 이봉상 등 네 분의 충신과 팔대손 이제빈, 한분의 효자 편액이 걸려있다. 원래 정려는 동남향으로 정위치에 있었으나 현충사 성역화시 참배객들의 편의를 위하여 서으로 방향을 바꾸어 해체·복원한 것이다.

 

 


연못

  경내에 있는 연못은 1972년 성역화 사업에 따라 인공으로 축조된 것으로 비단잉어와 돌다리 등이 경내의 조경을 돋보이게 하고 있다. 돌다리 위쪽에 있는 연못은 700평이며, 아래쪽에 있는 연못은 1,000평 크기이다. 필자가 방문했을 때는 물을 빼고 보강공사 중이어서 연목의 풍치를 보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겨울철을 맞아 물을 빼고 정비하는 중이었음

 

 

이충무공의 생애(生涯) 

  



 「충무공 이순신장군은 1545년 4월 28일 서울 건천동(현 인현동)에서 아버지 이정(李貞)과 어머니 변씨(卞氏)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공은 어린시절 가족과 함께 외가가 있는 이곳 아산으로 이주하여 성장하고 혼인하였으며 활쏘기 등 무예를 연마함은 물론 학문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1576년 32세가 되던 해에 식년무과(式年武科)에 급제하여 함경도 변방의 동구비보 권관을 시작으로 훈련원 봉사, 발포 만호, 건원보 권관, 훈련원 참군, 사복시 주부, 조산보 만호, 선전관, 정읍 현감 등을 차례로 역임하다가 1591년 2월 서애 류성룡의 천거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발탁되어 전라좌수영(여수)에 부임하자 일본의 침략을 예견하고 군사조련, 무기제조, 진지보수 등에 힘썼으며, 특히 세계 최초의 철갑선인 거북선을 건조하여 이에 대비하였다.

 

  이듬해인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왜군 20여만은 일사천리로 북상하여 5월 2일에는 서울이 함락되는 등 파죽지세로 우리나라를 짓밟았다. 그러나 공은 5월초 1차 출동 때 옥포, 합포, 적진포에서 40여척을 격파하여 승리했다.

 

 

 

▲학익진 전법
▲당시 사용한 승자총통, 천자총통, 황자총통(위로부터)

 

  이어 5월말부터 6월초에 이르는 2차 출동 때 사천, 당포, 당항포, 율포에서 승리하였고 7월에는 평양까지 진출한 육군부대와 서해를 통해 연결하려는 적 함대를 한산도에서 기습 대파하여 임진왜란의 전세를 뒤바꾸는 전기를 마련하였으며 연이은 안골포해전과 9월초 부산해전 등을 모두 승리로 이끌었다.

 

  이후 1593년 웅천 등의 적 수군을 궤멸하여 남해안의 적을 소탕하고 한산도로 진을 옮겨 본영을 삼았으며 최초의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가 되어 1594년 당항포, 장문포 등에서 왜적을 소탕한 뒤 전쟁이 소강상태에 들어가자 장기전에 대비하여 군사훈련, 군비확충, 피난민 보호, 산업장려에 힘썼다.

 

  1597년 왜(倭) 간첩 요시라의 간계로 모함을 받아 서울로 압송되어 사형을 받게 되었으나 정탁(鄭琢)의 상소로 사면되어 권율장군 휘하에 백의종군하였다가 정유재란 때 원균이 참패하자 삼도수군통제사에 재임되어 12척의 함선과 빈약한 병력을 거느리고 명랑해전에서 133척의 적함과 대결, 31척을 부수는 대전과를 거두었다.

 

  1598년 적선 500여척이 철수하기 위해 노량에 집결하자 명나라 제독 진인(陣璘)의 수군과 연합, 적군을 기습하여 접전 중 12월 16일 새벽 적탄에 맞아 54세를 일기로 일생을 마치었다.

 

 

▷ 해전도



  공은 전 생애를 통하여 일관된 애국심과 충성심,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정의감, 지극한 효성심을 고루 갖춘 인격자이었으며 특히 전략에 뛰어난 용장으로서 임진왜란 중 싸움마다 승리했고, 적 수군의 기세를 꺾어 제해권을 장악하여 곡창지대 전라도를 방어함으로써 군량미 확보에 만전을 기하는 등 어려운 여건에서도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는데 가장 큰 공을 세웠으며, 글에도 능하여 난중일기(亂中日記)와 시조(時調) 등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 <참고 :현충사 홈페이지에서 따옴>

 

 

   이상의 생애에서 본 바와 같이 그의 활동 무대는 거의 전국에 망라되어 있어 충무공의 유적 은 이곳 아산시 이외에도 전라남도 목포시, 여수시, 진도군, 완도군 강진군, 순천시, 정읍시, 함평군, 광주시와 경상남도 통영시, 남해시, 거제시, 진해시, 사천시, 진주시, 고성군와 충남 천안시, 서울 부산 등 전국 도처에 흩어져 있다.

 

▲백년이 넘은 현충사 경내의 반송

 

◎ 여행정보


* 문의처 : 관리사무소 TEL :  041-539-4600 
* 주변여행지 : 온양온천:10분, 마곡사:50분, 외암리민속마을:30분, 온양민속박물관:15분
* 찾아가는 길 : 경부고속도로(천안IC)→좌회전(600m)→우회전·아산음봉방향 직진 (7km)
 → 지방도624번(9km) → 현충사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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