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코 프라하
'프라하의 봄’을 꽃 피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글·사진 남상학
어젯밤 10시 크라코프를 떠난 야간열차가 프라하에 도착한 것은 아침 7시 30분, 빗방울이 떨어지던 크라코프와는 달리 프라하의 아침 날씨는 활짝 개어 있어 상쾌했다. 잠자리가 불편한 밤기차를 타고 왔으나,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프라하를 처음으로 방문한다는 기대감으로 고단한 줄도 몰랐다.
체코의 수도이며, 작은 골목하나에도 중세의 향기가 배어있는 유서 깊은 신비의 고도(古都), 그러기에 프라하 시내 곳곳에는 로마네스크 양식, 고딕양식, 르네상스양식, 바로크 양식의 건축물 등 시대를 망라한 중요한 건축물들이 즐비하여, 1992년에 유네스코 세계 문화 과학 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또 프라하는 2000년에 EU로부터 유럽 문화의 중심지로 명명된 아홉 개의 도시 중 하나로 지정되기도 했다. 또 체코는 카프카와 쿤데라를 비롯한 위대한 작가들과 드보르작과 스메타나를 비롯한 수많은 작곡가를 낳은 나라로 예술적인 향기가 그윽한 곳이기도 하다.
비록 제한된 시간이긴 하지만, ‘프라하의 봄’으로 명명된 민주화 운동의 산실이 된 광장과 모차르트의 일생을 그린 영화「아마데우스」의 배경이 된 골목골목을 걸으며, 어느 곳과도 비교할 수 없는 프라하의 야경까지, 프라하의 매력에 흠뻑 빠져보기 위하여 즐거운 마음으로 다리품을 팔기로 하였다.
프라하의 상징인 프라하 성
- 블타바강 언덕 위에 자리잡은 프라하성-
프라하성은 블타바 강(독일어는 몰다우강) 옆 흐랏차니 언덕 위에 우뚝 솟아 있다. 9~14세기에 완성된 이 성은 여러 개의 건물이 타운을 이루고 있으며, 프라하의 상징으로 불릴 만큼 웅장하다.
프라하성의 명성은 비단 체코에서 뿐만이 아니라 전 유럽에서도 가장 멋있고 훌륭한 성으로 정평이 나있어, 중세의 웅장함과 섬세함이 곳곳에 깃들여 있는 이 근사한 성을 보기 위해 연간 천만 명 이상이 이곳 프라하를 찾는다고 한다.
완만한 오르막 길을 올라선 언덕 위의 있는 프라하성은 9세기에 이미 교회가 있던 자리였다. 9세기에 건립되었으니 1천년 이상 프라하의 역사를 지켜온 셈이다. 11-12세기 들어 이 성 안 중심지에 성 비트 성당과 주교의 거처를 비롯하여 현재 대통령 궁으로 사용하고 있는 왕궁과 여러 개의 사원들, 그리고 몇 개의 부속 건물들이 성내의 중심부에 건설되었고, 그 위로는 12세기 수도원으로 지어졌다가 현재에는 전 세계의 진귀한 고서 200만권 정도 소장한 스트라홉스카 도서관이 자리를 잡고 있다.
또 같은 시기에 외각의 돌담이 축성되어 성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로얄 정원과 남쪽 정원, 갤러리, 앤 여왕의 여름 별장은 여름에 개방한다. 이 성 꼭대기에 서면 「백탑의 도시」라고도 불리는 프라하의 수많은 뾰족탑들이 장관을 이룬다. 프라하성이 이처럼 웅장함과 섬세함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유럽의 큰 도시의 대부분이 전쟁으로 큰 피해를 입어 복구된 데 비해, 프라하는 프라하 성을 비롯한 모든 중세의 건축물들이 온전하게 보전된 데에는 남다른 이유가 있었다. 2차 대전이 발발하자 체코는 폴란드, 헝가리와 함께 3국 동맹을 맺어 독일과 대항하였다. 그러나 막상 히틀러의 군대가 프라하로 진군하자 체코는 즉시 항전을 포기하고 독일에 백기를 들었다.
폴란드와 헝가리는 체코를 배반자라고 비난하며 히틀러에게의 대항을 계속했고, 그 결과 바르샤바와 부다페스트는 많은 부분이 파괴되었지만, 프라하는 단 한발의 폭탄도 얻어맞지 않았다. 오늘날 수많은 관광객들이 이곳을 찾아와 돈을 쓰며 체코의 경제에 많은 보탬을 주고 있다는 것은 어찌 보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깊은 사연 서린 로레타 성당(Loretto or Santa Casa)
- 프라하성 안의 로레타 성당 -
성의 중간쯤에는 단아하고 자그마한 성당이 하나 있는데 '로레타 성당'이다. 이 성당의 종탑에는 29개의 조그만 종들이 매 정시마다 종을 치는데, 그 종소리의 멜로디에는 "성모마리아에게 천 번의 경배를!" 이라는 메시지가 들어있다고 한다. 이 로레타 성당은 이탈리아의 로마에도 똑같이 생긴 것이 하나 더 있다. 로레타 성당은 예쁜 이름과는 달리 피의 사연이 서린 성당이다.
프라하에서는 독일의 루터보다도 100년 앞서 얀후스라는 신부에 의해 종교개혁 운동이 일어났다. 당시는 종교적으로 매우 보수적인 카톨릭교도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를 받고 있었으므로 개혁을 주장하는 세력들을 그냥 둘 리가 없었다. 얀후스가 화형(火刑)으로 순교한 후, 그 정신을 본받은 신교도들이 스웨덴 지원군의 협력으로 프라하 근교의 백산에서 구교도들과 마지막 일전을 벌였으나 불운하게도 이곳에서 모두 죽고 말았다. 로레타 성당은 구교도들의 희생을 애도하고 카톨릭의 승리를 기리는 뜻에서 세워진, 피에 의해 지어진 사연이 깊은 성당이다.
전쟁이 끝난 후 체코 전역에는 이와 똑같은 성당이 60개나 지어지게 되었는데, 그것은 '이제는 신교도들이 다 죽었으므로 지금부터 체코는 구교의 국가다'라는 의미를 모두에게 전달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후에 중북부 유럽에서는 나중에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꾸준히 지지를 받은 신교도들과 구교도들 사이의 골 깊은 갈등이 결국 전쟁을 불러일으켜 무려 100년 동안이나 피비린내로 얼룩지는 역사를 이어왔다.
- 로레타 성당의 파이프오르간 -
대통령궁(宮)과 근위병 교대식
- 대통령궁 앞에서의 근위병 교대식 -
시계가 정각 12시를 가리키자 대통령궁 앞에서 근위병 교대식이 거행되었다. 예복을 입은 병사들이 세련된 솜씨로 교대식을 진행했다. 런던 버킹검의 근위병 교대식이나 크레믈린의 그것과 비교하면 너무나도 보잘 것 없어 보였지만, 기대하지 않은 곳에서 이런 의식이 진행되는 것을 보는 것은 흥미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근엄한 근위병들의 교대식과는 달리, 문 앞에서는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5인조 악사들이 흥겹게 음악을 연주하며 관광객들에게 자신들이 제작한 CD를 팔고 있다.
정문에 들어선 우리는 일단 실망을 금치 못했다. 으리으리하리라고 예상한 것과는 달리 대통령 궁은 없었고, 건물의 한족에 체코의 국기를 달아놓은 곳이 대통령의 집무실이란다. 우리의 생각대로라면 ‘지엄한 존재’가 정치를 집행하는 자리라 접근이 엄격히 통제된 곳이어야 할 터인데, 이토록 개방적이며 시민과 가까이 하려는 태도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하루에도 엄청난 수의 관광객이 찾아오는 프라하성의 이 북새통 속에서 어떻게 중요한 국사를 처리할 수 있단 말인가? 궁금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하늘로 치솟은 두 개의 첨탑, 성 비트 대성당
- 중세 교회의 위엄이 살아 있는 성비트 성당 -
프라하 성의 하일라이트는 성 비트 성당. 대통령궁을 지나 성의 중심부에 들어오면 거대한 첨탑이 시야를 가로막는다. 929년부터 1929년까지 무려 천년 동안 만들어진 전형적인 고딕 양식의 거대한 건축물이다. 첨탑 모양의 이 웅장한 성당은 폭이 60m, 길이가 120m에 달하며 첨탑의 높이는 100m에 이르는 대규모의 성당이다.
신비적인 분위기를 강조하기 위해 천정을 매우 높게 하였고, 거대한 창은 스테인드글래스로 처리하여 외부로부터 빛을 받아 현란한 색상으로 신비스러운 성서의 분위기를 더해주는 웅장한 모습에 보는 사람들에게 탄복을 자아내게 한다.
이 성전의 특징의 하나는 성전 전면에 예수를 비롯한 성직자들의 일대기를 부조로 조각하였고, 성당의 육중한 청동 문에는 11세기경 체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으로 꼽히는 바즐라프 대왕의 일대기를 부조해 놓은 것이다.
어릴 때 가정교사로부터 교육받는 광경으로부터 왕이 되었을 때, 장군 복장에 투구를 쓰고 말을 타고 있는 모습과 왕을 시기하는 이복동생들의 칼에 맞아 이 성당의 앞에서 살해당하기 직전 문고리를 잡고 있는 모습 등이 새겨져 있다. 이복동생의 자객들을 피해 도망을 가던 왕은 마지막으로 이 성당 앞에 이르렀다. 문이 열리면 목숨을 건지게 되었겠지만 애석하게도 손잡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바즐라프 대왕은 결국 막다른 문 앞에서 살해당하고 만다.
또, 이 성당의 내부 한쪽에 부조된 과거 종교재판에 관한 이야기, 성당의 제단 뒤로 은(銀) 3톤을 녹여 만든 순은제의 관, '네포묵 신부의 관'은 모양도 매우 특이하고 사연도 깊다.
이 외에도 궁전 내에는 당시의 궁정생활을 엿볼 수 있는 유물과 공간이 많이 있는데, 크리스탈이 유명하여 샨들리아를 비롯한 유리 용기들은 대부분이 화려한 보헤미안 크리스탈로 만들어 졌고, 합스부르크 왕가의 문장과 당대의 오스트리아 황제와 체코를 다스렸던 오스트리아의 총통의 초상들이 아직까지 걸려있다.
프라하성 안에는 오래된 마사를 개조하여 만든 전시관(회화관)이 있다. 루돌프 2세 치하 때부터 모은 미술품을 소장할 목적으로 지어졌다. 1648년에 스웨덴의 침공으로 멋진 작품들을 대부분 약탈당했으나 아직도 흥미로운 그림들이 많이 남아 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티티안(Titian)의 '젊은 부인의 몸단장', 루벤스(Rubens)의 '올림픽 신들의 회합', 귀도 레니의 '데이아네이라를 유괴하는 반인마 네수스'등이 있다.
이 밖에 마스터 테오도록(Master Theodoric), 파올로 베로니스(Paolo Veronese), 틴토레토(Tintoretto), 체크의 바로크 예술가인 얀 쿠페키(Jan Kupecky)와 페트르 브란들(Petr Brandl) 등이 대표적인 화가들이다. 프라하 성에는 최초로 지어진 교회인 9세기 성모 마리아 교회의 유적지도 볼 수 있다. 이 교회는 프레미슬리드 가의 왕자로는 최초로 기독교 세례를 받은 보리보위왕자가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성비트 성당 외부 및 내부의 장식 -
황금소로(黃金小路, Zlata ulicka)에서 만난 카프카의 집
프라하 성의 뒷길로 나가면 프라하 성을 축성하다 죽은 사람들의 영혼에 봉헌하기 위하며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은 성트리제 교회가 자리 잡고 있으며, 그 뒤로는 걸리버의 소인국에나 등장할 법한 조그만 집들이 좁은 골목길을 따라 다닥다닥 붙어있는데, 이곳을 일컬어 '황금소로'라 부른다. 이 좁은 길은 프라하에서 가장 예쁘고 작은 거리로 이름난 곳이다.
좁은 골목을 따라 20여 채쯤 되는, 자그마하고 밝은 색조의 앙증맞은 상점들이 늘어서 있는데, 이 지역은 옛날 궁중의 잡일들을 처리하고 식료품을 배달하며 대장간을 하던 평민과 천민들이 살던 곳이었다. 후에는 납으로 금을 만들 수 있다는 연금술(鍊金術)을 믿은 일단의 기술자들이 이곳에 거주하면서 '황금소로(黃金小路)'라는 애칭이 붙게 되었다.
성벽의 아치에 붙박이로 지어진 이 집들은 1500년대 후반에 24명의 성 수비대원의 숙소로 쓰였다. 1세기 후에는 금 세공인들이 이주해 와 건물을 개축했다. 그 후 프라하의 빈민들과 범죄자들이 모여 사는 빈민가로 전락했다. 1950년대까지 이 지역에 남아 있던 세입자들이 모두 이사 간 이후부터 본래의 상태를 어느 정도 회복해갔다.
지금은 대부분의 집들이 책이나 보헤미아의 유리 제품, 그리고 몰려드는 관광객들을 상대로 기념품을 파는 상점으로 바뀌었다. 16세기에 지은 집들은 허리를 굽혀 겨우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작다.
하지만 이곳이 유명해진 것은 이곳에 실존주의 철학자이자 문학가인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 1883, 7,3-1924.6.3)가 살던 집이 있기 때문이다. 푸른색의 벽에 22번지라는 표시와, 카프카가 살던 집이라는 표지판이 붙어 있다. 카프카는 유태인 상인의 아들로 188년 이곳에서 태어났다.
유태인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사색적이고 철학적인 성품을 지닌 그는 초현실주의 기법으로 <변신>, <심판>, <성(城)> 등 현대인의 불안한 삶을 표현하며 산업혁명으로 피폐해진 인간성을 회복하려고 노력한 작가이다.
실존주의가 시대의 화두로 대두됐던 나의 대학 시절, 나는 사르트르, 까뮈와 더불어 카프카의 작품에 몹시 심취한 적이 있었다. 그가 작품을 구상하기 위하여 고민했던 그 현장을 방문하게 되다니 - 이 감격스러움을 어다다 표현하랴. 카프카는 불행하게도 40세에 정신병으로 죽고 만다. 카프카는 프라하의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살았으나, 프라하를 떠난 적이 거의 없다. 그와 같은 시대를 산 사람들은 말한다.
"카프카는 프라하이며, 프라하는 카프카이다. 우리는 프라하의 구석구석에서 그의 모든 작품의 파편들을 만날 수 있다."
카프카의 생가인 22번지 바로 옆 20번지는 대통령 하벨의 영부인이 장애자들로 하여금 수공제품을 만들게 하고 이곳에서 전시, 판매한 수익금으로 장애자를 돕는 훌륭한 일을 하고 있어 관심을 끄는 곳이다. 이 일로 영부인은 지금도 체코 국민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다. 나는 이곳에서 손녀에게 줄 선물로 목각인형 남녀 한쌍을 샀다.
황금소로가 끝나는 23번지에는 성곽 수비길로 통하는 계단이 있다. 계단에서는 예쁜 기념품, 엽서, 안내책자를 팔고 있다. 이 계단을 내려가면 메트로 A선 말로스트란스카(Malostranska)역으로 이어지며, 구시가로 가는 트램을 탈 수 있다. 황금 길은 노벨상 수상 시인인 야로슬라프 세이페르트(Jaroslav Seifert)를 비롯한 몇몇 유명 작가들의 고향이기도 하다.
- 황금소로에서 만난 카프카의 집 -
체코가 자랑하는 다리, 카를교
- 아름다운 프라하의 휴식처, 카를교 -
프라하에 도착하여 햄버거로 아침을 때웠으므로 시장기가 빨리 찾아왔다. 황금소로를 빠져나와 카를교로 통하는 길가 레스토랑에서 여선생님 일행과 괜찮은 식사를 마치고 나니 피로가 찾아왔다. 그래도 카를교와 구시가 광장 등 꼭 보아야 할 것 등이 보기 위해서는 피곤한 몸을 일으켜 서두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 10분 정도 걸어내려오면 불타바 강을 가로지르는 카를교가 나온다. 카를교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라고 체코가 자랑하는 다리이다. 프라하에 오는 관광객이라면 반드시 들르는 유명 관광지가 되었다.
이 다리가 처음 지어진 것은 9세기. 처음에 나무로 만들어졌던 이 다리는 홍수로 그만 유실되고 말았다. 그 후 11세기 중반에 다시 돌로 지어졌지만 그도 역시 다시 홍수로 유실되고, 지금의 다리는 1357년 카를 4세 때 약관 20세의 건축가 피터 팔레지에 의해 설계되어 1402년에 완공된 것이다. 블타바 강 위에 놓인 18개의 다리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 카를 4세 -
피터 팔레지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건축에 관한 한 가히 천재적인 기술의 소유자였다. 정확한 하중계산으로 균형과 견고함을 지닌 멋진 다리는 16개의 기둥에 길이가 560m. 폭은 10m로 3개의 브릿지 타워가 있다. 특히 바로크 시대에 만들어진 기독교 성인 33인의 조각상이 이 다리를 장식하고 있어 더욱 유명하다. 마치 전시회에 온 듯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 중 가장 인기 있는 것은 다리 중간에, 1683년 혀를 잘린 채 강물에 던져져 순교한 요한 네포묵 신부의 동상이다. 성 네포묵 신부님의 동상인데 신부는 왕비의 고해성사 내용을 왕에게 말하지 않았다는 죄로 혀를 잘리고 돌로 묶어서 카를교에서 볼타강으로 던져 수장되었다고 한다. 3일 후 신부가 던져진 곳에서 머리에 다섯 개 의 별이 빛나는 신부의 시신이 떠오르자 사람들은 시신을 거두워 장례를 치루었고 신부는 성인으로 추앙하였다고 한다.
그 반석의 전면에는 네포묵 신부가 병사들에 의해 돌에 매달려 거꾸로 떨어지는 모습이 부조로 묘사되어 있다.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조각상 밑의 손바닥 동판에 손을 대고 소원을 빌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이야기 덕분에 그 부분만 반질빈질하다. 조각상마다 거미줄이 많지만 그대로 둔 것이 오히려 편안하게 다가온다.
다리 위에는 언제나 관광객들과 음악을 연주하는 악사들로 거리공연이 끊어지지 않고, 기념품을 파는 잡상인들로 붐빈다. 그리고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난간에 기대어 포옹하는 연인들로 넘쳐난다. 애정을 고백하는 장소로는 안성맞춤인가 보다.
- 카를교의 난간에 세운 요한 네포묵 신부의 동상 -
- 카를교 난간의 장식과 부조-
다리 밑으로는 유람선이 한가로이 오르내리며 멋스럽게 보여 감흥을 돋구어 준다. 특히 이곳에서 바라보는 야경, 특히 블타바 강의 건너편으로 보이는 프라하성의 야경은 평생 잊지 못할 추억거리로 남는다.
- 카를교 아래로 유람선이 지나가고 있다. -
프라하 여행의 심장부 구시가(舊市街) 광장
- 인파로 가득찬 구시가 광장 -
카를교를 건너서 구시가 광장으로 이르는 길은 무척 재미있다. 아기자기한 카페들과 선물가게, 술집들이 밀집되어 있는데 이곳에는 언제나 많은 인파로 법석거린다. 재미나는 것은 광장으로 가는 동안 전단을 여러 사람으로부터 받았는데, 하나같이 크고 작은 극장이나 공연장에서 공연하는 오페라와 연주회, 그리고 연극에 대한 것들이었다.
모차르트, 푸치니, 로씨니, 베토벤을 비롯한 거장들의 음악들이 여름철만 되면 하루도 거르지 않고 무대에 오른다. 이것은 프라하의 시민들이 얼마나 예술적으로 수준이 높고, 얼마나 예술과 가까이 접하고 살고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된다. 각종 물건을 파는 상점들을 기웃거리며 약 10분가량 올라가니 프라하 여행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구시가 광장이 들어온다. 이곳은 11세기 이래 프라하 시민의 삶의 중심지로 종교 개혁가 얀 후스의 화형 등 역사적 사건이 일어났던 곳이다.
주변에는 화약탑, 구시청사의 천문시계, 틴 성당, 성 니콜라스 교회, 킨스키 궁전 등 중세의 고풍스런 건물들이 밀집해 있다. 주변에 있는 많은 노천카페는 프라하 시민들이 커피를 마시며 휴식하는 장소로 이용된다. 그리고 많은 선물 가게들은 관광객들이 애용하는 장소가 되었다. 그리고 여기 광장에도 마차를 끄는 말발굽 소리가 흥을 돋운다.
광장 중앙의 얀 후스 동상(銅像)
- 광장 중앙에 세운 얀 후스 동상 -
광장에는 수많은 인파가 몰려 든다. 광장 중앙에는 15세기에 체코의 종교 개혁을 주도했던 얀 후스의 동상이 서 있다. 이곳은 만남의 장소. SBS '프라하의 연인'에서는 이 동상 밑은 '소원의 벽'이라 하여 소원을 비는 종이즐이 붙어 있는 것으로 나왔으나, 촬영을 위해 연출한 것이다.
얀 후스는 체코 제1의 명문대학인 찰스대학교(까를대학교)의 초대 총장이기도 했다. 그는 구교인 카톨릭의 불합리한 점을 조목조목 들어가며 교황과 성직자들을 맹비난했다. 얀 후스는 체포되어 종교재판에서 사형이 언도된 후, 이 광장 한가운데에서 1415년 장대에 묶여 꼿꼿이 세워진 채 화형에 처해진 인물이다. 장작불이 더디게 타오르자 한 농부가 마른 볏짚을 잔뜩 장작더미 위에 쏟아 부으며 잘 타도록 불을 추슬렀다. 이때 얀 후스는 그 농부를 가엾은 표정으로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한마디를 던진다.
"우매한 성스러움이여....." 이 순간 그의 눈은 십자가에 달려 예수를 비난하던 강도를,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던 예수의 시선과 다름 없었으리라.
이 말은 '분별력을 가지고 하느님을 믿어라'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얀 후스의 동상은 1915년 얀 후스의 순교 5백주년을 기념하여 세워 졌으며, 동상의 밑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다. 또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를 말하고 진리를 지켜라' . 이 글귀는 오늘 이 시대, 타락한 종교인들에게 던지는 경구(警句)가 아닐까.
이토록 숭고한 역사와 교훈이 담겨있는 동상이라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동상의 반석 위에는 철없는 젊은이들이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마냥 즐겁게 재잘거리고 있다.
구 시가지의 상징 천문시계
- 구 시청사의 벽에 붙어 있는 천문시계 -
이 광장의 하이라이트는 옛날 연금술사들의 연구실과 화약창고로 쓰였다는 화약탑 옆의 구 시청사의 벽에 붙어 있는 천문시계이다. 구청사 정문 앞에는 매시 정각이 되면 약속이나 한 듯이 광광객이 모여든다.
이 시계는 1300년대, 체코가 동유럽의 광활한 지역을 차지할 무렵 당시의 왕인 찰스 대왕이 큰 영토를 다스리는 것을 상징하는 기념비적인 것을 제작하도록 당시 무명의 과학자였던 니콜라스에게 명령함으로서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그는 이 명령을 받고 바로 이 천문시계를 제작하게 된다.
1490년 이 시계는 하누슈(Hanus)라는 이름의 거장 시계공에 의해 고안되었다. 당시 시의회 의원들은 그 시계공이 다른 곳에서도 그러한 걸작을 만들 것을 염려하여 그 가련한 노인의 눈을 멀게 했다고 한다. 이후로 여러 차례에 걸쳐 수리되었으며, 오늘날 시계의 기본 장치는 1552년에서 1572년 사이에 얀 타보르스키가 만든 것이다.
천동설에 기초한 두 개의 원이 아래 위로 나란히 돌아간다. 위의 원은 해와 달, 그리고 북극성의 위치를 가리키며 1년에 한 바퀴 씩을 돌면서 연월일과 시간을 나타낸다. 수백 년이 흐른 지금도 매 시간을 정확하게 맞춘다고 하니 정말 신기하기 짝이 없다. 밑에 있는 원은 12개월의 계절별 장면을 묘사한 것으로서 보헤미안의 농경생활과 관련 있는 것이라 한다.
- 천문시계는 매 시간마다 12사도가 나타나고, 닭이 울음소리를 낸다 -
매 시각마다 한 번도 틀림없이 정확하게 시간을 알리는 이 시계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이 광장에 몰리는데, 매 시간마다 두 개의 원반 위에 있는 천사의 조각상 양 옆으로 창문이 열리고, 죽음의 신이 울리는 종소리와 함께 그리스도의 열두 제자가 창 안쪽으로 천천히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예수의 열두 제자들이 하나씩 지나가며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전한다고 한다.
"회계하라, 천국이 가까웠나니. 복음을 믿고 영생을 얻으라."
후세 사람들이 지어낸 얘기인지는 모르나, 창조주 신(神)을 거부하고 세상의 물욕에 눈이 어두운 현세인들이 새겨보아야 할 말이 아닌가. 마지막으로 제자들이 다 지나가면 그 위에 있는 황금색의 닭이 "꼬끼오"하고 소리를 내면서 시계가 울리는 것으로 끝이 난다. 사람들은 이 닭을 베드로의 닭이라 부른다. 나는 문득 그 소리를 들으며, 주를 모른다고 부정한 제자 베드로를 일깨우던 새벽닭 소리처럼, 나를 일깨우는 소리로 다가오고, 순간 사도 바울의 말이 생각났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이 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낮에 행동하듯이 단정하게 행합시다. 호사한 연회와 술취함, 음행과 방탕, 싸움과 시기에 빠지지 맙시다."(로마서 13:12-13)
매시 정각마다 이 시계를 보려고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몰린다. 매시 정각에 울리는 시계소리를 들으려고, 어둠이 짙은 밤(10시)인데도 한 떼의 무리가 광장 시계탑 아래에 주저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났는데도 울리지 않자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뒤늦게 밤 9시까지만 울린다는 얘기를 듣고서야 일행은 아쉬운 마음으로 자리를 떴다.
킨스킨 궁전과 틴 교회
- 쌍둥이 첨탑이 인상적인 틴 교회 -
구시청사 맞은 편에 위치해 있다. 킨스킨 궁전은 프라하에서는 드문 로코코 양식의 백미로 꼽힌다. 정면의 분홍색과 흰색의 벽토 장식이 특히 아름답다. 현재는 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14세기 부터 16세기에 걸쳐 건축된 교회로서 2개의 첨탑이 인상적인 고딕 양식의 건축물이며 양쪽의 첨탑은 16세기에 축조된 것이다. 구시청사 맞은 편에 위치한다.
또 쌍둥이 첨탑이 인상적인 틴 교회는 높이는 80m의 황금 장식으로 된 독특한 두 개의 첨탑(쌍탑)으로 구시가 광장을 압도하고 있다. 고딕 양식을 보여주는 이 교회는 1365년에 시공되었으며, 이후 보헤미아의 개혁운동과 연합했다. 15세기 초부터 1620년까지 틴은 프라하의 주요 후스파의 교회였다. 이 교회로 현재는 국립 박물관 분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교회 북쪽에 있는 입구는 예수 수난 장면으로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다. 어두운 실내에는 주목할 만한 작품이 몇 개 있다. 고딕양식으로 조각된 예수 십자가 상, 백랍 세례반(1414), 15세기 고딕 식 설교단 등이 그것이다. 덴마크의 천문학자 티코 브라헤(Tycho de Brahe, 1546-1601)가 이 교회의 대리석 무덤에 잠들어 있다.
바즐라프 광장과 그 주변
- '프라하의 봄'의 현장 바즐라프 광장 -
바즐라프 광장은 체코 근현대사(現代史)의 무대로 젊은이의 광장으로 통한다. 이른바 '프라하의 봄’'벨벳 혁명'의 현장이다. 이곳은 화려한 것 같으면서도 요란하지 않아 이방인의 마음을 적당히 들뜨게 한다.
바즐라프 광장은 넓이가 750m x 60m 정도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큰 광장에 속하지는 않는다. 신시가지의 중심이다. 이 광장은 광장이라기 보다는 커다란 도로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국립 박물관에서부터 프르지 코베 거리 사이의 이 광장에는 각종 상점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다.
1948년에는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 선언이 이 광장에서 열렸으며, 1968년 소련군의 침입에 항의하는 "프라하의 봄"이라고 불리우는 민주화 선언 데모가 이 광장에서 개최되었다. 원래는 말 시장이었던 자리인데 지금은 서구 문화의 영향으로 호텔과 레스토랑, 클럽, 상점들이 즐비한 거리로 변했다.
국립 박물관의 정면에서 광장 쪽으로 쭉 뻗은 광장에는 독특한 설치미술 작품들이 있다. 승용차의 빈 껍데기만 이어 붙이거나 땅바닥에 거꾸로 처박힌 슈퍼맨이 있다. 바즐라프의 거대한 기마상은 1912년에 세워졌다.
이 청동 조각상은 요제프 미슬베크(Josef Myslbek)의 작품이다. 동상의 받침대에는 체코의 수호 성인상들이 있다. 성 바즐라프는 10세기경의 인물로 국난이 닥쳐왔을 때, 중부 보헤미아의 그라니크 동굴에서 깊이 잠에 빠진 기사들을 깨워 그들을 이끌고 적군을 격퇴시켰다는 전설의 주인공이다. 체코 민족의 수호성인으로 신성시되고 있다. 동상 옆에는 전 공산주의 정권의 희생자들을 애도하기 위해 세워진 기념비가 있다.
동구 여러나라 중에서도 민족적인 자긍심이 대단히 강한 그들은 2차 대전 이후 구소련에 의해 1948년 공산화에 들어가 20년간 계획경제를 실시함으로서 경제적으로 계속 낙후를 면치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곧 인접한 서유럽의 영향을 받아 서방세계에 대한 동경과 자유화에 일찍 눈을 뜬 셈이다.
1960년대 민주화 운동지도자였던 두브체크는 프라하의 바즐라프 광장에서 시민들에게 '프라하의 봄'을 주창했다. '봄’이란 자유를 상징하는 것으로, '프라하에 자유가 올 것인가'라는 메시지였다. 마치 일제의 압제 속에서 한 줄기 뜨거운 불길처럼 타오른 우리의 민족시인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연상케 하는 것이었다.
- 희생된 두 대학생을 추모하는 기념비 -
이 메시지에 고무된 프라하 시민들은 바즐라프 광장에 모여 집회를 열었다. 1968년 민주화 운동은 절정에 이르렀고, 수만 명의 군중이 이 광장에 운집했다. 1969년 마침내 이곳에 운집했던 군중 가운데 찰스 대학의 학생이었던 얀 팔라흐(Jan Palach)라는 학생이 정부의 진압에 분노하여 분신자살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전 국민의 봉기가 촉발한 것이다.
사태가 악화되자 당시 소련의 서기장이던 브레즈네프가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군대를 진압군으로 파견했다. 무려 6천대의 탱크를 앞세우고 프라하로 진군한 막강한 병력은 항거하는 군중들을 무력으로 초토화시켜 수많은 희생자를 내었고, 민주화 운동은 결국 좌절되고 말았다.
그러나, 체코 국민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과 의지는 끊임없이 지속되어, 1989년에는 경찰의 잔혹 행위에 항거하는 집회가 이곳 바즐라프 광장에서 다시 열리고, 이 집회는 벨벳혁명(Velvet Revolution)으로 이어져, 마침내 공산주의 체제를 전복하는 결과를 얻었다. 그런 의미에서 바즐라프 광장은 체코의 현대사를 이끌어낸 현장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광장에서 하벨스카 거리를 지나면 구시가 광장으로 이어진다.
체코 국립박물관
- 광장 위쪽에 자리 잡은 국립 박물관 -
바즐라프 광장의 한쪽 끝에 신르네상스식 건물이 바로 국립박물관이다. 체코의 재건을 상징하는 이 박물관은 요제프 슐츠(Josef Schulz)에 의해 디자인되고 1890년에 완공되었다. 박물관 입구는 여러 가지 우화적인 상징물들로 장식되어 있다. 입구 옆에는 역사관과 자연사관이 있다. 건물 내부로 들어가면 대리석 장식이 매우 인상적인데, 너무나 화려해서 오히려 오래되고 평범한 소장품들을 압도한다.
이 박물관에 있는 소장품들은 주로 광물학, 인류학, 고고학, 자연사에 관련된 것들이다. 또한 이곳에는 체크의 학자, 미술가, 작가들의 흉상이나 동상이 전시되어 있는 판테온(Pantheon)이 있다.
그리고 프라하에서 가장 눈에 띄는 아르누보식 건축물인 시청이 1383년에서 1485년 사이에 왕이 거주했던 전 왕정 궁궐 자리에 서 있다. 지금은 건물은 수세기 동안 방치되어 있다가 신학교로, 그 후엔 군사 학교로 사용되었다. 그러다가 1900년대 초에 헐어내고 그 자리에 현재의 문화센터를 지었다. 이 문화센터는 전시실과 큰 강당을 갖추고 있다. 시청은 1918년 10월 28일 체코슬로바키아가 새로이 독립을 선언한 중요한 장소이기도 하다.
프라하 여행을 마감하며
- 프라하를 더욱 아름답게 하는 불타바 강변 -
낮에 카를교 관광을 하였지만,‘카를교에서 보는 야경을 빼놓고는 결코 프라하를 말할 수 없다’고 한 말에, 저녁을 먹고 다시 카를교를 찾았다. 낮과는 달리 카를교에서 보는 야경은 말 그대로 환상적이라 할만 했다. 카를교 위에 서서 올려다 본 프라하성의 휘황찬란한 불빛은 엽서에서 본 그대로였다. 밤에 다시 오길 잘했다고 느끼며, 구시가지 쪽으로 발길을 옮겨, 구시가 광장으로 향했다.
온종일 다리품을 파느라 피곤하기는 했어도, 프라하 여행은 행복감의 절정 그 자체였다. 세계의 어느 곳보다 아름다운 경관과 문화 유산이 조화롭게 어울어진 도시였다. 문화 유적으로 가득한 프라하 성과 카를교로부터 이어지는 블타바강 건너 구시가지, 예술의 멋과 정겨운 삶이 깃들여 있는 것.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라는 말을 들을 만하다고 생각했다. 프라하는 정말 아름다웠다.
강 언덕에 우뚝 선 프라하 성의 의연한 모습처럼, 아니 오늘이나 내일이나 파란만장한 체코의 역사를 간직한 채 흘러가는 블타바 강물처럼, 프라하는 프라하의 시민, 아니 모든 체코 국민의 마음 속에 들어있는 민족적 자존심을 유유히 지켜갈 것이라는 생각하며, 다음 행선지 부다페스트로 가기 위해 다시 기차역으로 행했다. 아름다운 도시 프라하는 영원하리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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