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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 및 정보/- 러시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그 : 눈부신 백야(白夜), 찬란한 물의 도시

by 혜강(惠江) 2005. 12. 16.

 

상트 페테르부르크 

 

러시아 제2의 도시, 러시아 속의 유럽

눈부신 백야(白夜), 찬란한 '물의 도시'  

 

 

·사진 남상학

 

 

 

네바강 건너 보이는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성당의 첨탑

 


  모스크바에서 오후 10시 10분에 출발하는 밤기차를 타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한 것은 다음날 아침 7시 10분이었다. 밤에 이동했으면서도 환한 대낮같은 백야(白夜)를 실감할 수 있었다. 페테르부르크의 화사한 아침 햇살이 밤기차에 시달린 피곤한 몸을 반가이 맞아주었다. 날씨는 덥지만 도시는 매우 쾌적했다.

   얼마 전까지  레닌그라드로 불렸던 도시로서, 제정러시아의 첫 닭이 울었던 도시이자 바로 그 제정러시아의 몰락을 가져왔던 도시이다. 한때는 러시아의 수도로서 그 위용을 서방에 과시하는 한편으로 숱한 영화의 배경이 되었고, 소설과 시와 산문의 배경이 되었던 서정적인 도시이기도 하다. 북유럽의 베니스, 북유럽의 파리라고까지 극찬을 한 몸에 지니고 수많은 방문객을 맞았던 아름다운 도시에 들어섰다는 점에서 다소 기분이 들뜨기도 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어떤 도시인가?

 

청동기마상 쪽에서 본 이삭성당

 


  지리적으로 핀란드 만(灣)과 인접하고 있는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모스크바에 이어 러시아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로 모스크바에서 북서쪽으로 850여km 떨어진 곳, 북위 60도에 위치하고 있다.  40여개의 섬, 380여개나 되는 교량, 동토의 대륙에서도 북극권 근방(북위 60도)의 네바 강 하구(발트해 연안)에 건설된 러시아의 옛 수도였던 곳이다.

   겨울이면 얼음바다에 둘러싸여 고립되는 표트르 1세(1672~1725)의 제정 러시아에 이 도시는 '유럽으로 열린 창'이었다.  이 강의 얼음은 쇄빙선으로 뚫을 수 있어 발트해를 거쳐 북해를 경유, 대서양으로 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표트르 1세는 스웨덴을 침공, 이 강과 땅을 빼았고, 수도를 모스크바에서 이곳으로 옮겼다. 1712년의 일이다.

   1703년 러시아 로마노프왕조 제4대 황제인 표트르 대제가 스웨덴과의 북방전쟁(1700-1721)에서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피터폴 요새를 건설하면서 이 도시가 형성되었다. 유럽의 유명한 건축 예술가들이 모여들어 건축 예술의 걸작품을 이곳에 표트르식 바로크 양식을 이 도시에 창출했다. 그리고 도시 이름도 자기 이름을 따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명명했다.

  모스크바가 동양적 모습을 많이 간직하고 있는 도시라면 페테르부르크는 ‘서유럽으로 가는 통로’라는 호칭에 걸맞게 서양적인 특징을 많이 보존하고 있는 곳이다. 

  표트르대제로부터 시작된 제정러시아는 레닌에 의해 니콜라이 2세 때 그 막이 내려지게 되는데, 수도를 다시 모스크바로 천도할 때까지 200여 년간 로마노프 왕조의 수도가 되었고, 러시아 제국과 영욕을 같이 하며 많은 동란과 혁명으로 굴절 많은 역사의 장이 되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요람 페트로 파블로프스크 요새

 

네바 강변에 정박하고 있는 전시용 배

 


   넓은 도로, 대형 건축물, 잘 정리된 거리를 지나 네바강 궁전 다리를 건넜다.  곳곳에 운하가 보이고, 훤하게 펼쳐진 강을 보면서, 들은 대로  과연 '물의 도시'를 실감했다. 네바 강 위를 달리며 보는 도시의 정경은 아늑하고 포근했다.

    우리가 먼저 찾아간 곳은  항구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 건설이 시작된 페트로 파블로프스크 요새(要塞)였다.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배처럼 두둥실 뜬, 이름하여 토끼섬. 조그만  실개천을 다리로 건너면 된다.  표트르는 바로 이 섬 습지에 스웨덴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 베드로와 성 바울의 기념일이었던 1703년 6월 29일에 목조 교회의 기공식을 치루고, 1719년 7월 8일에는 석조 대성당 건설을 착수했다. 성채인 요새는 성당의 명칭과 같은 명칭으로 붙였다.

    요새를 에워싼 성벽의 두께는 8m에서 12m로서 견고하기 이를 데 없다. 요새는 1703년 5월 27일 건축이 완공되었다. 적에게 완전히 포위되더라도 요새 내에서의 모든 생활이 별 무리 없이 적에 대항할 수 있도록 수도와 무기 제조창, 식량창고, 성당 등 기본 생활 시설들이 완벽하게 갖추고 있었다. 특히 당시에 사용하던 조폐창은 지금도 실제로 사용되고 있다.

 


  

 


  이후 이곳에 서구에서 건축가, 원예가 등을 초빙하여 항만과 도시를 건설하면서 상트페테르부르크라는 대도시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상트페테르부르크는 혁명이 난 다음해 수도를 다시 모스크바로 천도할 때까지 200여 년간 러시아 제국과 영욕과 운명을 같이하게 된다. 전쟁에 대비하여 건설한 이곳은 지금은 페테르부르크를 대표하는 관광명소가 됐다.
 
  이 요새에서 가장 유명한 건물은 페트로 파블로프스크 성당. 이 대성당의 종루 꼭대기는 첨탑으로 되어 있고, 거기에는 십자가를 지닌, 도시를 축복하고 있는 십자가상(像)이 있다. 종루의 전체 높이는 122.5m이다.  

    특히 성당의 뾰족한 첨탑이 아주 인상적이다. 대성당의 장식으로는 황제의 대문이 묘사된 독특한 격벽(隔璧) 환조와 부조로 처리된 연단이 있다. 표트르 통치기부터 베드로 바울 대성당에는 러시아 황제들과 황족들의 묘지가 있으며, 베드로 바울 성채가 이루는 건축 예술의 앙상블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모든 역사가 새겨진 유일한 기념비이다.

 

 

 

 

   또 성당 옆에는 1768년 천재적인 조각가 E. 팔코네에 의해 세워진 표트르 대제의 동상이 있다. 도시의 기초를 세운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그 동상의 모습은  머리는 작고 손발은 매우 크고, 키가 2미터 10센티나 되는 무언가 균형이 맞지 않는 거구의 사람이었다.

    황제이면서도 매우 정력적인 사람으로서 자신의 신분을 속이고, 핀란드의 조선소에 취직하여 배 만드는 기술을 2년 동안이나 배웠을 정도이다. 화려한 생활을 멀리하고 오두막에 살면서 도시를 건설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또한 인근 국가들과의 잦은 전쟁을 모두 승리로 이끌고 강력한 카리스마를 행하기 시작했다. 표트르 대제의 동상의 손과 무릎을 만지면서 소원을 빌면 모두 이루어진다는 말이 전해져 그의 손과 무릎은 반질반질하게 닳아 있었다.
  
   요새 밖으로는 네바강이 흐르는데 많은 러시아인들이 남녀 모두 상의를 걸치지 않는 채 일광욕을 즐기는 장소가 되고 있다. 한 여름 외에는 햋볕을 볼 수 있는 때가 드물기 때문에, 해가 자주 나는 여름 공휴일이 되면 수많은 남녀가 네바 강가나 공원에서 벌거벗고 일광욕을 즐기는 장면들을 많이 볼 수 있는데, 우리는 선탠이 건강을 위해서지만 이들에게는 비타민D가 부족하여 생기는 말년의 곱사병을 예방하기 위한 본능적인 행위에 가깝다고 한다. 우리가 방문한 시간이 아직 햇볕이 강하지 않은 오전인데도 벌써 많은 사람들이 나와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다.  


이삭 광장과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이삭 성당 

 

이삭 성당의 전면 모습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이삭 광장. 이삭 광장은 네바 강 좌측 강변과 연결된 광장으로 장엄한 건물들의 예술적 총체를 이루는 곳이다. 이곳에는 구 해군성 성채와 연결된 모르스까야 마을의 건물들이 위치하고 있다. 

   거의 3세기에 이르는 세월에 걸쳐 만들어진 건물은 이삭 성당을 비롯하여 독일 대사관 건물과 아스토리아 호텔이 서로 다른 건축 양식의 면모를 드러내고 있어 이삭 광장의 구조를 조화롭게 마무리하였다. 이 광장의 중심축은 이삭 성당으로, 이 성당과 광장은 5월 30일이 그 기념일인 성(聖) 이삭의 이름을 따서 붙였는데, 이 날은 표뜨르 대제의 생일로도 기념된다.

 


   

니콜라이 1세 기마상

 


   중앙에는 니콜라이 1세 기마상이 우뚝 서 있다.  이 기마상은 ‘믿음, 지혜, 힘, 공정함’을 의인화한 형상들이 새겨진 석대 위에 세워져 있는데, 4개의 형상은 니콜라이 1세의 황비(皇妃) 및 공주들을 닮았다고 한다.    
  
   이삭 광장의 한 면을 차지하고 있는 이삭 성당은 돔의 크기가 세계에서 세 번째 규모인 105.5m(30층 규모)에 이르러 도시의 어느 곳에서도 눈에 쉽게 띈다. 이 성당은 몽페란드에 의해 설계된 후 알렉산드르1세 때 시작하여 그의 조카 알렉산드르2세 때(1918년~1958년)까지 3대에 걸쳐 무려 40년간 10만 명이 넘는 농민들이 동원되어 지어진 거대한 카톨릭 성당으로서, 단일 예배당으로서는 세계 최대를 자랑한다. 거대한 황금빛 돔은 성 이삭의 날인 5월 30일에 태어난 표트르 대제를 기리기 위해 건립된  것이라 한다.  

 

 

 

본당의 대리석 기둥과 주랑의 부조 작품

 

 

   총 만 4천명까지 수용할 수 있는 웅장한 규모도 규모거니와 흠잡을 곳이라고는 단 한 개도 찾아볼 수 없는 완벽한 건축미와 종교적 숭고함, 그리고 건축술은 보는 이의 감탄을 넘어 경악을 하게 만든다. 특히 거대한 돔 밑에 역시 거대한 대리석의 둥근 기둥을 세워 넣은 기술은 현대의 건축가들이 입을 모아 불가사의로 부르고 있다. 

   천장의 높이는 80m에 이르고, 돔의 꼭대기까지는 그 높이가 무려 111.3m에 이른다. 64개의 원통 대리석 기둥으로 성당을 장식했으며, 안으로 들어가는 3개의 육중한 문은 각기 9톤의 무게에 달하는 청동 주물로 만들어져 있다. 이 거대한 대리석 기둥들은 모두 이탈리아에서 가공을 마친 완제품을 배에 실어 네바 강을 통해 이곳으로 실어온 후 조립한 것이다. 

    더구나 페테르부르크가 습지대인 관계로 기초만 다지는데도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지반을 다지기 위해서 이 성당 밑에는 가로 세로로 철490톤, 990톤의 주철, 40톤의 구리, 길이 6m의 쇠말뚝만 2만 8백개를 박아넣었다고 한다. 또 이 물자를 운반하기 위하여 최초로 네바 강에 바지선을 띄웠다고 한다.  하중에 관한 지식이 미흡했을 19세기 초반에 이룬 대역사다. 

 

 

 

이삭 성당의 중앙 본당과 중앙 격벽

 


   성당을 내부는 초록색의 특이한 색조를 가진 돌기둥들이 성당의 엄숙한 분위기를 보다 부드럽고 안정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이 돌은 '말라이트'라 불리는 일종의 보석 종류로서 러시아의 남부와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채굴한 것이다.  

   100t이 넘는 금과 유럽 각지와 국내에서 생산된 대리석과 반암, 벽옥 등 40여 가지가 넘는 다양한 석재가 사용되었고, 성당의 내부에는 성서의 내용과 성인을 묘사한 150점이 넘는 러시아 화가들의 회화와 조각품 12000여개의 조각으로 만들어진 62개의 독특한 모자이크 프레스코화가 전시되어 있다.(예언자, 에덴의 동산, 예수의 고난, 최후의 심판, 대홍수, 천사 가브렐라의 전언 등) 

   또 우랄산맥에서 생산된다는 초록색의 공작석으로 만든 모자이크 조각기둥 등은  바티칸성당과 비교하여 내부의 화려함은 보는 이들을 놀라게 한다. 


  

본 건물의 돔형 지붕의 내부

 


  남쪽 입구에서 262계단을 올라가 높이 43m에 달하는 교회의 전망대에서는 페테르부르크의 아름다운 전경을 감상할 수 있다. 여기서 에르미타쥬 방면으로 보면 72.5미터의 금빛 첨탑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약 120년간 지어서 1823년에 완공된 구해군성 건물이며, 그 옆으로 데카브리스트 광장이 있으며, 1825년 12월 니콜라이 1세 황제 취임식 날 전제정치와 농노제에 반대한 청년 귀족 장교들이 주축이 되어서 이곳을 중심으로 데카브리스트들이 난을 일으켰으나 진압된 역사적인 장소이다.

    이 건물은 1704년에 표트르 대제의 머리글자인 П모양을 기초로 하여 만들어졌다. 동쪽과 서쪽의 600m 범위는 축성학적 관점에서 일체의 건축이 금지되었다가 나중에 3개의 광장인 원로원 광장, 궁전 광장, 아드미라르 광장이 되었다. 현재의 구 해군성은 1823년에 개축된 것으로 해군의 주요 기관이다.




세계 3대 박물관의 하나 에르미타주 국립미술관

 

 

황혼 속의 에르미타주 미술관

 


  페트로 파블로프스키 요새가 바라다 보이는 네바 강변. 에르미타주 국립미술관은 줄지어 선 흰 기둥과 연두 빛 벽면이 어울려 웅장하면서도 아름다운 자태로 서 있다. 건물 지붕에는 수많은 조각상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수호신처럼 네바 강과 겨울 궁전 광장을 내려다보고 있다.
   
   프랑스의 루브르, 영국의 대영박물관과 더불어 세계 3대 미술관이라고 일컬어지는 곳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방문을 받고 있는 '에르미타쥬'는 처음에는 예카테리나 단 한 사람만을 위해 지어진 궁전이었다. 에르미타주 미술관은 겨울궁전을 비롯해 작은 에르미타주와 신-구 에르미타주 등 모두 5채의 건물로 이뤄져 있는데, 황제의 거처였던 겨울 궁전에만도 자그마치 1,050여 개의 방이 있다.  

    처음에 건축한 것은 겨울 궁전 옆에 세운 소(小) 에르미타주로서, 에카테리나 2세가 수집한 미술 작품들을 전해 놓기 위한 것이었으나. 이 여제(女帝)의 수집품이 많아져 감에 따라 또 하나의 건물이 필요하게 되어 대(大) 예르미타주가 세워진 것으로 이것들은 후에 통로를 따라 이어진 것이다. 

 

 

 

 


   125개나 되는 전시실을 모두 이으면, 전시실의 동선 총연장이 27㎞나 된다. 소장품은 그림과 조각 보석류 등 모두 300만점. 한 가지에 1분씩만 할애해도 전부 다 보려면 5년 넘게 걸린다고 한다.

   표트르대제는 그 아들인 표트르 2세에게 모든 황제의 권한을 물려주고 세상을 떠났지만, 아들은 아버지의 영광을 계승할 인물이 되지 못하였다. 독일을 흠모하고 열정적으로 좋아했던 대제는 모자라는 아들의 공백을 메울 수 있도록 고심한 끝에, '예카테리나'라는 독일 귀족의 딸을 아들과 맺어주기로 하였다.

 

  하지만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인 예카테리나는 정신박약의 증세와 성불구자인 표트르 2세를 결혼한 지 1년이 채 안 되어 살해하고, 자신이 '예카테리나 2세'로 왕위를 차지한다.  조각, 회화 등 작품 수집이 유일한 취미였던 그녀는 현재 소장품의 60%를 사 모으고 나머지는 빼앗아 온 것들이다. 

   에르미타쥬는 ‘비밀의 방’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지하에 많은 비밀의 방이 있어 2차 세계대전 때는 독일이 침공했을 때, 많은 보물들을 이곳에 숨겨놓아 탈취당하는 것을 막을 수도 있었다. 

   예카테리나 2세의 바람기는 공공연한 소문이 되었다.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살았던 그녀는 뭇 남자들의 품에서 살았다. 하루저녁 만리장성을 쌓았던 남자가 마음에 들면 오랫동안 자신의 곁에 두고 정치를 하게 하였고, 맘에 들지 않으면 다음날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게 되었다. 에르미타쥬는 이후부터 황제들의 겨울궁전으로 사용되게 되었다.

 

 

예카데리나2세가 타던 황금마차

 

 

  고대 동양 서유럽 러시아 문화예술 등 크게 5개부로 나눠 전시되는 유물 가운데, 특히 제4부에는 러시아가 국력을 쏟아 모은 렘브란트의 작품을 비롯해 루벤스, 라파엘로,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세잔, 고흐, 고갱, 드가. 모네, 르누아르 등 인상파와 피카소, 마티스, 칸딘스키 같은 20세기 초기 화가의 작품에 이르기까지 약 8000점의 명화들이 벽면을 가득 장식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 박물관은 여러 경향의, 여러 시대의, 여러 민족의 미술 작품들을 체계적으로 접할 수 있게 하려는 게 목적이었다.  
                                  
  소장된 중요한 작품으로는 마티스의 악기를 부는 소년, 고흐의 '언덕 위의 집', 고갱과 모네, 르노와르, 렘브란트, 레체트 등의 인상파 작품들이 특히 볼만하다. 빛의 명암을 최대한 극적으로 표현한 렘브란트의 작품 중 '돌아온 탕자'는 그의 작품 중에도 수작으로 꼽히고 있다. 

  렘브란트의 작품은 밝은 곳에서는 배경 속의 그림들이 보이지 않으므로 렘브란트의 방에는 창에 두꺼운 커튼을 드리운 것이 재미있다.  트로이언의 작품은 주로 이른 아침이나 해질 무렵, 역광을 이용해서 그림을 그리는 화가로서 유명하며 대표작으로는 '시장 가는 길'이 이곳에서 선보이고 있고 색채의 마술사 르노와르의 '채찍을 든 소년'은 우리에게 뭔가 친숙한 그림으로 다가온다. 

   또한 시간의 마술사라 불리는 모네의 경우, 그의 작품은 계절이나 바람의 이동, 기후를 절묘하게 표현하는 화가로 유명하고, 고갱의 그림들은 타히티의 원주민 색채에서 얻은 영감을 이용한 것들이 많고, 그의 작품은 후에 피카소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고호의 작 '언덕 위의 집'은 처음에는 졸작으로 평가를 받았지만, 후에는 흘러 내릴 듯한 언덕의 묘사가 절묘하게 표현되었다는 인정을 받게 되었다. 현재 에르미타쥬에서 최고로 비싼 그림이다. 

 

 

네오날드 다빈치의 '마돈나 리타'(1490-1491)

 


   고흐는 축복을 받고 태어났지만 저주받은 인생을 살았다. 그는 자기 자신 속에 갇혀 끓어오르는 열정을 그림으로 나타내며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살아오다 결국 권총으로 자살하고 마는 비련의 예술가이다. 이외에도 헤아릴 수 없는 중세의 회화들과 조각, 제정 때의 무기와 마차, 의상, 집기, 책, 초상화 등. 방대한 작품 앞에 그저 한숨만 나올 뿐이다. 
 
  한 가지 특기할 것은 우리나라의 김흥수 화백 작품이 바로 이곳 에르미타쥬에 걸려있다는 사실. 이 박물관에 있는 작품 중 생존해 있는 작가의 작품으로는 단 한 점, 바로 김흥수 화백의 '승무'라는 작품뿐이다. 걸려있는 곳이 방이 아니라 복도라는 점이 다소 마음에 걸리긴 해도, 우리의 자부심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다. 
   
  이 미술관에는 그림과 조각뿐 아니라 숱한 금은보석 장식과 각종 조형물, 비취빛 대리석 기둥을 보노라면 그 섬세하고 현란함, 웅장함에 찬탄이 절로 나온다.  미술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이곳에 가면 최소한 반나절은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지내게 된다. 미로 같은 전시실과 회랑을 바삐 돌아다녔더니 다리가 무겁다.




궁전 광장과 겨울 궁전

 

 

겨울궁전 광장 뒤로에르미타쥬 미술관이 보인다. 그 반대편이 참모본부



    에르미타쥬 미술관을 빠져 나와 한적한 광장으로 나섰다. 겨울 궁전, 에르미타쉬, 반원형의 개선 아치를 갖춘 건물 등으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조화를 보여주는 광장이다. 이곳은 페테르부르크의 역사적 중심지인 셈이다. 주위에는 웅장한 참모본부 건물, 황제 궁전, 근위병 학교 건물 본부와 중앙에 높이 세워진 원기둥 조화롭게 배치되어 있다.

     궁전 광장 한복판에는 러시아가 나폴레옹 군을 물리친 뒤 1834년 세웠다는 거대한 알렉산드르의 원주(圓柱, 원기둥)가 하늘 높이 솟아 있다. 붉은 화강암의 높이는 47.5m, 직경 약 4m, 무게가 704t이라는데, 꼭대기에는 천사상이 아래쪽을 내려다보고 있다.  아를로프스키가 따로 조각한 기둥 위의 천사가 십자가를 지고 참회하는 모습은 알렉산드르 1세를 나타낸다. 
   
  참모본부의 아치형 건물을 이어주는 개선문 위의 승전 마차 ‘영광의 병거’는 앞발을 든 6마리의 말이 정면과 옆을 각각 바라보며 끌고 있다. 1812년 조국전쟁의 승리를 기념하여 만든 것이라고 한다. 한편 지금은 궁전 광장에서는 각종 기념공연, 정치집회 등이 열린다.

 

 

참모본부의 아치형 지붕 '영광의 병거'

 


   아치 위에는 말이 끄는 전차에 탄 승리의 여인상이 서 있다. 이곳은 러시아인들이 조국 전쟁이라고 부르고 나폴레옹 전쟁의 승리를 기념하는 것이다. 아름다운 에르미타주, 문화대국을 꿈꿔온 러시아의 열망과 힘이 응축된 현장이다. 
   
   겨울 궁전은 궁전 광장을 지나 네바 강의 왼쪽 강변에 역대 러시아 황제의 거처로 세워졌다. 이 궁전을 설계하고 초기 건축 감독을 맡은 이는 천재적인 건축 예술가 B.F 라스트렐리였고, 1754년에 시작하여 에카테리나 2세 통치기인 1762년에 완성되었다.   

  이 겨울 궁전은 널찍한 공간, 풍요롭게 치장된 형태 등 그 모든 위엄스러운 자태로서 러시아 제국의 권위와 그 주권자가 갖는 무한한 권력을 느끼게 한다. 호화롭게 장식된 궁전은 1,057개의 방, 2,000개가 넘는 창문, 117개의 계단, 1,786 개의 문과 1,945개의 창문이 있다. 그리고 궁전 내부에는 170개 이상의 성화가 있다. 겨울 궁전의 크고 작은 방들은 궁중 생활의 역사를 그대로 말해 준다.    




숲과 조각으로 장식한 여름 궁전과 정원

 

 

궁정과 정원


 

  여름 정원은 물 위에 뜬 작은 섬 안에 있다. 이 정원은 북으로는 네바 강, 동으로는 폰딴까 강, 서로는 백조 천(川), 남으로는 모이까 강으로 둘러싸인 작은 섬 위에 위치하고 있다. 

 이 정원의 네바 강 쪽 울타리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밑 부분이 화강암으로 되어 있고, 원주와 항아리 모양의 조각, 또한 금으로 도금된 세부장식들이 있는 철제 격자 구조물이다.  정문에는 ‘평화와 풍요’를 뜻하는 조상(彫像)이 있다.  
 
  여름 정원의 대표적 건물은 벽돌로 된 2층짜리 궁전이다. 이 궁전의 구조와 각 방들의 쓰임새와 장식은 18세기 초 러시아 내부 장식의 표본이다. 각 방들의 벽은 두꺼운 직물로 덮여 있고, 화려한 천장화, 석고 무늬의 장식, 그린이 그려진 타일 벽난로, 무늬로 처리된 방바닥 등이 그것이다. 궁전에는 표트르 1세의 사실(私室)과 에카테리나 1세의 거실들이 있다. 
  
   표트르의 여름 정원에는 250전 이상의 조각품이 있고, 그 중에는 현재 에르미따주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고대 그리스 로마 원작 조각 작품들도 있다. 보존되어 있는 89점의 대리 석상을 통해 정원을 나름대로의 아카데미로, 즉 권위 있는 예술 작품의 집성체로 꾸미고자 한 표트르 1세의 의도가 엿보인다.

    여름 정원을 장식하는 작품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분수로서, 이 분수의 급수는 강으로부터 끌어올린 물을 이용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수원(水源)이 된 강의 이름이 ‘폰딴까 강(분수강)’가 되었다. 손상된 부분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여름 궁전과 정원은 표트르 통치기의 역사적, 건축 예술적, 문화적 기념비의 의미를 보존하고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상징, 청동 기마상

 

 

 

청동기마상 앞에서 기념촬영하는 신혼부부

 


   원로원 광장 끝 네바 강변 쪽(이삭 성당 뒤쪽) 카브리스트 광장에는 러시아의 대문호인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시 "청동 기마상(The Bronze Horseman)"에도 등장하는 같은 이름의 기마상이 우뚝 서 있다.

   이는 쿠데타로 남편을 죽이고 왕위에 올라 계몽 전제군주로 칭송받는 에카테리나  2세가 이 도시의 건립자이자 러시아 역사에 길이 남을 황제인 표트르 대제의 후계자임을 공식적으로 알리기 위해 1766년, 프랑스의 조각가 팔코네(E.Falconet)를 시켜 12년간에 걸쳐 만든 것이다.   

  표트르 대제가 탄 말이 앞쪽 다리를 번쩍 들어 올리고 있는 형상의 조각상을 받치고 있는 돌은 페테르부르크에서 12베르스타(구 러시아 단위로 1 베르스타는 약 1067㎞이다) 떨어진 곳에서 발견된 것으로, 그 무게가 1600톤에 달하고 길이가 13.5m, 폭 7m, 높이가 8m에 이르는 아주 거대한 뇌석이다.

    400명이 넘는 장정들이 핀란드만에서 이곳 네바강둑으로 이 돌을 옮겨오는 데만도 4개월여의 시간이 걸렸다고 하니 얼마나 엄청난 규모의 공사였는지 짐작할 만하다. 이 청동기마상의 구성법은 심플하면서 표정이 풍부하게 조각되었는데, 저자는 심볼을 이용하여 표트르 대제의 행적을 강조할 수 있도록 석상엔 파도치는 물결 모양을 조각하였고, 또한 러시아는 항상 바다를 향해 열려 있다는 것을 상기할 수 있음을 의미한 것이다. 기마상의 말발굽엔 날개달린 뱀이 조각되어 있는데 이것은 악의 내/외적인 힘을 상징화한 것이다.

    오늘날에도 이곳은 마르스 광장의 꺼지지 않는 불과 함께 결혼을 마친 젊은 신혼부부들이 방문하여 꽃다발을 바치고 기념사진을 찍는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러시아 황제와 귀족들의 여름 휴양지, 여름궁전 페테르고프

 

 

 

대궁전 앞의 폭포와 장식용조각상

 


 다음으로 간 곳은 시내에서 30㎞ 가량 떨어진 도시 외곽에 있는 표트르 대제의 여름궁전.  멀리 핀란드만을 정면으로 하여 세워진 방대한 여름궁전과 궁전 뒤뜰에 조성된 기하학적의 정원, 그리고 궁전에서 바다로 이어지는 운하, 방대한 숲과 140여개의 황금 빛 분수대는 방문객들을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러시아 정원예술의 최고라는 평을 듣고 있는 여름궁전은 이곳에 베르사이유 궁전을 능가하는 건축을 하고자 했던 표트르 대제에 의해 건설되었다. 18~19 세기의 궁전 및 공원의 거대한 복합체이다. 

  "러시아의 베르사유", "러시아 분수들의 수도"라고 불리는 페테르고프는 표트르 대제가 황제의 가족들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귀족들이 여름에 지내기 위해 지은 궁전으로 러시아 여행의 필수적인 코스다. 

 


  

'삼손'분수와 모르스꼬이(바다) 운하전경

 


  표트르 대제는 자신의 여름 휴양지를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과 비슷한 모습으로 만들고자 하였다. 표트르 대제의 명령으로 1714년 착공된 이래 9년이 지나서야 완공이 되었다고는 하나 실제로 공사가 끝난 것은 150년이나 지난 후였다. 

   1000 헥타르가 넘는 부지에 20여개의 궁과 144개의 화려한 분수, 7개의 아름다운 공원이 만들어진 것이다.  걷는 데 서너 시간이나 걸리는 가로수 산책로가 인상적이다.   이 공사에는 러시아와 유럽 최고의 건축가들과 예술가들이 총동원되었다.
   
  궁전은 대궁전, 아래 공원, 위 공원 등 세부분으로 나누어진다. 특히 아래 공원이 백미인데 이곳에는 독특한 폭포들, 각종 장식용 조상(彫像)들, 강한 물줄기를 뿜어내는 분수들 -「사자의 입을 찢는 삼손」, 장난꾸러기 분수, 우산 분수, 체스의 산 등 독특한 분수들이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뽐낸다.  분수 가운데는스웨덴과 잔쟁에서 거둔 승리를 기념한 '삼손'뷴수가 최고 걸작이다. 삼손 상(像) 앞으로는 핀란드 만 해변으로 운하가 연결되어 있는데, 표트르 대제 때 초청객들이 이 운하를 통해 배를 타고 여름궁전까지 들어왔다고 한다.

 

 

사실적 표현의 조각상

 


  표트르대제의 궁전 내부는 370점의 초상화와 너무 많아서 감각이 무뎌질 정도의 화려한 금장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심지어는 화장실 변기까지 금이다. 대궁전의 위편을 위 공원, 앞쪽을 아래공원이라 하는데 총 140개의 각기 다른 분수에서 뿜어내는 물줄기가 장관을 이룬다.   이곳의 최대의 건축물은 바로 대궁전(발쇼이 드바레츠)과 그 앞의 계단식 폭포라 하겠다. 

   원래 이 궁전은 1714‐25년에 걸쳐 표트르 대제를 위해 만들어졌으나 현재의 바로크풍 장식은 1745년부터 10년간 겨울궁전을 건축한 라스트렐리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이곳은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그 내부 인테리어는 조심스럽게 복구되어 오늘날에도 잘 보존되어 있다.




네바 강과 거미줄처럼 연결된 운하 탐방

 

 

 


  네바 강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요람이다. 이 강은 항구 도시인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생성되는 배경이 되었을 뿐 아니라 도시의 공간적 구조의 골조역할을 해왔다. 도시 내를 흐르는 네바 강의 길이는 28 km에 이른다. 

  이 도심을 가로지르는 네바강은 '은하수' 또는 '여자의 마음'을 의미한다고 하는데, 하루에 세 번 그 빛이 바뀌어 아침에는 회색이 되지만 점심때는 푸른빛으로 변하고 저녁에는 황금 빛을 발산하는 신비한 강으로 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강변을 따라 저명한 건축물들이 늘어서 있고,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광장과 정원들의 정면이 모두 네바 강 쪽을 향해 트여 있다. 또 강은 발틱 해로부터 이어지는 운송용 수로로서 여객선과 상선들이 들어오고, 이 강을 궁전 다리, 삼위일체 다리 등 8개의 개폐교(開閉橋)가 가로지로고 있어 도시가 매우 아름답다.

  이 네바 강을 따라 오르내리는 유람선을 타고 도시를 구경하는 멋이 어떠하겠는가. 밤에는  바실리 섬에 세워진 두 개의 해전 기념하는 뜻으로 세워진 원주(圓柱)가 있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네바강의 길잡이 로스트랄 등대이다. 

 

 

바실리 섬에 세워진 해정 기념 원주(圓柱)

 


   180년간 네바강을 지켜온 등대. 그 높이는 등(燈)을 포함하여 거의 32m가 된다. 이 원주의 화강암으로 된 밑받침에는 볼가 강, 네바 강, 보호프 강을 의인화한 석조 조각과 드네쁘르 강을 의인화한 석조 조각이 위엄을 갖추고 앉아 있는 모습으로 만들어졌다.  

    원주에는 박편(薄片) 구리로 된 8개의 뱃머리 모양의 장식이 있다. 강변에 둘러쳐진 화강암 벽은 이곳의 건축 예술과 앙상불을 이루고 있다.  이 주변에서는 강 낚시를 즐기는 러시아인들을 많이 볼 수 있다.
  
    또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북구의 베니스'라 불릴 만큼 운하가 발달해 있다. 고풍스런 중세 건물 사이로 운하가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어서, 페테르부르크의 구석구석을 살펴보는 데는 쪽배를 타고 운하를 따라가는 것 또한 멋진 경험이다. 운하를 가로질러 연결된 다리가 많아, 물이 불어난 시기에는 배가 다리 아래를 지날 때 고개를 숙이며 탄성을 지르기도 한다.

  특히 카잔성당의 오른쪽엔 그리보에도브 운하가 흐르고 있는데, 상트페테르부르크 시에서 가장 흥미롭고 아름다운 다리 중 하나가 방코프스키 다리이다. 이 다리는 운하를 건널 수 있는 보행자용 다리로 황금빛 날개를 단 그리핀(griffin - 독수리 머리 및 날개를 가진 보물을 지키는 사자)으로 장식되어 있다. 그리핀 두상 위엔 유리로 만든 둥근 등이 달려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운하 탐방은  장중한 건물들의 빛깔이 점점 더 바래져가는 어스름해질 무렵이 더욱 운치가 있다.

  
볼세비키 혁명의 시발점 순양함 오로라호

 

 

 페트로프스카야 강변로를 산책하다 보면 네바 강변에 회색의 대형 선박 오로라호가  닻을 내리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이것은  1917년 러시아 혁명을 알리기 위해 황제의 겨울궁전을 향해 발포했던 역사적인 순양함이다. 

  혁명정신이 투철한 이 군함의 선원들이 1917년 11월7일에 그 당시의 최고 권력기구인 임시정부가 있었던 동궁을 행하여 대포를 발사함으로써 사회주의 혁명의 시작을 선언하였다.
  
    당시 제정러시아 시대 공포정치로 종종 표현된다. 황제의 명령은 곧 신의 명령이었고, 귀족들은 화려함의 극치를 이루며 살아가는 반면, 일반 대중은 극도로 억압받으며 굶주린 생활에 시달리고 있었고, 이런 때에 혜성같이 나타난 사람이 바로 레닌이었다. 



 

네바 강변에 정박 중인 오로라 순양함의 위용


 

 레닌은 중심 이론은 귀족과 왕족들의 재산을 빼앗아 민중들이 다 같이 잘 살아보자는 것이었다. 이것은 레닌 사후 스탈린에 의해 더욱 심화되어, 공동생산과 공동분배를 목표로 집단농장과 같은 극단적인 커뮤니즘으로 발전하게 되는데, 이것은 결국 스탈린 정권 30년 동안 경제와 문화적으로 유럽에 훨씬 뒤쳐지게 되는 계기가 되고 말았지만 …
  
    1905년 1월 9일 에르미타쥬 광장 앞에 군중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의 손에는 차르 니콜라이 2세에게 보내는 청원서의 피켓이 들려져 있었다. 최소한의 생존권을 보장해 달라는 것과 노동조합의 설립, 언론과 집회의 자유를 보장해 달라는 민중들의 처절한 소원이 담겨 있었다. 차르는 궁전의 발코니에서 민중을 향해 높이 손을 흔들었다. 군중들은 이에 고무되어 '차르, 차르'를 외치며 계속 모여들었다.

    그러나 5천명 쯤 모였을 때, 차르는 흔들고 있던 손을 내리고 이것을 신호로 군중을 에워쌌던 군인들이 군중을 향해 기관총을 발포하기 시작했다. 하얗게 눈이 쌓여있던 광장은 삽시간에 피로 물들기 시작했고 4천여 명이 현장에서 사살되었다. 이 날은 일요일이었으므로 이후부터는 '피의 일요일'이라 불리게 되었다.  

    이 사건은 민중의 차르에 대한 실낱같은 믿음을 배신감으로 첨철시킨 사건이 되었고, 결국은 민중에 의해 제정이 몰락하는 계기로 발 톤급의 구축함 오로라호가 함포를 발사하는 것으로 혁명의 첫 신호탄을 울리게 되었고, 26일 새벽 2시에 에르미타쥬에서 레닌을 제거하기 위해 회의를 하고 있던 니콜라이 2세와 그 각료들을 급습하여 현장에서 모두 체포했다.

     회의를 했던 이 방은 지금 역사의 방으로 불리며, 당시의 탁상시계는 새벽 2시에서 멈추어져 있다. 이로서 러시아의 화려했던 제정은 그 막을 내리게 되었다.

   제정 러시아를 무너뜨린 10월 혁명의 신호탄 대포가 순양함 '오로라'호에서 포성을 울린 지 80년이 지난 지금, 러·일 전쟁에 참전하기도 했다는 군함 '오로라'호는 러시아 혁명을 기념하는 기념물로 강변에 정박한 채 현재 해군 중앙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러시아군의 영광을 상징하는 곳, 카잔성당 

 

카잔 대성당의 내외부

 


  1801년부터 10여 년간에 걸쳐서 무명의 농민출신 건축가 바로니힌에 의해 지어진 성당으로 소비에트 정권시절 한때 금지되었던 예배가 지금은 거행되고 있다. 

   네프스키 대로변 돔 끄니기 맞은편에 위치한 카잔성당은 광장 한가운데는 분수대가 있고,  광장 양쪽에는 승전을 기념해 만든 쿠투조프 사령관과 바르클레이드토리 상이 있다.  성당은 이삭성당의 통기둥과는 달리 석고대리석으로 1m정도씩 이어서 올라간 94개의 콜린도 양식의 기둥이 서있다. 

  성당 안은 조국전쟁에서 빼앗은 107개의 프랑스 군기가 장식되어 있다. 19세기 말 경부터 혁명 때까지 성당 앞 광장은 학생들의 집회 장소였으나 지금은 평화로운 시민들의 휴식처가 되고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중심가 네프스키 대로 (Nevsky Propect)

 

 

 


  19세기 중엽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중심가다. 1200년 대 스웨덴과의 싸움을 승리로 이끈 알렉산더 네프스키 대왕에게 헌정된 거리로, 길이 4.6km의 네프스키 거리에는 수많은 운하와 광장, 공원, 박물관, 극장 등이 있으며, 러시아의 대문호들이 자주 찾던 레스토랑 등이 있다.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고골리 등의 문학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거리로서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찾는 관광객이면 천천히 산책하며 제정 시대의 러시아를 느껴볼 만한 곳이다. 또 이곳에서는 원하는 곳 어디든지 갈 수 있다.
  
  네프스키 대로 끝에 자리잡고 있는 네프스키 수도원에는 차이코프스키를 비롯하여 림스키코로사코프, 뭇소로고스키, 쇼스타코비치, 글린카와 같은 음악의 거장들이 묻혀있는 곳으로 마치 빈의 음악가 공동묘지 같은 곳이다. 차이코프스키는 법학을 공부했으나 대학을 나오지는 않았다. 

  게다가 그는 모차르트처럼 어릴 때부터 천재성이 나타난 사람도 아니었다. 그저 취미활동으로 연주와 작곡을 하던 그가 세계적인 음악가가 될 줄은 그 자신도 몰랐을 것이었다.


피의 사원(그리스도 부활 사원)

 

피의 사원(그리스도 부활사원)의 내외부

 

  카잔교에서 다른 방향으로 발길을 돌리면 그곳에 이탈리아-그리보에도브 운하를 건널 수 있는 보행자용 다리가 또 하나 자리 잡고 있다. 그곳에는 그리스도 부활을 기리는 5개의 둥근 지붕을 가진 사원이 있다. 1883년부터 1907년까지 무려 25년 동안에 걸쳐 만들어졌다.  

 얼핏 보면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 있는 '성 바실리 성당'처럼 외관이 화려하고 다양한 색상으로 채색되어 있었다.  페테르부르크의 역사적인 시가지의 고전주의적 외양과는 상당히 대조적임에도 불구하고, 16-17세기의 러시아 건축 양식으로 디자인되었다.
  
  피의 사원(스빠스 나 끄로피)’이라 불리는 이 사원은 공포정치로 유명한 고(故) 알렉산드르 2세를 추도하는 뜻으로, 그가 암살된 자리에 세워졌다.  알렉산드로 2세가 행차하는 순간을 노린 민중이 길목에 작은 폭탄을 설치했으나, 하필 거사 당일에는 마차가 약간 옆으로 비껴가게 되는 바람에 폭탄이 옆에서 터지게 되어 황제는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그 후 황제는 그 일이 몹시 궁금하여 어떤 상황이 벌어진 것인가를 확인하기 위해 다시 이곳을 들렀다가 군중사이로 혁명군이 던진 폭탄에 맞아 그 자리에서 죽고 만다. 

  나중에 그 혁명군을 색출하여 이곳에서 다시 처형하게 되었다. 후에 니콜라이 2세에 의해 알렉산드로 2세의 영혼을 구원해 보자는 취지에서 성당을 짓게 되는데, 성당이 완성되자 그 아름다운 자태에 반한 황제는 더 이상 이와 같이 아름다운 성당은 다른곳에서 지을 수 없도록 건축가의 눈을 뽑아 버렸다고 한다. 후에 많은 피를 흘린 곳이라는 의미로서 '피의 구원의 성당'이라는 애칭이 붙여지게 된 것이라고 한다.  사원의 내부 장식은 각기 다른 대리석으로 치장되었고, 수천 개의 조각으로 구성된 모자이크로 처리되어 아름다움의 진수를 보여준다. 


여행을 마무리하며

 

 


  어느덧 시간은 가고,  문학가 도스토예프스키, 작곡가 차이코프스키, 과학자 로마소노프, 건축가 보로닌 등 저명인사들의 묘지가 있다는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대수도원 , 또 귀족의 딸들을 위한 학교였다는 스몰린스키 수도원, 마하일 광장에 있다는 러시아 박물관 등을 둘러보지 못하고 이곳을 떠나야 할 시간이 되었다. 

  아름다운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속속들이 엿볼 수는 없었으나, 첫 인상부터 그러했듯이 모스크바에 비해 한결 쾌적하고 사람들도 부드럽고 친근함이 엿보였다. ‘물의 도시’라는 조건이 풍요함과 여유로움을 보태주는 듯 했다. 또 유럽으로 통하는 지역적인 조건 또한 일찍이 자유의 바람을 불어오게 했는지 모른다.

  쭉 뻗은 대로, 수많은 운하와 아름다운 다리들, 호화스러운 문화 유적, 6,7월이면 볼 수 있는 백야(白夜)의 광경은 가히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북구의 베니스’라고 칭송할 만하며 러시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라고 단언할 수 있는 곳이다.  

  호숫가 아침 산책길에서 본 낚시를 즐기는 노인들, 물과 숲이 어우러진 분수 궁전, 네바 강으로 통하는 운하에서의 크루즈, 청동기마상 앞에서 여행객과 포즈를 취해주던 신혼부부들의 모습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추억으로 길이 남을 것이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좀 더 넉넉한 시간을 가지고 다시 한 번 찾아보고 싶은 곳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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