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 크라코프(Krakow)
유태인 강제수용소 아우슈비츠
상상을 초월하는 소금광산 비엘리츠카
글·사진 남상학
- 평화를 사랑하는 크라코프 시민들(구시가 광장) -
폴란드의 두 번째 방문지 크라코프는 바르샤바에서 전용버스로 4시간을 달려 도착하였다. 고속도로 양 옆으로 펼쳐진 벌판은 어느새 여름을 지나고 있는 듯 보였다.
수천 개의 건축물과 예술품들로 가득 차 있는 크라코프는 과거와 현재가 어우러져 있는 도시이다. 폴란드에서는 드물게 전쟁으로 인해 파괴되지 않아 중세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아름다운 건축물로 유명한 크라코프는 폴란드 왕국의 옛 수도로써 오랫동안 번영을 누렸다.
체코 국경 근처에 위치하고 있고, 비스와 강 상류의 양쪽에 걸쳐 있다. 비수아 강을 기점으로 구시가지는 왼쪽, 신시가지는 구시가지 주위와 우측에 자리한다. 교통의 중심지이며 다른 나라와 연계하여 여러 지역으로 여행하기에 편리하다. 가까이 있는 아우슈비츠와 소금광산 비엘리츠카는로 인해 더욱 유명한 도시가 되었다.
수백 년 동안 세계적으로 명성이 이어져온 이 도시는 경제와 문화적인 면에서 폴란드의 중추적인 역할을 해오는 곳으로, 폴란드인의 정신적 고향이라고도 불린다. 구시가지에는 300개가 넘는 역사적인 건물들과 58개의 교회 그리고 궁전 등, 이 나라의 문화를 볼 수 있는 건축물들로 가득하다.
히틀러의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오슈비엥침, Oswiecim)베르케나우(Birkenau) 수용소
- 아우슈비츠 수용소 정문 -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 히틀러의 악명이 높은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크라코프에서 서쪽으로 61km 떨어진 곳에 있다. 아우슈비츠는 폴란드 남부 비엘스코주(州)에 속해 있는 도시명이다.
아우슈비츠가 세계적으로 알려진 것은 유례없는 '인간도살장'인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1940년 6월에 나치 친위대(ss) 총사령관 하인리히 히틀러에 의해 세워졌다. 이곳에 수용소를 설치한 이유는 도심과 떨어져 있고 가까운 곳에 철도가 지나고 있어, 수용자의 대량수송에도 효과적이라는 것이 이유였다.
- 이중 철조망으로 외부와 차단된 수용소 -
아우슈비츠 수용소 외곽은 엄중하게 전기 울타리 망(網)이 겹겹이 구축되어 있다. 그 안의 수용소는 붉은 벽돌의 단층 건물 28동이 3열 횡대로 열을 지어있고, 이곳 수용소에서 살해당한 사람의 수는 최저 150만 명에서 최대 400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이미 잘 알려져 있는 대로 대부분의 희생자는 유태인들이었다.
하지만 이곳의 희생자는 유태인뿐만이 아니다. 아우슈비츠는 근본적으로 정치범 수용소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나치독일 점령 하에 있던 지역에서는 유태인 외에도 로마인(집시), 공산주의자, 반나치활동가 등이 체포되어 강제로 이곳 수용소로 이송되었고, 수용소에 보내진 사람 중에는 그 자리에서 총살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혹한 노동에 투입된 후에 학살된 사람들도 많다.
- 갖가지 생체실험의 대상이 된 수감자들 -
- 지하 가스실 -
제1수용소인 아우슈비츠 수용소 입구 철문 위에는 독일어로 “ARBEIT MACHT FREI" 라고 쓰인 문구가 붙어 있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에도 등장한 간판으로 "일하면 자유로워질 수 있다"라는 뜻이다. 하지만 죽음 이외에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아무것도 없었다.
폴란드는 이곳을 회복하자마자 독일어식 발음 ‘아우슈비츠’대신 폴란드 옛 이름인 ‘오슈비엥침(oswiecim)’으로 재빨리 되돌렸다. 비참했던 역사를 더 이상 기억하기 싫어서였다. 그리고 박물관과 전시관으로 꾸며놓았다.
"용서하라 그러나 잊지는 말자"
라는 말처럼, 폴란드인들은 이곳을 민족정신의 산 교육장으로 삼고 있다. 1947년에 세워진 희생자 박물관은 1979년에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 산더미처럼 쌓인 수용자들의 의족 -
현재 이 건물 중에서 나치의 잔학 행위를 전시한 건물은 모두 5개 동 (4, 5 ,6, 7, 11)이다. 이 5개 동에는 수용자가 사용하던 조잡한 식기, 스푼, 안경테, 가방, 칫솔, 구두, 모자, 한통으로 400명을 죽일 수 있는 티크론 가스통, 죄수복 등이 전시되어 있으며, 번호가 새겨진 줄무늬 파자마와 같은 죄수복 등이 전시되어 있다.
나치는 가스실에서 죽은 수용자들의 인골로 재떨이나 종이칼을 만들고, 기름으로는 비누, 여성들의 머리카락으로는 카펫을 만들었다고 한다. 1945년 소련군이 아우슈비츠를 해방시켰을 때 자루에 담아서 카펫용으로 수송하려던 머리카락 7천 킬로그램을 찾아냈다고 한다.
또한 의학실험이라는 미명 아래 수용자를 갖가지 생체실험에 이용되었는데, 말라빠진 두 다리로 상반신을 지탱하는 고통스러운 모습의 쌍동이, 맨발인 채로 12시간이나 밖에 서있게 하여 동상에 걸린 소녀 등 차마 눈뜨고는 보기 힘든 모습들을 찍은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11동은 2만 명을 총살한 벽, 사방 1미터에 4명을 밀어놓은 채로 하룻밤을 보내게 한 방, 환기통이 없는 방에 많은 사람들을 밀어 넣어 질식사시키는 감옥, 도망친 죄수를 대신하여 스스로 순교한 콜베신부를 아사시킨 독방이 있다.
- 독가스 사이클론 비(Cyklon B)의 빈 가스통 -
수용소 주위에는 220볼트의 3상전류가 흐르는 가시철조망이 쳐져 있어서 절망한 나머지 스스로 감전되어 목숨을 끊은 사람들도 많았다고 한다. 그리고 총살을 면하고 살아남은 자라 할지라도 1~2 개월 안에 폭력으로 희생되거나, 혹은 공포(두려움)로, 혹은 전염병으로, 혹은 굶주림으로 죽어 갔다.
한편 이곳에서 북쪽으로 약 4킬로미터를 더 가면 아우슈비츠에 넘쳐나는 사람들을 수용하지 못하여 추가로 지은 제2수용소 비르케나우(Birkenau). 이곳 변두리 광대한 초원의 비르케나우에는 아우슈비츠의 수십 배에 달하는 건물에 수십만의 유태인을 수용했다고 한다.
영화 <쉰들러리스트>에서 유대인을 수송하는 열차가 도착하던 곳. 수용자들을 실은 열차는 수용자들이 어디로 왔는지 알아차리지도 못한 채 이곳 비르케나우로 진입한 것이다.
1942년 2월 이전에는 주로 반체제 인사들이 학살되었고, 그 이후에는 주로 유대인들이 대량 학살되었다 한다. <안네의 일기>로 유명한 안네의 언니인 마르고트는 1944년 9-10월에 이 수용소로 이송되어 이곳에서 장티푸스에 걸려서 죽었고, 어머니인 에디트는 아우슈비츠에서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 영화 "쉰들러리스트"에 나오는 제2수용소 비르케나우 수용소 정문 -
그렇다면 나치는 왜 이토록 잔혹한 일을 저질렀을까? 히틀러가 유태인을 골라 학살한 것은 자신이 싫어한 계모가 유태인이었기 때문이라는 설과 “예수를 십자가에 죽인 민족은 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라져야 한다”는 그럴싸한 종교적 명분 또는 자기 민족의 우월성 확보, 아니면 게르만 민족의 결속 등 여러 설이 있지만, 그 어떤 이유라 하더라도 이해하기 어렵고 수긍이 되지 않는다.
아우슈비츠, 인간 잔학상의 극치를 보여주는 곳. 만약 피해자인 유태인들은 이곳을 방문할 때 무슨 생각을 할까? 가해자를 “용서하라, 그러나 잊지는 말자”는 단순한 다짐으로 끝날 것인가? 아니면 자기 자신도 모르게 마음 한 구석에 보복의 칼날을 세우지는 않을까? 악순환을 걱정하는 것은 나만의 염려일까? 여러 가지를 생각하며 되돌아 나오는 발길이 무겁기 그지없다.
상상을 초월하는 소금광산 비엘리츠카(Wieliczka)
- 소금광산 비엘리츠카 건물(이 곳에서 갱도로 들어간다) -
크라코프에서 남동쪽으로10㎞쯤 떨어진 비엘리츠카에는 1978년 유네스코로부터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받은 소금광산이 있다. 천오백만년전의 바다가 지형변화를 일으켜 지금의 소금광산이 되었다고 한다.
상상을 초월하는 광산의 방대함과 자연의 신비가 잘 조화된 비엘리츠카 소금광산은 세계적 관광 명소이다. 해마다 50만 명 이상의 관광객들이 이곳을 찾아와 자연의 신비를 느끼고 돌아간다.
소금광산은 지난 7백 년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땅 밑에 형성된 거대한 소금광맥을 파내고 있는 현장이다.소금광산의 채굴통로만도 3백20㎞에 이르고 있는데, 현재는 2.5㎞만이 관광객들에게 공개되고 있다.
- 갱도로 들어가는 계단(주변이 모두 소금이다) -
소금광산을 찾은 관광객들은 우선 지하 64m지점까지 378 개의 통나무 계단을 걸어 내려가야 한다. 묵직한 나무문을 열자 갱도 사이로 몰아치는 바람이 시원하다기보다 스산한 느낌이 든다.희미한 불빛이 회청색의 거친 바위벽과 천장에 불빛을 드리운다. 소금광산의 갱도를 따라 광산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동안 관광객들은 신비스럽다는 느낌에서 벗어날 수 없다
깊은 땅속인데도 바닥은 물론 천장 벽 전체가 모두 소금이다.그것도 단지 소금덩어리가 아니라 1493년에 이곳을 방문한 것으로 기록된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의 소금 조각상 등 수많은 조각상이 있다. 왼손에 지구를 들고 있는 조각상의 모습이 특이하다. 통로 곳곳에 수백 년 동안 만들어놓은 각종 소금조각 상들을 보노라면 어느새 황홀경에 빠진다.
- 지하 벽이 온통 소금결정체로 되어 있다 -
또 소금광산 안에는 17세기 광원들의 손으로 만들어진 소금 제단이 있고, 십자가에 달린 예수상도 조각되어 있는데 광원들은 이곳에서 일과를 시작하며 “오늘 하루도 무사히 살아서 갱도를 나가게 해달라고”기도했다고 한다.
무명 광원들의 위대함은 지하 101m에 “성 킹가 대성당”에서 절정을 이룬다. 채굴 작업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생긴 엄청나게 큰 공간에 자신들의 안전을 위하여 대성당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발코니, 계단은 물론 팔각형으로 고르게 새겨진 바닥 타일까지 모두 소금이다.
- 지하 100m에 만들어 놓은 대성당(샹들리에도 소금 크리스탈로 만들었다) -
대성당 천장에는 소금 크리스탈로 만들어진 대형 샹들리에가 걸려 있으며, 성당 벽면에는 최후의 만찬, 예수 탄생 등의 장면 등 무려 1백여 점의 정교한 소금 조각상이 전시돼 있어 경탄을 자아내게 한다. 물론 이들 조각 작품은 전문조각가가 만든 것이 아니고, 이곳 광부에 의해서 직접 만들어진 것이라고 하는데, 너무나 정교한 데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 받은 이유를 알겠다.
광산 안에 있는 박물관에는 7백 년 전에 소금을 파던 채굴장비와 광산에서 발견된 유적들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잘 전시해 놓았다.
진기한 보물의 보고(寶庫)인 바벨성 (Zamek krolewski na Wawelu)
- 바벨성 -
- 황금색 돔으로 덮힌 지그문트 예배당의 모습 -
비스와 강변에 언덕 위에 우뚝 서 있는 바벨성은 16세기 초에 세워진 고딕 르네상스 양식으로 역대 폴란드 왕들이 주거지였다. 성내에는 71개의 홀이 고딕식 회랑으로 이어져 있으며, 진귀한 보물과 미술품들이 소장되어 있다.
도시 남쪽 비스와 강 상류 언덕 위에 우뚝 서 있는 바벨성의 역사는 9세기 초부터 시작된다. 화재 후에 지은 고딕 양식의 바벨성은 1502년부터 1536년까지 르네상스 양식으로 개조된 것이다. 바벨 성은 500년 동안 폴란드 왕이 거처했던 궁전으로 유명하다. 성 내부에는 중세 때의 갑옷, 검, 장신구, 초상화 등을 전시하고 있다. 근처에 녹지공원이 조성되어 있어 경관이 수려하다. 바벨성은 현재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으며 진기한 보물들이 많이 있다.
20개의 예배당 가운데서 황금색의 돔으로 덮인 지그문트 예배당(Kaplica Zygmuntowska)은 르네상스 양식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보여주는 건물이다. 대성당 내부에는 폴란드 왕의 석관과 가치 있는 예술품들이 있다. 그리고 지하에는 폴란드 왕과 영웅들의 묘소가 있다. 대성당 탑에 올라가면 특별한 경우에만 울리는 유명한 지그문트 종이 있다. 도시의 소음에도 불구하고 수 킬로까지 울려 퍼진다.
- 폴란드 왕들의 석관이 있는 성당 내부와 자그문트 1세 석관 -
성의 역사는 9세기 초부터 시작되며, 1500년대 대화재를 겪은 후 고딕식에서 르네상스 양식으로 개조되었다. 성 내부는 현재 박물관으로 공개되고 있으며 중세 때의 갑옷과 검, 장신구, 초상화 등 진귀한 보물들을 다수 소장하고 있다. 근처에는 녹지공원이 조성되어 있어 경관이 수려하며 저녁에 비슬라 강가에서 바라보는 바벨의 모습은 장관을 이룬다.
중앙시장 광장과 직물회관, 성 마리아 교회
- 중앙광장과 광장 내의 직물회관 -
중세의 향기로움이 가득한 크라코프의 구시가지 입구가 플로리아인스카 문이다. 길이 약 3km에 달하는 구시가지 성벽에는 8개의 주된 문이 있었는데, 이 문이 8개의 문중의 하나로 현재까지 남아 있다.
구시가지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총 4만㎡의 넓은 광장으로, 중세 유럽 광장 가운데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중앙 광장은 예전에 크라카우의 사교장 역할을 했던 곳으로 옛 귀족들의 저택이 줄지어 있다. 이 중앙광장은 거리의 악사, 꽃을 파는 사람들, 마차. 결혼 파티 등으로 수많은 사람들로 항상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룬다. 그리고 기념품 파는 상점, 레스토랑들에도 손님이 들끓고 있다.
광장 중앙에는 고딕양식에 르네상스 양식이 혼합된 흰색의 직물회관(Sukiennice, The Cloth Hall) 이 자리 잡고 있다. 14세기에 세워진 직물회관은 길이가 100m나 되는데 중앙광장의 상징적인 건물이다. 직물 회관 안에는 관광객들이 기념품을 살 수 있는 많은 잡화점이 있다. 직물 회관에는 18, 19세기의 폴란드 조각과 회화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는 국립박물관의 일부가 있다.
- 직물회관에서 기념품을 고르는 관광객들(우리 일행의 얼굴이 보인다.)
중앙시장 광장은 크라코프의 사교장으로서의 역할을 했던 곳이다. 구시가지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으며 총 4만m²로 베니스의 산마르코 광장 다음으로 유럽에서 두 번째로 넓은 광장이다. 주위에는 옛 크라코프 귀족들의 저택이 줄지어 있다. 시장 옆쪽에 있는 "Bei Noworol"이라는 카페에서는 민속 예술품 같은 각 시기의 가구들을 구경할 수 있다.
중앙시장 광장 서쪽에 세워진 성 마리아 교회는 크라코프를 방문한 사람이라면 반드시 보아야 하는 고딕 양식의 아름다운 교회이다. 우뚝 솟아오른 두 개의 첨탑은 뉘른베르크 출신의 천재 조각가 Wit Stwosz가 그의 제자들과 함께 12년 동안 만들었다고 한다.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와 12∼19세기의 수많은 예술품들은 교회의 고풍스러움을 더해준다.
- 성 마리;아 성당의 외관 및 내부 -
- 중앙 광장을 달리는 마차 -
크라코프를 돌아보고 나니, 폴란드 공화국에 대한 애정이 솟아나는 느낌이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파란만장한 역사적 격랑(激浪)을 헤치고 나왔다는 공통점 때문일까? 과거 오랜 기간 동안 잦은 외침과 외세 지배에 시달렸으면서도 굴하지 않고 일어선 장한 의지, 자주성 유지에 대한 자존심이 강하다는 것부터가 호감이 간다.
오랜동안 소비에트 연방 국가이면서도 러시아에 대한 반감이 너무나 커서 자신들을 ‘동구’국가로 표현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고, ‘중구’(Central Europe) 국가로 불러주기를 원하는 것부터가 그렇다.
인간의 왜곡된 욕망이 인류의 양심을 무자비하게 짓밟을 수 있음을 증명해 준 역사의 현장 아우슈비츠. 인류의 장래를 위한 후세의 교육장으로 남겨두려는 뜻도 소중한 것이다. 자유와 양심의 소중함을 새롭게 되새기며 체코의 프라하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 크라코프 광장의 야경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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