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리아 횡단열차
자작나무 사열, 잠 못 드는 감동
글·사진 전소연
몽골 고비를 지나 이제 러시아 바이칼로 떠나야 한다. 그곳까지 가기 위해 우리가 선택한 교통수단은 시베리아 횡단열차.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것은 ‘시베리아’라는 단어에서 느껴지는 아련한 그리움 때문일까. 아니면 무려 9000km가 넘는 대륙을 횡단하는 열차의 매력 때문일까.
설렘은 두려움을 동반했다. 짧은 영어도 통하지 않는 데다 재수가 좋으면(?) ‘마피아’와 ‘스킨헤드 오빠’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라는 이야기를 수도 없이 들었던 탓이다. 게다가 야간기차를 타고 국경을 넘어야 하니 고만고만한 여행자들에겐 용기와 무모함이 필요했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와 모스크바를 잇는 시베리아 횡단철도는 길이가 9466km에 이른다. 이는 우리나라 경부선의 20배가 넘으며 지구 둘레의 4분의 1에 가까운 거리. 거쳐가는 중요한 역만 59개이며 시간대가 일곱 번이나 바뀌는, 세계에서 가장 긴 철도다.
시베리아 횡단열차는 현재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해 러시아 대륙을 횡단하는 노선과 중국 베이징에서 시작해 몽골의 울란우데를 거쳐 러시아 이르쿠츠크에 도착하는 노선 두 가지가 있다. 러시아 대륙을 횡단하는 블라디보스토크발(發) 열차는 울창한 타이가(침엽수 삼림지대)의 장관을 만끽하는 것은 물론, 러시아의 전통적인 향취를 느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와 달리 베이징에서 시작하는 울란우데 노선은 황량한 고비사막을 횡단하며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 국경을 지난다. 두 노선 모두 거대한 바이칼호의 입구이며, ‘시베리아의 파리’라 불리는 러시아 이르쿠츠크에 이른다. 이르쿠츠크는 바로 이번 시베리아 기차여행의 목적지.
러시아 주요 이동수단 … 바이칼호 상상에 속이 울렁
▲면세점이 들어선 울란바토르역 입구.
363호 열차가 날마다 울란바토르를 출발해 이르쿠츠크까지 간다면, 005호 열차는 일주일에 세 번 울란바토르에서 출발해 이르쿠츠크를 지나 모스크바까지 간다. 363호 열차는 이르쿠츠크에 도달하는 데 꼬박 34시간 10분이 걸리기 때문에 시간 여유가 있고 지루함을 잘 견디는 사람이 타는 게 낫다. 우리 일행은 이르쿠츠크까지 약 26시간 걸리는 모스크바행 기차를 타기로 했다. 여행을 준비하며 한국에서 미리 열차표를 사둘까 생각했지만, 수수료도 아끼고 나름의 모험을 즐겨보고 싶었기에 현지에서 구입하기로 했다.
시베리아 횡단열차는 러시아 사람들의 주요 이동수단이므로 여행 성수기에는 자리가 없는 경우도 있으니 스케줄이 빡빡한 여행자들은 미리 표를 사두는 게 좋다.
우리는 결국 기차역에서 열차표를 구입하는 모험은 하지 못하고 몽골에 도착하자마자 게스트하우스 사장에게 부탁해 수수료를 주고 표를 구했다. 표를 끊는 모험 대신 고비사막을 모험하는 데 집중하기 위한 것이라고 합리화하면서….
울란바토르역에 도착하니 빛바랜 초록색 기차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차에 시선을 빼앗긴 나는 시베리아 자작나무 숲을 지나 바이칼 호수에 다다르는 상상으로 속이 울렁거리기까지 했다. 시베리아 횡단열차 시간은 모스크바 시간을 기준으로 하기에 자칫 착각했다가는 기차를 놓칠 수 있다는 주의사항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터라 일찌감치 기차역에 도착했다.
여행객 대부분이 이용하는 4인 1실(쿠페) 침대칸에 들어섰다. 아래 침대에는 이미 차가운 이미지에 조각처럼 생긴 러시아 청년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에게 눈인사를 하고 위 침대에 짐을 풀었다. 좁은 공간에 흐르는 침묵은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낯선 느낌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듯했다.
▲울란바토르역에서 우리를 기다리던 빛바랜 초록색 기차(왼쪽).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도착한 바이칼 알혼 섬 전경.
기차가 출발하기 전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살펴보는데, 객차 안 사람들은 오히려 그런 나를 호기심어린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문득 저마다의 이유로 몽골에서 러시아로 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듣고 싶어졌다.
기차 안 화장실에선 세수 정도는 할 수 있는 것 같았다. 하룻밤 기차를 이용하는 나는 거기서 씻기보다는 물티슈로 대충 얼굴을 닦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차장실 맞은편에는 러시아 특유의 구리 주전자인 사모바르를 두어 언제든지 뜨거운 물을 쓸 수 있었다. 그 물로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최고 먹을거리인 컵라면을 먹거나 인스턴트 커피를 마실 수 있다. 그 러나 컵은 따로 없기 때문에 개인 컵을 사용해야 했다.
내가 누릴 수 있는 공간은 좁은 침대 한 칸이지만 시베리아로 가는 여행길에 공간이 더 필요하지는 않았다. 누워서 책을 읽거나, 옆 침대의 동행자와 지나온 여행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거나, 아래층 러시아 청년에게 러시아 말을 배우거나, 여행수첩에 지금의 감정을 끼적거리거나, 말랑말랑한 음악을 듣거나…. 철길을 달리는 동안 나는 그렇게 자신에게 좀더 가까워졌고, 좁은 공간을 공유하는 낯선 이들과도 친밀해졌다.
말걸기조차 부담스럽던 아래칸 러시아 청년은 보드카의 힘을 빌려 수다쟁이가 됐고, 러시아 전통이니 꼭 마셔야 한다며 우리에게도 보드카를 권했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는 말을 떠올리며 나는 시베리아 횡단열차 안에서 그 전통을 지켰다. 우리는 서로의 언어를 익혀가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밤늦은 시간, 몽롱한 상태에서 짐 검사와 여권심사를 받으며 국경을 통과했다. 한국인이라 러시아어를 못 알아듣는다고 밝혀도 끊임없이 러시아어로 이야기하는 무뚝뚝한 열차 승무원에게 당황하지 않을 수 있었던 건 보드카의 힘을 빌려 친해진 아래칸 러시아 청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행할 때 그 나라 말을 못하면 여행하기 힘들지 않아?”라고 묻는 친구들에게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 나라 말을 잘하는 친구를 사귀면 된다고. 그게 한국인이든 현지인이든, 의사소통이 되는 친구를 사귀면 여행은 한결 수월해진다.
기차는 국경을 통과해 러시아에 접어들었고, 그날 밤 나는 시베리아 횡단열차 안에서 울창한 자작나무 숲을 헤매는 꿈을 꿨다.
<출처> 2007.05.22 / 주간동아 586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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